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흙청춘 -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남기
최서윤 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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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을 넣고 네이버 검색을 해봤습니다. 연관 검색어 1위가 '알바'일거라고 추정했는데 '글자 수 세기'였습니다. 회사에 지원하는데 1000자 이내로 쓰라고 해서였습니다. 청년하면 떠오르는 게 젊은, 정열, 사랑, 욕망이 아닌 그런 모습으로 살게하면 안 됩니다." -은수미 전 의원 필리버스터 중에서

 

  청년 문제가 심각하다. 은수미 전 의원의 공이었는지 이제는 네이버에 청년이라는 말을 넣으면 '글자 수 세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더 알아보는 지식백과에는 '청년실업률, 삼포세대, N포세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뜬다. 청년의 처지가 좋아져서 연관 검색어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청년 문제의 심각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청년들은 아직도 수저 계급론을 이야기하고, 헬 조선을 외친다. 어른들은 언제 살기 쉬웠던 적이 있었느냐, 요즘 것들은 참을성이 없다는 말로 청년들을 나무란다. 이 책의 말미에 인용된 이어령씨의 글이 대표적이다. 이런 시각이 팽배한 기성 세대들은 모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요즘 청년들의 눈이 너무 높다. 눈을 낮추어야 한다."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혹은 현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게 할 뿐이다."는 생각으로 청년들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고 한다. 청년들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나라의 기둥이라는 식상한 생각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고, 파트너로로 보지 않는다. 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들을 가지고, 청년들을 동정한다.

 

  그 어디에도 현재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다. 혼밥과 혼술을 하고, 대학 5학년이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에, 어쩔 수 없이 1인 가구로 내몰린 시대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버둥대는 청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각은 없다. 그저 계도의 대상으로, 그리고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청년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연령대가 얼마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그저 선거철만 되면 몇몇 정치인들을 청년들을 위한 자리라고 배졍하고 끝이다. 그마저도 임기가 끝나면 토사구팽 신세가 된다. 청년들을 시혜의 대상, 생각이 어린 녀석들 정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전에 셋째 외삼촌께서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투표권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피력하신 적이 있다. 어른이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책임도 없는데 무슨 권리를 주냐는 논지의 말씀이셨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셨고,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셨지만 청년 문제에서 만큼은 나와 격차가 너무 컸다. 청년들을 그저 본인의 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설령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스물이 넘은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불과 10-20년이 지나면 당신의 아들들이 뒷처리를 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신했던 것, 그리고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88만원 세대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집필한 기성 세대가 아니라 헬조선의 상황을 감내하고 있는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청년이라는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기성 세대와 연대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청년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라면 청년이라는 대상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게 규정하는 글이 한두편쯤은 실렸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책에 청년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내용이 지금까지의 청년론과 오늘날의 청년론은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선에 멈추었기 때문에 아쉽다는 말이다.

 

  이 책의 결론은 청년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청년들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일 것이다. 청년은 불쌍히 여기고 시혜를 베풀 대상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내고, 10-20년 후에는 이 사회를 짊어져야할 대상임을 분명히 알아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 맞는 대우와 발언권을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 변화와 발언권의 보장 없이 무슨 세대간 연대가 가능하겠는가? 흙흙청춘이라는 말이 왠지 "흑흑청춘(저자가 분명히 의도했으리라 본다.)"인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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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지옥
도이 다카요시 지음, 신현정 옮김 / 새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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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십대에게 이만큼 중요한 단어가 또 있을까? 아무리 경쟁 사회에 들어섰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줄 세워 등급을 매기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가 있다. 바로 친구이다. 특히 10대에게 친구는 정말 중요한 인간관계이다. 자기 부모에게 하지 못하는 말도 친구들끼리는 한다. 부모들이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그 부모들이 10대였을 때에도 똑같이 행동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친구라는 단어에 "지옥"이라는 말이 붙었다. 이 얼마나 이율 배반적인 단어인가? 그렇지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가 친구라는 단어에 "지옥"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를 알게 되면 이율배반적인 이 단어만큼 이 시대를 잘 나타내 주는 단어도 없다. 10대에게 정말 중요한 인간 관계이기 때문에 10대에게 가장 큰 데미지를 입히는 관계도 친구관계이다. 특히 요즘처럼 왕따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이 시대에는 말이다.

