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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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개봉작 중에 이퀼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로는 보지 못하고, 2004년 비디오로 빌려서 보게 된 영화이다. 지금도 심심하면 가끔씩 보는 영화인데, 크리스천 베일의 권총 액션이 환상적이다. 존윅의 권총 액션이 나오기 전에 단연 독보적인 권총 액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권총을 사용하는 액션 영화는 많이 있지만, 권총 사격술 자체를 액션의 영역에 끌어 올린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일 것이다.(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다.)


  영화관에서 개봉될 당시만 해도 내가 몰랐던 것으로 보아 그다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영화같다. 이 무슨 망발이냐 하겠지만, 그 당시 군 입대를 1년 앞둔 시점이라 거의 모든 영화는 챙겨봤었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다. 당시 이 영화가 나왔던 것도 잘 몰랐을 정도이니, 크리스천 베일 영화치고는 그렇게 크게 홍보가 되지 않았던 영화같기도 하다. 최근에 1984를 보면 다시 한번 돌려봤던 영화인데, 아직까지 볼만하다. 통쾌한 액션을 원하는 사람은 한번식 보기를 권한다.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김빠지는 일이요, 유즈얼 서스펙트에서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테러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퀼리브리엄의 세계관은 1984의 세계관과 거의 동일하다. 셋이냐, 하냐라는 차이, 빅브라더와 파더의 차이, 비극과 순응이냐 전복과 통쾌한 액션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감정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은 1984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아마도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이 1984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1984의 배경은 조지 오웰 당시에는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들이겠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는 현실이다. 텔레비전과 CCTV를 적절히 섞어 놓은 것 같은 텔레스크린, 그리고 이를 통한 감시는 오늘날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어떤 이들은 "베리 칩"과 백신을 거론하면서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이미 우리 주위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신용카드와 휴대폰을 통하여 동선을 파악하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었고, 그래서 작년 집회 때 전모 목사는 현금 쓰고 휴대폰을 꺼놓으라는 지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책의 내용을 읽어가는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 모든 기술은 적정한 수준에 멈추어 있거나, 오히려 퇴보하지만, 경찰의 감시에 대한 기술은 나날히 발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매우 위험하고 소름끼치는 일인데, 더 소름이 끼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에 열성적인, 그러나 잠꼬대를 어린 딸이 고발하여 끌려온 사람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 전체주의가 왜 무서운지을 알게 된다.


  전체주의에 대한 여러가지 정의들이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의 판단은 길들이는 것이다. 어떤 거대한 담론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담론은 대체로 "국가"가 된다. 거대하고, 모호해서 비판할 수 없지만, 너무 쉽게 압도되어 순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즘 많이 말하는 국익, 국격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하더라도 쉽게 자기의 생각을 꺾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보라. 국익이라는 말로 아프간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익이라는 말로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데, 그 근거는 국익이다. 상반된 주장이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지면, 그것은 완전무결한 정책이 된다. 그리고 이것의 오류를 드러내는 행동들은 모두 국익에 반대되는 행동이 된다. 끊임없이 과거를 고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익과 국격들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1984에서냐 빅브라더와 당이 존재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누가 그 세력인가? 너무나 큰 권력을 쥐어주지만 이 또한 모호하기에 더 위험하다. 프롤은 절대로 혁명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마음에 걸리는 이유이다.


  1984는 소설이다. 그러나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씁쓸하고 소름이 끼친다. 차라리 이퀼리브리엄처럼 액션이나 혁명의 통쾌함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오웰은 그렇지 않다. 마음마저도 꺾이고, 결국에는 죽는 순간에도 빅브라더의 은총과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는 윈스턴의 모습은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동물농장, 1984에 이어 이젠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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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2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퀼리브리엄!!saint236님.감사합니다!

saint236 2021-08-26 19:39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다시 봤는데 역시 재미있습니다 이퀼리브리엄
 
이솝 우화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4
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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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솝 우화"


