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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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봐! 날 봐! 내 안의 괴물이 이렇게 커졌어!"


  아는 사람은 아는 유명한 대사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름없는 괴물"이라는 이름의 동화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몬스터의 전체적인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몬스터를 말하는 이유는 이 책이 묘하게 몬스터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고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곱씹으면서 "몬스터"라는 만화가 생각났다. 괴물과 싸우는 의사, 돈 대신 의사라는 본분에 충실한 선택을 한 주인공은 그로 인하여 병원에서 쫓겨난다.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이 살린 아이가 절대로 살려서는 안되는 괴물임을 깨닫게 되고,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을 그리고 있다. 만화 책을 읽으가면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악이란 것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던 책이었는데, 암흑의 핵심이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자기 노력에 대해 공평한 대우를 받고 싶어했던 커츠. 그는 콩고로 떠난다. 그곳에서 상아를 수집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그는 복귀하던 길에서 돌이켜 다시 밀림으로 들어간다. 그를 찾아 복귀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말로를 통하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원래는 젠틀하고 상식적인 커츠가 어떻게 콩고의 삶을 통하여 식인까지 하게 되는 불건전한 사람이 되었을까?(지배인은 소설 내내 커츠의 방식에 대해서 불건전한 방식이라고 비난을 하는데,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 말을 사용한다.) 목표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기 때문이다. 성공을 통하여 공평한 대우를 받겠다는 그의 생각, 성공을 통하여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던 약혼녀의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서겠다는, 또는 복수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성공"이라는 괴물에 잡아 먹히고 말았다. 성공이라는 배고픈 괴물은 그의 생각과 가치관을 잡아 먹고 심지어는 커츠마저 잡아 먹었다. 성공이라는 괴물을 직시하지 못하고, 거기에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묘한 복장과 기괴한 행동을 일삼는 원주민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어진 커츠의 모습은 옷과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동일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성공을 위하여 달려오던 커츠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무서워! 무서워!"


  성공을 바라보고 달려온 인생치고는 싱거운 그의 마지막 두 마디이지만, 그 두 마디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아니겠는가? 


  공정이 요즘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이슈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 남자만의 병역 의무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 여성의 경력 단절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 등등. 이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것 투성이다. 그만큼 공정에 대한 목마름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공정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이들의 모습이 공정하지 못하다. 불공정과 싸우다보니 어느새 자기도 불공정에 물들어 버린 것이다. 더 문제는 그것이 공정의 잣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 사회는 그렇게 타파하려던 능력 지상 주의로 돌아가고 있다. 성적만으로 줄을 세울 수 없다,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수십년전에 있었던 투쟁의 가치관들이, 그리고 어느 정도 이루었던 성과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마치 콩고의 밀림에 던져진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공정이고, 그것이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일까? 


  거츠의 "무서워! 무서워!"라는 마지막 유언이 우리 사회의 결말이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책을 덮고 정리하면서 니체의 말의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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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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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풍자가 사라졌다. "민상토론"을 정말 재미있게 봤던 사람으로서 풍자 개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참 아쉽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팍팍한 진영 논리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 같아서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던 내게 이 책은 오랫만에 재미와 즐거움이라는 것을 줬다. 이 시대를 평가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웃음으로 버무려 놓은 풍자는 간만에 접하는 꽤나 고급의 풍자 개그물이다.


  어린 시절 똘이장군이라는 만화를 많이 봤다. 똘이라는 소년이 북한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 골자인데,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한낱 소년이 어찌 장군이 될 수 있으며, 북한과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재미있었다. 열심히 똘이 장군을 응원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 북한의 우두머리는 항상 돼지였다. 부하가 늑대나 개이고 우무머리가 돼지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법한 일이라서 어린 나이에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그러한 것들이 동물농장에서 연유한 것임을 알면서,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책도 학교에 보급하던 문고판 책이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그렇게 자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줄거리들은 모두 담고 있다는 점이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동물농장의 주된 내용은 작품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기본적으로는 소련의 혁명에 관한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번역자가 너무 친절하게도 각 등장인물이 상징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1대 1로 매칭해 놓았다. 소련의 혁명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흐름을 따라서 이 책을 읽어간다면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자가 말한대로, 이 책을 그저 그 시대에만 국한 시켜 읽을 필요는 없다. 지엽적인 문제들은 다르겠지만 주된 흐름은 여전히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뉴스에 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국과 정경심 관련한 사안들, 여야 대선 주자들의 행보들, 이재용 가석방과 관련된 사안들.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상당히 희석되어 버렸지만, 모두가 메가톤 급의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청와대가 잘못했다, 어떤 이들은 범무부가 잘못했다 설왕설래가 많다. 민주당의 후보들은 자신이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적통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의힘당의 후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의 아이콘이라고 말하면서 이승만, 박정희의 라인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민들은 생각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왜 그럴까?


