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역사: 이브, 그 이후의 기록 - 하이힐, 금발, 그리고 립스틱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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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혹이라는 말을 사전은 "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성(異性)을 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정의에 충실한 책이다. 유혹은 여자의 본성이라는 입장에 충실하게 여성의 모든 행동들을 남성을 꾀기위한 방편으로 이해한다. 여성의 옷차림도, 화장도, 헤어 스타일도, 심지어는 걸음걸이나 행동 하나하나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고도로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이렇게 하나하나 다 계산하면서 산다면 머리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유려는 해본다. 행여라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책을 보다가 복장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이 책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재미로 읽어야지 심각하게 "아하 그렇구나!" 감탄하면서 읽는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이다.

 

  표지에 그려진 인물은 루이 15세의 애인인 퐁파두르 부인이다. 저자가 자기가 말한 모든 유혹의 결정체이자 이상형으로 보는 대상이 바로 이 여인인데 표지에서 보듯이 인형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인형같은 외모라는 말을 예쁘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형같다는 말은 말 그대로 인형같이 앉혀놓고, 인형처럼 내 맘대로 하기 좋다는 의미이다. 지은이가 생각하는 여인은 남성의 맘대로 하기 좋은, 남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여인이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여인이 아니다. 즉 지은이는 여자는 인정하지만 여성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랑수와 부셰의 캔버스 유화

 

  어떤가? 하나의 인형같지 않은가? 책꽂이나 선반에 그대로 앉혀놓고 바라보기에 좋은 서양 인형같지 않은가? 그 어디에도 성숙한 인격체로서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책을 지극히 마초적인 책으로 규정한다. 분명히 밝혀 두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성의 매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책을 읽고 나서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참 괜찮은 녀석인데, 성격도 좋고, 자기 일도 열심히 하고, 신앙도 좋은 녀석인데 서른이 넘도록 혼자다. 그 녀석을 아끼는 마음에 몇몇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으나 대개가 한번 만나고 나면 연락이 없다.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가? 이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괜찮은데 남성을 유혹하는 모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화장도 안하고, 치마도 입지 않고 항상 맨 얼굴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보다 못한 내가 소위 말하는 갈굼을 시작했다. 평소에 일 때문에 청바지를 입는 것은 좋으나 교회 올 때는 일하러 오는 것이 아니니 여성스럽게 입고 와라, 자세는 구부정하게 하지 말고 꼿꼿하게 허리 세우고 어깨를 펴고 다녀라, 화장 좀 하고 다녀라 등등... 내가 여자친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아내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소리를 해댄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혹 이 책을 선물해 주면 조금은 더 나아지려나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본다. 너무 모든 것을 유혹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유혹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문제다. 적절하게 유혹의 기술을 행동으로 옮기는 지혜(?)가 그 녀석에 필요하지 않을까?

 

  이야기가 딴 길로 샜다. 남성성에 대해서, 여성성에 대해서 한마디로 해석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지난한 일을 유혹이라는 말 한마디로 해냈다. 거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무모함과 용기에는 박수를 보낸다. 심심할 때 읽으면 꽤 재미있는 책이다. 단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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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7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7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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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번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험을 볼 때 열심히 문제를 풀고 답안지에 답을 옮겨 적으면서 한칸씩 밀려 적은 경험말이다. 이런 경우는 최대한 정답을 많이 맞출수록 오답에 점점 가까워진다. 그때 느꼈을 답답함이란 세상이 뒤집어지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 책이 그렇다.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지 몇년이 흘러 벌써 시즌 7번이다. 몇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식 e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여전하다. 이번 시즌의 제목은 "直JUSTICE 斜ISSUE 曲SOLIDARITY"이다. 정의는 올곧아야 하며, 이슈는 삐딱하게, 즉 그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연대는 최대한 유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이게 정답이다. 그런데 한장한장 넘겨가면서 우리 시대를 바라보니 현실은 이렇지 않다.

 

  현실은 "直ISSUE 斜SOLIDARITY 曲JUSTICE"이다.

 

  이슈는 여전히 일방통행적이며 소통을 거부한다. 그저 매체에서 읊어 주는대로 받아들인다. 보수는 조중동에서 불러주는대로, 진보는 경향, 한겨레에서 불러주는대로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길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과연 100% 올바른 매체가 어디있는가? 100% 가치 중립적인 기사가 어디있는가? 명박산성이 광화문에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인식 속에도 자리 잡고 있다.