  어린 시절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이 이솝 우화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간혹 깜짝 놀랄만한 내용을 발견하고는 "헉"이라는 감탄사를 내뱉곤 했다. "서울 쥐 시골 쥐, 해와 바람, 사자와 생쥐, 학과 여우, 코끼와 거북이" 등 어린 시절 우리가 교화서나 동화책을 통하여 들었던 이야기들의 출처가 이솝우화이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이라는 반증이리라. 그리고 내용도 어렵지 않고, 주인공이 동물이기 때문에 더욱 더 부담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금도끼 은도끼"도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나라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고대 그리스도에도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출처를 찾다보니 금도끼 은도끼가 전래동화가 아니라 이솝 우화의 번역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6년, 1907년에 번역되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가 되었는데 번역이 너무 잘 되어서 한국 전래동화로 알고 있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헤르메스가 노인으로 그리고 산신령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현지화라는 것이구나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읽던 이솝 우화를 다커서 읽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생각하겠지만 어른이 되어서 읽는 이솝 우화는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우화라는 말의 의미처럼 이솝 우화는 단편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아주 짧은 글들이 모여 있는 책이다. 그런데 짧은 길이에 담겨 있는 생각은 결코 짧지 않다. 우리가 흔히 촌철살인이라고 말하는데, 이솝 우화는 촌철살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86번 "볼일부터 먼저"라는 글에서는 나랏 일을 소홀히하고 이솝 우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 마저도 풍자의 소재로 만들고 있는 이솝의 대범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자기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풍자이리라.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은 182번 대머리의 사연이다. 


  백발이 되어가는 사람에게 두 사람의 첩이 있었습니다. 젊은 첩과 늙은 첩이었지요. 늙은 첩은 나이 아래 사내를 둔 것을 부끄러이 여기어 그가 올 때마다 검은 머리를 뽑았습니다. 노인을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 싫은 젊은 여인은 흰 머리를 뽑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그를 온통 대머리로 만들고 말았지요.(이솝 우화 207p)


  읽으면서 얼마나 낄낄대게 만든 글인지 모르겠다. 이솝 우화의 내용들이 이렇게 유쾌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각 글마다 달려 있는 교훈이 쌩뚱맞은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장 위릐 이야기만 해도 "잘 맞지 않는 동반자들은 복을 얻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마나 이것은 봐줄만하다. 이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도 종종 보인다. 굳이 찾은 옥의 티는 이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깊이는 166번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소년이 고기를 사러 함께 상점에 갔습니다. 푸줏간 주인이 등을 돌렸을 때 한 소년이 내장을 슬쩍해서 친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몸을 돌린 푸줏간 주인은 내장이 없어진 것을 보고 두 소년이 훔쳤다고 나무랐습니다. 슬쩍한 소년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맹세하였고 그것을 가진 소년은 슬쩍하지 않았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들의 속임수를 꿰뚫어 본 푸줏간 주인은 말했습니다.

  "거짓 맹세로 나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 그러나 하느님은 못 속여."(이솝 우화 190p)


  두 소년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진실을 말했다. 그렇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이 합쳐지면 불의가 된다. 참 아이러니한 장면이기도 하고, 자신의 불의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두 소년의 모습은 참으로 교활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몇 가지 재판이 머리를 스쳐간다. 아마 들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술은 먹었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최근에는 이런 것도 있다. "미등기 이사이고 부회장은 명예직이니 그가 한 일은 취업이 아니다. 기업의 큰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한 것이다." 법, 재판은 양심을 근거로 사실을 따지는 것인데, 사실을 따지면서 양심은 뒤로 미루어 둔다. 그러니 하나하나를 놓고보면 맞는 것 같은데, 그것들의 총합은 거짓이 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이솝 우화의 "거짓말쟁이가 된 진실"이라는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순간을 모면하려고 진실을 이리 저리 찢어붙인 결과가 거짓된 판결이라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모순과 궤변을 어떤 평론도, 웅변도 이 짧은 글만큼 잘 보여주지 못한다.


