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들을 생각해
정지혜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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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사람의 몸을 빌리지 않고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단다. 그래서인지 목야에는 귀신에 씐 사람이 많았다. (p.84)


가장 무서운 귀신은 물에 빠져 죽은 수살귀이며, 그런 연고로 해안가나 섬에 있는 무당은 대체로 영험하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바위와 절벽으로 해안가가 둘러싸인 섬 '목야'가 있다. 이 작은 섬의 학교에 전학온 아이는 강령술을 퍼뜨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장난처럼 유행한다. 귀신을 불러오기에 더 없이 완벽한 무대에서 '지은'은 그것을 부르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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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아이의 감정에 도통 공감이 가지 않아서 혼이 났다. 슬프고, 억울하고, 또 관심받고 싶고 그 복잡한 애증은 이해하지만 이 감정이 부모가 아니라 자기보다 어린 아이, 즉 약자를 향해 폭력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보며 아...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순수악이라고 보기에는 양심적이었고 청소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덜 자라서 미숙한 아이. 이 아이가 불러낸 것은 정말로 귀신이 맞을까.

그 위태함을 읽어내고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자마자 책에 무섭게 집중이 되었다. 각자 사람에게 받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퍼즐처럼 서로에게 끼워진다. 각각으로도 온전하지만 연작으로서도 완벽한 부품이 되는 치밀한 연결성을 눈치채는 순간의 쾌감이 강렬하다.


공포 소설이라는 장르로 분류되지만 공포는 곧이어 애틋함과 씁쓸함 등의 입맛이 쓴 감정으로 변모한다. 작품은 주인공을 일종의 도파민을 줄 뿐인 도구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정교하게 짜여진 구조는 아이들을 위해 상처받은 경험에 나름의 매듭을 짓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각 단편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내미는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위로. 전체가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한 드라마였다.


+ 사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고 아픈 이야기



학교에서 강령술을 시도해본 애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굳이 나를 골랐다. 기다렸다는 듯. 아주 오래도록 나 같은 애를 찾아 헤맸다는 듯. 나의 안은 그것의 머리카락처럼 검고 축축하고 악취가 풍긴다. (p.55, <지은의 방>)

때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펑펑 터지며 별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바다가 번쩍하고 밝아졌다. 악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 개의 머리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p.124, <강과 구슬>)

이젠 엄마 이야기를 할 때도 목소리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괜찮아진 건 아닐 거다. 유년기에 받은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으니까. 딱지가 앉지도, 흉터가 아물지도 않는다. (p.178, <이설의 목야>)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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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업 캐피털리즘 - 시장급진주의자가 꿈꾸는 민주주의 없는 세계 Philos 시리즈 30
퀸 슬로보디언 지음, 김승우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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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사라진 이곳에서 경제적 능력에 따른 분리와 불평등은 일상이 되었고 인권은 자리를 잃어 갔다. (P.449, 역자 해제)


정부의 개입이 없는 신자유주의는 어디로 튀어오를까. 자본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급진적인 세계. 국가를 벗어난 새로운 '구역(Zone)'. 어렵지 않다. 이미 있다. 도시국가, 도피처, 면세 구역, 경제특구 같은 곳. 민주주의나 국가의 개입 없이 오로지 돈만 있는 공간. 예를 들면 홍콩, 싱가포르, 런던 도클랜드. 이런 곳들은 오로지 자본만을 위해 민주주의에 균열을 내며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구멍을 늘리고자 하는 움직임을 바로 '크랙업 캐피털리즘 CRACK-UP CAPITALISM' 이라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규율이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부재였다. 어떤 노조나 대중 선거도, 노동자나 시민을 위해 존재할 수 없었다. 홍콩의 금융 기밀주의는 식민지 총독보다 중요했다. (p.41)


서문에서 저자는 하리 쿤즈루라는 작가의 『빨간 알약』이라는 소설을 통해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있는 급진적 형태의 자본주의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공공 정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거래만이 그 자리를 대신 하는 체제, '권리Right' 가 없고 단지 '권력Power'의 행사만이 존재하는 공간. 이런 곳에서 개인은 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책에서는 홍콩, 싱가포르부터 리히텐슈타인, 실리콘밸리, 소말리아 심지어 메타버스라는 가상공간에까지 존재하는 급진적 자본주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는 두바이의 사례가 가장 가시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본다. 부유한 나라의 외국인 거주자들은 우리가 아는 그런 두바이의 삶을 즐기는 반면, 육체노동자들은 철조망으로 둘러싼 야영지에 수용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권리 없이 노동하고 있는 현실. 다른 이들의 권리 위에 세워진 찬란한 자본의 성.