  권력 자체를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꿀 뿐 본질적인 사회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오웰의 생각이 그 답이다. 아무리 국민을 위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라는 말을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권력이다. 권력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최종 목표로 본다. 그러니 권력을 얻으면 다 똑같아지는 것이다. 친박연대와 대깨문처럼 말이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닮아 있다. 공수교대만 할 뿐이지 권력지향적인 생각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정신 운운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혁명을 한다면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없다. 그러니 항상 우리 사회는 주인만 바꾸는 혁명으로 끝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혁명이 미래를 향한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적폐청산에 머물러 있게 된다. 적폐청산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폐청산만 외치다가 세월이 다 흘러가는 것은 분명한 문제이리라. 


  정치인들이 무더운 여름 너무 열만 올리지 말고 동물농장 한권씩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했으면 좋겠다. 주인만 바꾸는 것은 서로에게 고달픈 일일테니 말이다. 표를 구하는 정치인들이나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나 모두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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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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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봤던 영화 중에 "타짜2-신의 손"이 있다. 타짜 1편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기대감을 가지고 봤지만, 본편만한 속편은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하는 말이 정말 기발했다. "다 된 밥에 TOP 뿌린다" 이 말만큼 타짜 2를 잘 표현할 말은 없다고 아직도 단언한다. 왜 이 말을 꺼내느냐면, 햄릿에 대한 평가가 꼭 이렇기 때문이다.


  알라디너 가운데 다른 누군가가 같은 책을 보고 좋은 평을 써주셨지만, 솔직하게 나는 그렇게 평을 할 수가 없다. 햄릿의 내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곡으로 된 것을 안 읽어 본 것도 아니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속해 있는 햄릿은 재미가 없어도 너무 재미가 없다. 번역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번역을 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한 부분만 봐도 이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책에는 이렇게 저자의 확고한 신념은 있지만, 독자를 향한 친절함이나,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읽히겠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대학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나는 번역가고 너는 독자야라는 말이 곳곳에서 울린달까?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상상력을 가지고 읽지 않는다면 깊이 빠지기 힘든 장르인데, 이렇게 불친절한 번역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판본 자체도 최대한 권위 있는 판본에 근거하여 번역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곳곳에서 뭉텅뭉텅 잘려나간 이상야릇하게 흐름이 끊기는 대본이라면 판본의 권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햄릿을 보는 것은 성경을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그 의미를 곱씹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가능성이 많은 성경과 햄릿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햄릿이 영국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필리어가 죽는 장면에 대해서도, 그리고 희곡의 여러 중요한 장면에 대해서도 이 책만으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연극을 보면 여러 장면들을 통하여 알아챌 수 있겠지만, 이 책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한계와 단점은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햄릿(이경식 역)"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분들은 이 책의 단점마저도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민음사의 햄릿을 읽어본 나로서는 문학동네의 햄릿은 무릎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저자의 친절함에 감복하면서 읽게 될 뿐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번역이 충분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다 된 햄릿에 번역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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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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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생각은 다 비슷한가 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로마판 용비어천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래 리뷰를 쓰신 분이 "오비디우스식 용비어천가"라고 제목을 달아 놓으셨다. 용비어천가 이보다 더 이 책의 의도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성서와 함께 오래 읽히는 책, 세계의 창조에 관한 책 등 많은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본질은 오비디우스가 자기의 처지를 개선해볼 요량으로 당시의 절대 권력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책이다. 1편이 아닌 2편에 들어오면 그러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그리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외부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건설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그냥 지나갈 것 같다는 생각에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 전집을 독파하는 것이다. 독파라는 말에서 알듯이 특별히 선호하는 책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먹어 치우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그래서 세계문학전집 1권에서부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변신 이야기이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제목이고, 내용도 익히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읽어본 적이 없던 책이다. 그런 의메에서 보자면 분명히 고전이다. 누구나 다 알지만, 실제로는 읽어본 사람이 드문 것이 고전이라고 하지 않던가? 


  1편을 펴서 읽어가면서 약간의 문화 충격을 느꼈다. 신들의 이름이 로마식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약간의 버퍼링이 나기 때문이다. 주신들의 이름이야 잘 알고 있지만, 주신 이외의 신들에 대해서는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물론 전혀 다른 이름은 아니고, 그 의미를 보면 충분히 어떤 신을 의미하는지 알지만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처럼 탁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약간은 당혹스러운 경험이다. 


