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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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에 카인을 읽은 이후로 갑자기 소설에 꽂혔다. 난 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이다. 소설보다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책을 선호하는 편인데 예전에 사놓고 아직도 읽지 않았던 흑산이 눈에 들어왔다. 김훈의 소설 중에서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에 대한 기억이 꽤 좋았기 때문에 흑산에 대한 기대도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천주교의 박해를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종교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나 궁금하기도 했다.

 

  한장한장 넘겨가면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산이라는 제목이 붙었기 때문에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겠거니 생각했다. 평소 순교하면서 신앙을 지킨 정약종보다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PR을 더 많이 하는 천주교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던 차에 도대체 김훈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천주교의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궁금했는데 이 책은 정약용은 물론 정약전에 대해서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정약용은 소설에서 잠시 스쳐가는 사람으로 등장하며, 순교로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정약종도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물론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삶도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까지 정약전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곁다리일 뿐이다. 오히려 김훈은 천주교의 이름모를 신자들, 천주교를 고발하기 위해 잠입했고,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여동생마저도 죽이는 선택을 한 박차돌의 삶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길갈녀, 아리, 강사녀와 같은 민초에 대해서 비중있게 다룬다.

 

  김훈이 비중있게 다루는 것은 민초만이 아니다. 대비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어찌보면 빼버려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대비의 교서와 언행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룬다. 또한 흑산도의 별장이라는 쥐꼬리만한 권력을 가지고 마음껏 휘두르고 있는 오구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룬다. 책의 절반이 넘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그 어느 책보다도 더 묵직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칼의 노래가 그랬고, 남한산성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 책의 묵직한 메시지는 206페이지의 아래의 대목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비전의 조회는 대체로 그렇게 끝났다. 대비는 자신의 말의 간절함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고 백성을 먹일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신료들은 그렇게 느꼈다. 대비의 말은 곡진하고 다급했다. 대비는 자신의 그 다급한 말과 간절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신료들은 대비가 내린 자교를 읽으면서 눈물겨웠다.

 

  왜 그럴까? 이 책을 읽으면서, 대비를 보면서 누군가 생각이 나는 것은? 같은 여자라서가 아니다. 사고의 틀과 주장하는 형태가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간곡한 말과 생각으로 간절히 원한다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는 사고 방식을 대비를 통하여 보게 된다. 자신은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려고 하는데 왜 현실이 바뀌지 않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지도 못하고, 밑에 있는 신하들이 아뢰지도 못한다. 혼자 끙끙 싸매다가 머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짱아지와 굴비만 들이라는 대목에서는 속에서 불이 올라온다. 신하들은 "대비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지껄이겠지. 무엇을  통촉해야 한다는 말인가?

 

  문득 정약현이 사위 황사영에게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잊지 말거라. 육손이는 그의 아비와 어미가 낳은 아들이다."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리면서도, 목이 베어지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 언제 한번 사람 대접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람 대접해준다는 것! 한번 이런 대접을 받으면 평생 떠나지 못하겠지? 김개동이와 육손이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가 잠시 곁으로 샜지만, 갑갑하다. 정약전의 마음을 내리 누르는 흑산이 여기에 있는 것 같고, 박차돌을 이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포도대장이 여기있는 것 같다.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동떨어진 간곡한 말만 해대는 대비가 여기 있는 것 같고, 대비의 전교를 전하는 세 방울의 딸랑 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더 암울한 것은 흑산을 자산으로 바꿀만한 조짐이 지금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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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한 해
윌리 오스발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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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다소 자극적이긴 하다. 뭘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가 생각하겠지만, 제목만으로 책의 내용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닐까? 제목을 보고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난 이 리뷰를 통하여 존엄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끄집어 내보고자 한다.

 

  존엄사!