 

  연대는 어떠한가? 최대한 유하게, 부드럽게, 공통 분모를 찾아서 많은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좌와 우의 공통분모를, 남한과 북한의 공통 분모를, 대한민국과 세계의 공통 분모를, 나아가 인류와 자연의 공통 분모를 발견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이다.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차이점을 찾아낸다. MB정권 심판이라는 시대적인 대의를 들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야권연대가 흔들거리는 이유가 여기있다. 생각이 다르니 잡음이 없을 수가 없다.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따지기 보다는 보다 큰 대의를 위해서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물론 대의를 위해서라고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요즘 잘 알 것 같다. 연대의 대상을 삐딱하게 보니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 나와 너를 가른다. 좌우 우를 가르고, 남과 북을 가르고, 자와 타를 가른다. 그리고 우리 편이 아니면 망설임없이 사선 밑으로 차버린다. 연대가 삐딱하니(斜)하니 목적이 한없이 사사롭고(私) 연대의 자리가 죽을 자리(死)가 된다.

 

  정의는 어떠한가? 正義! 바르고 옳음!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 과연 이 시대의 정의가 옳은가? 마땅히 그러해야 할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묘하게도 JUSTICE에는 재판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 시대의 재판이 옳은가? 법이 정의롭게, 바르게, 마땅히 그러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외침이 사라졌는가? 아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더하여 "유맥무죄 무맥유죄"의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양심의 소리가 과연 힘을 얻고는 있는가? 비근한 예로 민간인 사찰을 들어보자. 과연 법대로, 상식대로, 마땅히 그러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장담컨대 몇달 더 지나서 인맥이 사라져버리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서 바른 판결을 내리려 시도(!)할 것이다.

 

  정의는 한없이 반듯해야 하며, 이슈는 삐딱하니 이면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연대는 최대한 부드럽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이게 이 시대의 상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한칸씩 밀려 쓰여 있다. 정의는 한없이 왜곡되어 있고, 이슈는 일방적이며, 연대는 삐딱하게 남을 죽일 생각만한다. 그러니 "直ISSUE 斜SOLIDARITY 曲JUSTICE"일 수밖에! 그러니 깊은 여운과 동시에 진한 아픔을 느낄 수밖에!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시험을 보고 난 후 오답을 정리하는 오답노트도 있다던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오답노트는 무엇인가? 프롤로그 선대인의 "무엇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오답 노트가 무엇인지 묻는다. 지식채널 팀은 이러한 질문에 1.3cm의 권력이라 답한다.

 

  당신이 수많은 촛불에 둘러싸여 있든

  단 하나의 촛불만이 비추든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당신이 두 팔로 세상을 걸어가든

  당신이 두 발로 세상을 걸어가든

  당신이 있는 곳이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단 한 명만이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든

  모든 이가 당신의 소리에 공명하든

  당신이 고개를 들고 크게 외치든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침묵하든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이 유일한 유식인 당신에게

  이른 새벽 또 다른 일터를 찾아나서야 하는 당신에게

  88만 원을 벌어서 55만 원을 저축해야 하는 당신에게

  손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당신에게 주어진

  가로 10cm 세로 22.1cm 똑같이 갖는 한 칸

  1.3cm의 권력

 

  당신의 소망

  당신의 믿음

  당신의 책임

  당신의 권리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 1조 2항(p12~17)

 

  마지막 페이지의 제주도 구럼비 사진은 우리에게 평화를 위한 연대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제주도민에게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고통받는 타인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인간으로서 자연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끊임없이 시청자들과 독자들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지식채널팀의 짝사랑이 너무 애틋하여 내 마음도 아리다. 아니 아니다 못해 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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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3-24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예약주문으로 사놓고는 첫날 훑어만 보고 아직 읽지 못했어요.
그런 책이 한둘이 아니지만...ㅜㅜ

saint236 2012-03-24 12:53   좋아요 0 | URL
저도 항상 예약 주문을 합니다.이벤트로 끼워주는 DVD가 또 저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살거 DVD 받는다는 이런 생각에...
 