 

  저자는 왕따(일본에서는 이지메라고 한다.)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 과도하게 친절을 강요받는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각 나라에서 추구하는 관계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농담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아이가 학교 갈 때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놀다와."라고 한단다. 일본 사람들은 "친구들에게 폐끼치지 말고 와."라고 한단다. 한국 사람들은 "지지 말고 와."라는 말을 한단다. 우스개 소리이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지향하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그렇기 때문에 흔히 일본 사람들은 상대방과 생각이 달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에둘러서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의 말은 무슬림들이 하는 "인샬라"라는 말만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가장 큰 관계에 대한 진리이다. 그런데 과도하게 친절한 인간관계를 추구하다보니까 문제는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친구들에게 휘둘리기 일쑤이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다보니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일 것이고, 그러다 보니 친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실패하면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러한 친절한 관계에 대한 강요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과도한 친절을 강요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친구 관계에서 한번 밀려난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큰 데미지를 입는다. 이 데미지는 결국에는 자신을 향하게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종종 이어지기 일쑤이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도 평생을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일단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데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회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말 잘듣는 아이, 친절한 아이로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가르침은 과도한 친절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친구 지옥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연습할 것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한지를 살펴보고, 그대로 하라."는 김어준의 말을 생활화하는 것이 아닐까? 10대 자녀들을 둔 부모들이라면 한번 읽어보면 아이들을 이해하고 교육하는데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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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리 2030 -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장원석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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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청년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다.

  청년실업이 심각하다고 한다. 삼포 세대를 넘어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N포 세대를 말한다. 결혼도, 직장도, 차도, 결혼도, 심지어는 굼도 포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취업이 되지 않아서 절망하는 청년들을 많이 본다. 물론 서른의 끝자락인 나도 청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결혼은 하고, 직장도 있고,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못한 청년들은 아무 것도 없다. 이들의 마음이 어떨까? 속상함은 물론이거니와 답답한 마음에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열심히 하면서 미래를 꿈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것이 문제가. 끝없이 올라가는 등록금은 이미 청년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고,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그리고 한 가정의 행복할 미래가 파탄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청년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냉동 창고에서 일을 하다가 얼어 죽었다. 어떤 청년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컵라면 하나 먹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청년은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다가 백혈병을 얻어서 죽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디에도 이들을 위한 대안이 없다.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는 세상을 다 뒤짚어 엎을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 진다. 아무 것도 나아진 것은 없고, 오늘도 힘없는 청년들은 불안한 미래를 꿈꾸면서 잠자리에 들고, 좀비처럼 일어난다.

  청년이 희망을 잃으면 그 나라는 없다고 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은 그저 비석에 새겨진 말이 되었고, 청년을 위한 정책이라는 것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하기 어렵다. 청년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키우겠다고 선거전마다 청년 비례 대표를 선출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심도있게 들어주는 정당도 없고, 한때 쓰고 버리는 일회용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이들이 언제까지 청년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사회의 주류일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의 청년들은 지금의 기득권층의 나이가 되고 이 사회를 떠받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런데 사회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열정 페이라는 명목하게 착취를 당하던 사람들이 시 사회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품겠는가? 이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사회를 떠받들 수나 있을 것인가?

  이 책에는 지금 청년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둘씩 점검해 나가기 시작한다. 보수적인 신문사의 기자 출신답지 않게 꽤나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이 야기할 미래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한다. 화가 가득한 청년들의 마음을 조금씩이나 이해하는 그의 글은 아프니가 청춘이다라는 말보다는 더 위안이 된다. 제시하는 대안들도 해봄직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대안들을 실행하고 현실로 만들어내기에는 청년들의 입지가 너무나 좁다는 것이다. 그저 이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알아서 무엇인가 해법을 마련해 주기를 바래서는 답이 안나온다. 그저 속으로만 앓지 말고, 답답해 하지 말고, 화를 삭히지 말고, 그 화를 밖으로 표출해 보자. 화를 건정하게 표출할 수 있는 노력을 하다보면 그것들이 모여서 표가 되고, 정치력이 되고, 힘이 된다. 그리고 대안이 현실이 된다. 청년들이여 화를 내보자. 무엇인가 하나씩 해보자. 그러면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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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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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청년 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 분야를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지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교회에서 만나는 청년들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똑똑하다. 비록 SKY를 나오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고, 인생의 비전도 분명하다. 그런데 취업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때론 내가 대기업, 혹은 견실한 중소 기업의 사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해본다. 만약 내가 그런 위치에 있다면 혹시 이들 중에 최소한 몇명이라도 구제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계산 때문이다.