두바이는 모국보다 더 많은 임금을 보장하지만 영주권 없이 언제든지 고용 후 해고, 추방이 가능한 정책으로 남아시아 지역의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법적 보호 정책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위협할 수 있었다. (p.254)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항상 독재나 전체주의 같은 어떠한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는 떠올려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하나씩 민영화되어 가고 노조는 탄압되고 기업 친화적으로 변하는 정책들을 보면 저런 세상이 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트럼프 이후 빠르게 극우화되어가는 미국을 보고 있자면... 이 책은 크랙업 캐피털리즘을 꿈꾸는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실패 사례로 마무리 되나, 현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그들의 전략은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급진주의자가 꿈꾸는 민주주의 없는 세계', 그 곳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쯤에 있을까. 개인적으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지만, 권력자들에게 반드시 던져주고 싶은 책이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구조가 괜찮은 비문학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챕터의 첫 머리나 말미에 챕터에서 하고 싶은 말을 요약 정리 해주는 쪽을 선호하는데 (ex. 총균쇠) 그냥 계속 정보가 흐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들었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 같아 계속 집중이 흩어져서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쉬이 읽히지는 않아서 다른 필로스 시리즈에 비해 만족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 역자 해제가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 강의력 떨어지는 교수님의 수업과 그걸 커버하는 능력치 좋은 조교의 합작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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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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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첫 문장으로 쉬이 이 아이의 삶을 예상할 수 있다. 하나의 민족에 속하지 못하며, 피부색만으로 평생 가져가야할 불편한 시선을.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알겠지만, '단일 민족'에 집착하는 이 땅에서 혼혈 특히 동남아 혼혈의 삶은 녹록하지 않다. 


주인공인 재일의 가족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계획한다. 기회의 땅, 다민족이 섞여 살아가는 그 곳으로 가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기대하며. 이 과정에서 베트남 사람인 어머니의 의견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묵살되고, 동생의 손을 잡고 베트남으로 간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응축된 분노의 표상이었고 합의된 공격 대상이었다. 핍박받으나 반항하지 못하는 존재였고, 그래서 더욱 응집하지 못하는 개인이었다. 개인이었으나 집단이었고 또한 어떤 개념이었다. 소수의 부정한 존재였으며 위험을 상징하는 대상이었다. (p.286)


첨언하자면 나는 재일의 이름도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jail(감옥)이 생각나는 어감 혹은 '재일교포' 할 때의 그 '재일'이 생각나기도 하고. (물론 일본이 아니라 미국으로 갔으니 이 경우 재미교포겠지만) 소수자로서 받는 불합리한 차별과 멸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존재만으로도 위험 인물로 찍힌 낙인과 그의 행동을 샅샅히 감시하고 흰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 속에서 재일은 어디를 가든 언제나 감옥에 갇혀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미국 땅을 밟아도 재일은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이다. 파란 피부는 여전히 그에게 강력한 소수성을 부여했으며, 아시아인, 베트남인도 한국인도 아닌 혼혈, 편부 가정.



수 많은 사람들이 재일에게 소수자답기를 강요한다. 소수자로서 의견을 내기를. 마치 들어주는 척하는 그들의 행위에는 자기 만족과 우월감이 숨어있다. 주류가 허락하는 답을 주장하기를 바란다. 학생들과 선생들 어디에서도 재일은 도망갈 수 없었으나, 학교에서 그는 자신을 돕는 셀마와 백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파란 피부의 클로이와 만나고 친구가 된다. 그 시간은 재일에게 있어 거의 유일한 안온함이었으나 클로이의 전학으로 오래가지 않는다. 클로이는 '파란 피부'로서 느낀 차별과 모욕에 대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유명세를 얻게 되었으며 재일은 그런 클로이를 응원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 반발심을 느낀 이에게 살해당한다. 이 일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재일에게는 불행이 밀어닥친다. 




나는 사이먼이 쓸모없어진 클로이를 폐기 처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반짝이는 트로피, 자신이 선량한 이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명찰, 파란 피부의 친구라는 타이틀, 한때 그러했던 기록. (p.156)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부자 사이에 어떠한 정서적 교감이 없었으므로 그저 나의 住와 食을 제공한 것만으로 감정의 골을 어거지로 메우지 않는 점이 좋았다. '그래도 키워준 부모인데.'를 강요하지 않는 점. 


이 소설에서 재일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표본이다. 한국에서는 같이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고 위에 군림하듯 행동하고, 같은 한국인에게는 굽신거리며 미국으로 넘어와서는 역으로 자신이 차별했던 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이 되어 차별받으며 분통을 터뜨리나 흑인을 차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차별은 아들인 재일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깨달음도 없으며, 아들을 마치 통역기처럼, 도시락을 싸주는 도구처럼 취급한다. 피멍이 든 채로 돌아오고 집에 보안관이 찾아와도 그는 재일의 상태를 묻지 않는다. 재일은 가정 내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여 부유했다. 외로웠겠으나 자유로울 앞으로의 여행에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어떠한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차별이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 (p.185)



