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 수업 - 중년 이후, 존엄한 인생 2막을 위하여
고미숙 외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일 관계로 만난 여자 분이 있다. 동석하셨던 분이 이 분에게 나이를 물었다. 43살이라고 하셨다. 몇 년생이라고 묻는 추가 질문을 통하여 이 분의 나이가 41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틀렸다고 말해 줄 수도 없어서 그냥 듣고 있었는데 이 분이 하시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는 것이 그만 두었다고 하시면서 올해는 자기 나이가 43살이라고 하신다. 상당히 열심히 살고 있는 분이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는데 오늘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이 일이 떠 올랐다.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자기 나이를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구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나이를 기억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내 삶의 궤적은 어떤가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나이이기 때문이다.

  스무살에 김광석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김광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동아리 선배들을 통해서 김광석을 좋아하게 되었고,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라는 앨범은 정말 많이 샀던 것 같다. 여러개를 사서 주변에 나눠주었고,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듣다가, 나중에는 CD가 긁혀서 듣지 못할 정도로 들었다. 좋아했던 녀석에게 거절당하고 선배들이 불러주었던 외사랑, 아픔을 담아서 자주 부르던 그녀가 처음 울던 날...그 중에 그냥 비만 오면 불 꺼놓고 들었던 노래가 있다. 서른 즈음에...그냥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서른이 되었다. 그ㄸ때 느꼈던 감정은 "헉"이다. 어느새 서른이 되었고, 이제 조금 지나면 마흔이 된다. 마흔이라는 숫자 앞에서 마냥 스무살 시절의 나만 떠올리던 내가 이젠 그 두배의 나이가 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그럼 육십이 되어서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까였다. 아직은 20년을 더 가야 하지만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내 인생이 대답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60이 되어서 여전히 "헉"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백세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백세를 준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다. 백세를 살아지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백세가 되고, 어쩌다보니 이 나이가 되는 것이다. 앞만 보고 정신 없이 달려가다보니 어느새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게 나이를 먹고, 아무런 준비없이 노년이라는 문텩을 넘게 된다. 고령 사회에 이미 진입했다고,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은 하지만 그 노인 문제를 잘 준비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그저 돈 몇 푼 쥐어 주면 된다는, 그들의 표만 얻으면 된다는 얇팍한 표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 나이가 되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지만 뚜렷한 답은 없다. 그저 그 나이가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공짜가 있을리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멋있게 나이를 드는 것도 공짜가 있을리가 없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물론 이 공부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그런 수학 과학 물리같은 것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공부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얼마나 유의미한 결과물을 남길 수 있는지 생각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한 살의 나이를 더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남기는 것인지 한번 점검해 본다. 마흔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혹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내가 싫어하는 꼰대질은 젊은이들에게 강요하고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내가 말한 것과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까지 쏟아냈던 그 많은 말들이 그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린 말은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말 한대로 살겠다고 그렇게 애를 써왔는데 진짜 그렇게 살아왔는지...

  특히 책의 장 강연을 강연자였던 유경 선생의 강연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 해보게 된다. 죽음 준비학교라는 책으로 유경 선생을 접하게 되었고, 많은 공감을 했는데, 그 뒤로 10여년이 지난 뒤 다시 읽는 유경 선생의 강의는 남다르다. 내 관계를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어 가고 있는지, 아이들과의 유대감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떤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이 그저 감사하다.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하는데도 전화할 때마다 빠듯한데 용돈 보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감사하고, 사위 고생이 많아 힘들어서 어째라고 말씀해 주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감사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지금부터라도 한 살씩 먹어가면서 한 살 한 살의 무게를 더 하고, 의미를 싣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더 애쓰고, 공부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 쉽게 상처받고 주눅드는 사람들을 위한 자기 회복의 심리학
롤프 메르클레 지음, 유영미 옮김 / 생각의날개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5-27)

 

  성경에 있는 구절 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단순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경 구절을 곱씹어 보면 한 가지를 더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끼어 있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지나가지만,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대해서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너무나 쉬워보이고,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요즘은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렵다. 스스로를 흙수저로 규정한다. "이러려고 ~했나라는 자괴감이 듭니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는 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박탈감과 낮춰봄이 자리잡고 있다. 자살율 1,2위를 다투는 현상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치유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돕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몇 번씩 읽고, 메모하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고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이 글을 읽고난 다음에 도대체 얼마나 거창하기 때문에 이런 말까지 하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내용은 거창하지 않다. 정말 쉽다. 게다가 양도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양 가운데 대부분은 심리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말과 사연이다. "이러려고 이 책을 샀는가라는 자괴감이 듭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렇지만 작가의 말처럼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 장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자기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읽고 끊임없이 실천하다보면 자기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외부에 의해 규정된 자신이 스스로를 옭아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정한 규칙이, 부모의 기대가,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아 내린다고 말한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을 부모가 행한다는 것이다. 격려자가 되어주어야할 부모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기보다 성공을 위한 지식을 가르치는데 애쓰기 때문이 아닐까? 난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여러가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 손석춘.김기석의 대화
김기석.손석춘 지음 / 꽃자리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스마트함이 넘치는 세상이다.

