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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2 - '인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 한국사傳 2
KBS 한국사傳 제작팀 엮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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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떠온 어느 님의 사진>

  

   
  깨끗한 달 빛이 환하게 비추나니...비록 구름이 그 빛을 가리더라도...삽시간에 불과하다.  
                                         -<정조실록>정조 7년 6월 15일

  "모든 강을 미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

  정조가 자신을 빗대어 이른 말이다. 노론이라는 거대 당이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혼란한 시기에 이런 군주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사용하였던 정조의 낙관이다. 이 책의 내용은 정조의 이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한국사 傳 1권이 역사에서 예기치 않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었다면 한국사 傳 2권에 기록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역사의 위기 앞에 직면하여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김윤후, 정조, 이경석, 김춘추 등 비교적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들의 일생에 관하여 적고 있지만 거기에 적혀 있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국사를 통하여 국민은 통치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여기에서 자유로운 정권은 없었다. 그저 말잘듣는 국민을 양산하기 위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군인들을 이야기하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민족 항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전부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머리가 커가면서 단순히 그럴까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좌빨이라 부르며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느꼈다. 역사의 사건이란 단순히 한면만을 바라봐서는 그 깊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사 傳 2권에 기록된 사람들은 화려한 배경을 가진 메이저리거들이 아니다. 그저 가진 능력을 계속 갈고닦고, 역사의 부름에 고개 돌리지 않고, 위기 가운데 배짱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사 傳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메이저들이 아닌 마이너들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마이너들의 삶이 한국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수업시간에 미처 배우지 못한, 아니 일부러 접근을 금지당한 역사의 진실일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너무 안타까워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억울해서 탄식을 하기도 하고, 거대 노론의 무식한 행동에 너무하단 마음에 분노를 삭히기 위하여 애쓰기도 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껴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정조는 달과 시냇물 사이에 구름이 끼면 안된다고 했다. 요즘은 달이 없다. 서울에 달이 안뜬지 오래다. 먹구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먹구름 중에 가끔 자기를 달이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냇물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거기가 자기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구름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조금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달이라 자처하는 기회가 오기를 말이다. 그 밑으로 성난 시냇물들은 모래를 삼키고 버스를 뛰어 넘는다. 이순신 동상을 향하여 전진해 보지만 컨테이너 방파제에 막혀서 가야할 길마저 가지 못해 역류하고 있다. 물이 흐르는 길을 불법이라 지칭하며 깎아 내리고, 깊이 파고, 운하를 만들어 검찰청으로, 경찰서로 넘긴다. 어찌보면 한반도 대운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진짜 물이 아닌 국민이라는 물을 조절하고 컨트롤하기 위해서 말이다.

  경제는 김영삼, 정치는 전두환이라는 오늘의 총체적인 난국을 어떻게 해야 할거나? 정조대왕이 다시 나타나야 할것인가, 아니면 홍경래가 다시 나타나야 하나? 소현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죽어가는 명을 섬기며 청을 멸시하는 척화파들,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가적인 일마저 팽개치는 썩은 글쟁이들, 김처선 같은 왕의 남자들은 이미 사라지고 김자원만이 가득한 파란집. 도무지 풀리지 않는 복잡한 정국 속에서 지켜주지 못해 끌려갔던 아낙내들은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자결을 강요당한다. 돌아갈 고향을 꿈에도 잊지 못했지만 환향의 기쁨은 순간 환향년으로 변해버렸다. 여전히 달은 없고 구름들이 서로 높은 위치에 서서 달을 자처하기 위하여 한나라를 뒤덮는다. 성나고 지친 시냇물들은 그저 촛불을 켜고 토정비결로 아픔을 달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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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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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역사적인 아픔이 있다. 이 아픔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아무리 모든 것을 용납한다고 할지라도 해소되지 않을 아픔이다.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을 아픔이다. 이젠 그만 용서하자는 말이 많이 나온다. 두고두고 잊지 말자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친일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은 남아 있는데 친일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2008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오랜 세월동안 지지부진했던 친일인명 사전을 발간하였다. 이 인명 사전의 파괴력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핵탄두에 버금가는 위력이다. 이 인명 사전이 발간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거의 대부분 연로하신 노인분들이다.) 민족문제 연구소를 찾아가 항의를 하였다. 항의의 골자는 이것이다. 박정희가 왜 친일파냐? 안익태가 왜 친일파냐? 이 문제의 핵심에는 여전히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우류부단함이 들어 있고, 공이 있으면 과가 자연적으로 말소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경제에 대한 공이 있으니 정상 참작을 하여 풀어준다는 재벌 총수들의 이야기나 이만큼 먹고 살게 된게 누구 덕인데 박정희를 비판하고 친일파로 모냐라는 이야기는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독일과는 너무 달라도 다른 모습이다. 2차대전 후 나치를 완전히 청산한 독일에서도 여전히 나치의 잔재가 뿌리 뽑히지 못했는데 친일 청산은 고사하고 그들을 다시 집권층에 포용한 한국의 모습은 말해 무엇하랴?