  1편은 신들의 전성시대에서, 인간들의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인간들의 영웅에 관한 서사시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신화를 본다고 이해하면 된다. 오비디우스의 의도가 티나게 묻어 있는 것은 2권에서부터이다. 2권은 헬라클레스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주된 내용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기반으로 시작하여 아이네이라고 끝난다. 오비디우스는 오디세이아보다는 일리아드를 더 핵심적인 소재로 사용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오비디우스의 사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로마의 기원을 트로이의 멸망에서부터 찾고 있는 로마 사람들에게 오디세이아는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디세이아가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일리아드는 단순히 소설로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외국 사람에게 웅녀 이야기는 재미있는 신화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신화로 치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변신 이야기 2의 1/3이 지난 시점부터 생소하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는 익숙하지만 로마의 신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하튼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사심을 슬쩍 드러냈다면 그 이야기를 마치면서부터는 아예 드러내놓고 표현한다. 이처럼 뻔뻔함에서 쌍벽을 이루는 사람은 군주론을 쓴 마키아밸리 정도가 아닐까? 대놓고 나 이런 사람입니다, 난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는 그 뻔뻔함과 아부하는 모습은 굴욕적이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하다. 로마의 역대 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까지만 해도 괜찮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승천을 다루는 대목에 가서는 한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든다. 이건 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도 "용비어천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게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있어보이게 만들려고 뜬금없이 피타고라스를 집어 넣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 편은 통째로 들어내도 문맥을 크게 해치지 않는데, 굳이 이 부분을 넣은 것을 보면서 요즘이나 당시나 배운 척, 있는 척하는 포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복잡한 사생활, 이로 인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역린이 두 율리아와 엮이게 되고, 이를 통하여 삶이 고달파진 어느 지식인이자 문학인의 비굴함과 유세가 이 책의 본질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책이 오랫 동안 살아남은 것은 재미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로마 신화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보는 것도 이 책의 재미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세계문학 전집이 나온지 오래 되어서 그런지 책의 형태나 글자체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편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출판사가 그런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을 알지만, 추후에 만약 인쇄를 한다면 이러한 점을 고려해 주는 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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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31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의 정의에 딱 맞는 책. 그래서 저도 안 읽고 여기저기서 인용되는 것만 봤는데 이런 내용이라니... ㅎ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382권인데 올해가 가기전에 독파하시겠다니.... 일단 창대한 목표에 존경ㅇ르 보냅니다. 저는 한다면 다른거 아무것도 안보면 3년쯤 걸릴듯요. 일단 응원을 보냅니다. ^^

saint236 2021-08-12 21:38   좋아요 0 | URL
목표는 잡았지만 달성이 어렵다는 것도 압니다. 그냥 그런 각오로 읽다보면 최소한 올해가 가기 전에 100권대에 진입은 하지 않을까요? 여튼 열심히 읽어 보렵니다.
 
수상한 소문 -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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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얀시의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일까?

  쉽게 읽힌다는 것,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다는 것.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이다. 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뻔히 속이 보이는 기복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적당한 깊이와 적당한 고민, 그리고 적당한 난이도. 이것이 필립 얀시의 책이 가지는 장점이고, 이런 이유로 그의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약간 다르다. 그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내공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글쓰는 포인트와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필립 얀시의 책 치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내용이 어려워서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책과는 달리 내용이 약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쏟아져 나오는 다른 기독교 서적에 비하면 우수하다. 단지 그의 이전 책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수상한 소문"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초대와 같은 내용(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종류의 책)을 생각했는데,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출판사에서 나름대로 제목을 붙인 것 같지만 원제 "A Skeptic's Guide to Faith"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 또한 포이에마가 하기에는 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원제가 의미하는 바는 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역서는 번역을 한 것이지,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번역자도 꽤 번역을 잘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제목을 번역했다는 것은 판매를 고려한 출판사의 잘못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얀시는 책에서 이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원론적인 구조이지만, 이 책이 회의주의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이러한 용어 선택은 출발에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회의주의자가 대상이라기보다는 필립 얀시의 새 책이라는 점에 흥미가 동한 기독교인들이 대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용어는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그리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에게는 그렇고 그런 용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는 사람들과 출판하는 사람들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민 끝에 저 단어를 다시 사용한다면 인정하겠지만 고민 없이 그냥 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말 그대로 허공을 치는 소리요, 향방없는 싸움일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매일 내가 숨쉬면서 살아가는 세계와 내가 그리고 바라보는 세계 사이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세계가 천국일 것이고, 비기독교인에게는 이루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인이 실수하게 된다. 기독교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세계는 천국 뿐만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세계가 포함된다.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게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지 않는가? 얀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도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전통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나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의 봉사, 선, 자비, 베품과 같은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다. 얀시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에게 과연 이것이 믿음으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회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믿음 안내서라는 포장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떡밥이라는(너무 막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이런 의도라면 틸리케의 "현실돠 믿음 사이"라든지 툼 라이트의 "광장에 선 하나님"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이 부분도 회의주의자들에게 의미있는 대답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얀시의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평타 이상은 한다. 기독교인들로 국한했을 때에만. 개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것들도 많이 던져준다. 다만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아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꿨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신의 한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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