 

  사람도 스마트해야 하고, 옷도 스마트하고, 휴대폰도 스마트하다. 심지어는 교복도 스마트하다. 마치 스마트하지 않으면 구닥다리요, 구태의연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시대이다. 스마트라는 말을 통하여서 우아함과 세렴된에 대해서 말을 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가지만, 난 스마트라는 말 속에서 쫓기는 듯한 다급함과 얕음을 느끼게 된다. 특별히 진중해야하는 신앙의 부분에서 스마트를 말하게 되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참담하기까지 하다.

 

  똑똑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교회도 똑똑해지려고 한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그런데 교회는 그러면 안된다. 다른 단체들은 똑똑해지고, 세상의 가치들에 충실해야하지만, 최소한 교회는 옳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도 이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런 자리매김을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구식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도 바쁘게 돌아가야하고, 유행을 선도해가야 하고 스마트하고 효율적인 단체가 되어야 한다. 투자 대비 어느 정도 성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어느샌가 교회는 세상과 똑같이 스마트라는 명목 하에 깊이와 뚝심을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두 바보가 기독교에 대해, 성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주기도문에 대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죄의 용서와 빚의 탕감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지겹도록, 바보처럼 천착한다. 주기도문의 고갱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자가 가진 이해와 내공을 드러내 보인다. 이 책이 다른 신앙 서적에 비하여 유명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보스러운 두 사람이 전혀 스마트하지 않고, 전혀 트렌디하지도 않고, 깊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기석과 손석춘이라는 내공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천착하게 될 때 어떤 결과물들과 깨달음이 나올 것인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바보스러운 두 사람의 바보짓에 동조하게 된다. 세태에 영합하지 않고, 그저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가 한 말을 어떻게 삶 가운데에서 지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함에 마음 아파하는 두 사람의 바보.

 

 참 바보 같은 사람이지만, 이 두 사람이 이 시대를 좀더 따뜻하게 밝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이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맞았던 사람들은 모두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다. 멀리서 찾아왔던 동방박사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찾아갔던 목자들, 마리아와 요셉도.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참 바보같은 이들을 통해서 세상은 조금은 살만해졌다. 조금은 나아졌다. 그런데 요즘 그 바보들이 사라지고 있다. 교회도 스마트해지고, 트렌디해져간다. 그런 세상 속에 간만에 보는 한 줄기 빛이 아닌가? 아직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 심리 상담 - 병든 한국 사회는 청년들의 내면을 어떻게 파괴했는가
김태형 지음 / 다시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청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참 괜찮은 녀석들이다.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꽤나 반듯한 아이들이 많다. 요즘 젊은이들은 생각이 없고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내가 만나본 녀석들은 그렇지 않다.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판단을 하는 어른들이 문제이지, 그들은 결코 생각이 없지 않다. 오히려 요즘 녀석들은 생각이 없어라고 말하는 그들이 젊었을 때보다 생각이 더 많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그래서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들이 생각이 없어서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 한 녀석이 생각이 난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위해 외국에 나가 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어디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외모도 그 정도면 예쁘장하게 생긴 편이고, 성격도 모난 곳이 없다. 학교도 괜찮은 곳을 나왔고, 책임감도 있다. 공동이 해야 할 일을 맡길 때에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취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인턴을 몇번 하면서 면접을 보다가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어학연수라는 스펙을 쌓기 위하여 외국에 1년간 나갔다. 잘 다녀오라고 축하해주고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얼마나 청년들을 몰아 붙여야 하는가? 이런 안타까움 때문이다.

  처음 이 녀석과 대화를 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커피 한잔 사주면서 요즘은 어떻게 살아가니로 시작하여 대화를 나누다가 그 녀석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날은 작심하고 만났기 때문에 일부러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그 녀석의 사촌들이 꽤나 잘나간다. 의사도 몇 있고, 취업해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그래서일까? 그 녀석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컸다. 자기도 모르고 있지만 부모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부모가 자신이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자랑스럽게 밝히도록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처음 들어간 학교는 그러한 기준에 모자랐기 때문에 반수를 했고, 이름을 내밀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한동안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가 되어서 문제가 발생했다. 취업도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데 쉽지가 않다. 매일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그 녀석의 자신감이 계속 추락을 한다. 그 녀석의 부모도 그를 몰아붙이는 것이 아닌데 스스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자신을 계속 몰아 붙인다. "괜찮니?"라고 물어보면 "괜찮아요."라고 답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커피한잔 하면서 그 녀석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내가 보기에 너는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큰 것 같아.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거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다. 당황했다. 커피숍에서 비록 그녀석하고 10살 이상 차이가 나지만 남녀 둘이 앉아 있다가 여자가 무슨 말을 듣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오해하기 딱 좋은 그런 그림이다. 게다가 괜시리 그 녀석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참을 말없이 울더니 냅킨을 가져다가 눈물을 닦고 "창피하게 울었네요. 아! 창피해!" 이러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그 녀석의 부모님이 조심스러워서 지금까지 살면서 한 마디하지도 않고, 눈치도 주지 않지만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이 녀석이 이후에 참 고마워한다. 그날 내가 그 녀석에게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커피 한잔 사주고, "넌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 한마디 해준 것 밖에는 없다.

