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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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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5월 23일!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속상한 날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승리의 날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가운데 2009년 5월 23일이 어떤 날인지 제대로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느덧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09년 5월 23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한 날이다. 전직 대통령이, 그것도 광우병의 역풍을 명박산성으로 간신히 막았던 현직 대통령과 항상 비교가 되던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건 과정 중에 담배 한 개비 찾다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그가 가족들의 잘못 때문에 뛰어 내렸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검찰 조사를 받다가 자존심이 상해서, 어떤 이들은 언론의 비열한 플레이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덮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획적으로 뛰어내린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현직 대통령에게 엿먹이려는 고단수의 정치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의 투신을 두고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한데, 난 이 책을 통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해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논리가 작동했고, 이 논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퇴임한 후에 그는 꽤 존경받는 대통령이었다. 누구처럼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지도 않았다. 아방궁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동네 청소를 하고, 농사를 짓고, 손주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막걸리 한사발 마시고, 담배 한개피 피우고 돌아오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대통령에 비하여 너무나 소탈했기 때문이리라. 그 또한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자부심도 오래가지 못했다.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정치인이 검찰 조사 받는 것이야 무엇이 대수겠는가? 김대중 대통령도, 김영삼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도, 전두환 대통령도 모두 조사를 받았고, 형을 구형받았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곧 퇴임 후 검찰 조사로 직결된다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걸어야할 통과 의례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가 왜 뛰어 내렸을까? 왜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잔인한 언론의 플레이 때문이리라.

 

  당시 검찰 조가사 신문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원색적인 제목의 기사가 난무하기도 했다.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 논두렁에서 1억짜리 시계를 주우러 봉하마을로 가자 등등의 상식 이하의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자녀들에 대한 집중 포화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며, 그의 측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이 무엇일까? 그가 느꼈을 감정은 수치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측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은 혐오감이리라. 이유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역시 빨갱이, 좌파라는 말로 그를 공격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혐오감과 여기에서 느껴지는 수치심 이 두 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결과는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났다. 물론 오늘까지 일베는 그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혐오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그만의 문제였다면 좋겠지만,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감과 수치심, 이를 통한 차별화와 이등국민화, 편가르기는 계속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지방 대학생에 대한, 혹은 같은 대학이라도 외국인 전형이냐 농어촌 전형이냐라는 문제들로 혐오감과 수치심이 난무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적인 감정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법이라는 공적인 가치관에도 침투하기 시작한다. 상대방 진영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의 밑바탕에는 혐오와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다. 상대방에 대해서 수꼴, 좌빨이라는 말, 어린 것이, 꼰대 등등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법적으로 고소하고, 조롱하고, 처벌하려고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법은 혐오와 수치심으로 작동하면 안된다.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가치관 속에서 집행되면 안된다. 그런 법은 없느니만 못한 악법이 된다. 제발 법관들이,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한번만이라도 읽고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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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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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걱!!

 

  "안녕하십니까? 스타벅스입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나를 반기를 점원들의 활기찬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계산대 앞에 서면 여러가지 질문을 받는다. "무슨 음료를 하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요." "차가운 것인가요 뜨거운 것인가요?" "뜨거운 것이요." "사이즈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란데...아니요 벤티로 주세요. 참 샷 추가해 주세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벤티 맞으신가요?" "예! 시럽은 필요 없습니다." "더 필요한 것 없으신가요?" "없는데요." 주문을 하더 내 눈에 순간 마카롱이 보인다. '저걸 집을까 말까? 그 옆에 보이는 카스테라를 집을까? 베이글은 어떨까? 그런데 스타벅스는 왜 샤벳은 없는 것일까?'

 

  어느 순간 스타벅스는 내 옆에 아주 가까이 와 있다. 예전처럼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비단 스타벅스일뿐이랴. 스타벅스로 이야기를 하지만 카페베네도 있고, 이디야도 있고, 할리스도 있다. 잠시만 눈을 돌리면 여러가지 이름의 커피숍이 많이 보인다. 사이즈도 각양 각색이다. 난 아직도 벤티와 그란데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물론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알겠지만 굳이 벤티와 그란데를 구분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톨과 그란데가 무슨 차이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느새 우리는 그 이상야릇한 단어들을 아무런 고민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왜 스타벅스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가? 음식이라는 문화가, 말과 의미가 어떻게 우리 삶에 일상적으로 들어왔는지를 밝히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자주, 그리고 잘 보여주는 것이 그카벅스 이용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윗 세대들만 해도 혀를 굴리기조차 힘든 그런 말들을 아무런 망설임없이 너무나 능숙하게 사용한다. 과거에는 커피를 코피로 발음했는데 요즘은 커피로, 그리고 더 이국적으로 카페 혹은 카베로 발음한다.