 

  1.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2. 초가집도 없에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3.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4.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비교적 연식이 오래된 사람들이라면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 것이다. 새마을 노래다.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노래라고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분명히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이 노래를 통하여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이 노래를 통하여 한국의 70-80년대를 사로잡은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78년 생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 노래를 삶의 가치관으로 삼았던 세대는 아니다. 다만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촌동네였기 때문에 이 노래를 듣고 자랐을 뿐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애향단 활동이라는 것을 했다. 당시 초등학교 아이들은 토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동네별로 모여서 마을 회관까지 행진을 했고, 그곳에서 헤어졌다. 아내처럼 학교가 있는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함께 모여서 동네 청소를 했다. 나오지 않는 아이들은 마을의 최고 학년인 애향단장이 기록해서 선생님께 제출했고, 참석하지 않은 나는 불려가서 혼이 나곤 했다. 정식으로 혼이 나지는 않더라도 지나가는 말로 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가 애향단 활동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마을을 사랑하지 않아서(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이야기다.)가 아니라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이다. 그 시간에 나는 교회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가끔 일찍 모이는 날이면 동네 청소에 참여했다. 아침마다 새마을 운동 노래가 울려퍼지고, 조금 있으면 "아!아! 이장입니다."라는 말로 마을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 전파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다 군대문화인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새마을 운동 노래와 함께 마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잘 살아보세"였다. 새마을 운동이나 잘 살아보세나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가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학교 교육의 최고 목표도 인적자원 육성이었다.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것은 잘 살아보자는 사회적인 가치관이 교육에서 발현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시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이었다. 민주주의도, 경제정의도, 개인의 꿈의 실현도 잘 살아보자는 가치관 앞에 후순위일 수밖에 없었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은 잘 살아보세라는 사회적인 가치관이 어느 정도 실현된 척도로 인정되어 미술시간에 호돌이를 줄기차게 그렸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70-80년대가 지났다. 그러다가 IMF와 구조조정이라는 90년대를 만났다. 97학번인 내 동기 중에도 학비 문제 때문에 일찍 군에 가던 친구들도 있었다. 곳곳에서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잘 살아보세라는 가치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회는 여전히 웰빙에 관한 화두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웰빙이 전부가 아니라 웰다일 또한 중요한 인간적인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웰다잉은 배부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웰다잉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존엄사에 관한 이야기들,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고 미리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상조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웰다잉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던 내가 웰다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경이다. 비교적 일찍 웰다잉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순전히 내 대학원 전공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나는 인기가 없었던 윤리학을 전공했다. 사회학과 정치학 분야를 전공할 것인가, 윤리학을 전공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다가 좀더 삶에 밀착되어 있는 윤리를 전공하기로 하고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내용이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이야 논란은 되지만 많은 논의가 진전된 동성애 문제, 젠더 문제, 의료 윤리 문제 같은 내용들을 공부했고, 그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존엄사였다. 그 당시만해도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가치관에 입각해서 죽음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정이고, 이를 인간이 함부로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월권 행위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이 아직까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내 친구들의 평가와는 달리 나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이를 통하여 알게 된다.) 리뷰를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을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자기 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하기 1년 전의 기록들을 충실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존엄사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읽어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헛수고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책은 논리적인 내용도, 초지일관된 주장도 없다. 다만 저자가 아버지의 선택 앞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반대했고, 존중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흔들리고, 아버지를 원망한 이야기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회복되어 가고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에게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는가? 그 권리를 사회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존엄사에 대한 이해와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서유럽에서도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저자가 말한대로 판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진다. 존엄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판사를 만난다면 법적인 절차가 비교적 쉽게 이루어지지만, 혹 판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아픔에다가 법적으로 살인죄, 혹은 살인 방조죄까지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떠 안게 된다. 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명확하게 이렇게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문맥 속에 담긴 이야기를 관심만 기울이면 충분히 캐치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자기의 권리가 아닐진대,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렇지만 그들이 평생을 통해 이룩해 놓은 삶의 지위와 가치관들이 마지막 죽음의 몇 년을 통하여 부정되거나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면 이것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존엄사를 택한 사람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의 마무리를 직접 선택한 용기있는 사람일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남겨진 사람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남겨진 가족들은 그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반려 동물을 안락사 시킨 후에도 슬퍼하며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도 있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그 슬픔을 무엇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더군다나 사인을 자살이라는 단 두 글자로 기록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이 떠 안아야할 고통은 또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마지막까지 용기있게 삶을 살아주는 것이 떠나가는 자의 마지막 책임이 아닐까? 물론 뇌사나 혼수 상태라는 특별한 경우는 논외로 하자. 그것까지 이야기를 하자면 이 리뷰는 리뷰가 아니라 한편의 논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리뷰에 대해서 여러가지 댓글이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 비판은 받아들이겠지만 비난은 사양하고 싶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내 생각을 인정해 준다면, 그리고 좀 더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 간다면 언제든지 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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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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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한 녀석으로부터 문화상품권을 받았다. 교회에서 가르치던 녀석인데 꾸준하게 책을 사주면서 신경을 썼더니 고맙다고 문화상품권을 준 것이다. 나는 문화상품권이 생기면 거의 책을 구매하는데 사용하는데 아마 이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받자 마자 책을 샀는데 교회 청년이 준 문화상품권을 가지고 구매한 책이 혜민스님의 책과 법륜스님의 책이다. 내가 불교에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작년 중반기에 혜민스님과 법륜스님의 책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구매했을 뿐이다.