  이솝 우화를 읽다 보면 이러한 보석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아이들에게 권선징악이라는 가치관을 가르치지 위하여 이솝 우화를 읽히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풍자와 해학의 도구로 이솝 우화를 어른들이 읽는 것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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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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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봐! 날 봐! 내 안의 괴물이 이렇게 커졌어!"


  아는 사람은 아는 유명한 대사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름없는 괴물"이라는 이름의 동화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몬스터의 전체적인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몬스터를 말하는 이유는 이 책이 묘하게 몬스터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고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곱씹으면서 "몬스터"라는 만화가 생각났다. 괴물과 싸우는 의사, 돈 대신 의사라는 본분에 충실한 선택을 한 주인공은 그로 인하여 병원에서 쫓겨난다.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이 살린 아이가 절대로 살려서는 안되는 괴물임을 깨닫게 되고,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을 그리고 있다. 만화 책을 읽으가면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악이란 것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던 책이었는데, 암흑의 핵심이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자기 노력에 대해 공평한 대우를 받고 싶어했던 커츠. 그는 콩고로 떠난다. 그곳에서 상아를 수집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그는 복귀하던 길에서 돌이켜 다시 밀림으로 들어간다. 그를 찾아 복귀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말로를 통하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원래는 젠틀하고 상식적인 커츠가 어떻게 콩고의 삶을 통하여 식인까지 하게 되는 불건전한 사람이 되었을까?(지배인은 소설 내내 커츠의 방식에 대해서 불건전한 방식이라고 비난을 하는데,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 말을 사용한다.) 목표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기 때문이다. 성공을 통하여 공평한 대우를 받겠다는 그의 생각, 성공을 통하여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던 약혼녀의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서겠다는, 또는 복수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성공"이라는 괴물에 잡아 먹히고 말았다. 성공이라는 배고픈 괴물은 그의 생각과 가치관을 잡아 먹고 심지어는 커츠마저 잡아 먹었다. 성공이라는 괴물을 직시하지 못하고, 거기에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묘한 복장과 기괴한 행동을 일삼는 원주민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어진 커츠의 모습은 옷과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동일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성공을 위하여 달려오던 커츠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무서워! 무서워!"


  성공을 바라보고 달려온 인생치고는 싱거운 그의 마지막 두 마디이지만, 그 두 마디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아니겠는가? 


  공정이 요즘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이슈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 남자만의 병역 의무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 여성의 경력 단절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하다 등등. 이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것 투성이다. 그만큼 공정에 대한 목마름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공정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이들의 모습이 공정하지 못하다. 불공정과 싸우다보니 어느새 자기도 불공정에 물들어 버린 것이다. 더 문제는 그것이 공정의 잣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 사회는 그렇게 타파하려던 능력 지상 주의로 돌아가고 있다. 성적만으로 줄을 세울 수 없다,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수십년전에 있었던 투쟁의 가치관들이, 그리고 어느 정도 이루었던 성과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마치 콩고의 밀림에 던져진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공정이고, 그것이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일까? 


  거츠의 "무서워! 무서워!"라는 마지막 유언이 우리 사회의 결말이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책을 덮고 정리하면서 니체의 말의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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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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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풍자가 사라졌다. "민상토론"을 정말 재미있게 봤던 사람으로서 풍자 개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참 아쉽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팍팍한 진영 논리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 같아서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던 내게 이 책은 오랫만에 재미와 즐거움이라는 것을 줬다. 이 시대를 평가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웃음으로 버무려 놓은 풍자는 간만에 접하는 꽤나 고급의 풍자 개그물이다.


