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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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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이 흔히 하는 대답은 "건물을 짓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에도 철학이 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집을 짓는데 무슨 철학이 있단 말인가? 건물만 잘 지으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괴짜 취급받기가 쉽상이다. 기껏해야 건축에서 필요한 철학이라봐야 건물을 지을 위치를 선택하는 풍수지리 정도라고나 할까? 건물은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쓰임에 맞도록 지으면 된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예쁘게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건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이정도이다. 건물을 짓는 사람에 대해서도 당신의 건축철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기껏해야 건축학과 교수에게나 물을 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건축에도 분명하게 철학이 필요하다 선언한다. 건물을 짓는 행위 자체가, 건물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에도, 그리고 건물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도 모두다 철학적이라는 말이다. 건축가에게 철학이 부재하게 될 때 건물은 인간의 생활의 가치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지금까지 건축에 대해서 철학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건축물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한강 주변에 늘어선 아파트들을 바라보면서 외국사람이 평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국 사람이 외국인에게 한강 주변에 늘어선 아파트들을 보여 주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었을 때에 외국인은 왜 저렇게 멋대가리없이 건물을 이렇게 지어 놓았는가, 한국이 분단국가라고 하는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북한의 공격을 늦추기 위하여 차폐물로 사용하려고 저렇게 지었는가 물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비싸고 조망권도 좋고, 꿈의 집이라고 불리는 한강변의 아파트들도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멋대가리 없이 전시에 차폐물 정도로 지어진 그런 쓸모 없는 집일 뿐이라는 말이다. 

  얼마전 개봉되었던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자. 그 영화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짊문은 당신은 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는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건물에 담겨진 추억과 그 추억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건축가들은 어떻게 대답할 껏인가라는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진다.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라든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보존하는 것은 건축공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건축가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 대답할 문제이다. 

  건축을 위한 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는 있지만 이 책은 건축가를 위한 철학 개론이다. 처음 이 책을 펴면서 건축물은 어떠한 철학을 담고 만들어기는가라는 부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다못해 판옵티콘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제목을 가리고 본다면 대학생들이 철학개론 수업 시간에 교재로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로 철학에 집중한다. 간혹 건축의 미학에 대해서, 건축물의 비례에 대해서 다루고는 있지만 그것들은 가볍게 지나가는 정도이다. 건축에 대한 철학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은 것같은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서서히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철학들이 건축가에게 소화가 되었을 때 그가 어떤 건물을 짓게 될 것인가? 기대가 되지 않는가?

  요즘 시사인을 읽으면서 꽤 흥미를 가지고 읽는 기사가 있다. 행복한 집짓기라는 타이틀로 건국 곳곳에 있는 건축물들을 살펴 보는 것이다. 그 기사에 등장하는 건축물들의 고려 조건은 단가, 재테크가 아니다. 부동산이 가지는 가치도 아니다. 오직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편안한 잠을 자는가, 이웃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그 어디에도 우리가 가파트를 바라보면서 고려하는 항목들은 발견할 수 없다. 건물을 지으면서 경제적인 요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건물을 지을 때 고려해야할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건물을 통하여 자신드르이 세계관과 가치관을, 공동체의 이념을 구현하려고 해썼다. 궁궐, 신전, 박물관 뜽 그 어느 것을 둘러보아도 경제적인 부분을 신경쓴 흔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건물을 짓고 국고가 텅비어서 국가가 멸망하기도 했고,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건물 자체를 놓고 보자면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는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가치관이 경제와 효율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효율도 경제라는 틀 안에서의 효율이다. 이 만큼 투자하면 얼마만큼 수익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는 식의 효율 말이다. 그렇지만 건물은 결코 효율만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이야기 해서도 안된다. 효율을 따진 결과가 아파트고, 교도소 같은 건물이 아닌가? 이젠 진지하게 철학적인 접근, 인문학적인 접근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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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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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의사 박경철!

  그리고 그리스 문명!

 

  두 가지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박경철에 대한 이미지야 좋고 나쁠 것이 없다.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그의 책을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 혁명"이라는 책을 이북으로 사서 짬짬이 읽고 있을 따름이다. 나에게 박경철은 작가 박경철이 아니라 안철수의 동료 박경철일 뿐이다. 작가 박경철이라 함은 그저 자기 계발서를 썼다고 생각하는 정도?