  이 녀석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럴 때마다 같은 이유로 힘겨워 하는 녀석들을 만났다. 내가 보기에는 꽤 괜찮은데, 자꾸 스스로를 몰아 붙인다. 그나마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녀석들은 회복이 빠른데 그렇지 않은 녀석들은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는다. 군에 있을 때에는 그러다가 자살한 녀석도 몇 명 봤다. 

  요즘은 헬조선이라는 말이 더 이상 유행어가 아니다. 일반 명사가 되었다. 왜 그럴까? 어느새 이 나라에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시대를 지나면서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라는 것이 서열화 되는 것이 아닐진대 수능 점수로, 혹은 학교로, 혹은 직장으로 사람을 서열화 한다. 누구는 금수저, 누구는 흙수저로 분류가 된다. 그 사람의 조건이, 그 사람이 처한 서열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내는 것인양 마음대로 판단해 버린다. 그러니 상위 그룹에 속한 사람은 굴러떨어질까 두려워서 하위 그룹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인색의 낙오자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여서 살아간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리라. 이 책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이 책에 기록된 내용들이 특별한 몇몇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케이스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를 보자. 이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한트럭은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야,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거야, 지금의 아픔이 너의 인생에 귀중한 밑거름이 될거야 이런 식상한 말을 하지 말다. 그냥 진심을 담아 한마디만 해주자.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그 무슨 말보다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아픈 청춘들에게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개정신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상성이라는 것이 있긴한가 보다. 고미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저평가받을 이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썩 내키지 않는 이름이다. 고전에 대한 해설과 평가를 기록해 놓은 책들은 특히 더하다. 임꺽정을 읽으면서 나랑 안맞구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확실해졌다.


  "고미숙과 나는 안맞는다."


  우리나라 학사 과정을 정상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이라면(여기서 말하는 정상적이라는 것은 의무 교육을 말한다.) 대체로 한번씩은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것이 열하일기다. 한국사에 대해서 배우면서 정조 시대에 박지원이 어쩌구 저쩌구, 북학파가 어쩌구 저쩌구, 이용후생, 실사구시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꼭 언급되는 책이 박지원의 열하일기이다. 그만큼 유명한 책인데 문제는 이 책이 철저하게 고전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농반 진반으로 고전의 특징이란 모두들 제목은 알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아는데 읽어본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안 읽어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호질, 허생전, 양반전 같은 내용들이야 대입 준비하면서 읽어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어본 일은 없다는 말이다. 하긴 많은 학생들이 호질과 허생전과 양반전이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비교적 낫다고 자부해도 되겠지만...


  고미숙은 자신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만난 것이 클리나멘이었다고 말한다. 박지원의 해학에 대해서, 좋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마이너로 살아가면서 노마드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왕성한 지식 욕에 대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끝없는 상찬을 늘어 놓는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가 되어 자신이 살아가서 시대를 바라보던 박지원의 삶을 표현하기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만큼 훌륭한 것들은 없겠지만, 내가 고미숙과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역시 배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책에 집중을 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야기들, 인문학 용어들이 책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며 박지원의 해학을 박제로 만들어 버렸다.


  요즘 아재개그가 유행이다. 아재개그의 특징은 유치하지만 직관적이라는 데 있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고 웃게 만드는 아재 개그는 실패다. 유치해도 직관적이어야 듣는 순간 빵 터진다. 박지원의 해학도 그렇다. 일단 듣는 순간 웃는다. 한참 웃고 난 다음에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호질, 양반전, 허생전이 그렇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밑줄 긋고, 이 부분이 웃기고, 이 부분은 당시 상황이 이렇고 해설하고 분석하면 재미가 없다. 수험생들이 호질, 양반전, 허생전을 보고 웃지 않고 생사의 대적을 눈 앞에 둔 것처럼 심각한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일단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는 읽었다. 여러가지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도 많다. 고미숙은 역시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말이 너무 어렵다는 것, 그리고 박지원의 글이 웃기다는 것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강렬하게 드는 생각은, "젠장! 열하일기를 읽어야겠군."이다. 원전을 읽지 않고는 박지원이 얼마나 웃긴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11-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님의 리뷰를 오랜만에 봅니다. 저도 열하일기 완독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로 나온 열하일기를 가지고 있는데,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