  오늘날 벌어지는 정치의 혼란함 가운데, 한나라당과 민주당 및 자유 선진당을 포함하여 보수당이라 부르는 이들 가운데 과연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친일 인명 사전에 대하여 그렇게 방해공작을 폈던 것이고, 이젠 용서하자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정신대 할머니들의 피해와 인권과 존재를 돈 몇푼에 팔아버린 박정희와 그를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한나라당, 친박연대, 자유선진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밥에 그 나물인 민주당은 어떤가? 모두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친북 좌빨을 외치는 이유도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 정권의 모습의 연장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진보 연대가 촛불의 배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덕일 씨의 책을 읽으면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교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교는 원래 이런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안 좋았을 뿐이야라는 논리의 말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우습다. 그냥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 누구나 보고 판단할 것을 굳이 계몽하려는 식으로 늘어 놓는 이야기들 같아서 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동일한 생각을 품어본다. 어느 시대에나 우가 있으면 좌가 있고, 보수가 있으면 진보가 있다. 유교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저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 되는데 굳이 계묭하려는 모습이 영 마뜩찮다. 그러나 이덕일 씨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말할 수 있는 대범함이 아닐까? 자기 신념에 대한 자신감, 학문에 대한 자신감, 말과 행동의 일치가 상실된 시대이기 때문에 이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야기된 것은 아닐런지? 노론의 일당 지배하에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웃긴 조선의 모습이나 코메리카를 꿈꾸며 어륀지를 외치는 1%를 꿈꾸는 웃기는 작자들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인터넷과 언론을 통제하려는 방통위와 여기에 힘을 실어주는 범무부와 조선 당시 노론을 위해 봉사하던 의금부와 주자를 숭상하던 송시열을 비롯한 설익은 유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단지 당시 명이 오늘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바뀐 것뿐이요, 청의 침략이 일본의 침략으로 바뀐 것 뿐이다. 다른 것은 청의 침략이 조선을 좀더 자유로운 사회로 만들었다면 일본의 침략은 대한민국을 친일후손들을 위한 국가로 만들었다는 정도? 거기에 더하여 박정희 신화를 만들었다는 정도일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내 말이, 내 신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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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역사를 뒤흔든 개인들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 한국사傳 1
KBS 한국사傳 제작팀 엮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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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눞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나는 역사를 참 좋아한다. 역사를 보면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처음 역사를 접할 때 역사란 영웅들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역사를 즐겨온 뒤 얻은 결론은 "역사는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수많은 민초들 가운데 몇몇이 대표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사 傳이라는 책은 민초의 이야기를 그들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풀어 놓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울고 웃고, 가슴 아픈 감정을 느낀 것이리라.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위대한 왕족, 귀족,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소한 사람들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한국사를 조명해 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일 것이다.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이런 즐거움에 푹 빠졌을 한국사 傳 제작팀에 부러움과 질투의 마음을 동시에 담아 박수를 보낸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묻혀 버린 사람들을 한명씩 조심스럽게 발굴해 내는 작업은 가슴설레이는 작업이다. 더군다나 그 작업이 우리의 삶에 지혜의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작업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나는 이 책을 청와대에 보내고 싶다. 여의도 국회에 보내고 싶다. 한나라당 당사, 민주당 당사, 각 정당 당사에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답답한 정국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란 희망을 품어본다. 대한 민국 1%, 소위 말하는 지도층들은(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돈을 많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지도층이라 자처하는) 자기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라고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이들이 역사의 주체로 기록된다면 이들이 지도층이라서가 아니라 국민의 한 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금처럼 함부로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신문을 보면 답답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보수와 진보라 자처하지만 우리 나라엔 보수와 진도보는 없다. 극 수구 꼴통과 덜 수구 꼴통만이 있을 뿐이다. 국민이 촛불을 들면 빨갱이라 욕한다. 빨갱이는 어디 가서 맞아 죽어도 하소연할 수 없는 나라가 2008년의 대한민국이다. 3조 이상의 재산을 가지신 모 의원께서는 버스 요금 70원을 이야기하면서 서민경제를 살리겠단다. 민초란 말도 사라져 버리고 서민이라는 말이 넘쳐 난다. 서민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그럼 국민도 아닌가? 명박산성을 쌓아 국민과 의사소통하는 대통령, 한대 맞았다고 수백명 잡아 넣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 검찰의 중립성을 당당하게 외치던 5년전 기개를 아직도 간직하고 네티즌을 단속하는 검찰, 국민의 말을 자기들 입맛대로 요리하는 국민의 신문 조중동 이 현실을 100년 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역사는 민초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기록된 시대에 살던 지도층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민초는 살아 남았다. 바람불면 넘어지고, 울어버리지만 끊질기게 일어난다. 서슬퍼런 노론도, 청나라도, 일제도 모두 사라졌지만 이 땅의 민초들은 살아 남았다. 그리고 역사를 기록해 간다. 그러기에 촌놈들이 날 뛰는 대한민국에도 희망이 있다. 촛불이 꺼져버린다 할지라도 그 불씨는 민초들의 마음에 계속 남아 타오를테니. 오늘 밤 왠지 바람에 눕는 풀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PS. 역사 스페셜에 비하여 책이 고급스러워 졌다. 그러나 내용은 역사 스페셜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내가 한국사 傳 프로그램을 못봐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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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스탠리 레인 풀 지음, 이순호 옮김, 정규영 감수 / 갈라파고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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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나는 군대에 있었다.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러갔던 이유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대해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온갖 문학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십자군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현대에는 영화화되지 않은 소재이다. 기대를 가지고 보았던 영화였지만 화면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던 영화였다. 발리안이라는 대장장이와 시빌라 공주의 로맨스가 주축이 된 영화로 십자군 전쟁은 그저 빌려온 배경일 뿐이다. 그저 마지막에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군주가 나와서 이들을 유럽으로 돌아가게 허락하고 예루살렘을 접수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 영화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킹덤 오브 해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영화를 검색해 보다가 그 때 그 왕이 누구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병에 걸려서 죽은 볼드윈 4세, 살라딘, 이벨린의 발리앙을 그렇게 재해석해서 한편의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서양 사람들의 재치에 놀랐고,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에 대해서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교황이 유럽의 제후들을 충동질했고 종교적인 열심으로 일어났던 많은 제후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가면서 성지 탈환을 위해 싸웠다는 것, 그리고 결국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 모든 것은 서양의 시각에서 기록된 것들이다. 성지 탈환이라는 말 자체도 서양의 시각이다. 역사를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 책은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이슬람의 술탄을 전면에 내세운 책이다.