 

  이 책이 소개하는 칠면조 요리, 마카롱, 와플 등등 우리 귀에 이미 친숙한 단어들도 사실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문화가 섞이면서 발전하듯이, 음식 문화도 여러나라의 것들이 섞이기 시작한다. 과거에는 파스타는 다 스파게티였지만 요즘은 그렇게 말하면 무식하다고 취급을 받는다. 이미 파스타는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음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음식의 언어와 문화는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라 각 나라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우리 나라의 고유한 음식은 전주 비빔밥입니다, 김치입니다, 된장찌개입니다 등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이미 음식은 물론 문화도 섞여 버리고 있고, 개방적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유 음식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이미 아이들의 입맛은 과거의 김치를 멀리하고, 된장찌개를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다. 난 우리나라의 고유 음식은 김치이고, 이것은 발효학적인 면에서 매우 발달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입니다를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위행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식도, 음식을 지칭하는 언어도 너무나 쉽게 개방적이 되어 가는데 우리는 그 문화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이 다 외국에서 온 것이고, 아직도 카페라떼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이고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문화의 개방이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음식의 언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은 음식에 관한 언어를 추적하면서 그 음식들이 어떤 역사적인 맥락과 문화적인 교류 속에서 탄생하고 전파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말하면서 우리에게 개방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이라는 부제가 사족이라는 생각때문인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신경이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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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6-1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도 신자유시대인 것 같습니다. 글이 책을 잘 그려 줍니다.

saint236 2015-06-13 10:54   좋아요 0 | URL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이 없지요. 융합은 필연이지만 무분별한 융합은 필망이겠지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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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인사과예 리뷰 책을 받고 솔직하게 폭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평단 활동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읽기 싫어하는 책들, 그래서 내가 잘 접하지 않는 책들을 읽어본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지난달 시간 연대기와 같은 책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때론 의무감에 읽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마음 속에서 심각하게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면서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달 인사과예 서평도서가 바로 그것이다.

 

  롤랑 바르트!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이쪽 방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본 사람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지은 책이라도 다 좋은 것은 아니면, 또 아무리 잘 쓴 책이라도 해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책은 사람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책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책이 너무 불친절하다. 불친절하다 못해 불편하다. 책을 읽는내내 불폄함과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다. 그러니 읽고 나서 아무런 느낌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그저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이 하이쿠를 좋아했구나, 그리고 소설을 쓰고 싶어 했구나, 프로스트라는 사람을 꽤나 좋아했구나 이정도이다.

 

  책이 이렇게 폭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쪽 방면에 관심이 없어서인가? 저자가 글을 못써서 인가? 아니면 편집자가 너무 무리해서 책을 냈기 때문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어떤 세미나를 듣고 난 후에 요약된 강의안을 보는 것은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 당시 머리 속에 있는 기억들을 끄집어 내기 위해서는 축약된 단어들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강의를 아예 듣지 않고 축약된 글만 읽는다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그런 비효율을 강요한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라는 제목답게 말 그대로 강의안이다. 책을 읽어가다보면 이 사람이 강의를 위해서 작성한 노트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

 

  아무리 대가라도 정리되지 않은 강의안을 바로 책으로 출판하는 일은 이 책은 망해도 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일텐데, 유고작이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이 불편함을 커버하려고 한다. 너무나 불편해서 네이버에서 책 평점을 찾아봤는데 10점 만점중에 9점을 주었다. 이해가 안되는 점수이다. 민음ㅇ사에서 너무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과감하게 나는 이 책에 별 한개를 주려고 한다. 그것도 최저 점수가 별 한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억지로 읽은 책! 무얼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책"이라고 하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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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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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시절 한자 대문에 꽤나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있다. 물론 순전하게 내가 공부를 안한 탓이지만 그때까지 살면서 그런 점수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가서 부모님에게 혼이 났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한문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놀랍게도 미술 선생님이셨다. 피카소같이 생긴 머리를 가지고 추상화와 같은 한문을 가르치셨다.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문을 가르치셨는데 칠판에 써놓은 한문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졸리기까지. 그러니 한문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겠는가? 아마도 그때부터 한문이 싫어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한문을 배웠지만 성적에 크게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무협지에 재미를 들리면서이다. 지금은 가로로 읽어가는 무협지가 대부분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직 갱지에 세로로 찍어낸 무협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괄호 안에 한문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읽어가던 무협지만 백권이 넘고 이백권이 넘어가면서 쓰지는 못하지만 읽을 줄은 알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배운 한자이니 한계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한문을 배우면서 상형이니, 회의니, 지사니, 회의니, 형성이니 등등을 배웠는데 이 내용이 이 책에 다시 나올 줄은 몰랐다. 저자는 한문의 탄생 과정에 대해서 조목조목 이야기하면서 한문에 담긴 철학적인 사유와 문화적인 배경들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간혹 등장하는 갑골문자들도 꽤나 흥미롭게 생겼고, 어떤 것은 딱 보고 이건 뭐랑 비슷한 것 같은데, 혹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라면서 알아챌 때의 희열은 로제타 스톤을 가지고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석해 낼 때의 기분이 아니겠나 싶다.