문화는 정치다 - 왜 프랑스는 문화정치를 발명했는가?
장 미셸 지앙 지음, 목수정 옮김 / 동녘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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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쉬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CGV 어플로 영화를 검색한다. 시중에 개봉중인 영화는 거의 대부분 한국 영화이다. 언뜻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시중에 개봉중인 영화가 한국 영화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난다 긴다하는 영화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맥을 못추기 시작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과거에는 기껏 2~3백만이 봤다면 대박이라고 말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천만에 육박하는 영화가 한 둘이 아니다. 과거 홍콩 영화에 열광하고, 4대 천왕을 이야기하던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젠 한류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한국의 4대 천왕을 이야기한다. 한국 드라마가 외국에서 꽤 잘팔린다는 뉴스를 들었다. K-POP이라는 말로 한국 음악이 외국에서 꽤 잘나간다. 이 정도면 한국도 문화 강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신문을 장식한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옮긴이는 한국의 문화 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날카롭게 비평한다.

 

  촉망받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은 생활고로 세상과 이별하고, 미친 가창력, 전설로 불리는 가수 임재범은 100만원 안팎의 저작권료로 근근이 살아간다. 연극배우들은 보험 설계사, 카페 서빙을 겸해야만 생계를 이을 수 있고, 중견 조각가는 일용직 노동자보다 못한 직업으로 취급받는다. 문화 영역에서, 창작자로, 실연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굴욕은 한국 사회가 문화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거울처럼 정확하게 투영한다.(p12)

 