 

  얼마 전에 6개월 단기 인턴을 시작한 녀석이 있다. 나름대로 괜찮은 학교를 나왔고, 성품도 좋다. 교회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책임감도 있고, 동생들도 잘 챙긴다. 외모도 빠지지 않는다. 요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외국어도 괜찮은 수준이다. 작년에 토익시험을 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걸로 봐서는, 그리고 교회 일을 하면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으로 봐서는 실력도 괜찮다. 그런데 취업이 안된다. 이력서를 넣으면 죄다 떨어진다. 면접까지 가지도 못하고 서류 전형에서 거의 떨어진다. "제가 너무 착실하게 교회만 다녔나봐요. 이력서에 적을 인턴 경력이 하나도 없어요." 씁쓸하게 이야기하는 그 녀석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스타벅스가서 커피 한 잔 사주고, 이야기 들어 주고, "기도할께!" 딱 한마디 했다. 재작년에는 아픈 구석을 찔렀더니 갑자기 펑펑울던 녀석이 이젠 울 힘도 없는지 "괜찮아요!" 한 마디 한다. 부모님들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서류 전형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묻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6개월 단기 인턴십을 시작했다. 고디바와 바디 앤 배스 상품을 수입하는 회사란다. 처음 3개월은 매장에서, 나중 3개월은 본사에서 사무직으로 근무를 한단다. 한번 놀러가겠다는 말을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난 주에 다녀왔다. 내가 생각에는 그 일을 하기에는 그 녀석이 가진 스펙이 차고 넘치기에 안쓰러웠다.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나 생각했는데, 그 녀석 표정이 많이 좋아보인다. "정사원은 생각도 안해요. 6개월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말을 하는데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씁쓸했다. 그 녀석이 내려준 커피 한잔 마시는데 그 커피가 그 날다라 더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해맑은 표정으로 했던 그 녀석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단 이 녀석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청년들과 함께 지낸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비슷한 녀석들을 많이 봤다. 그 녀석들의 반응도 동일하다. 도대체 저 녀석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힘든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왠지 미안해 진다. 그들보다 채 스무살도 더 살지 않은 나이지만 내가 그 녀석들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그런다.

 

  작년 "절망의 나라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을 봤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미래에는 나아질 희망이 없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행복하다고 자신을 세뇌시키는 젊은이들의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의 내용은 더 씁쓸하다. 누구나 무업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 지금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히키코모리 시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눈을 뜨고 갈 곳이 생겼다는 것 이런 말들이 내 마음에 비수처럼 와서 박혔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청년 실업이 문제라고 외치는데, 도대체 정치권들은 기성 세대들은 이 청년들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은수미 의원이 필리버스터의 마지막에 했던 청년의 연관 검색어가 글자수 세기라는 말이 현실인데 도대체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고 있는가? "보이스 비 앰비셔스!" 젠장이다.

 

  무업 상태를 맞아, 절망으로, 자기 비하로 치닫고 있는 청년들에게 도대체 이 사회에서 해 주는 일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네가 실력이 없으니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실력을 갖추라고 한다. 누가 말했냐고? 이지성이다. 그 날 이후 청년들에게 쓰레기라고 이지성 책 읽지 말라고 기회가 오면 말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해봐서 아는데 눈이 높으니 눈을 낮추라고 한다. 누가 말했는지 아는가? 위대하신 MB각하시다. 어떤 사람들은 아프니까 청춘이고, 흔들려야 성장한다고 한다. 누군지 충분히 감이 올 것이다. 이 시대 청년들의 멘토라고 일컬어지는 김난도이다. 왜 아파야만 청춘이고, 흔들려야만 성장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108배를 하고 나면 괜찮아진다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한다. 누구냐고? 법륜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말하는 혜민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청년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청년을 국회의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누구냐고? 박근혜 대통령이시다. 그런데 한번 쓰고 버리는 사석으로 취급한다. "이준석, 손수조" 이미 쓰고 버린 돌이다. "조은비?" 이번에 쓰고 버릴 돌이다. 청년 문제에 대해 대변한다는 사람이 청년 실업 문제도, 노동 문제도 알지 못한다. 오로지 얼짱이라는 말만 한다. 셀카로 도배한다.