 

  그렇지만 그리스에 대해서는 환장한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그리스 문명에 대한 책들은 꽤나 찾아서 읽는 편이다. 서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지론 때문이다. 물론 신화가 재미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와 문화에 대해 십덕후는 아니지만 최소한 오덕후, 혹은 삼덕후는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꼽는 그리스에 대한 한국의 대가는 이윤기와 천병희이다. 해석의 이윤기, 번역의 천병희! 편견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책을 읽어 본 후에 갖게된 편견이니 너무 타박하지 않기를 바란다. 언어학자의 시선에서 번역하기 때문에 깔끔한 맛은 있지만 철학서를 읽을 때에는 꽤나 고민하게 만드는 천병희,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그리스의 문명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이야기하면서 그 깊이를 자랑하는 이윤기! 이윤기가 죽었다는 사실에 꽤나 애석해 하면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야금야금 아껴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요즘은 천병희 역의 시학을 읽으면서 역시 번역은 천병희라는 생각에 숲에서 나오는 그의 번역서를 모조리 읽어보겠다는 야심만 품고 있다.

 

  이런 내게 있어서 박경철의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는다는 것은 꽤나 큰 모험이었다. 그것도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한 그런 모험 말이다. 그래서 굳이 읽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덜컥 알라딘 서평단의 도서로 받게 되었다. 그래도 박경철이라는 이름값에 그리스라는 문명이 더해지면 홈런은 아니더라도 평타는 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읽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은 꽤나 괜찮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품고 그리스 여행을 했다는 그의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정말로 감명깊게 보고 영화를 봤던지라 그에 대한 덕후력을 거리낌없이 표방하고 있는 박경철이 부러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내용도 꽤나 재미있었다. 그저 유명한 예술품들만 보고 와서 대충 쓰는 그런 책이 아니라 그리스의 곳곳을 누비면서,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현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글을 읽으면서 이거 꽤나 괜찮겠는 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를 그리스로 이끈 카잔차키스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 내지 못하게 했다. 가끔 글이란 것을 끄적거려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머리에 맴도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그 이야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많을 때 그 때가 글을 쓰기가 가장 어렵다. 그 순간에 가장 먼저 할 일은 과감하게 가지 치기를 하는 것이다. 박경철의 책은 이것이 부족하다. 그리스를 여행하는 곳곳에서 그가 카잔차키스를 만난 것은 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직접 그 현장에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다. 이야기에 몰입할 만하면 여지없이 카잔차키스가 튀어나온다. 뭔가 분위기가 무르익을만 하면 카잔차키스의 작품이 인용되고 있으니 어찌 글 속으로 몰입할 수가 있겠는가? 마치 여자 친구를 위해 여러가지 책을 읽으면서 이벤트를 준비했던 남자가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여자친구가 감동할 시점에 "감동스럽지, 어느 책에 보니까 이러면 감동받을 거라고 하더군."이라면서 초를 치는 격이랄까?

 

  그냥 카잔스키가 그의 안으로 갈무리 되었으면 좋았겠을 것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굳이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그의 사고의 단편들을 무리하게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책의 절반이 넘어가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인용하는 대목이 오면 과감하게 건너뛰는 것이다. 그러니 한결 책읽기가 수월하다. 그리고 꽤나 흥미진진해 진다. 카잔스키를 품고 그리스로 날아간 박경철은 결국 카잔차키스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독자인 나는 꽤나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물론 내가 글을 쓴다면 이만큼은 못쓰겠지만 말이다. 그저 그리스 오덕후 내지는 삼덕후로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 꽤 재미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값에 비해 아쉬움이 있다. 마치 이대호가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이 아니라 일루타를 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같은 것이다. 또 다시 고민이 된다. 후속편이 나오면 또 사야할까라는 고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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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3-2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는 예전에는 박경철씨의 독서론이 좀 맘에 안들었더랬지요. 실용서 위주로 읽으라는 말을 어디선가 했었어요. 자기도 문학 읽으면서 말이죠.ㅎㅎ 이 책은 좋은데, 앞으로 두고 봐야죠. 전문작가의 글에는 미치지 못하는게 좀 있죠. 근데, typo지요? 박경철이 김경철로 한번, 그리고 카잔차키스가 카잔스키로..-_-:ㅎㅎㅎ typo겠지요??ㅎㅎ 공식리뷰같아서 못보시고 지나가셨음 고치시라구 굳이 썼어요.ㅎㅎ