 

  특히 스님의 주례사는 꼭 읽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구매를 했다. 스님이 주례사를 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그 주례사에 관한 책을 많은 알라디너 분들이 읽고 리뷰를 작성했기 때문에 호기심 반, 호의 반으로 구매를 했다. 처음 읽어 나가면서 꽤나 공감을 했던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느 부분에 가서 탁 하고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마지막까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마도 종교적인 부분이 가장 큰 것 같고,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고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 덕을 보려고 하지 마라, 오히려 자신이 상대방에게 덕을 끼치기 위해서 노력해라, 서로 양보하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많은 부분이 통하기 때문이었고, 결혼에 대해서도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많은 청년들이 나에게 묻는다. "누구와 연애를 해야하고, 결혼을 해야하나요?" 그러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녀석들에게 말한다. "네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 편한 사람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와 같은 사람이 결혼하기에 가장 좋은 사람이야." 내가 아내와 결혼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한참 집안 일로 어렵고 힘들 때 아내를 만났고, 결혼까지 이어졌다. 초등학교 동창이었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고, 내 모든 연애사를 다 알고 있었지만 아내도 나와 만나는 것이 편했는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만 6년을 살아오면서 싸웠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다투었던 적은 없었다. 아내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내가 조심하고,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내가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결혼이란 서로 양보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책을 읽어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은 수행해라, 참선을 하고, 상대를 생각하면서 절을 하면 지금 가지고 있는 미움들이 사라질 것이고 문제가 해결될 방법이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가장 조심스럽고도 아직도 고민하는 부분들이 기도에 관한 부분인데, 바로 이 부분이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기도하면 지금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부분은 단순하게 기도하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감정들이 해소된다는 문제는 아닐것인데 108배를 하고, 천배를 하면 된다는 식의 처방은 마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다.

 

  게다가 법륜스님이 주로 권하는 대상이 남성이 아닌 여성인 것이 문제이다. 어떤 분들은 그분이 남성 우월주의적인 사고를 깔고 그런 답들을 내 놓는다고 비판하지만 나마저 그렇게 미판하고 싶지는 않다. 내 생각에 그분이 그렇게 말한 것은 주로 가정의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들이 확율적으로 남성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며, 그분이 결혼을 해보지 않아서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제 넘게 법륜스님에게 그건 이상이고, 현실은 다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주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밖에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좋은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키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고, 갈등이 있다. 상대방을 사랑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복잡한 사람의 마음인데 칼로 자르듯이 그렇게 해결책을 내 놓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결혼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명쾌하게 결혼에 대한 해답을 주는 이 책은 현실을 잘 모르고 이상적인 이야기들만 늘어 놓는 것이라 생각이 들 수밖에...

 

