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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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없는 세상이란 거짓 개념이며, 그 역사에 군데군데 구멍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11


문학을 읽다보면 내가 사랑 렌즈를 껴서 그런게 아니라 진짜 주인공의 의심스러운 친구들이 있다. 우정이라는 탈을 쓰고 가슴이 짜르르 울리는 짓을 하는 앙큼한 녀석들, 내가 그런 녀석들 때문에 친구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게 친구라면 나는 친구가 없다.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는 그런 작품들 속 퀴어의 이야기, 특히 고대의 이야기를 긁어모아 묶은 책이다. 제목이 너무 직설적인가. 저 문구는 강렬한 동성애 감정을 노래한 시의 일부분이다. '키스가 죽음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예요'. 미친 사랑의 노래다.


또 한 번은 어린 소년인 스포루스를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그를 거세시키고 억지로 끌고 와서 사포를 씌우고 결혼식을 올렸다. / p.160, 네로와 스포루스


절절하고 비극적이라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도 있지만 진짜 행위가 노골적이고 솔직해서 아찔한 것도 많았다. 현대 시민으로 살면서 들어본 적 없는 날 것의 표현도 많았고, 충격과 야만 그 자체인 서사도 많았다. 디오니소스와 어떤 인간 남자가 원나잇을 약속했는데, 인간이 죽어버리자 신이 슬퍼하며 그 무덤 위에서 딜도를 꽂아 맹세를 지켰다는 전개의 이야기같은. 이것보다 수위가 센 이야기들이 많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리 낭만이라지만 단어 하나만 바꾸면 야만인데 여기는 야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르티알리스의 풍자시라던가 정신나간 네로라던가....카툴루스가 분노하며 하는 저주라던가(p.127)... 지금 이런 말 하면 상대한테 백퍼센트 고소 들어온다. 그냥 모가지를 따버리는게 나을 수도 있을 정도의 수위다. 



"지금 증명할 수 있어요. 내게 기회를 줘요. 그러면 곧 내가 그 어떤 남자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나한테 남자의 물건과 비슷하게 생긴 장난감이 있어요. 조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반드시 보여줄게요." / p.36, 스리섬 이야기


고대에 얼마나 소년애가 장려되었는가는 인간의 성별은 세 개였다고 하는 플라톤의 말에서 살짝 엿 볼 수 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세 번째 성. 여성을 욕망하는 남성은 제 3의 성으로 보고, 온전한 남성이라면 본성상 남자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며 남성에게 끌리는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그것을 '남자답고 고귀한' 특성으로 보는데 그 분류에도 여성끼리의 사랑은 없었다. 여성들끼리의 사랑은 그 때도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마치 문 닫은 열린 교회 같은 느낌. 아킬레우스도 헤라클레스도 남성을 사랑하고 당당하게 소년 연인을 전시하고 다니는데 왜 여자만 신에게 '남자로 만들어달라는' 기적을 구해야 하는지.



고대가 아무리 동성애에 열려있고 심지어는 소년애가 권장된다 하더라도 여성 차별은 뿌리가 깊다. 꼭지 중 '남자의 마음과 욕망'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처럼' 여성을 사랑한다고 텍스트에 적혀있다 해서 그를 트랜스 남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나? 그냥 여성으로서 다른 여성을 사랑한 건데, 그 당시 기준 "사회적으로 학습된 남성상"인 모습이라 그렇게 적힌게 아닌가. 왜냐면 남성끼리의 사랑은 권장되었으나, 여성끼리의 사랑은 당시에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남성은 전쟁을 하고 여성은 출산을 하는 것이 미덕이자 의무였던 고대의 시대적 특성 상 종족 번식이 되지 않는 여성끼리의 사랑은 배제되었던 걸까.