  이러한 사회 풍조 속에서 한국에서는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가치를 빼앗기고, 소유한 자본의 크기대로 평가 받는, 신자유주의에 휩쓸려 버렸다고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맞다. 우리 문화가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말 속에는 우리 문화 콘텐츠가 외국에서 팔릴만한 경쟁력을 가졌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쉽게 말해 한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돈을 벌어 들 일 수 있을 정도로 상품성을 갖추었다는 말이 문화 경쟁력이라는 말로 둔갑해 버렸다는 의미다. 과연 이런 현상이, 상품성을 갖추었다는 말이 우리 문화의 기반이 든든해지고, 성장했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올시다이다. 자본 회수와 이윤 창출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로 문화 성장을 판단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오히려 자본과 이윤 창출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인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왜 그런가? 문화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문화 정치는 프랑스의 발명품이다."라는 다소 오만한 선언이 타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문화적 기반은 튼튼하다. 프랑스에서도 분명 팔리는 문화 콘텐츠가 있을 것이지만 팔리지 않는 문화 콘텐츠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처럼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안타깝게 세상과 이별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팔리지 않는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이러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수 있는 이유는 프랑스의 문화 정치 때문이다. 팔리는 상품에 올인하는 한국의 문화 정책과는 달리 프랑스는 콘텐츠가 아니라 콘텐츠를 창출하는 예술가들에게 투자한다. 예술가들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도록 국가는 정책적으로 이들을 지원한다. 이것이 프랑스가 오랜 세월 동안 문화 강국으로 세계 무대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문화 강국이라는 명함은 프랑스에게 여러가지 장기적,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 주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아트싸커라는 이름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도 결국은 문화 정치의 힘이다. 과거 식민지를 꾸준하게 지원하면서 문화적인, 언어적인 연대를 유지하면서 일류 선수들을 프랑스로 귀화시킨 것이 아트싸커의 실체이다. 지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이 프랑스의 문화 정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정치는 어떤가? 멀리 갈 것도 없다. 유인촌 장관을 살펴보자. 내가 유인촌 장관을 주시하여 보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가 역대 문화부 장관 중에서 최장수 장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근 4년이라는 시간동안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다면 프랑스의 자크 랑 문화부 장관에 비견할만 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인촌 장관이 문화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어떤 문화 정치를 이룩했는지 살펴 보는 것은 한국의 문화 정치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과거 전원 일기를 통해서 양촌리 청년 회장으로, 양촌리 이장으로 일반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갔던 유인촌 씨가 문화부 장관이 되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문화계 종사자들이 반대를 했다. 그가 장관이 되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반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놀랍게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최장수 문화부 장관이면서도 실제로 이룩해 놓은 문화 정치적인 업적이 없다.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그의 행적의 대부분은 문화 정치 중에서 문화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방점이 찍혔다. 문화부 국감에서의 막말 퍼레이드는 우리에게 양촌리 이장이 대한민국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한 일은 MB 정권의 나팔수 노릇 뿐이다. 정권과 시각을 달리하는 연예인들을 고소하고 퇴출 시키는 것, 전 정부가 선임한 인사를 공격하면서 정권이 바뀌었으면 알아서 기어 나가라는 말로 협박한 것이 그의 업적의 전부이다. 김제동이 퇴출 됬고, 윤밴이 하차했다. 김미화는 골방으로 숨어 들었고, 정권을 편들지 않는 이들은 폴리테이너로 몰아 붙였다. 그덕에 많은 방송인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강정 마음에서 연행된 영화 평론가는 면회도 금지된 채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단식을 이러가고 있으며, 수면 밑에서 구타를 당했다. 영화는 고만고만하고 비슷한 것들만 넘쳐난다. 어린 가수들을 조금이라도 벗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학교 폭력은 웹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얼마나 어이 없던지 한 누리꾼은 그럼 아리랑 치기의 배후는 민요냐는 말로 대꾸한다. 문화는 철저하게 정치의 종속 변수가 되어 버렸다. 저항문학, 예술가의 자유로운 혼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백남준과 같은 아티스트가 나타나야 한다면서 수선을 떤다. 닌텐도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왜 이런거 못만드냐면서 아쉬워한다. 과거로 회귀한 것은 정치와 사회 뿐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김명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런 평을 남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일부 불온한' 문화 예술인은 군사정부의 독재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에 거세게 저항했다. 그들은 민주와 통일, 인권, 평등의 기치를 드높이 내걸고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문화 예술 운동을 펼쳤다. 199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탄생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관리와 통제 정책은 지원과 육성 정책으로 변했다. 검열제도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다. 문화 예술인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고 소신껏 발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다시 참담해졌다. 문화 예술계의 좌우 편 가르기가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기관장 인사 파동, 방송 장악 시도, 표현의 자유 위축 등도 급속도로 심화되더니 급기야 비판적 문화 예술인들의 '목줄 조이기'라는 구시대적 작태까지 등장했다. 이제 연예인을 포함한 문화 예술인은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적당히 이용당하며 살아온 옛 시절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꿈꾸는 광대 p65~66)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문화 정책이겠는가? 무한도전 비빔밥 광고처럼 돈을 쳐발라서 뉴욕에서 CF 내보내면 되는가? 한국 방문의 해라는 정치적인 구호를 외쳐서 과연 문화 강국이 되겠는가? 대규모 토건 사업을 벌려서 골프장 만들고 선착장 만들면(그 와중에 올레길이 사라지고, 자연 경관이 훼손되어도) 장땡인가? 양촌리 이장이라면 그래도 된다. 범위도 제한되어 있고, 실패해도 그렇게 리스크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없이 많은 양촌리의 문화 정책을 세워야 하는 문화부 장관은 달라야 한다. 고작 양촌리 이장처럼 행세할 것이라면 아예 시작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명곤의 문화관은 충분히 곱씹어 볼만한 내용이다. 지금부터라도 문화 정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김명곤의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정부가 문화 예술을 지원할 때 너무  입김이 강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며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 예술 정책의 큰 원칙을 지켜주신 DJ 덕분에 국립 극장장의 업무를 소신있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분은 예술가는 정부에 의해 굴레 씌워지고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신 유일한 '문화 대통령'이다.(꿈꾸는 광대 p72)

 

ps. 내용이 자세하고 자료가 풍부하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문화 정책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디테일한 자료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장점이 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단점이 된다. 나는 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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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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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덕은 서서가 여망과 장량에 비견될 선비를 추천하니 목을 빼고 다시 서서에게 묻기를

  “그분의 재주는 선생과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번거롭지만 나를 위하여 말해 주시오.”


