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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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없는 이야기"


  제목부터가 눈에 띈다. 왜 지금은 없는 이야기일까? 책을 읽어가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된다. 없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중의적인 이야기입니다. 없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없다는 이야기이다. 동물이 하는 경우도, 식물이 서로 성공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이 책은 우화이니까? 다음으로 없다는 것은 이 책의 내용대로 가면 책의 주인공들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조금씩 타협을 하고 조금씩 퇴로 없는 경쟁을 하다 보면 멸종되어 버릴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내용은 암울하다. 약자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하고 강자는 약자를 없애기 위해서 힘을 모으니 말이다. 


  어떤 동물 이야기에서 약간 특이하게 우는 동물을 골라내고 그 동물을 쫓아내는 이야기, 이 일이 성공하고 난 다음에는 또 다른 동물을 골라내고, 끊임없이 골라내다보니 결국에는 그 동물들은 사라져 버리는 이야기. 염소를 잡아먹는 늑대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는 날카롭다. 송곳이라는 그의 책의 제목처럼 현실을 바라보고 풍자하는 그의 시각이 무척 날카롭다. 그래서 더 아프다. 애써 외면하려는 나의 마음을 자꾸 불편하게 한다.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보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내 마음에 불편함이라는 짱돌을 던진다. 


  동물들의 이야기라는 상상 속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동물을 노동자로, 소비자로, 평범한 사람들로, 이 시대의 약자로 치환하여 읽으면 신문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현실의 이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무한경쟁의 시스템을 멈추기 보다는 그 안에서 나는 안전하니까, 나는 괜찮으니까라는 위로를 하면서 혼자서 살아남으려는 우리들에게 그러다 보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던져 준다.


  천사의 이야기는 더 신랄하다. 천사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다보니 나중에야 비로소 자신이 속아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속아서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파인텍 노동자들이 고공 농성을 해도, 신기록을 세웠다는 말 앞에서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다. 아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니 아무렇지 않다는 말보다는 무관심하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면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물려주기 위해서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문득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옹알이를 하고 있던 큰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아빠가 미안하다."라고 사죄했던 그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지금은 미안하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무한 경쟁, 적자 생존의 시스템 속으로 내 아이를 밀어 넣으면서 미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작가는 나에게 묻는다. 아이에게 미안해 하던 당신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그 때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 씁쓸함과 불편함과 미안함으로 복잡한 마음으로 끄적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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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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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쟁이 김훈의 오랫만의 소설이다.

 

  아직 읽어야할 책들이 많고, 소설을 즐기는 편이 아닌지라 굳이 사지 않았던 책이다. 그런데 책을 빌려줬던 녀석이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선물해 준 책이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읽었다. 김훈의 소설이 그렇듯이 읽히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다른 소설보다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멈춰서는 부분이 있다. 연대기를 따라서 가는 일반적인 소설과 김훈의 소설이 다른 점이 이 부분이다. 정신차리지 않고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이 꼬여 있다. 갑자기 이 사람의 삶에서 저 사람의 삶으로 넘어가 있기도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마차세의 삶에서, 마장세의 삶으로, 마동수의 삶으로, 이도순의 삶으로, 박상희의 삶으로 넘어간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삶인데 그들의 삶이 섞여 있으니 막힐 수밖에 없다.

 

  소설의 시대배경이 그렇듯이 주인공들의 삶은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다. 돈, 사랑, 직장, 자녀 등등 모든 가치관들의 이면에는 살아남는 것, 이 난리를 이겨내고 살아남는 것에 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데 같이 산다. 어떤 사람은 군수물자를 삥땅치고,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돈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그는 그렇게도 싫어하던 한국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얼마의 돈을 보내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동생에게 떠넘긴 미안함을 달랜다. 물론 그에게 미안함이라는 말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각자가 여러가지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질게 연명해온 목숨이 끊어지기도 하고, 쓸쓸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잘나간던 사업도 어느날 파산하고, 함께 살던 부인도 부하 직원과 떠난다. 형과 동업하던 마차세도 좋은 시절을 보내고 택배 배달기사로 서울 남부 순환 도로에서 동부 순환 도로로, 외고가 순환 도로에서 내부 순환 도로로 하루종일 달린다. 꿈도 젊음도 사라지고, 소시민의 모습만 남아 있다. 김훈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그렇게 아등바등했는데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막막한 세상 속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하나 없이 부평초처럼 떠돈다. 박상희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도 편지를 보냈던가? 그 편지를 과연 장세의 부인은 받았을까? 받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이며, 받았더라도 읽을 수는 있었을까?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한가지를 생각해 본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무엇을 위해서 그들의 젊음을 소비했는가? 인생이 무상하다.