  십자군 전쟁이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예루살렘 왕국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슬람 왕국이 무너져 군웅할거의 시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군웅할거의 시기를 마무리짓고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과 대적하였던 사람이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귀에 참 많이 익은 사람이다. 게임은 물론이고, 영화 문학 작품에도 이슬람을 이야기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사람이다. 이 살라딘에 관해 전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인데 보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이 좋았다. 리처드 왕과 살라딘이 호적수였다는 사실도, 킹덤 오브 해븐에서 처럼 한 컷으로 등장할 정도로 비중이 작은 인물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하여 알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살라딘 재해석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구 역사에 대한 반동으로 이슬람의 입장에서 살라딘을 해석하고자 한 의도는 칭찬받을만 하지만 너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역사를 해석 함에 있어서 한 인물을 너무 깎아 내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추켜 올리는 것 또한 문제인데 이 책은 살라딘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영웅 만들기에 급급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현실적인, 인간적인 살라딘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

  살라딘의 군사적인 능력 또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리처드 왕과 싸우고, 십자군들과 싸우면서, 이슬람의 또 다른 와지르들과 싸우면서 그렇게 많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살라딘의 군사적인 능력이 많이 부족했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오로지 살라딘이 관대해서, 다툼을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땅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 적에게 관대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자기 군사를 죽이는 리처드가 보병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말을 보내주었고 자기 병사들을 무찌르도록 도와주었다는 일화조차도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이슬람 군사들이 살라딘의 말을 안들었을까?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군대는 덕장보다도 지장을 따르기 마련이다. 지장을 따르는 것이 덕장을 따르는 것보다 더 살아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둘다 겸비하면 좋다지만 목숨걸고 싸우는 군대라면 둘 중의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할 때라면 단연코 지장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살라딘을 기록하면서 덕장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살라딘의 단점을 그렇게 감추어 버리는 얄팍한 속임수이다.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서구의 얄팍한 속임수에 발끈하여 감정적인 대응을 하다보니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리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행하고 있는 실수이다.

