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이긴 사람들 -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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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87년 6월은 뜨거웠다고 한다. 

  난 국민학교 3학년이었고, 6월 항쟁이 무엇인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매캐한 최루탄 냄새였다. 내가 살던 곳이 워낙 깡촌이라 그랬나? 실제로 최루탄을 그렇게 많이 맡아볼 일도 없었는데. 가끔 시내에 나가면 보던 전경들의 모습, 그리고 도망가는 사람들, 매캐한 향기. 당신에는 그것이 최루탄인지도 몰랐다. 

  어느날 학교를 갔다가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당시 우리는 주머니에 자석을 하나식 넣고 다녔는데, 막대자석은 고가의 물건이었으므로, 버려진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에서 뜯어낸 원형 자석 조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없었던 우리는 어디 버려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원형 자석 조각같은 까만 조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그것을 자석으로 믿었고, 그것을 손에 쥐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철이 붙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손이 얼얼하고, 손으로 부빈 눈이 따가워지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최루탄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쵤탄이었다는 것도 한참 지나고 난 뒤에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에게 6월은 딱 그정도의 기억이었다. 6월이 뜨거웠다면 손으로 부벼서 눈물이 날 정도로 따끔했던 그 정도였다.  

  나이를 먹고 대학생이 되어 최루탄이 무엇인지 구별할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6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메이데이가 5월의 축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절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을 알게 되었다. 전태일을 알게 되었고, 왜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광장으로 뛰어 나갔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가지 살면서 학교에서 단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국민학교 윤리 책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사진이 있었고, 내 오랜 기억에도 학교 교실 한 구석에 캐극기와 대통령 사진이 나란히 걸렸던 것 같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지게 만드는 서슬 퍼랬던 권력자들이었는데, 어느덧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 사회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민주화를 향해서 전진했던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누가 국가를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국민이다. 이름도 없이, 이름 석자 기억됨도 없이 국민이라는 일반 명사로 불려지는 그들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 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존재는 기념되지 않는다. 그저 민중으로, 국민으로, 때로는 폭도 등 정치적인 이익에 따라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을 뿐이다.  

  작년 6월도 뜨거웠다. 광우병을 우려하며 많은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국가의 오만가, 정부의 탈선을 지적하며 나왔다. 그러나 1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폭도로, 시위꾼으로, 때로는 빨갱이, 혹은 사탄의 자식들로 불려질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는 이들 대문에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행동은 분명히 역사를 발전시켰다. 우리가 살아 있음이 그들의 희생 때문이 아니던가?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워드 진이 "A Power Goverments cannot supress." 라고 채긔 우너제를 붙인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이상,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깨어 있는 이들이 있는 이상 역사의 새벽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 이것이 하워드 진이 이 책을 통하여 하고 싶은 말이 아니겠는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다. 독재 권력을 휘두른다고 할지라도 역사는 퇴보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주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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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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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스무살에 감신대에 들어간 이래 아마도 이분하고는 많은 악연으로 엮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 책에서 예수회의 신부들과 그 선봉 가브리엘 말라그리다 신부를 접하는 순간 이 분이 떠오른 것은 스무살부터 맺어온 악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인 이분과 300명 정도가 모이는 작은 교회의 한낱 부목사인 내가 비교의 대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싫은 걸 어찌하란 말이냐?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왜 그분을싫어하냐고? 그렇게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왜 싫어하냐고 의문을 달기도 하지만 단언컨대 이분이 단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분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싫은 이유를 어려가지 꼽아보라면 수십가지도 꼽겠지만 내가 가장 싫은 것은 그분의 독선이다. 자신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 그 생각이 싫은 것이다. 물론 목사들은 대체로 이런 성향이 있지만 이분은 도가 너무 지나치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치도 없다.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분을 떠올린 가장 큰 이유는 이분이 쓰나미와 캍리나 참사를 본 후 한 설교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분의 독선이 정확하게 나타난다. 