 

  다만 이 책에서 발견한 한 가지 희망은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가고,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박상희가 옷가게를 차렸다. 누니가 혼자서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그나마 마차세의 삶이 다행이다 싶은 것은 모두가 공터에 서 있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상희와 누니라는 몸을 기댈 수 있는 작은 거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 책이 몇 페이지가 더 연장된다면 어떤 모습들이 그려질까? 상희의 옷가게는 마트에 쫓겨서 매출이 급감하여 폐업하게 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고, 누니는 세상에 귀신은 없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때닫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차세는 취업통보를 기다리면서 결코 임시직일 수 없는 임시직을 계속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 너무 멀리 나갔는지도 모르겟다. 그렇지만 자기 주인공들의 삶을 그리면서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뿌듯해야 하는데 허허롭다. 마치 내가 공터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또한 글쟁이 김훈의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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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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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소설이다.

  

  중국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썰을 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루쉰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의 소설 아Q정전은 당연히 따라나오는 것이니 유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보면 이 책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소설이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제목은 알고, 내용도 아는데 실제로 읽어보지는 못한 것들! 이것이 고전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이 소설은 고전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고, 아Q정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루쉰 단편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책에서는 놀랍게도 아Q정전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광인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흥미가 생겼고, 생일을 맞이하여 스스로에게 선물로 사주었던 책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이제야 리뷰를 하게 되니,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하는 일이라고 해도 내 게으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Q정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광인일기와 아Q정전이다. 혁명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근대를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다른 분위기로 그리고 있다. 광인일기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피해망상증에 걸린 친구의 일기를 입수하여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면서 서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물론 광인의 일기는 루신의 생각이겠지만. 광인은 지금까지 지탱된 사회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사회라는 것은 중국의 유교 체제와 왕조라는 통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이런 시스템을 통하여 백성들을 쥐어짜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왔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통찰은 지식인 내지는는, 권력층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통찰이기에 나는 광인일기가 근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 체제 속에서 본인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도 사람을 잡아먹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는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 식견과 교육을 가능하게 한 것이 본인들이 비판했던 사회 체제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당시 중국 지식이의 절망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 아Q정전은 당시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Q는 원래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얻어터지고, 저기서 얻어터지고는 강자 앞에서는 정신승리를 외치는 사람이다. 실제적으로는 얻어터지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내가 이겼다는 자기 만족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자기 만족이라는 것도 얼마나 기만적인가? 자기보다 약하거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샌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니 말이다. 이러한 아Q가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 뚜렷한 이념도 없이, 상황에 따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 마치 아Q는 가만히 있는데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결국 아무 생각이 없던 아Q는 혁명이다, 반혁명이다라면서 자기도 의도하지 않게 정치적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죽어도 마땅한 사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광인과 아Q 모두 혁명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시대에서 새롭게 사람을 잡아먹는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다가 도태되었다. 중국만 그런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루신의 이 소설이, 단편 길어야 중편인 이 소설이  왜 중국의 근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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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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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같이 근무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소설책을 많이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느냐 물었더니 아직 안 읽었다고 한다. 책 빌려 줄테니까 한번 읽어보라고 읽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내용에 대해서 묻는다. 여러가지 평가가 많이 있는데 "과장되었다"라는 평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묻는거란다. 책 내용을 찬찬히 되새겨 보았다.

 

  "과장된 표현이나 내용이 어디 있었던가?"