  “서서는 그분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지 꼭 비교해야 한다면 그분이 기린이라면 서서는 비루먹은 조랑말에 불과합니다. 그분이 봉황이라면 서서는 한 마리 까마귀에 불과한 몸입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어 자신을 말하기를 관중이나 악의에 비교하지만 관중이나 악의도 그분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분은 經天緯地(경천위지) 할 재주를 가졌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금의 천하에서 그분과 비교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봉추가 있다 하나 저의 견해로는 복룡이 더 윗길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대목을 잘 알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책사를 얻었던 유비가 조조의 계략에 의해 그를 떠나 보내면서 그렇게 아쉬워했고, 유비의 마음을 알아차린 서서가 제갈공명을 추천한다. 삼국연의의 메시급 사기 캐릭 제갈공명의 등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할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제갈공명이 스스로를 공자같은 위인이나 손자같은 병법가가 아니라 관중과 악의라는 춘추 전국시대의 관리와 무장에 견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등장하겠지만 악의는 뛰어난 무공을 자랑하지만 끝모를 자신감과 그를 질시하는 이들의 참소로 죽음을 당한 연나라의 장수로, 관우와 비슷한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제갈공명은 정치에서는 관중이요, 무공에서는 악의를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갈공명이 관중과 악의를 닮고 싶었던 것은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살던 시대가 춘추 전국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던 후한의 혼란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관중과 악의와 같은 현실정치와 부국강병을 통해 천하를 안정시키고 싶었던 것이 어찌 보면 제갈공명의 속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신주는 관중과 공자라는 춘추시대의 두 인물을 통하여 현실정치와 이념정치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난 후 중국은 전란과 혼란의 시기로 접어든다. 존왕양이의 기치를 걸고 패자를 추구하는 춘추 오패와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하려는 전국칠웅의 시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따로 구분하여 부르지 않고 일반적으로 춘추전국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혼란의 시대 가장 처음 등장한 인물은 관중이라는 관료이다. 일반적으로 춘추전국하면 유가의 공자와 맹자와 순자, 법가의 상앙과 한비자, 병가의 손자, 묵가의 묵자, 도가의 노자와 장자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놀랍게도 춘추전국 시대에 관한 책은 항상 관중으로부터 시작한다. 관포지교외에는 그렇게 유명하지 못한 관중이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서술을 그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춘추 오패의 첫 인물인 제환공을 모셨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그가 제환공을 춘추오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환공을 춘추 오패의 첫 인물로 만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강신주가 말한대로 그가 철저하게 현실정치가이기 때문이다. 관중은 인과 민을 구분하고 국읍과 비읍을 구분하여 끊임없이 구별하고 차별화하는 시대에 민과 비읍의 잠재력에 일찍 눈을 떴고 그것을 국가의 힘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비록 목민이라는 그의 정치 이념이 경제적 수탈을 강화했지만 제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관중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정치관료였던 셈이다. 관중의 현실감각에 대해 강신주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만약 민중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면 군주는 그들이 예의나 수치를 모른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는 셈이다. 여기서 관중의 현실적 인간 이해가 돋보인다. 문화적 생활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관중의 통찰은, 기본적으로 귀족층이나 민중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귀족층은 선천적으로 귀족적인 예절이나 명예심을 갖고 태어난 선택받은 계층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얻은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이 없다면 그들이 과연 예절이나 수치심을 알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p108-109)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면 군주는 그들이 예의나 수치를 모른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충분히 숙고해야하는 말이다. 촛불집회만 일어나면 누가 뒤에서 조장하는가, 촛불을 살 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인다는 말로 이념논쟁으로 몰고가지만 모든 일의 근본원인은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안전한 먹거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숨을 쉴만한 경제적인 요건, 대기업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정규직과 사회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희망버스가 생겨나는 것이고, 촛불을 드는 것이고, 하다하다 안되니 고층 크레인에 올라가고 한강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 정권들어서 경제 문제보다는 이념 논쟁이 더 격화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민영화, 재벌, 경제문제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제문제가 아니라 계층문제와 남북문제라는 이념 전쟁이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좌클릭했다는 말이 이러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또한 차기 총선 대선 주자들이 하나같이 복지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도 이러한 현실에 눈을 떴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다만 걱정인 것은 그들의 정치적 식견이 관중과 같이 삶의 고난과 실패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동반되지 않아 관중의 목민이라는 개념의 찌꺼기만 가져오는 유사 현실정치인이 되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서민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서민의 삶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시장에서 악수 한번하고 떡볶기 한접시 사먹고, 소에게 사료 한번 주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서민을 위하네, 민생을 위하네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걱정이 깊어지는 것은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책의 후반부의 주인공인 공자는 이념주의 정치가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주례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해석하여 인과 예에 대해서 니야기하지만 그도 결국은 관료를 꿈꾸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정치가라고 하겠다. 다만 그는 현실정치보다는 가치관과 국가의 이념에 올인한 이념주의형 정치가일 뿐이다. 강신주는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 약간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이처럼 공자는 민중을 자신과 같은 존재, 다시 말해 인식과 판단의 동등한 주제초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중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가 주창했던 인이란 것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먼 이념이었다는 점과, 그것은 단지 지배 계층에게만 국한된 귀족적 고상함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P 213)