  책의 많은 부분들이 마음 속에 간직할만한 말이고, 삶에서 기억해야할 말이지만(그래서 별점을 세개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모든 사람들이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명쾌하게 해결책을 찾는다면 4주후에 봅시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결혼생활을 통하여 내가 얻은 결론은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어렵더라는 아주 간단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결혼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다면, 혹은 주례사를 부탁한다면 가능하면 사양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을 사준 녀석에게 한 마디 결혼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면 "행복해라. 그러기 위해서 많이 양보해라. 혼자 사는 것과 둘이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말이다. 비록 가슴 뛰는 연애 감정은 사라져 버릴지 모르지만 결혼은 가슴뛰는 감정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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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세트 - 전10권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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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꽤 좋아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나에게 한국 현대사에게 대해서, 사람의 아들은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삼국지를 삼국지 중 최악의 작품이라고 일컫지만 한국 작가 중에 삼국지를 꽤 재미있게, 그리고 자신의 비평을 곁들이면서(거기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기록한 이들 중에 대중들에게 이만큼 인지도를 얻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그의 삼국지를 통하여 평역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서 역사 소설이라는 것을 이렇게 읽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거이구나 생각을 했다. 중고등학생 때 삼국지를, 조금 더 커서는 사람의 아들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여러번 읽었고, 끝까지 읽는 것이 고문이리만치 힘들었던 선택이라는 책, 그외에도 수호지를 비롯하여 틈틈히 그의 책들을 읽어 왔으니 나를 이문열 키드라고 불러도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문열 키드라고 자칭한 것처럼 그의 책은 내 사고 형성에 꽤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선택이라는 책은 그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퇴색시켰다. 그래도 이문열이 실수했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았지만, 몇년전 그의 극우적인 발언들은 그가 실수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한가닥 희망만큼은 잃지 않았기에 이문열 책 장례식을 펼치는 이들을 보면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비판했었다.

 

  그러다가 이문열의 초한지가 나왔고 초한지와 이문열이라는 조합에 한번 사볼까라는 생각으로 품었다. 그러나 반값 할인을 했던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 정가를 주고 사기 아깝다는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막내 동생에게 생일 선물로 받아냈다. 책박스 채로 않고 그대로 두길 몇 주... 20권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두번째로 이 책을 읽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기대감으로 책을 폈다가 괜히 폈다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책은 삼국지에 비해서 진도가 안나가긴 하지만 이문열의 글솜씨가 쇠퇴해서가 아니다. 여전히 이문열이구나, 썩어도 준치구나라는 감탄사를 내뱉게 만들 정도로 꽤 재미있다. 다만 삼국지에 비해서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힘이 많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괜히라는 후회를 했던 이유는 한가지다. 그의 서문 때문이다. 서문의 내용을 정리하기 보다는 그 대목들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아서 간략하게 옮겨본다.

 

  5년이 넘는 중국사 장정이 드디어 끝났다. 돌이켜 보면 이 장정은 내 문학의 어둡고 쓸쓸했던 한 계절을 어렵게 헤쳐 나온 궤적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내 문학을 조여 오던 묵살(默殺)의 카르텔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일방적인 단죄의 선고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판 홍위병들이 그 선고의 어설픈 집행자로서 내 문학의 장례식을 되풀이 거행하자 나도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그러나 득세하는 인터넷 대자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나날이 괴물이 되어 가던 나는 갈수록 더 흉흉해지는 전의(戰意)만큼이나 주체 못할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중략)...

  한입 가득 불평을 물고 앙앙불락 지내는 사이에 한 시대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바라노니, 이제 더는 시대의 아이들과 불화하고 싶지 않구나.(이문열의 서문 중에서)

 