 

  청년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청년 문제를 청년들에게 돌린다. 그리고 요즘 것들은 배가 불렀다, 문제다, 싸가지가 없다, 근성이 없다라는 말로 그들을 싸잡아 비난한다. 자신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생각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취업하지 못하고 빌빌대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것 이것들이 그들의 죄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책임을 추궁하려면 이 문제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청년팔이를 하면서 이익을 얻는 자신들에게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에서 무업 사회가 문제란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지만 아직 큰 효과를 얻지 못하고, 사회의 흐름을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 그런데 난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일본이 부럽다. 그나마도 어디인가? 양복을 마련해 주고, 컴퓨터를 가르쳐 주고,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서 정직원까지 채용되도록 끊임없이 도움을 주는 그런 시스템이 마냥 부럽다. 한국이라면 어떻겠는가? 양복이 없어서 면접을 못본다? 그럼 아르바이트 해서 양복을 사라고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라고 하겠지. 그러면서 양복은 고가의 양복을 사는 것이 좋고, 코디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말하겠지?

 

  제발 그들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처진 그들의 어깨에 무책임한 놈, 배부른 놈이라는 편견과 무거운 짐을 더 짊어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커피 한잔 사주고 같이 울어 줄 눈꼽만큼의 동정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런 것이 그들의 죄가 아니지 않은가?

비전: 모든 청년이 사회에 소속되어 `일하기` 및 `일을 계속하기`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
미션: 청년과 사회의 연결(299p)

매일 갈 곳이 생긴 것,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편했습니다.(274p)

`일`을 하는 고생은 히키코모리 시절의 고생에 비하면 정말 별 게 아니죠.(2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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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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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을 틀면 손범수씨가 심심치 않게 나오신다. 가입 조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처리해 주겠단다. 이 광고의 특징이 있는데, 광고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암에 걸릴 것 같다는 것이고, 나도 살면서 암에 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보험 하나 들어놓지 않는다면 나는 가족들에게 상당히 무책임한 가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암보험에 가입한다. 전형적인 공포 마케팅이다. 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암에 관해서만 말하고자 않다. 사람들이 암 선고를 받으면 불안해 한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꼭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 암의 특징 때문이다. 암의 특징은 무한증식에 있다. 암세포는 어느 정도 선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증식을 하고, 그 결과 암세포가 기생하고 있는 생명체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흔히 자본에 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본을 암에 비유한다. 끝을 모르는 자본의 자가 증식, 그리고 이 자가 증식 과정 속에서 피도 눈물도 없으며, 결국에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에 자본을 암세포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증식하는 자본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제기한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는다는 책의 제목만 보고 있으면, 레드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어마 뜨거라 하면서 깜짝 놀랄 것이다. 반대로 기대감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은 상당히 특이한 제목인데라는 기대감으로 이 책을 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라고 할지라도 뜨악하게 된다. 책의 내용은 책 제목처럼 빨갛지도 않고, 전혀 사상적이지도 않다. 물론 저자의 글 행간에 담겨 있는 사상이 맑스의 자본론에 입각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저자는 도시 생활의 부적응자이다. 자기 부인과 함께 천연 효모를 가지고 빵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 다음 조용한 시골에 정착한다. 쉽게 말하면 귀농을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사람이 꽤나 행복하게 산다. 자기의 시골 생활에 대해서 패배 의식도 없고, 그렇다고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가족들과 꽤나 행복하게 살아간다. 자기가 원하는 천연 효모를 가지고 빵을 만드는 분야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를 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빵집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그의 다음 행동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온갖 상상을 한다. 대개는 이렇게 인기를 끄는 사람은 돈을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게를 더 넓히고, 삶의 많은 부분을 빵집을 경영하는데 쏟을 것이라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삶은 전혀 반대로 간다. 빵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일주일 가운데 며칠은 빵집의 문을 닫는다. 빵집 운영 시간도 한국의 유명 프렌차이즈 빵집처럼 늦은 시간까지 열지도 않는다. 딱 그날 정해진 분량만 팔고,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에 마감을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여름 휴가 또한 상당히 길다.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유럽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빵집을 운영하면 금방 망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의 빵집은 망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적자가 누적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저자의 경영 마인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욕망을 키운다. 그렇지만 저자는 빵집을 키우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는 지속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채워서 빵집 경영에 올인하면 그 삶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빵집을 유지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줄 정도가 되는 선에서 자신의 욕망을 컨트롤하고 있다. 그의 자제력과 실험이 어느 정도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만 갈 수 있었어면 좋겠다.

 

  지금 한국에서는 철지난 트리클 다운 이론이 힘을 얻고 있다. 파이를 키운다음에 나누자고 하는 선성장 후분배를 말한다.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과거로 회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가치관은 많이 달라져 있다. 고령의 국민들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하다. 다만 그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도 자본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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