  "쓰나미 참사는 동남아 지역의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비롯한 불신자들, 그리고 주일을 지키지 않고 놀러가는 그런 불신앙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카트리나 참사는 미국의 동성애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위의 내용과 "리스본의 탐욕과 불신, 타락 때문에 하나님이 지진으로 이곳을 심판하셨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놀랍도록 똑같지 않은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놀랍게도 18세기의 사고 방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게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사회는 정신없이 바뀌어 가는데, 종교는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이 해야할 부분마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해하고 있다. 당연히 곳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저항감이 넘쳐나지 않겠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계몽주의를 보고, 독재자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박정희와 개발주의, 재건 대책에 관한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신앙과 맹신, 그리고 광신이라는 세 단어를 떠올려본다. 신앙이란 이성과 믿음이 적절히 균형을 이룬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맹신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덮어놓고 믿는 것이며, 광신은 이성을 잃고 그냥 믿는 것이다. 리스본 지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불신과 신앙, 맹신과 광신의 모든 것들을 보았을 것이다. 카르벨류가 불신의 모습이었다면 교구 신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한 신부들은 신앙을, 신부들의 설교에 재건보다는 회개를 외쳤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맹신이며, 예수회 신부들과 종말론을 설교하는 이들은 광신이 아닐까? 

  과연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당연히 이성이라고 말하다. 종교는 타파하고 깨뜨려야할 미신과 같은 것이며, 리스본 지진을 통하여 드디어 계몽주의가 포루투갈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하고 싶은 운명의 날이라 함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선 운명의 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나 기독교 신자인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맹신과 광신은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보다는 더 위험하며 유해하다는 것이다. 내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은 거꾸로 간다. 기술은 21세기이지만 마인드는 여전히 18세기에 머물고 있다. 자연현상을 도덕적 해이에 대한 심판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을 돕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이론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21세기에 과연 이런 식의 설교, 광신과 맹신은 어떻게 이해되 수 있을까?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각설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당시 포루투갈과 유럽의 사조와 배경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섦여하면서 카르벨류라는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평가는 긍정으로 기울어 있지만 말이다.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 중요한 사건이 왜 그렇게 생소한지, 세계사 가운데 왜 빠져 있는지 궁금하다. 주마간산식으로 배우는 역사공부의 폐해가 아닐런지?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가진 사라은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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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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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몇 가지 법안을 묶어 미디어법이라고 지칭하는 법안들이 논란 끝에 통과 되었다. 여야협상 결렬, 여야 국회 동시 점거, 배후에서 작전지휘하는 국회의장, 일선에서 경호권 발동과 동시에 직권상정하는 국회부의장, 빠른 시간내에 투표하는 한나라당 의원들, 허를 찔릴 야당 의원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등등 국회는 간만에 활발한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곳이 되었다. 물론 활발한 에너지가 넘펴 흐른다고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가르쳐 줬지만.  

  권력의 무상함이랄까? 불과 몇년 전에 헌법 수호라는 명목하에 의장석을 점거하면서수세에 몰렸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제는 법안 통과를 위해서 국회 의장석을 점거하는 공세의 입장이 되었다. 야구처럼 공수 교대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짓거리도 참 재미있겠다 생각을 해본다. 미디어법 통과에 맞추어 국회는 우리에게 블랙코미디를 선사해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쪽팔려 못살겠다하고, 어떤 사람들은 국회를 개들이 점거했다고까지 표현한다. 미디어법이 통과되어야지만이 서민경제를 살릴 수 있다, 서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미디어법이 통과되어야 한다면서 서민경제를 인질로 삼아 국민을 협박하는 한나라당의 오만함과 독선은 민주주의의 죽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국회의 결정을 다수결의 원칙을 따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주주의라 표현한다면 세상에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어디있겠는가?  

  각설하고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문득 "그 때도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의 역사에 수없이 많은 논쟁들이 있었는데, 이 논쟁의 마지막이 혹시 이번 국회의 모습같지는 않았을까? 왕을 앞에 두고 문방사우가 날아다니고, 상대방의 수엽과 상투를 잡아 뜯으며 개싸움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즐거우면서도 씁쓸한 상상을 해본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을 정력적으로 개진하면서 싸운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국회는 활발한 토론의 장이다. 그러나 토론의 모습이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보여줬던 서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서로를 용납하고 의견을 좁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없애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성을 보이는 모습, 그리고 자기편의 주장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 무슨 수단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모습은 조선의 왕마저도 택할 수 있다며 택군을 이야기했던 서인들의 오만함이 아니던가? 그들의 모습과 다수결의 원칙으로 통과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이 국민의 생각이요, 자기와 반대하면 빨갱이요 헌법 파괴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한나라당의 모습과 무엇이 닮았는가? 거기에 더하여 박근혜 대표의 기가막힌 낚시질까지 감안한다면 닮은꼴이 아니라 판박이가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왕 앞에서 멱살잡고, 상투잡고 수염뽑으며 드잡이질 하다가 왕이 발동한 경호권에 의해서 내시들에게 손발이 잡혀서 끌려나가는 대신들, 아수라장 끝에 바닥을 치우면서 한숨쉬는 상궁들.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 아닐까? 

