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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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들어 보지도 못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 2주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자는 총리의 간곡한 부탁에 많은 국민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항상 그렇듯이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젊음을 과신하면서 이럴 때 더 놀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습관에 젖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권고는 권고일뿐 강제가 아니라는 신념으로 혹은 그러한 생각도 없이 전국을 활보하다가 여행지에서 확진 판정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전 모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많은 교회의 교인들, 그리고 목사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민망함을 금할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한달째 청년들과 인스타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이 상황이 속상할 뿐이고,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질본 본부장의 나날이 야위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코로나-19라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사람을 여럿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골라든 책이 페스트, 콜레라 시대의 사랑, 데카메론이다. 질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의 기록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훨씬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전염병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 작품을 몇개 골라두고 틈틈이 읽고 있다. 첫번째 책으로 페스트를 선택하고 읽기 시작한지 1주일만에 다 읽었다. 작품의 분량이 대단히 많아서 1주일을 꼬박 읽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분량으로 치자면 내 팔을 두껍게 만든 류시화의 책에 비하면 1/3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데 1주일이나 걸린 이유는 첫째로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면서 내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생활 리듬이 깨졌기에 집중이 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철학적이어서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소름끼치도록 이 시대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장을 읽어가면서 오통의 아이가 죽어가는 장면을 읽으면서는 목에 무엇인가 걸려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듣고 노라면 오늘날 보수적인 교회에서 목사들이 행하는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놀라고, 페스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사협회와 오랑시 책임자들의 관료주의에서 의사협회 관계자들과 대구시장, 그리고 정부에게 딴지 걸려는 미통당 관계자들의 작탤르 발견한다. 어떻게해서든 살려보려다가 지쳐가는 리유와 그의 동료들의 모습에서 오늘도 의료 일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의 눈물겨운 싸움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다. 떠들썩하게 살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클럽과 주점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염병을 틈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코타르와 주변 인물들을 통하여 마스크 매점 매석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이들의 추악함을 보게 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만나는 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코 소설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가면서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된다.


  도피자의 모습으로 서 있는 랑베르,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결국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파늘루,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페스트라는 상황을 즐기는 코타르와 주변 인물들, 뚜렷한 이상이나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돕는 자의 위치에 서는 그랑, 타인을 위한 삶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맞서 싸운 페스트에 패해 죽는 그래서 성자의 삶과 가장 닮아 있는 타루, 의사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지만 끝까지 싸우는 리유, 진실을 숨기는데 더 관심을 갖는 의사와 시 당국자, 가족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그러다가 나중에는 슬퍼할 힘마저도 잃어버리는 많은 사람들. 페스트를 코로나-19로만 바꾸어 놓는다면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 분명하게 리유와 타루의 삶을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꼽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수능에 지문으로 나온다면 학원에서도 리유와 타루의 이름을 기록하고 밑줄 쫙, 반드시 외울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습으로 읽는다면,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한다면 어떻게 할까? 파늘루일 수도, 타루일 수도, 리유일 수도, 오통일 수도, 그랑일 수도, 코타르일 수도, 오통의 아들일 수도, 랑베르일 수도 있다. 또는 이름없이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입장일 수도 있다. 각자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옳음과 정의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페스트를 이긴 것은 연대의 힘이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페스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연대의 힘이다. 랑베르처럼 겉돌아도, 타루처럼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파늘루처럼 고민과 체념으로 살아도, 리유처럼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접해도, 그랑처럼 어찌어찌 시작해도 결국은 타인을 향해 손을 내뻗는 연대의 힘, 함께 함의 힘이 페스트의 위기를 견디게 만들었음을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여야로, 남녀로, 좌우로 갈라져서 싸우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가 소설 페스트의 시대보다 더 암울하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 때문에 재난소득 분배를 4월 16일부터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씁쓸한 하루가 오늘도 저물어 간다. 정총리의 사회적 거리두기 당부 후 8일째가 저물어 간다.


PS. 소설과는 상관이 없지만 카뮈는 참 잘 생겼다. 개인적으로 잘생긴 철학자와 문인을 뽑자면 카뮈와 비트겐슈타인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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