 

  공자의 사상을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들만의 리그,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겠다. 주례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확고히 붙잡고 그것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어쩌면 강신주의 말대로 정치적인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자의 이념이 춘추전국과 같은 혼란의 시대가 아니라 비교적 장수한 제국에서 지배이념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공자의 가르침이 정치적인 아마추어리즘의 발로라고 평가절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관중에 대한 반동내지는 관중이 간과한 이데올로기의 힘을 발견하고 거기에 치중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물론 강신주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공자를 성인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한 것은 공자의 사상은 철저하게 보수적이요, 그래서 지배계층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 이데올로기로 소비되어 왔다는 점이다.

 

  제자백가의 귀환 2권을 읽으면서 자꾸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이 책의 결론과도 같은 말이요, 이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에 부합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제나라가 패자로 인정받아 규구의 회맹을 개최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제나라가 다른 제후국을 압도하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로 주나라로 상징되는 예의 질서를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한 가지라도 없어진다면, 패자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특히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측면,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다. 만약 이 힘을 상실한다면, 제나라는 패자는커녕 다른 여러 체후국들의 연합군에 의해 국가 자체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할 것이다.(p 84)

 

  관중과 공자는 서로 다른 면을 바라보고 있는 동전의 양면이다. 둘을 떼어 놓으면 양쪽 모두 가치를 잃어버린다. 제대로 된 이념이 없는 현실정치는 물질 만능주의를 만들어내고, 현실적인 감각이 없는 이념은 배고픈 민중을 양산한다. 물론 양측 모두 독재자와 전체주의 탄생의 아주 좋은 토양이 된다. 전자가 남한이라면 후자는 북한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둘 다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한제국의 길을 되풀이하지 않겠는가?

 

  무분별한 복지정책, 무분별한 먹고사니즘, 무분별한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국민의 한 사람인 나를 이래저래 골치가 아프고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인 정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꼭 이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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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2-02-2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중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신기합니다. 포숙아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기감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활자로 접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활자로도 위기감이 보이거든요.

삼국지의 제갈공명에서 관중과 공자의 이야기라니...재밌고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도 보관함으로 가야겠네요~ 추천 날리고 갑니다.^^

saint236 2012-02-21 21:24   좋아요 0 | URL
그래서 강신주는 관중의 현실적인 감각은 여러번의 실패를 통해 얻게된 관중의 힘이라고 평합니다.

차트랑 2012-02-2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개월 후의 독서목록인데...
흠미롭습니다^^