  그의 생각이 나와는 다를 수도 있다. 그가 극우에 서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발언을 가지고 그의 문학적인 성과들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의 문학적인 성과들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면 논리적인 평을 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요즘 힙합 뮤지션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디스를 하던지 하면 될 것을 그의 책들을 모아서 불태우는 것은 도가 지나치지 않았는가 싶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이문열의 분노가 이해가 안될 것도 없지만 문제는 그의 홍위병 발언이 자기의 책을 불태운 이들에 대한 분노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부모에게 받은 소중한 머리칼을 자르느니 차라리 내 목을 베라."는 말이 단순히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겠다는 멋쟁이의 고집이 아니듯이 그의 홍위병 발언은 자기 문학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이것과는 상관없는 정치적인 발언이다. 이미 홍위병 발언은 그 전에 있었고, 전라도 발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여러번 있었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일의 전후가 뒤집어지게 되며 이문열은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의 전후를 뒤바꾸어서 자기를 억울한 희생양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과 다투지 않고 홀로 독야청청하는 탈속한 사람으로 만드는 기술을 보면 이 사람의 글솜씨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서문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할말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줄이고, 왜 하필 고전, 그 중에서도 초한지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뜬금없다 여기지 말라. 모든 일에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고, 그 의도라는 것이 글솜씨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술렁술렁 넘어가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초한지는 이미 말했듯이 삼국지에 비해서 재미가 없다. 삼국지가 수많은 등장인물과 전략과 전술, 계략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면 초한지는 무협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항우라는 걸출한 절대 지존이 등장한다. 그는 초반부터 넘사벽이다. 그의 주변에는 기막히 스펙을 자랑하는 그의 부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의 반대편에 출신도 미천하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하층민이 등장한다. 그가 어울리는 친구들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개장수, 곡소리꾼, 건달, 하급관리 등등 뛰어난 능력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넘사벽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의 주인이 된다. 아마도 이문열은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시대에 우리를 이끌어갈 영웅을 간절히 소원했는지도 모른다. 일반 시민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현실 앞에서 이건 아니라면서 우리를 이끌어줄 영웅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문열의 기다링 때문일까? 그 영웅이 등장했다. 물론 그 영웅이 진짜 영웅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만 일단 이것은 뒤로 젖혀두고 이문열이 기다리던 영웅의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다. 아마도 이문열은 항우형보다는 유방형을, 가능하면 항우형과 유방형을 섞은 타입의 영웅이었으면 생각했을 것이다. 이문열은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서 모든 보수 세력을 아우르고 진보진영과 한판의 싸움을 벌리고 최후에 권력의 승자가 되는 영웅을 기다렸을 것이다. 물론 가능하면 이 영웅의 출신이 운동권도 아니고, 장돌뱅이도 아니고 둘째가면 서러워할 그런 가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문열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었던 것일까? 이에 부합하는 한 인물이 등장했고 권력 쟁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겉보기는 이문열의 바람대로 된 것 같지만 그 실상은 이문열이 제일 꺼려하던 형태로 나타났다. 유방을 베이스로 하여 항우의 스펙이 뒤덮인 것이 아니라, 항우를 베이스로 하여 유방의 교활함이 가미된 것이다. 유방의 교활함과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도 끊임없이 외연을 확장하고 인재를 받아들이고, 몇번을 실패해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전제가 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외연의 확장 능력 때문임을 기억한다면 이것이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한 진영을 이끌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맹박이, 쥐박이, MB라는 명칭으로 조롱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소통의 부재가 아닌가? 명박 산성이라는 컨테이너 차폐물이 그의 소통 방식의 상징이 아니던가?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많이 거론했지만 수첩공주라는 그의 별명이 의미하듯이 그 또한 소통에 취약하다. 페북을 하고, 여러가지 SNS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란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타작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소통이라고 한다면 항우는 소통의 달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의 생각을 타자에게 전달하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초한지를 읽으면서 여러모로 생각할 만한 사안들이 많았다. 이게 고전이 가지는 힘인가 보다. 아마도 이것이 이문열이 고전으로 피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홍위병 운운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스탠스와 변명을 저자의 서문에 실어 놨다는 것이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꼰대 정신으로 똘똘 뭉쳐 나는 시대의 피해자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작가의 자존심이 있다면 초한지 서문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나는 시대를 잘못만난 피해자다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작가다운 다른 방법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차라리 안도현처럼 절필 선언이라도 했다면 논란은 있겠지만 덜 구차하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서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변신은 김지하의 변신만큼이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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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9-0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문열 초기작들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등등..근데, 진짜 <아가>부터는 뭐랄까, 욕먹어도 뭐라 할말이 없을 정도..이후 저도 이문열 작품에서 멀어져갔지만, 이문열은 확실히 작가로서의 아우라는 있습니다. 요즘 신인작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죠. 그런 포스를 가진 사람이 정치적 행보, 것두 우리나라 보수의 기수로서 발언하는 걸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말씀하신 논의들에 공감 만빵~~이구요, 단지 저는 이문열의 초한지는 아직 읽지 않아서, 재밌는지 살짝 여쭤봅니다.^^

saint236 2013-09-07 15:58   좋아요 0 | URL
이문열인지라 기본은 합니다. 수호지 정도의 레벨은 되는 것 같구요. 다만 삼국지보다 처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같은 평역이긴 하지만, 레벨차이가 나기는 하네요.