saint236 2013-03-28 07: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나 많이 적었군요. 김경철은 헷갈렸던 것 같고. 도대체 왜 카잔차키스를 카잔스키로 적었던 것일까요? 그게 참 미스테리합니다.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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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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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 들어서 최고의 히트어가 무엇일까? 어록이 너무 화려해서 어느 하나를 꼽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를 뽑자면 멘붕이 아니겠는가? 멘탈붕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것은 아마도 지난 총선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멘탈붕괴 줄여서 멘붕이라는 말은 젊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위키백과 사전에는 멘붕이라는 말이 이미 등재되어 있고, 거짓말 조금 보탠다면 국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을까 싶다. MB정부의 이니셜과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정치 행태를 잘 반영한 말이 아닐까 싶다. 멘붕이란 말이 조금 어려운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총선은 그렇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도 대선이 있으니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대선을 겪고 보니 회복이 쉽지 않다. 박근혜가 됐다는 사실만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1500만이나 넘는 사람이 박근혜를 찍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1500만이라는 숫자 앞에서 난 멘붕을 경험했다. 이 멘붕 상태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 가끔 한 숨이 나오고, 앞으로 5년은 어지 살아야 하나라는 걱정은 손톱 밑의 가시처럼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정치권에서 여러가지 분석이 나오지만 그 분석이라는 것이 반성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대안도 아닌 것이 어정쩡하다. 민주당의 문희상 체제를 보면서 언제적 문희상이냐는 한숨과 존재감마저 희미해져 버린 진보정당들을 보면서 멘붕상태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멘붕을 경험했다. 곳곳에서 멘붕을 회복하지 못한 농성자들이 뛰어내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뛰어내릴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암울하다. 우리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더 나아지게 될 것인가? 한국은 복지국가가 아니라고, 아직 한국은 멀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뭐라 위로를 해야할까? 힐링캠프? 힐링버스? 곳곳에서 힐링이라는 말은 넘치는데 실제로 와 닿는 것은 없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눈물닦고 스피노자! 스피노자와 눈물닦는다는 말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철학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는 있는 것일까? 300여년 전의 스피노자의 사상이, 그것도 철학이라는 복잡한 인문학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설령 위로를 준다고 해도 스피노자의 생각을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이 또한 허울좋은 아는 사람들만의 이슈파이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와 걱정을 가지고 책을 한장씩 넘기기 시작한다.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책을 넘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시간내에 서평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라지고 제목대로 멘붕된 내 마음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1500만이나 넘는 사람이 박근혜를 찍은 이유가 무엇일까? 내 멘붕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박근혜 당선의 최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50대는 박정희 시절을 살아본 사람들일텐데, 그것도 기성세대가 아닌 변혁을 꿈꾸는 젊은 세대로서 살았던 사람들일텐데 박근혜를 찍은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인의 정치적 수준이 그정도라서?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 처칠의 명언이라면서 떠 돌았던 말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상처난 자기 몸에 소금을 뿌리는 자학일 뿐이었다. 나름대로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정치적인 문제들,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이 바보라서, 정치적인 수준이 낮아서, 학력이 낮고, 편파적인 언론과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박근혜를 찍은 것은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속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은 유혹이 강하다. 어딘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유를 누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꽤 용기있는 일이다. 당장 스피노자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부유한 아버지로부터의 상속받을 유산을 포기했고,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직을 포기한 스피노자의 삶은 유리를 깎아서 살아야할 정도로 궁핍했다. 게다가 그는 유리를 깎는 그의 생업 때문에 마신 유리 가루로 인해 진폐증에 걸려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예속하지 않고 자유를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꽤나 고단한 일이요, 용기있는 일이다.