작가는 다양한 차별적 시선을 그저 그려낸다. 감정의 처절함이나 시린 문장이 없다. 날 때부터 차별과 함께였던 재일은 외롭고 아프고 우울했으나 부정적 감정에 깊이 매몰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누구도 가본적이 없는 길이었기에 재일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으며, 대처할 방안을 알려줄 이들이 많지 않았고, 옥죄는 다양한 시선의 감옥 속에서 애초에 꿈도 꾸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재일과 같이 불합리한 상황을 그저 목도한다. 담담한 글과 철저한 자료조사는 서사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그는 정말로 어딘가에 파란 피부로서 같이 살아가고 있을 것 같으며, 개인적 공감을 넘어 이야기 곳곳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차별을 받는 자, 하는 자 모두에게서 나의 파편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차별에서 나는 자유로우리라는 알리바이는 없다. 여기에서 무너지거나 회피하거나 혹은 세계의 전복이 아닌 그저 마주하는 재일의 힘으로부터 공존과 연대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읽는 이를 성장시킨다.




​성별, 세대, 인종, 국가, 종교로 분류된 인간은 연대가 필요한 집단과 분리됨으로써 고립된다. 군림하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도구로 작동한다. 이것이 종으로 연대한 결과다. 종으로의 연대는 차별과 계급화를 심화시킨다. 계급화된 상태로 분열하고 고착된다. 이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수직 결합을 벗어나야 한다. 수평적 구심점을 확보해야 한다. 평행한 타인과 연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종이 아닌 횡으로의 연대다. 횡적 연대다. 집단에 맞서는 집단이며 구조를 전복하는 구조다. (p.304,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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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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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상황인데도 묘한 담담함이 어떠한 외침이나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마음을 크게 울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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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이데올로기 - 수저 계급 사회에 던지는 20가지 질문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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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의 국가별 소득 분포 자료를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몫보다 더 벌어가는 사람은 10% 정도인데 제 몫보다 덜 버는 사람은 70%나 된다. / 첫 문장


성실한 노동 만으로는 타고난 계급을 바꿀 수 없다는 인식 하에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코인의 유혹이 사람들 사이에서 거세게 불었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코인을 ‘신분 상승의 사다리’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이른바 커다란 ‘한 방’이 없다면 타고난 수저를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고, 그로 인한 불안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금수저로 태어나면 계속 금수저지만 흙수저로 태어나면 아무리 ‘노오력’해도 금수저가 되기 어렵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부의 대물림이 구조화된 ‘수저 계급 사회’가 되었다. (p.56)


한국인들은 불평등을 인식하고 있다. 변화가 없으리라는 부정적 전망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수용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는 어째서일까? 금수저는 어째서 당연히 금수저이며 흙수저는 어째서 죽을 때까지 흙수저야 하는가. 이 높은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힘이 강해져야 하는데 자본가도 아닌 일부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지, 현 정권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어떤 계급인지. 불평등을 조장하고 정당화 하는 것은 누구의 이데올로기인지. 어떤 질문을 하고 답을 마음 속에 내려봐도 너무나 부정적인 답안지만이 나오고 있다.


취준생을 일자리 빼앗긴 피해자로, 전환 비정규직을 일자리 빼앗는 가해자로 만든 것은 보수 야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p.251)


상위 10%와 하위 50%의 소득 격차가 급격히 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상위층을 단단하게 유지시켜줄 불평등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득권층과 언론은 교묘하게 노동자들 내부에서 서로가 총질을 하게끔 부추기고 있다. 그들의 손가락이 결코 자본가를 향하지 않게끔, 나의 적은 옆에 있는 나와 같은 다른 사람이라는 듯. 부추겨지고 확산된 불안감은 이 문제를 크게 볼 수 없도록 당장의 밥그릇만 보이게 시야를 축소시킨다.


죽어라 일해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주(住)만을 원하는 사회. 당장 내 몸 편히 뉘일 온전한 나의 집이 없어 내면이나 정신적 성장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회. 이럼에도 노후를 장담할 수 없는 사회.

다수가 이 부조리를 인식하지만 체념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출구는 정말 없는걸까.


이재용·박근혜 게이트는 국가 권력의 정상인 대통령과 시장 권력의 정상인 삼성 재벌 총수가 불법 비자금을 매개로 국가 권력을 농단한 사건으로 정경 유착의 불법성과 불공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재용·박근혜 게이트는 ‘수저 계급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성을 겪으며 누적된 시민들의 불만을 광장으로 불러내고 촛불을 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p.295)


재벌에게 날리는 통쾌한 한 방이 있는 영화 <베테랑>의 흥행, 지나친 재벌 갑질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모두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갔던 2016년. 각각의 사건들은 불평등을 한국 사회가 속 깊이 용납하고 있지는 않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조금의 계기가 있다면 이 사회는 힘을 합쳐 저항할 것이다.


앎으로서 오는 작은 촛불 같은 희망은 불평등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파고들어 균열을 낸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 살면 돼.’ 의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내가 살 수 있다. 해당 저서는 체념하며 수용하던 계급 부조리에 일단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므로 현재 시기적절하게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한국 사회가 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상태보다 선택과 기회가 주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좀 더 공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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