마태우스 2013-09-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욕을 많이 했지만, 젊은 날의 상당부분을 그에게 빚진 것도 맞죠. 그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였어요. 그 이후의 행적으로 인해 존경심은 싸그리 없어졌지만요. 그가 정말 이해 안되는 게요, 몇백만부의 책을 판 사람이 시대와의 불화 이러고 앉았으면 몇천부 판 작가는 시대의 저주, 뭐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건지요.

saint236 2013-09-08 20:21   좋아요 0 | URL
몇백만부의 책을 팔았기 때문에 자신이 특별하다 생각한게 문제죠

transient-guest 2013-09-1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방을 베이스로 하여 항우의 스펙이 뒤덮인 것이 아니라, 항우를 베이스로 하여 유방의 교활함이 가미된 것이다"는 명문인 것 같습니다.
이문열은 어릴 때 참 좋아했었죠. 그의 독단과 독선이 시원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고, 나름대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그의 비판적인 논리도 좋아했었죠. 그래서 한때, 이문열은 좌/우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솔직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삐진' 그는, 점점 더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다가 이제는 돌아올 수도 없을만큼 그 사람 자체가 바뀐 것 같습니다. 물론 글에서 교묘하게 자기 집안과 자기를 포장하는 것은 전부터 좀 싫었지요.ㅎㅎ 아마도 '변경'을 전후로 해서, 필력이 떨어지고, 이 시점에서 진보를 비판하는 것으로 부족한 글솜씨를 때워가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나저나 무려 '마태우스'님이 댓글을 남기는 것을 보니 saint님이 마구 존경스러워집니다.ㅎㅎ

saint236 2013-09-11 11: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문열씨는 누구라도 댓글을 달고 싶어 할만한 사람입니다.
 
모피아 : 돈과 마음의 전쟁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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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은 약사에게 OO은 OO에게"

 

  요즘 들어 많이 보는 카피 문구다. 일에 대한 전문성을 나타내는 카피인데 과거에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다소 정치적인 표어를 사용했었고, 요즘은 모 구직 사이트에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보통 책을 읽고 나면 나름대로 그 책을 한단어로, 혹은 한마디의 문장으로 요약한다. 때론 책의 내용을 다루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인데, 그것이 책의 내용과 연관이 있다면 괜찮은 책으로, 연관이 없다면 뭔가 아쉬운 책으로 평가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소설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이 전문성이라는 말은 이 책이 꽤나 부실하다는 말이다. 경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소설책을 보고 내린 결론이 경제의 전문성이 아니라 글쓰기의 전문성이니 얼마나 이 책이 문학작품으로서 부실한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한다. 한국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해왔던 경제 관료들 중 카르텔을 형성한 이들(이들을 모피아라 칭한다.)이 배후 조종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국가의 운명을 두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와 경제 전쟁이라는 참신한 소재를 가진 소설이니 꽤나 기대가 될 법도 하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소설이 애정사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매우 긍정적인 일이겠으나 문제는 이런 참신한 소재를 가지고 식상한 소설을 만들어 버렸다는데 있다.

 

  우석훈이라는 이름값 때문이랄까, 아니면 모피아에 대해 줄기차게 공격해 왔던 나꼽살과 홍보 효과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MB 정권의 경제 정책에 학을 뗀 사람들의 관심 때문일까?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이 책은 책의 완성도에 비하여 꽤 많이 팔린 축에 속하는 책이다. 나역시도 이 책을 보면서 "우석훈이 소설을?" 이런 호기심에 책을 살까 말까 고민했었고,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는 순간 충동적으로 구매를 했다. 영화 판권도 팔렸다는 책이라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중반부까지는 그래도 흥미 진진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내 정신세계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인지 환타지의 세계로 날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 정책과 환율, 페이퍼 컴퍼니,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다툼이 꽤나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현실적인 묘사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이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러한 묘사는 얼음이 녹아버리듯이 사라져 버렸고, 그 사이를 만화와 같은 억지스러움과 끼워맞춰진 해피엔딩이 대체해 버렸다. 역시나 우석훈에겐 소설이 무리구나라는 생각을 해봄과 동시에 이 책을 영화로 각색하려면 각색하는 사람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들어봐야 흥행헤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석훈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위하여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했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택했다는데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혹 우석훈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그의 말과는 달리 만만하게 본 것은 아닐까? 소설에 별점 하나를 주면서도 과한 것 같아서 못내 마음이 쓸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번 한번은 새로운 경험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가고 이런 실력으로 두번다시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소설을 스고 싶다면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습작을 한다음에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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