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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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장 재미있는 건 정사보다 야사, 정설보다는 속설이 아니던가.


고흐는 평생 그림을 하나도 못 팔았다는 흔히 알려진 말부터, 반려동물로 개미핥기(..!!)를 키웠다는 달리, '무직' 모리조(...ㅋ), 흔히 아는 <절규> 속 인물은 사실 절규가 아니라는 이야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교양 미술사의 단락들을 재검토해보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미술 작품만큼이나 공간도 시대의 취향과 이념을 드러내는 언어다. 하얀 벽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이 왜 선택되었는지를 질문하는 것, 현대 전시 문화를 비판적으로 읽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p.257


주어진 정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는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기록된 예술사' 전부 이론적으로 알지만 미술품들을 들여다보던 관람객들은 단 한번이라도 그 이면을 들여다본 적 있었는가. 전시관의 벽은 당연히 희고, 오기된 작가명도 거기에서 그렇다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던게 현실이었으니까.


마치 고정된 것 처럼 붙박힌 미술사의 정설을 깨부수고 시대의 욕망과 주류의 철학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도전적인 시선은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예술의 가치를 전복한다. 특히 예술이 예술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는 말은 마치 환경에서 벗어나 오롯하게 홀로라는 사실이 불가능한 현대 그 자체와도 같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어떤 미술사를 다룬 책보다 가장 현대적인 책이었다.


+ 저런 의미에서 한겨레출판의 미술 관련 책은 대체로 재미있는데, 『언니네 미술관』 (이진민, 2024) 도 매우 재미있다. 같이 세트로 묶어도 꽤 어울릴 것 같음.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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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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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걸 깨고 나아가야 진짜 네 길인 거지. 한번 쓰러진 나무가 다시 서긴 어려운 법이지만, 너는 물을 끌어올 방법을 알고 있다. / p. 24



이 책에는 말씀의 나라로 승천할 수 있는 아벨과, 그렇지 못한 '가인'이 있다. 可人, 인간인 것 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존재. 유림과 해수는 이런 걸 가르쳐주는, 사이비 냄새가 짙은 '하나의말씀'이라는 보육원에서 길러진다.

선함과 자비 따위를 입에 올리면서 사방이 막힌 벽돌집 안에서 누구보다 잔인해지고 교활해지는 어른들의 학대를 벗어난 두 아이의 로드 무비. 그렇게 그들은 破四柱, 주어진 운명을 부수는 여행길에 오른다.


실재와 환상을 오가는 듯한 분위기는 이 말을 하는 것이 종교집단에서 가둬져서 길러진 아이들의 시선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 아이들의 세상이 이런 것임을 인지하고 읽을 때 학습된 아이들의 관념이 어떤 폭력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왜 유림에게 '해수'라는 존재가 필요했는지. 그렇기에 아이들은 망산(邙山)을 넘어 황천과 명도를 걸어야 했다. 폭력에 희생된 무수한 유림과 해수같은 아이들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데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길의 끝이 빛일지, 어둠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들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겨우 벗어난 벽돌집은 너무나도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와 다름 없었으니까. 이 때 작가는 아이들의 등을 슬쩍 밀어준다. 아이들이 작은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어디선가 이 글을 읽을 길을 잃은 무수한 사람들을 위해서. 섣부른 위로와 성마른 희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곳에서든 구원과 희망은 나 자신의 몫이라고.


+ '인생은 미로고,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다.' 추천사 그대로의 책이었다.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림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건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이 보일 터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걷다 보면 환한 빛을 마주하리라는 작은 희망이 유림의 발걸음을 앞으로 이끌었다. /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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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우정과 무가치한 연애들 - 연인도 부부도 아니지만 인생을 함께하는 친구 관계에 대하여
라이나 코헨 지음, 박희원 옮김 / 현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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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맨틱 관계는 우리 삶을 형성하는 유일한 결합이 아니다. / p.352

사회는 인간들에게 학습을 시킨다. 필히 로맨틱한 관계가 수반되는 다른 성별이 결합하여 가정을 이룰 것을. 어릴때부터 배우는 소꿉놀이부터 길거리의 온갖 미디어들도 연애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눈치채지도 못하게 전방위에서 밀려들어오는 치밀한 압박 속에서 그 외의 선택지는 박탈된다. 


어째서 우정은 연애를 대신할 선택지가 되지 않는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로맨틱한 관계가 수반되지 않는 것을 끼워넣을 수는 없는 걸까. 연애와 결혼 안에서만 우리는 인생의 반려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흔히 밸런스 게임을 하면 사랑과 우정 중 무엇을 택할거냐고 묻기도 한다. 왜 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우정은 어째서 사랑이 될 수 없는가.