  조선 아고라, 다음의 아고라를 빗대어 잡은 주제일 것이다. 책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질문한다. "토론이란 소모인가 상생인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토론은 상생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는 진짜 토론의 모습이 없다." 그러면서 조선 시대 격론을 소개한다. 한양천도, 공법실시, 1, 2차 예송논쟁, 문체반정 이렇게 다섯가지의 토론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격론들이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충분히 토론을 거친ㄷ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간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이 논쟁을 보면서 저자의 의도와는 모순되게 묘한 생각을 가져본다. 이 책이 현재 한국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말이다. 

  한성천도 논쟁은 결국, 기득권 세력인 왕과 신하 사이에서 좀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태조와 태종이 신하들을 얼르고 달래서 밀어붙인 일이 아니던가? 흡사 군부독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태조와 태종이 무인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이다. 한성천도는 말이 논쟁이지만 사실은 왕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었던가? 국민들의 여러가지 말과 의견을 무시하고 독재를 저질렀지만 다행이도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는 면에서 본다면 어떨까? 

  공법 논쟁은 YS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충분히 고민하고 토론끝에 시작했지만 그 내용을 보완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 공법의 시행 과정을 보면서 분명히 필요하지만 외호아 위기를 기점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열어버린 개방은 당연히 부작용이 나타나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법은 오랜 세월토론을 거쳐서 보완했지만 우리는 과연 세계화에 대해서 얼마나 숙고하면서 폐해를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예송논쟁은 DJ 놈현 MB시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으로 숫자와 권력으로 밀어 붙이는 모습, 왕까지도 택했던 오만함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초유의 사태를 밀어붙인 한나라당의 모습은 달마도 너무 닮아 있다. 서인(산당과 한당)과 남인, 북인으로 나누어져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모습은 한나라, 친박연대, 자유선진당과 민주당, 민노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의 이합집산산과 다를 거이 무엇인가? 

  문체반정은 논쟁이라기보다는 왕의 독단이 아닌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이 아니었던가? 결국 문체반정은 실패로 끝났는데 요즘 MB정권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책들, 청와대의 독주. 조만간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편지를 날릴지도 모를일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토론의 부재라는 역사도 돌고 돈다. 토론의 문화가 없다. 현재 한국에서 토론은 상생이 아니라 소모일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토론을 가장한 감정싸움이 아니겠는가? 감정싸움은 서로를 소모시키고 죽이는 일일뿐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감정싸움 끝에 사라져간 인물들이 한둘이었는가? 토론부재의 역사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되풀이 되고 있다. 토론의 장인 아고라가 아니라 아집과 고집과 구라의 아고라만이 한국 사회에 편만해 있다. 토론의 부재, 감정대립,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PS 사진의 출처는 연합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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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과서 한국을 말하다
이길상 지음 / 푸른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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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들어 역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간다. 얼마전에 읽었던 뉴라이트 교과서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나 보다. 뉴라이트 교과서에 대한 비판가운데 한국사에 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는데, 그렇다면 세계는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간단 명료하게 이야기한다. 역사를 잘못가르치는 것은 둘째치고 역사에 대하여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래도 경제 규모에 비례하여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가르칠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가면서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실상 다른 나라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동해를 이야기하고, 독도 문제를 이야기하고, 동북공정을 이야기할 때 세계의 교과서는 한국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독도에 관한 일본의 망언이 나올때마다 들끓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를 보면서 이것은 많이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감정적인 태도가 일본에, 그리고 중국에 정치적인 입맛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우리의 이야기가 다른 나라에서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인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 조차 모르는 현 상황을 만든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우리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든 예전에 친구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 올랐다. 아마도 2002년일 것이다. 친구가 선배와 함께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갔던 일이 있었다. 당시 전세계가 2002월드컵으로 뜨거웠던 때였다. 길을 가다가 차를 얻어탔던 일행에게 운전사가 물었다고 한다. "Where are you from?" 월드컵 성적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담아서 "Korea"를 외쳤던 선배와 친구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설명하면서 중국밑이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은 "Japan"으로 이해하더란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본 위라고 설명했더니 "China"라고 이해하던란 것이다. 몇 시간 실랑이 끝에도 결국 그 사람ㅇ게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 설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외국 사람들의 지리적인 개념에 의하면 중국 밑에는 일본이요, 일본 위는 중국이었던 것이다. 그 어디에도 한국은 없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2002년에 말이다. 