saint236 2012-02-21 21:23   좋아요 0 | URL
저도 사놓고 한동안 묵혔는데 재미있더라고요. 더 흥미로운건 제가 했던 리뷰의 내용이 춘추전국이야기 4권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열국지 교양강의 - 이야기로 읽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 동양문화의 정수가 담긴 인간학의 보고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8
신동준 지음 / 돌베개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동아시아 3국은 참 묘한 관계에 있다. 중국, 한국(남북을 포함하여), 일본은 비슷한 듯 닮아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혹은 반대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적인 애증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3국이 아닌 외부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묘한 관계라 하겠다. 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 나라만이 아니라 삽시간에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준다. 그것도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전 분야에 걸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나라에 고구려 열풍이 불게 만들었다. 중국의 동북 공정 이후로 영화, 드라마, 만화, 남북 협력 연구 등등 그동안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생각했던 고구려에 대한 깊은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 영향 때문인지 발해에 대해서도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서도 재해석이 활발하게 대두되기 시작되었다. 아울러 우리와 비슷한 수순을 밟고 있는 티벳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분쟁,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분쟁, 일본과 러시아의 쿠릴열도 분쟁은 각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며, 이 분쟁들은 분쟁 당사자국들 뿐 아니라 나머지 나라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2011년 출판계의 새로운 동향은 누가 뭐래도 중국의 부상이라고 하겠다. 각 출판사마다 “중국을 만든 책”내지는 “중국을 말한다”와 같은 주제 하에 중국에 관한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중국에 관한 사상서적, 역사서적, 학술서적들이 쏟아졌다. 과거 일본에 관한 서적들이 쏟아지던 것과 비견할 만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중국의 G2부상이 그 이유이다. 잠자던 거인으로 불리던 중국이 잠에서 깨어나 놀랍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베이징 올림픽까지 성대하게 개최했다. 헐리웃의 섹시한 스타 리스트 중에 이연걸을 비롯하여 중국 출신의 배우들이 이름을 제법 올리기 시작했다. 세계 속에서 중국의 위상이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며, 외국 유명 언론들도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고, 미국 열풍 못지않게 중국 열풍이 일어났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에 관한 여러 가지 서적 중에서 연말에는 압도적으로 춘추 전국 시대에 관한 책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중국 고전은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열국지의 순으로, 시대는 위촉오 삼국시대, 명, 청의 순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춘추 전국 시대 이야기는 지전 같은 고사성어 내지는 짧은 역사적인 사실을 다룰 때에나 관심을 받았지 이렇게 통으로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지전도 중국의 전 시대를 다루고 있으니 춘추 전국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작년 중반기에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를 시작으로, 강신주의 제자백가의 귀환, 신동준의 열국지 교양 강의가 비슷한 시기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만 해도 꽤나 완성도가 높은 책들이요, 저자의 이름값이 만만치 않은 책들이며, 각 저자가 뚜렷한 시각을 가지고 책을 재미있게 끌어가고 있는 책들이 비슷한 시기에 3권이나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덕에 심심치 않은 연말을 보냈다.

 