삶의 동반자라면 마땅히 '로맨틱'해야 한다는 강력한 프레임. 그러니까 깊은 우정을 쉽게 사랑이라 단정 짓는 것, 혹은 사랑이라 하면 반드시 성적 관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관계의 공식에서 벗어난 이들의 용감한 걸음들. 연인도 부부도 아니지만 인생을 함께하며 기꺼이 나의 반쪽이라 부를 수 있는 친구 관계에 대한 반가운 사례들이 여기에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뿐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공감하는데, 어째서 인생의 동반자를 고를 때는 단일한 관계만을 강요하는가. 로맨틱한 관계의 연인만이 나의 전부여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오히려 더 건강한 파트너십을 만들어내고 더욱이 낭만적으로 나를 지탱해주던 우정을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는 세상을 벗어나는 일이 아닌 세계를 확장시키는 방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새삼'의 일을 우리는 자주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도록. '굳이', '새삼'이라는 부사가 붙지 않도록.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나 『여자 셋이 모이면 집이 커진다』 같은 삶을 꿈꾸는 친구들이라면 이 책을 싫어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교환독서 하면 재밌을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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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 - 23개 질문으로 읽는 검찰 상식과 개혁의 길
박용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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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검찰 상식이 우리 사회의 필수 교양이 되었나 / 들어가는 말


"기소 당하면 인생이 절단난다"

윤석열이 몇년전에 한 말이다. 판사가 무죄를 선고한다고 피고가 자유로워 지는게 아니라는 말, 양날의 검과 같은 검찰권의 무거움을 말하는 데는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인생을 절단낼 수 있는 기소권을 제 정적을 제거하는데 남용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적으로 휘둘렀지만 말이다.


자정되지 않는 기관, 윤석열과 한몸이 되어 집단의 이익만을 꾀하고 국민이나 무고한 자에게 칼을 들이밀기를 거부하지 않았던 검찰이 그와 함께 몰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아닌가. 12.3 내란의 밤을 같이 지새고 그 이후의 시간을 같이 걸어온 사람이라면, 폭주를 막을 수 없고 견제할 힘이 지금껏 없었다는 걸 목도해 온 국민이라면 검찰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검찰을 공소청으로 개편하고 검수완박을 하면 끝나는 일일까.


검찰권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그 권한을 분산시키고 윤리에 맞지 않게 부당하게 행사할 경우 그들에게 징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검찰 앞에 놓인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것이다.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형사 사법과 부당한 기소를 남용해대던 과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 어떤 식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저자는 외국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답을 찾고자 한다. 주요 범죄 기소를 아예 시민들이 결정하게 한다거나 (미국 대배심), 검사가 불기소하더라도 시민들이 뒤집을 수 있는 시스템(일본 검찰심사회), 혹은 스페인 · 노르웨이와 같이 공무원의 법 왜곡 행위를 처벌할 수 있게 하는 것 등. 그 어느 나라에도 완벽한 시스템은 없지만 이렇게 검찰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일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너무나 비대한 검찰권은 단 한번도 제 존재를 축소해본 일이 없이 검찰 주류의 이익을 위해 국민에게 칼을 겨누는 걸 꺼려하지 않았으니까.


많은 국민들이 검찰을 주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몰라도 좋을 판검사의 이름을 우리는 몇개씩이나 알고 있다. 한국 검찰 내부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대부분이었던 그 동안의 글들과는 달리 이 책은 손가락을 밖으로 향해 다른 나라를 가리키며 앞으로의 우리 검찰이 나아갈 길을 다방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에 맞는 새로운 검찰 제도에는 무엇이 있을지, 앞으로의 검찰은 어떻게 될지 나름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게끔 하여 당면한 시대적 과제에 분명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 세계의 검찰도 나오는 1부와 달리 2부에서의 감정 이입과 열받음은 진짜 상상을 초월함^^ 야잇.....


++ 그게 진짜 웃김. 검찰 로고가 대나무의 올곧음을 상징하고 중립성? 공정성? 청렴함? 독립성? 뭐 그런게 있다는 말이. 뭐 하나 있는 게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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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자들 위픽
백온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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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가 전부라서, 전부를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을 모질게 끊어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한 거겠지. 덜 사랑하면 덜 슬플 줄 알았는데. / p.100


연고자 (緣故者)

혈통, 정분, 법률 따위로 맺어진 관계나 인연이 있는 사람.


어느 날 윤아는 보육원에서 친남매처럼 자란 태화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윤아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는데, 태화가 매일 밤 윤아의 집 초인종을 누르며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말' 속에서 절대 가족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전부를 잃지 않기 위해 전부를 끊어내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이는 맹목적인 애정을 찾아 타인에게 목을 매고 준 크기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에 결국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사려가 부족했던 방어적이고 비겁한 마음들은 끝내 안에서부터 곪아 결국 영혼에 깊이 새겨져 아물지 않을 상흔이 된다.


윤아와 태화의 관계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가족도 아니면서 우정도 사랑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의 전부임을. 서로에게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투영할 수 있는 관계에 고작 '전부'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래서 태화는 연인이었던 지현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윤아를 끊임없이 찾아왔던 거겠지. 그런 연고자니까.


덜 아프고 싶어서 덜 사랑하려 하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상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러는 마음인지 몰라서 선택하게 되는 비극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해두어야 하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눅눅하게 젖어가는 마음이 무거워 고개를 숙였는데, 어쩌면 그런 게 사랑의 무게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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