  지금 한국의 현주소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아무리 브랜드 파워를 외치고 찹아오고 싶은 한국을 외친다고 할지라도 결국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은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체계적으로 한국을 알리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가 수년을 세계의 교과서를 수집하고 한국을 알리려고 하는 과정에서 부딪혔던 벽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미국의 똘마니가 되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린다고 할지라도 결국 한국은 북한보다도 네임 밸류가 낮은 나라라는 것이 현실이다.  

  위에서 정치하는 아저씨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신경썼으면 좋겠다. 그저 독도와 고구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부분에 관하여 이름을 알리길 원한다. 일단 단 한줄이라도 더 넣으려고 노력하는 것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반만년의 역사를 외친다고 할지라도 외국에는 그저 몇십년 밖에 안된 신생국가 일뿐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에서 나서서 건국절을 이야기하다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그저 경제 성장과 분단국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음도 알려지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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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참하라 - 하 -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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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을 참하라." 

  자극적인 제목에 속아 이 책을 산 나는 이 책의 서평을 똑같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정하고 싶다. 

  "너를 참하고 싶다." 

  이 책의 상권과 하권을 읽으면서 막말이 요즘 트랜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개같은 조선" "요망한 여편네." "암탉"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는 저자의 말투를 보면서 왠지 역사학계의 진중권이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다. 옮은 소리를 싸가지 없이 해서 욕을 먹는 진중권에 비하여 백지원씨는 이름값도 없고, 참신성도 없다. 진중권은 참신함이라도 있지만 저자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을 작극적인 말로 늘어 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자극적으로 서평을 쓸 수밨에. "왕을 참하라. 백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은 망해도 진작 망해야 할 나라이다. 왕이 없는 것이 낫다."는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이 양반이 정말 백성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있기나 한 것일까 의문을 품게 된다. 그 어디에도 백성은 없다. 실체로서의 백성은 없고 집단과 관념으로서의 백성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치 요즘들어 서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정작 어디에도 서민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왕을 참할 주체는 관념으로서만 남아 있고 현재의 역사관에 그나마 차지하고 있던 그 작은 존재감마저 빼앗겨 버렸다. 정작 백성을 위해 썼다는 책이 백성의 설자리를 빼앗았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것은 둘째치고 저자의 역사관에 몇가지 의문을 던져본다. 요즘 한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상당부분 겹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본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책을 열심히 읽어본 내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같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몇가지 집어보자. 

  첫째, 조선의 멸망을 조선 내부의 갈등탓으로 돌린다. 쉽게 말해 조선은 일찍 망해야하는 개같은 나라라는 것이다. 조선의 멸망이란 열강들에 의해서 멸망한 탓도 있지만 일찌기 그 안에 신분제와 붕당이라는 제도적인 요인과 병신같은 왕들의 뻘짓거리로 인해서 애초에 멸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수가 좋아서 생각보다 오래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일본이 아니더라도 조선은 애초에 멸망할 나라이고, 그중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말아라는 뉴라이트의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정말 조선은 멸망해야만 하는 빌어먹을 세상이었단 말인가? 개같은 나라 그것이 조선의 실체인가? 저자의 역사관에 던지는 첫번째 의문점이다. 