 

  과장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아쉬웠던 내용이 있었다. 여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서 빙의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빙의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갈 때 멍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이야기를 빙의라는 말로 풀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아무리 소설은 작가 마음이라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아쉬움 때문에 저자가 이 모든 것들을 소설 안에서 풀어 나가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쓸데 없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었다.

 

  이 책의 내용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 모든 내용이 단 한 사람에게 모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과장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내용은 김지영이라는 한 사람을 통하여 빙의라는 아주 특수한 설정을 가지고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김지영의 입을 빌려서 하고 있을 뿐이지 김지영이 이 모든 일을 겪은 것은 아니다. 설령 이 모든 일이 한 사람이 겪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가지고 성평등주의다, 기득권 층이다, 여혐이다, 남성 우월주의다 등등 이야기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첫번째는 저자가 빙의라는 특별한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위에서 밝혔듯이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여성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나는 점을 감안한다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지 않고서는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겠구나 생각한다. 주인공 김지영은 빙의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는 거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이 설정 자체가 미치지 않고서는 자기의 이야기를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여성들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집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 형제들과 어머니(시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 한다. 혹시라도 내가 오해하고 받아들일까봐, 혹은 내 동생이나 어머니가 오해하실까봐 조심스러워 한다. 그것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한다. 우리 집은 이 부분이 상당히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책이 은연중에 이야기해주는 것은 여인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미친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점이 아니겠는가?

 

  두번째는 가장 마지막 부분이다. 김지영을 상담하고 돌려보낸 의사가 자기 아내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내의 삶에 미안해 한다. 아이들 수학 문제 외에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아내의 말을 곱씹어 보면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한다. 그런데 출산으로 그만두는 간호사를 보면서 다음 간호사는 결혼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리다. 이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성적으로는 성평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일이 내 일이 아닐 때에는 마치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받아들인다.

 

  내가 아는 분 중에 남자 분이 육아 휴직을 1년간 했다. 당연히 주어진 권리이다. 그런데 그분 이후로 그 직정에서 남자 육아휴직은 신청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하여 펑크가 났다는 것이다. 관리자야 그렇지만 그 권리를 같이 누릴 수 있는 직장 동료들도 마치 그 분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생각하더란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머릿 속에만 머물러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김지영이 나라면, 혹은 내 아내라면, 내 딸이라면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있을까?

 

  마지막은 이 책을 과연 소설로 분류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주인공이 김지영이라는 82년생의 가공인물이어서 그렇지 내용 자체는 사실적이다. 나는 이 책을 소설이라기보다는 르포르타주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이 책의 내용은 사실적이다. 심지어는 각주처럼 그 내용에 대한 기사나 출처까지 달아 놓은 부분을 보면서 이게 소설이야라는 생각도 했었다.

 

  과장이라는 말, 성갈등을 증폭시킨다는 말! 내가 보기에는 글쟁이들의, 혹은 남성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아닐까? 혹은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못하고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 그리고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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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1-3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목조목 넘 잘 짚어주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saint236 2018-01-31 17:01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친구신청했습니다...서재들 둘러보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책꽂이를 발견하고 반가웠습니다.

[그장소] 2018-01-31 20:03   좋아요 0 | URL
저도 넘 반갑습니다~^^ 분명한 자기 목소리가 있는 리뷰구나.. 싶어 더 반가웠어요! 자주 뵈어요. 저두 친구신청 받고 콜!! ^^

북극곰 2018-01-3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전혀 과장이 아닌데...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건 아닐지. 이 책 읽으면서 저도 어릴 적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되게 당황스러우면서도 분노스러웠어요.

몇 년 전에 1년 육아휴직을 했었는데,‘작년에 육아휴직을 낸 사람은 승진시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기 돌았었지요. (승진 못했어요. ㅠ.ㅠ) ^^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회사인데도 그랬어요. 육아 휴직도 쓰는 사람이 많을 수록 사회도 변할 수 밖에 없겠지요. 서지현 검사 소식들을 접하면서 정말 편치 않은 요즘입니다.

