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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 눈을 확 잡아끄는 것은 조금은 민망한 표지이다. 개인적인 민감함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누드모델의 뒷모습을 찍은 책표지를 대하면서 가장 처음 느끼는 것은 민망함이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이런 민망한 표지일까? 무엇인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구성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여전히 책을 읽기 위해서 책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민망함이 몰려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아직까지 나는 이 책에 마음을 열지 못했나 보다.
표지 디자이너가 하고 많은 그림 중에 왜 하필 누드모델 그것도 여성의 뒷모습을 턱하니 첫 페이지에 올려놓은 것일까? 그것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상상하게 만드는 뒷모습을 말이다. 아마도 표지 디자이너는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 사진을 통하여 이 책이 말하는 놀이의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먼저 이 책을 접하고 당혹해 할 나 같은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지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결코 당혹스러울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인 통념에 내가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이것이 창조력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 알게 된다.
한 아이가 자라서 자유분방한 시절을 보내다가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사회화 과정을 밟게 된다.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창조력을 죽이는 대신 사회가 원하는 관념 체계로 무장된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공정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학교라는 곳을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습득하게 된다. “친구와 싸우면 안 된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안 된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되어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시스템에 잘 적응하면 모범생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마치 숙제를 잘 해온 아이에게 “참 잘 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듯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내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본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깨어 있는 선생님들을 많이 만난 편이다. 전교조인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전래 동요와 쟁가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이야 사계라든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들이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어 불린다지만 당시에는 접하기 힘든 문화였으며, 왠지 붉은 색으로 매도되는 문화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4살의 나이에 노찾사를 접하고 노래마을을 접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역사는 돈이라는 강력한 동인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간단하면서도 직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대학생이 되고 마르크시즘을 접하고 난 뒤에 그것이 유물론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고등학생 시절, 그것도 대학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3 시절에 유물론을 접했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그분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의식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딱한 사유체계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배우는 즐거움에 빠져보라는 것이었다. 그런 영향일까,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역사를 좋아했고, 국문을 좋아했고, 남들이 잘 안 외우던 서경별곡, 청산 별곡 같은 고전문학을 좋아해 외우고 다녔다. 내가 즐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았던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즐기라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놀이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라는 말이다. 딱딱한 호이징거의 이론을 생각하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창조력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사교육으로 대변되는 교육 시스템의 횡포 때문에 아이들이 노는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 놀 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저 노는 것은 컴퓨터 게임이다. 가수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농구 축구를 열심히 하지도 못한다. 역사와 인문학을 즐기지도 못한다. 오직 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실용이다. 시험에 출제 되는가 출제되지 않는가, 대입에 유리한가 아닌가, 취직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모든 일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냥 즐겁고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창조력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준화가 진리가 된 시기에 예측 불가능한 창조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가 함축하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상상하라는 것이다. 표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드는 민망함이라는 감정의 뒤를 이어 오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뒷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앞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이다. 본능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제우스신이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보내면서 상자를 하나 주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단서와 함께. 그러나 어디 신화에서 절대 금기가 지켜지던가? 판도라는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상자를 열었고 그 상자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질병을 비롯하여 온갖 악들과 고난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악인가? 아니다.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그것들을 접하고 그것들을 뛰어 넘고 있는 그대로 포용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예술이라는 경지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하라. 호기심을 가져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라. 그 단계를 넘으면 당신의 지평은 더 넓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를 보고 느끼는 것은 가식을 벗어 버리라는 것이다. 옷이라는 가식을 벗어버리고 날 것 그대로 서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가면을 쓰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가면은 우리의 본성을 죽이는 첩경이다. 모든 가식을 벗어버리고, 페르조나를 벗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직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놀이는 가식이 아니다. 직면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창조적인 능력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인생을 움직여가는 가장 강력한 동인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은 즐기는 존재이다. 유희의 인간이다. 내가 서평 쓰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이 시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가 되어버린 지금, 서평을 작성하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놀이가 된다. 즐겨라. 자기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라. 거기에 진실한 당신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신은 결코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모 루덴스! 이 보다 더 인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어디 있을 것인가?
ps. 호이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도 다시 읽고 서평을 쓰련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