  책을 읽으면서 “왜 춘추전국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위촉오의 삼국지도 아니고, 명청 시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송도 아닌 전쟁과 불안의 시대인 춘추 전국인가? 열국지 교양 강의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책을 시작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춘추 전국 시대는 주왕실의 몰락과 각지에 봉하여졌던 제후국들이 제(齊), 진(晉), 진(秦), 초(楚), 오월(吳越)로 통합되고 다시 진(秦)으로 통일되는 530년의 시기를 말한다. 흔히 춘추전국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제환공에서부터 시작하여 월왕 구천까지의 춘추 오패의 시대(BC 770~476)를 춘추시대라고 하며 전국 칠웅의 시대(BC 475~221)를 전국 시대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는 전국 시대에 비하여 존왕의 명분이 강했지만 이 또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패도가 뒷받치하지 않고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실제로 자신의 군사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 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되고자 했던 송 양공은 송양지인이라는 어리석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을 뿐이다. 오월을 거쳐 전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패도적인 성향이 더 강해진다. 제나라는 군주 강씨를 멸하고 신하인 전씨가 왕위를 차지했으며 중원의 진(晉)은 신하들에 의해서 한위조(韓魏趙)의 3개 국가로 분할되었고, 연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등장하여, 진제위한조연초의 전국 7웅이 형성된다. 전국 7웅은 춘추시대의 존왕이라는 명분과 서로 창칼을 맞대는 상대방에 대해서도 예의를 지키는 로망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상대를 멸망시키기 위한 생존 경쟁에 돌입한다. 그 과정 속에서 제자백가가 출연하고 각 나라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며, 자국의 국력을 키우기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며 출신보다는 실력을 우선시 하고, 실력만 있다면 자천도 교만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봉건 질서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춘추 전국의 특징은 묘하게도 군사력과 사상적 자유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군사력은 사상을 통제할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중국 역사상 춘추 전국 시대만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적도 없었다. 치도에 대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등장했고, 춘추전국 시대 이후 유가에서는 왕도를, 법가에서는 패도를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치도에 대한 학설들이 존재하지만 오랜 세월 살아남은 치도는 왕도와 패도라고 하겠다. 훗날 유가의 한 갈래인 성리학은 왕도를 최고의 치도로 여겨서 군사력 자체를 터부시하는 우를 범하였고, 그 결과 성리학을 신봉한 나라를 멸망 혹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우리나라도 그 중 하나로 역사학자 중에 성리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저자인 신동준은 반대를 넘어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저자는 난세에는 패도가 왕도에 우선하며, 치세에는 왕도가 패도에 우선하는 왕패병용을 최고의 치도로 주장한다. 저자가 춘추 전국에 주목하며 우리에게 열국지를 읽어보라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의 냉전 체제가 무너진지 30년이 까까워지고 있다. 공산주의와 이에 대항하는 자유주의라는 명분은 퇴색해 버릭 철저하게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나라는 어제의 친구였던 대만과 수교를 단절하면서 대신 어제의 적이었던, 그리고 여전히 북한의 친구이기도 한 중국과 손을 잡았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이라는 실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국제 사회는 주(周)라는 절대 질서가 사라져버리고 실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던 춘추 전국 시대의 양상으로 변해 버렸다. 이데올로기라는 절대 이념은 쇠퇴해 버리고 시장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실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고 예의를 지킨다고 할지라도 실력이 없다면 송양지인의 불명예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먼저 미국이 패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세상을 호령한다. 제가 회합을 벌여 제후를 호령하듯이 UN을 통하여 세계를 호령한다. 맘에 들지 않으면 군사력을 동원하여 제재를 가한다. 절치부심하던 중국이 미국의 뒤를 바짝 뒤쫓아 G2로 부상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일본과 같은 주변 여러 국가들이 있지만 앞으로의 양상은 패자의 자리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다투는 국면이 될 것이다. 문명국가, 명분, 의리에 앞서 실력이 우선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지금 우리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실력을 기르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송 양공의 행보처럼 시대착오적이다. 6.25 참전의 은혜, 혈맹과 같은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미국도 포기해버린 명분과 의리를 가지고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미국에게 주고 있다.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면 빨갱이요, 의리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몰아 붙인다. 마치 과거 재조지은의 의미와 명분을 가지고 청나라를 대적했던 시대착오적인 조선의 집권층처럼 말이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입아프게 떠들어댈 필요도 없다.

 

  춘추 전국 시대처럼 국제 사회는 냉정하다. 조금만 삐끗하면 굴러떨어져 두번 다시 재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벼랑 끝을 걷는 것처럼 매사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물론 이런 행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력 또한 있어야 한다. 글로벌 호구를 자처하는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우리가 춘추 전국 시대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오타가 많다. 일단 눈에 띄는 대로 찾아보자면 289페이지 12번째 줄 "주양왕이 여동생으로=>주 양왕의 여동생으로", 354페이지 7번째 줄 "위엄은 손숙오는=>위엄은 손숙오의", 395페이지 7번째줄 "부차를 달려와=>부차에게 달려와", 557페이지 6번째 줄 "진나라가 군사가=>진나라의 군사가", 560페이지 소제목 "장평대전과 두우참=>장평대전 혹은 장평대전과 백기"(두우참에 관한 내용이 없다. 뒤에 백기와 두우참이라는 소제목이 있다.)가 맞다.

 

  손자병법과 마찬가지로 처세술로 읽어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열국지를 구입해서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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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현대의 그것이 오버랩되는 현상에 대한 통찰,
이와 더불어 중국 관련 도서의 조명 역학 관계를 정확하게 지적해주신 위의 리뷰는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그나저나 saint님의 매우 훌륭한 리뷰 덕분에
저의 장바구니가 더 무거워졌습니다 ㅠ.ㅠ
(그런데...당최~ 좋은 리뷰를 써줘도 불만인거?)

saint236 2012-01-19 23:46   좋아요 0 | URL
이런 감사할데가...돌베개 교양강의 시리즈는 사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시리즈를 전부 샀는데 논어 교양 강의를 제외하고는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차트랑 2012-01-20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렇게 좋은 정보를 주시다니...
알라딘에서 페이퍼의 기능을 작동시킨 배경을 감지하는 순간입니다^
돌베개 교양강의 시리즈라구요
고맙습니다 saint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