 

  경제가 불안해지고, 정치가 불안해지고, 공동체가 깨어지고 관계가 단절되면서 사람들은 어딘가에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개개인의 연대라는 어렵고도 고된 인생보다는 절대 권력에 예속되어 그 속에서 보호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 발동된 것이 아니겠는가?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에 자신을 예속시킴으로 이것이 구원받는 길이요,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사고체계가 이번 대선 가운데 가장 불안함을 느끼는 50대에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큰 오판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예속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은 권력과 불안, 파편화된 존재들을 낳는 것이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관계망을 형성시키지도 못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지도 못하며, 위로를 주지도 못한다. 물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내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지적을 받으면서 MB시대의 보통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파편하, 예속화, 권력의 사유화, 실망, 절망, 외로움, 분열, 자기 욕망의 잘못된 투영과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잘못된 욕망이 우리 안에서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다. 상대방의 역능을 고양시켜주는 사랑의 관계는 깨어진지 오래고, 만인의 만인의 대한 투쟁의 관계 속으로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이웃조차 밀어넣었다. 얼리버드 신드롬으로 시작한 지난 5년은 철저하게 관계를 깨버리고, 상대방을 파편화하였으며,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늘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 누군가 뛰어내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변용?(난 이것을 공감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되기가 아니라 이기가 삶의 기본 방식이 되어버렸고, 주인공처럼 아파서 눈물 흘리면서도 누군가에 하소연조차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이런 우리에게 스피노자가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인다. 눈물을 닦으라고.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조금만 바꾸자고. 불안하고 힘든 것은 알지만 이젠 공동체를 회복하자고, 슬픔의 관계가 아닌 기쁨의 관계로 전환하라고. 3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의 손을 잡은 스피노자와의 관계 맺기가 우리에게 작은 혁명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기쁨의 관계 맺기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도 다른 누군가에게 눈물을 닦아 준 스피노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 시대에 스피노자가 참 많아진다면 이 또한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스피노자를 통하여 멘붕을 조금씩 벗어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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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1-2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뉴스를 보니 저소득층에서 특히 많은 표를 받았다고도 하네요. 막말을 하면 역시 못배워서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의 글을 보니,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독재자를 원하는 그 열망 밑바닥에는 누군가가 다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을 수도 있죠. '은하영웅전설'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저 민주주의의 역사가 짦고 역시 근대시민사회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해방이후로 봐도 한 60여년, 군부독재이후부터 보면 이건 30년도 않되니까요. 하루하루 견디고 어떻게 젊은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합니다.

saint236 2013-01-24 12:46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나랏님으로 보는 의식이 팽배한 것 같네요.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반신반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웹서핑으로 박정희 탄신제를 찾아 보시면 재미있는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박정희를 향수라고 하는데 전 향수라기보다는 종교고, 스스로 예속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3-01-25 07:11   좋아요 0 | URL
사당을 짓고 박정희/육영수 사진을 크게 걸어놓은 그곳에서 업드려 절하고 향 피우고 소원빌고 있는 사진을 봤습니다. 구미던가요? 우상숭배도 그런 우상숭배가 없더군요.

saint236 2013-01-25 08:25   좋아요 0 | URL
그로테스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진이지요. 게다가 둘의 사진의 복장이 일본 천황가의 복장을 흉내낸 것이라는 것까지 깨닫게 되면 입이 다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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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무엇인가?

 