  어린 시절 똘이장군이라는 만화를 많이 봤다. 똘이라는 소년이 북한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 골자인데,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한낱 소년이 어찌 장군이 될 수 있으며, 북한과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재미있었다. 열심히 똘이 장군을 응원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 북한의 우두머리는 항상 돼지였다. 부하가 늑대나 개이고 우무머리가 돼지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법한 일이라서 어린 나이에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그러한 것들이 동물농장에서 연유한 것임을 알면서,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책도 학교에 보급하던 문고판 책이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그렇게 자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줄거리들은 모두 담고 있다는 점이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동물농장의 주된 내용은 작품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기본적으로는 소련의 혁명에 관한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번역자가 너무 친절하게도 각 등장인물이 상징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1대 1로 매칭해 놓았다. 소련의 혁명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흐름을 따라서 이 책을 읽어간다면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자가 말한대로, 이 책을 그저 그 시대에만 국한 시켜 읽을 필요는 없다. 지엽적인 문제들은 다르겠지만 주된 흐름은 여전히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뉴스에 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국과 정경심 관련한 사안들, 여야 대선 주자들의 행보들, 이재용 가석방과 관련된 사안들.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상당히 희석되어 버렸지만, 모두가 메가톤 급의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청와대가 잘못했다, 어떤 이들은 범무부가 잘못했다 설왕설래가 많다. 민주당의 후보들은 자신이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적통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의힘당의 후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의 아이콘이라고 말하면서 이승만, 박정희의 라인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민들은 생각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왜 그럴까?


  권력 자체를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꿀 뿐 본질적인 사회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오웰의 생각이 그 답이다. 아무리 국민을 위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라는 말을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권력이다. 권력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최종 목표로 본다. 그러니 권력을 얻으면 다 똑같아지는 것이다. 친박연대와 대깨문처럼 말이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닮아 있다. 공수교대만 할 뿐이지 권력지향적인 생각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정신 운운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혁명을 한다면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없다. 그러니 항상 우리 사회는 주인만 바꾸는 혁명으로 끝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혁명이 미래를 향한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적폐청산에 머물러 있게 된다. 적폐청산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폐청산만 외치다가 세월이 다 흘러가는 것은 분명한 문제이리라. 


  정치인들이 무더운 여름 너무 열만 올리지 말고 동물농장 한권씩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했으면 좋겠다. 주인만 바꾸는 것은 서로에게 고달픈 일일테니 말이다. 표를 구하는 정치인들이나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나 모두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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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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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봤던 영화 중에 "타짜2-신의 손"이 있다. 타짜 1편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기대감을 가지고 봤지만, 본편만한 속편은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하는 말이 정말 기발했다. "다 된 밥에 TOP 뿌린다" 이 말만큼 타짜 2를 잘 표현할 말은 없다고 아직도 단언한다. 왜 이 말을 꺼내느냐면, 햄릿에 대한 평가가 꼭 이렇기 때문이다.


  알라디너 가운데 다른 누군가가 같은 책을 보고 좋은 평을 써주셨지만, 솔직하게 나는 그렇게 평을 할 수가 없다. 햄릿의 내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곡으로 된 것을 안 읽어 본 것도 아니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속해 있는 햄릿은 재미가 없어도 너무 재미가 없다. 번역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번역을 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한 부분만 봐도 이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책에는 이렇게 저자의 확고한 신념은 있지만, 독자를 향한 친절함이나,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읽히겠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대학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나는 번역가고 너는 독자야라는 말이 곳곳에서 울린달까?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상상력을 가지고 읽지 않는다면 깊이 빠지기 힘든 장르인데, 이렇게 불친절한 번역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판본 자체도 최대한 권위 있는 판본에 근거하여 번역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곳곳에서 뭉텅뭉텅 잘려나간 이상야릇하게 흐름이 끊기는 대본이라면 판본의 권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햄릿을 보는 것은 성경을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그 의미를 곱씹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가능성이 많은 성경과 햄릿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햄릿이 영국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필리어가 죽는 장면에 대해서도, 그리고 희곡의 여러 중요한 장면에 대해서도 이 책만으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연극을 보면 여러 장면들을 통하여 알아챌 수 있겠지만, 이 책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한계와 단점은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햄릿(이경식 역)"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분들은 이 책의 단점마저도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민음사의 햄릿을 읽어본 나로서는 문학동네의 햄릿은 무릎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저자의 친절함에 감복하면서 읽게 될 뿐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번역이 충분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다 된 햄릿에 번역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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