[그장소] 2018-01-31 20:05   좋아요 0 | URL
선례를 아예 나쁘게 만들어서 내내 쓸 수없게 누군가 악의적으로 애쓰는게 아닐까 싶었어요. 듬성듬성한 징검다리에 돌하나 더 놔주지는 못하면서 있는 디딤돌마저 치우려는 사람들을 .. 생각하니 참..마음이 그렇네요..에휴~~

saint236 2018-02-01 10:53   좋아요 1 | URL
법과 현실의 간극이 심하지요. 이런 것을 무시하면서 법으로 보장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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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이슈가 되었던 책이다. 대체로 성경을 비비꼰 이야기들은 세간에 화제가 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작가가 "눈먼 자들의 도시"의 주제 사라마구이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게다가 출판사에서 전략적으로 12월 25일을 출간일로 잡았으니 더 이슈가 되리라. 원래 책에 대한 편식이 심한 편이라 소설을 잘 안 읽는(소설만 잘 안읽는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나이기에 카인이라는 제목과, 작가, 그리고 막 희생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묶여 있는 어린 양이 그려진 표지를 보면서 성경을 비비꼰 책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넘어갔다. 며칠 지나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대학 동기가 읽고 감상을 기록한 글이 올라왔다.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또 다른 글이 올라왔다. 그리고 알라딘 베스트셀러 중에 이 책이 문학 분야에서 꽤 오랫동안 랭크되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책을 주문하면서 5만원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집어 넣었다. 지금은 5만원을 채운다고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도서정가제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5만원을 채우는 것은 알라디너들의 즐거움이자 목표이자 의무였다. 그 습관이 아직도 남아서 책 주문시 항상 5만원을 채우게 된다.

 

  이렇게 사놓고 책꽂이에 박아두었다가 연휴 기간에 꺼내서 읽게 되었다. 역시 소설책은 쭉쭉 넘어간다. 만약 내가 스물에 이 책을 접했다면 엄청난 고민을 하면서 읽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고민이 되지 않는다. 읽어가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비하면 가볍다는 정도? 스물에 교회 선배가 던져주었던 사람의 아들을 읽는데에는 몇달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읽다가 던지고 또 읽다가 던지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교회를 다녔던 내게 사람의 아들은 그정도의 충격이었다. 잠시 곁길로 가지만 지금의 이문열씨의 행보를 보면 안타깝지만 사람의 아들이 내게 주었던 충격은 부인하지 못한다.

 

  읽는 내내 도대체 이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왜 이걸 가지고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내가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 소설에 나오는 성경의 이야기들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 책이 내게 더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는 많이 다르다. 기독교의 신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나 로마의 신과 비슷하다. 편을 나누어서 사람들의 전쟁에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을 깨는 그런 신의 모습 말이다. 카인은 그런 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대적하고, 저주하고, 신의 계획을 깨버리기 위해 노아의 방주 사건을 이용한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적인 고뇌를 가지고 신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소갈머리 없는 신이라 이름붙여진 인간과 애정결핍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가득차 있는 카인의 입씨름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인간적인 고뇌도 없고, 신에 대한 반발도 없다.

 

  책을 덮으면서 요한복음 1장 1절을 약간 비틀어서 한마디로 평을 내려본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태초에 책임전가가 있었느니라 책임전가는 카인과 함께 있었으니 이는 곧 사람의 본성이니라

 

  소설 속의 신과 카인은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한다. 신은 자신의 계획을 흔드는 카인에게, 카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아벨을 편애한 신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내가 아벨을 죽인 것도 신이 알면서도 묵인한 것이 아니냐? 소설은 시종일과 신과 카인이 책임이라는 공을 가지고 탁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 작가는 카인이 가여웠나 보다. 마지막에는 카인이 강력한 책임전가 스매싱을 날리고, 신은 이에 짜증을 내는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보니 말이다. 물론 소설은 끝나지만 그들의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 카인이 존재하는한, 사람이 존재하는한 책임이라는 공을 가지고 하는 탁구시합은 끝나지 않으리라.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한다. 옥시 사태가 그렇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중범죄가 그렇고, 온갖 스캔들이 그렇다. 잘못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다는 책임전가 신공, 그리고 그 신공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함께 훈련한 철면피 아우라는 흡사 카인의 한 대목을 현실로 옮겨 놓은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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