  언제부터인가 "~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책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정의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최근에 나온 죽음이란 무엇인가까지... 이런 책들은 대개 강의를 엮은 책들이다. 물론 그 강의도 세일즈가 되어야 하니 유명한 대학의 유명한 강의여야 한다. 내용이 무엇이라는 카피 대신에 하버드대, 예일대, 아이비 리그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런 뻑적지근한 수식어야 죽음이란 난해한 주제까지 끼어들기 시작하면 그 책은 존재자체로 대단한 미끼가 되어 버린다. 인문학의 냄새를 좀 맡았다 싶은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철학에 살짝 한쪽 발가락이나마 걸쳤던 사람들은, 합리론이 어쩌구, 경험론이 저쩌구 잘 모르면서도 읊어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넘어가게 되어 있다. 물론 나도 팔구 중 하나다. 알라딘 서평단을 통해서 책을 받았기에 다행이지 내 돈을 주고 책을 샀다면 무척 아까울 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다는 것은 날로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강의 자체는 꽤 흥미롭다. 논리도 꽤 탄탄하고.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정말로 딱 거기까지다. 그게 이 책을 돈 주고 샀으면 아까왔겠다 싶은 이유다. 혹 눈치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책에 대한 별점을 꽤 후하게 주는 편인지라 왠만하면 3개는 준다. 이 책이 별점이 3개라는 말은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뜻이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만큼의 임팩트와 고민거리를 던져주지는 못한 것 같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책이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미국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수업이 인기가 있으려면 확실하게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가던지, 아니면 철저하게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던지. 이 책은 후자다. 영혼의 존재 자체도 부정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도 쓸데 없는 짓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유는? 그것들을 자신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논리적이라는 전제를 바닥에 깔고 있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죽음이란 것도 이원론이 논리적으로 불명확하기 때문에 자신은 논리적으로 클리어한 일원론을 지지한다는 식이다. 책의 서론에 말했던대로 이러한 그의 논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철학으로 밥벌어 먹고 살만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철학으로 밥벌어먹고 산다는 말이 항상 좋은 의미는 아니다. 논리적이라는 것도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철학자로서 그가 펴는 논리라는 것이 꽤 재미있다. 그는 파이돈의 대목을 가지고 플라톤의 이원론과 그의 논리적인 문제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일원론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지금 이순간의 문제라는 말을 결론으로 내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원론의 입장에서 그의 일원론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만 몰입해서 읽다보면 그런가보다, 영혼이란 없는 것이구나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수고하면 정반대의 논리를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죽음보다 삶에 더 집중해야 한다,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게 철학의 재미요, 신비요, 아이러니가 아닐까? 때론 철학자들을 사람들이 보면서 말장난에 능한 사람들, 궤변론자라고 비판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과연 이게 옳은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이렇게 논리적이어야 하는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죽음에 대해 논리적인 분석이 과연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가치있게 만드는가? 죽음 이후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게 아무런 피해나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결론이 죽음에 공포를 덜어 줄 수는 있는가? 철저하게 논리로 무장된 저자의 입장이 나에겐 그다지 큰 매력이 없다.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발감만 더 불러온다. 뭐 이런 차가운 사람이 다 있는가? 세련되고 반짝반짝 빛은 나지만 심장은 없는 그런 존재, 세련된 기계를 대하고 있는 기분이다. 물론 저자는 이런 나의 주장에 기계와 인간의 유사성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파했던 부분을 들어서 설득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의 논리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내기보다는 반발감을 더 불러일으킨다. 논리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논리 대신 감정을 우선시해야할 때가 있는데 죽음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구나라는 감정적인 연대가 오히려 문제에 대한 공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군에 있을 때의 일이다. 이등병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할 기회가 종종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교욱을 하겠는가? 군생활 잘하라는 교육이다. 그런데 모든 자유를 다 박탈당하고, 화장실도, 피엑스도 혼자 못가는 녀석들에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군생활을 잘하라고 설명을 해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행여라도 탈영하면 영창을 간다, 잘못하면 실형을 살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군생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 주지도 못한다. 끌려온 녀석들에게 무슨 논리적인 설득이 먹히겠는가? 그냥 그 녀석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면 된다. 논리적인 설명을 해도 안 듣던 녀석들에게 농담처럼 한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당시 이등병 월급이 1만원이 조금 넘었을 때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달에 월급을 간단하게 12000원으로 계산하면 한달에 30일로 계산해서 일당이 400원이다. 하루에 8시간 근무한다면(절대로 8시간이 아니지만 일과 시간만 계산한다면 이정도 된다.) 시급 50원이다. 1시간에 10분 휴식하고 50분 일하면 1분에 1원, 삽질 세번 정도 하면 1분 정도 되니 삽질 세번하고 1원, 삽질 세번하고 1원 이렇게 1원씩 쌓다보면 집에 간다. 이런 이야기들을 풀어가면서 그 녀석들의 박탈감과 공포, 고민들을 함께 나누다보면 의외로 교육 효과가 좋다. 논리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이 편향된 저자의 입장을 아주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래서 책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저자의 입장에 혹하게 되지만 딱 3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꾸 어쩌라구라는 반발심이 더 커진다. 뭐라도 한마디 뱉어주고 싶다. 기대했던 만큼 배신당했다는 마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 논리적으로만 풀어나가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물론 논리적으로 풀어질 문제라면 애초에 풀어졌겠지만 말이다. 그저 죽음에 대한 일원론적인 입장의 논리가 이런 것이구나 한번 살펴 보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주저리 주저리 불평과 궤변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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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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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이야기 한토막

 

  한 무신론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무신론에 대해서 강의하기 위하여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God is nowhre!"