  마지막으로 책이 참 안넘어간다. 역사책을 두번 연속 읽으면서 이렇게 안넘어가는 역사책은 오랫만에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번역이 정말 조잡하게 되어 있다. 여기저기 가지치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원문에 충실하려한 탓인지 독서를 방해할 정도이다. 학생들에게 숙제 내주고 그것을 그대로 모아 살짝 다듬어 책을 낸 듯한 생각을 잠시 해봤다. 또 이 책의 원저자 또한 그리 대단한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왜 이리 쓸데없이 논점을 빗나가지? 문맥은 왜 이리 꼬아놓은 것이야? 왜 횡설수설해?"라는 생각을 너무 자주 하게 되었다. 심심풀이로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지만 몇번을 읽을 책은 아니다. 역사에 감정이 개입하면 안된다는 또 하나의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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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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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열심히 봤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오랫만에 역사책을 본다는 설레임으로 봤다. 제목도 "밖에서 본 한국사"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무지 힘들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책을 읽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 350페이지가 안되는 책을 읽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서 딴짓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이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김기협이 도대체 누구냐? 결론이 뭐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서평을 찾와 봤다. 마음에 꼭 드는 책이라고 하는데 난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하지? 내가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것일까?

  국사의 해체를 바란다고 하면서 한국사는 동아시아사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을 하더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동아시아사에서만 한국사를 바라보다 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다 보니 내용을 잃어버렸다고 할까? 이 책을 보면서 저자의 논점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다. 한국이 살아남은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 때문이고, 그 문화에서도 고구려의 것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고, 강대국들과의 관계 가운데에서 모질게 살아남은 것이 한국사라는 의미인가? 만일 내가 파악한 것이 옳은 것이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 한 순간에 한국사가 축구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고구려사가 내 것이 아닌데도 마치 그것이 내것인양 붙잡는 파렴치범이 되는 것이요, 주체 의식 없이 이리저리 채이는 축구공 신세가 되는 것이요, 문화로 오늘까지 살아남은 별종 중의 별종인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한국사인가? 국사라는 국수적인, 애국적인 모습을 버리고 동아시아사에서 바라보는 바람직한 한국사의 모습인가? 웃기는 일이다.

  뉴라이트에서 나오는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가 극우적이라 문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교과서나 이 책이나 그렇게 차이가 없다.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국사의 국수주의적 모습을 벗어버린다고 하나 책의 중간중간에 던지는 이야기들이 요즘 보수층들이 말하는 논리와 교묘하게 겹치고 있다. 친일파에 관한 문제들이 그것이다. 항일운동한 사람들을 무작정 영웅으로 볼 것도 아니고 친일파들을 무작정 매도할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얼마전 친일 인명 사전이 발표된 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이명박 대통령의 이야기와 놀랍도록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외 4.19 민주화 운동, 군사 정권에 대한 평가들을 보면서 어이없어서 픽픽 웃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의 한국사의 위치, 세계화에서 화이부동이라는 말이 이 책의 논점이라 말하는데 왠지 합종연횡으로 들리는 것이 무엇일까? 합종연횡의 마지막이 어떠했는가? 교묘한 말로 국가들의 연합을 꾀했고,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마지막은 어땠는가? 그렇게 경계했던 진에 의한 통일로 합종연횡이 얼마나 실패한 정책이었는지 드러나지 않았는가? 밖에서 본 한국사를 외치다가 그나마 안에 있는 것도 잃어버릴까 두렵다. 더구나 요즘은 국사마저 선택으로 배우는 시대 아닌가? 르네상스도 모르는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무슨 동아시아사요, 국사요, 세계사인가? 동북공정, 독도 문제 이걸 도대체 어떻게 풀 것인가? 책을 덮는 마음이 씁쓸할 따름이다.

ps.역사 에세이가 도대체 뭔지? 논란거리를 피하기 위해 살짝살짝 말만 던지는 비겁함으로 느껴진다. 차라리 욕먹어도 당당하게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한다. "이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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