  둘째, 조선은 정말 시대의 조류를 읽지 못한 자폐국인가? 저자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선은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혼자 왕따 놀이한 자폐아로 본다.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할 때, 조선은 한심하게 자기들이 최고라는 생각에 빠져서 서로 잡아 먹지 못해서 안달난 지배층의 지배를 받은 나라로 그리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쇄국정책만 고수하니, 아니면 이리저리붙어서 홀로서지 못하니 발전이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과연 조선은 시대의 조류를 전혀 읽지 못했던가? 또한 세계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것을 버리고 서구화하지 못한다면 후진국이 되는 것일까? 서구화가 과연 만능일까?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은 자아 정체성과 자기 문화를 지키는 것에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저자의 사대의식을 비판하고 싶다. 저자는 사대주의를 비판하다. 오랫동안 명과 청의 속국으로 지내온 조선을 비판한다. 사대주의가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저자의 역사관 밑바탕에도 사대주의가 숨어 있다. 사대의 대상이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숭미주의라고나 할까?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왕조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며, 시민국가로 흘러가야 한다, 유럽과 미국은 벌써 이렇게 했다는 것, 과학기술을 최우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밑바침은 결국 숭미가 아닌가? 나에게 있어서 숭미나, 숭명이나, 숭청이나, 숭일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넷째, 백성은 어디로? 저자는 백성의 입장에서 쓴 조선 통사라 주장하지만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난 다음 나의 평가는 지금까지 배워온 엘리트 역사관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천재들의 세기,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심으로 쓴 이야기에 그들의 신비감을 덜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인용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역사는 영웅에 의하여 흘러간다. 그리고 시대를 잘못만난 영웅은 얼마나 비참했던가? 이런 이야기는 있지만 당시 백성들의 이야기는 없다. 양반이 잘못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양반이라 말하는 오만함, 버젓이 호를 달아놓은 표지는 자가당착과 엘리트 지상주의를 그대로 대변한다. 

  다섯째, 호칭의 문제. 가장 크게 문제 삼고 싶은 호징은 민비이다. 물론 나도 역사를 민비라는 말로 배워왔지만 지금은 민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명성황후라는 말을 쓴다. 책은 적어도 공식적인 이야기이다. 아무리 싫어도, 그 사람의 행적이 혐오스러워도 공식 명칭을 적는 것이 예의요 도리가 아닐까? 내가 아무리 이명박 대통령을 싫어한다고 해도 책을 출판하면서 명바기, 2메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책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민비라는 말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된 말이라면 말이다. 민비의 정식 명칭은 명성황후이다. 고종은 고종이라 부르는데 왜 명성황후는 민비라고 부르는가? 명성황후의 실정과 척족 정치는 별개로 하고 공식 명칭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민비라 칭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심에 의하여 사용된 깔보기 식의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를 자학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호칭 하나만으로도 저자의 의도를 알 것 같다.(최소한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 한국근현대사에서도 민비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섯째, 숭무주의! 어찌보면 저자는 숭무라는 말보다 군사독재라는 말에 더 기울어 있는 것 같다. 조선 역사상 군인을 대우한 왕들은 좋은 왕, 아닌 왕들은 등신같은 놈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하지 않을까? 분명 국방력은 중요하다. 저자가 전쟁사가이기 때문이라고 이해도 한다. 그렇지만 너무 무쪽으로 치우쳐서 문의 부분을 이빨까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까? 간단한 예로 "예송논쟁"을 들어보자. 예송논쟁을 저자는 단순히 먹물든 것들의 이빨까기라고 말하지만 예송논쟁은 단순한 이빨까기가 아니다. 왕의 정통성을 다루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자칫잘못하면 왕권이 무시되는 정통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했던 것을 단순히 옷입는 문제로,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겠는가? 

  일곱째, 이상한 사고. 과거가 부끄러워도 지금은 부끄러워하지 말자. 잘먹고 잘살지 않는가? 잘먹고 잘사는 것은 박정희의 작품이다. 우리나라는 한번조 잘살아 본적이 없다. 대충 감이 잡히시는가? 거기에다가 요즘은 정신을 쇄신해야 한다는 저자의 결론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900페이지 넘게 물질의 중요성, 실학의 중요성과 정신세계와 명분에 경도된 성리학을 비판하더니 결론은 윤리관이라는 성리학적인 명분을 꺼내는 것인가? 그저 우스울 뿐이다. 결론을 읽고 "그럼 나는 900페이지가 넘는 부분을 왜 읽었지?"라는 황당함을 맛보았다. 

  이 외에도 이 책을 비판하자면 한도 없겠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뉴라이트의 사고와 왠지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상당히 읽을만한 구석들이 많다. 역사적인 사료도 많이 인용하였다. 그렇지만 비판의식을 갖고 읽지 않는다면 조금은 위험할 수 있는 책이다. 읽어볼만한 책이기는 하지만 강추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그저 패관문학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시라. 열하일기와는 격이 많이 다른 패관문학!! 베스트 셀러가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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