 

  그러자 한 학생이 일어나서 칠판의 문장을 이렇게 바꾸었다.

 

  "God is now here!"

 

  종교과 과학의 차이를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이다. 같은 문장을 보고 누구는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다!"고 읽는가 하면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읽는다.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같은 자연 현상을 보면서도 과학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를 제거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종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신비를 노래한다. 한쪽에서는 논리의 문제에 집중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의미의 문제에 천착한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한쪽이 전적으로 그릇되었다든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의미의 문제와 논리의 문제는 기본 입장이 다른데 어느 한쪽을 완전히 제압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을 이해하든지, 혹은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과학과 종교가 관계를 맺는 방법 중에 가장 온건한 방식이 이런 방식이다.

 

  문제는 어느 한족이 다른 한쪽을 격멸해야할 바이러스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발생한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의도하는 것처럼 과학이 종교를 박멸하려고 하던지 혹은 교과서 개정추진 위원회에서 하듯이 진화론을 필생의 원수로 대하게 되는 순간 종교는 물론이고 과학고 논리적인 자기 모순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과학이 종교에 반하여 독선에 빠지게 되어 과학 만능주의로 흐른다면 과학이 새로운 종교로 대두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나 정신 작용도 그저 호르몬에 의한 화학 반응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로 종교가 과학에 반하여 독선으로 흐른다면 사회는 미신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며 삶의 기반이 되는 물질문명은 한치의 발전도 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퇴보하게 될 것이다. 과학이든 종교든 독선으로 흐르게 될 때 빅브라더가 등장하게 될 확률은 매우 높아지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는 적극적으로는 반목의 길을, 소극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해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그렇지만 인간 존재와 생명까지도 과학의 소재로 삼으려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갈등은 시작되었고, 점점 극단을 치닫고 있다. 과학은 종교의 신비를 미신으로, 종교는 과학을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로 공격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이 이 페이스로 간다면 결코 끝나지 않을 neverending story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전개는 인류 발전의 동력을 상당히 갉아 먹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과학과 종교 양쪽 모두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꽤 흥미로운 책이다. 종교계에 몸을 담고 있는 현직 목사와 과거 기독교인이었느나 종교인(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 포용적인 종교성을 지닌 사람)으로 변신한 종교학자, 과거 기독교인이었으나 철저한 무신론자가 된 과학도! 목사와 종교학자와 무신론 과학도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이 책이 과연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에 대해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떠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궁금즘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그렇지만 결론은 역시  Neverending Story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상대방의 포지션을 인정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온건한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 담겨진 공격의 날카로움은 간장과 막야가 울고간다. 주로 종교가 방어를 하고 과학이 공격을 취하는데 "종교는 이미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사라져 버려야할 과거의 유산이 아닌가"라는 장대익의 공격적인 질문 앞에서 과연 이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온건하지만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기는 매한가지다. 도키스와 맥그라스의 한국판 설전 정도로 이해하면 되려나?

 

  과연 이 세사람의 대화가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대변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사, 종교학자, 과학도라는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찬성이든 반대든 모두 기독교적인 베이스를 깔고 있다. 이들의 대화가 결코 일반적인 종교인들의 생각을 대변할 수도 없고,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도 없다. 그 결과 이들의 대화가 그렇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 저기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만 들려 집중하기 어렵다. 과학과 종교가 좀더 상대방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일반 대중의 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저 학문적인 토론에서 멈출 뿐이다. 그러면 여전히 종교와 과학은 Neverending Story를 이어나갈 뿐이다. 조금은 더 쉽게, 조금은 더 편안하게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관전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ps. 장대익씨는 교과서 진화론 개정 추진 위원회와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있다. 과거 그가 기독교인이던 시절에 적었던 글을 가지고 그의 현재 입장을 비난하는 것은 치졸한 짓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입장이 변화되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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