 

  만약 한문 시간에 아이들에게 한문을 이렇게 가르칠 수 있다면 나처럼 한문에 흥미를 잃거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대만 사람이기 때문에 한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문자의 발전과 이를 통한 기억의 축적, 문명의 발전은 꽤나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 특별히 마지막에 다루고 있는 형상을 본 딴 도형문자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있는가라는 주제는 요즘같이 이모티콘이 발전하는 시대에는 깊이 생각해볼만 한 주제이다.

 

  문자는 좀 더 간소화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가고, 내용은 더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상형 문자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된다고 하면서도 특정한 문자들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갈 것이라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한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글이 아주 우수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우수한 한글을 가진 우리 민족이 얼마나 대단한가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런데 한글의 우수성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동양의 사상을 아우르는 창제 철학이 아니라 문자의 경제성이 아니겠는가? 간소한 선과 점 몇개로 확연한 차이를 보이면서 어떤 글자이든지 표현해 내는 기능이 한글의 우수성이 아닐까? 다만 사라진 한글 몇 글자는 간소화와 함축이라는, 그리고 정확한 발음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왜 사라진 것일까?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게 비효율적이어서 사라져버린 이집트 상형 문자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 책은 알라딘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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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 로드 - 3천 년을 살아남은 기묘한 음식, 국수의 길을 따라가다
이욱정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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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치 국수, 파스타, 우동, 메밀 소바, 막국수!

 

  잔치집에 가면 뷔페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음식이다. 이 음식들의 특징은 국수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먹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다. 맛또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평타는 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국수는 과연 어디에서 먼저 시작했으며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잔치국수와 막국수는 한국 음식이고, 파스타는 이탈리아 음식이고, 우동과 메밀 소바는 일본 음식이다. 짜장면과 짬뽕은 중국음식이며, 신장을 비롯한 중앙 아시아에는 라그만이라는 국수가 있다. 이 중에서 도대체 어느 민족이 어떤 이유로 국수를 먹기 시작한 것일까? 그리고 한국에서는 밀가루는 꽤나 귀한 음식 재료인데(예전 대장금에서 아주 귀한 음식 재료로 소개되었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보라.) 언제부터 국수를 먹기 시작했을까?

 

  이 책은 누들(국수)이라는 음식을 문명사적으로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는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꽤 자세하고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중국에서 국수는 자국의 음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조작의 냄새가 다분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국수 유물인 신장 지역의 국수 유물을 놓고도 그걸 몰라서 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그 유물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발굴 후 얼마되지 않아서 사그라져 버렸다는 웃긴 변명을 늘어 놓고 있는 모습은 꽤나 재미있어서 이번 인사 청문회를 보는 듯 했다.

 

  지난 열흘간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낯선 중앙 아시아에 여행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구 소련 연방에서 해체된 나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다.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바가 없는 나라였지만 어찌어찌하여 방문하게 되었다. 가볍게 읽을 책이라 생각하고 가지고간 책은 내게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책이 말하는 내용을 책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매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흔하게 먹는 음식 가운데 라그만이라는 것이 있다. 볶음 짬뽕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나는 이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 음식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렇게 며칠을 지낸 후 7시간을 차를 타고 가면서 꺼내든 책에는 놀랍게도 신장에서 발견된 국수 유물과 국수 음식의 종류로 내가 방금전까지 먹었던 라그만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라그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먹었던 음식이고, 조리법도 오랜 시간 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을 접하면서 책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읽고 체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이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이동하면 파스타의 나라 이탈리아가 있고,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면 라그만의 신장, 다양한 면요리의 중국을 거쳐, 막국수와 잔치국수의 한국, 우동의 일본에 까지 이르게 된다. 시대적으로 보면 라그만이라는 오랫된 음식에서부터 인스턴트 라면이라는 초현대식 음식까지 이르게 되는데 우리가 매일 접하는 한 그릇의 음식 속에, 내가 방금전까지 먹고 즐겼던 그 음식 속에 인류 문명의 태동과 접촉, 변화와 발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국수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인류의 문명에 감탄하고, 도보로 이동하고, 차를 타고 이동하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국수가 내가 걸은 그 길을 걸어서 전파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경이롭고, 꽤나 재미있다. 국수를 조리해 먹던 사람들이 이 중앙 아시아의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했을 상상을 하면서 마치 내가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듯한 느낌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독서의 즐거움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큐멘터리를 책을 만든 것이라 그런지 삽입된 그림과 사진들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보강이 된다면 이 책은 젊은 친구들도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화사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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