에로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단순히 뒷받침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도록 사람들을 부추김으로써 아레스를 능가한다. / p.165


사랑에 빠진 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는 결코 후퇴하거나 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로맨틱하다. 옆에서 같이 싸우는 게 연인이기에 절대 물러설 수 없고 서로를 지켜야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전쟁과 파괴 신 아레스보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더 강력하다는 말은 사랑의 힘의 놀라움을 증명한다. 이런걸 보면 고대에 남자들의 사랑을 응원한 건 잦은 전쟁에 써먹을 병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나치즘이나 국가때문이 아니라 옆의 전우들을 위해 싸웠고 탈영률은 0에 가깝고 연합군보다 평균 50%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전우의 힘이 군대를 강하게 결속하는데, 전우가 연인이라면 더욱 강한 힘을 내지 않았을까.



이 책은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 계속 몰아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 꼭지당 내용이 짧다는 건 쉽게 읽히고 긴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깊이가 얕다는 어쩔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를 불러온 게이 커플'에서 이 커플이 독재자를 살해하고 공모자를 고발한 행위가 왜 민주주의를 불러왔는지 본문 내용만으로는 쉽게 제목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각자의 내용이 굉장히 재밌으므로 책이 조금 더 두꺼워지더라도 길고 자세히 작성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고대에서부터 노래되어 온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지만 동성애 자체보다는 강력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다를 것 없이, 때로는 더 강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현대 미술과 만난 고대의 퀴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을 박살내고 재해석한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품는 감정에 '정상'을 따로 정의할 수 있는가. 날 것으로 느껴질 만큼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능청스레 풀어내는 고대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다듬어지고 정제된 글보다 특정 관념의 세계를 강하게 부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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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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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뒤로도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친절한 동료부터 평생 나를 사랑한 부모님까지. 이별은 익숙해질지 언정 덜 슬프지 않고, 미완으로 남은 기억은 언제까지나 가슴 한편에서 나를 부른다. / p.246


최근의 미디어는 그야말로 도파민으로 가득한 자극과 '악'의 승리, '선'의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선은 너무나 연약하고 악은 항상 승승장구하며, 결국 그 악과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악'으로 분장하는 서사의 드라마나 영화의 예를 나는 꽤 많이 들 수 있다. 세계는 후퇴하는 것 같고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는 언제나 반복되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그래도 나아질 거야'라는 말을 하려면 다소 용기가 필요하다. 현실을 모르니까, 머릿속이 꽃밭이 아니냐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모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는 걸까.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는 걸까.




이 책은 두 가지의 큰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연작 소설들로 이루어진 [카두케우스 이야기], 보다 더 현실적인 배경으로 돌아와 일상에 닥친 재난을 이야기하는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표제작 <미정의 상자>는 바로 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에 속해있다. 모든 이야기에 약간의 픽션이 곁들여져 있지만 결국 평범한 개인의 소박한 일상을 뒤트는 장치로서의 기능만 할 뿐 그렇게 어려운 과학적 문제가 있지 않아 쉬이 읽힌다. 



나는 이 두 테마에서 '시간'을 가장 눈여겨보았다. SF 역시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그 마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소연 작가는 시간이라는 소재를 주물러 감정이 변화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낸다. <미정의 상자>는 재난으로 연인을 잃은 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계속 다른 시도를 하는 이야기이며, [카두케우스 이야기]의 단편들은 더욱 시간을 재밌게 사용한다. 우주를 누비며 별들을 뛰어넘는 사람의 시간과 행성에 발을 붙이며 살아가는 사람의 시간의 흐름이 과연 같을까? 서로 보내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다를 때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누군가의 3년이 누군가의 40년이라면. 신파를 찍어낼 수 있다면 찍을 수 있고, 감동을 주려고 작정한다면 줄 수도 있는 설정 속에서 작가는 그저 담담하다. 자극적인 서사와 격정적인 감정 서술에 매몰되지 않는 담백한 글은 읽는 순간보다 덮은 뒤에서 잔잔한 여운을 퍼트린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점은 작가는 그냥 SF라는 살짝의 비현실적 배경을 사용하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중첩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카두케우스'라는 사기업이 우주여행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문제, 회사에서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인간, 조금 더 현실로 돌아오자면 현재 청년들의 주거 문제나 방역 관련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안전불감증과 같은 이야기들. 작가는 다양한 문제들을 아주 태연하게 다루고 있다. 과장 없이 다루고 있는 모습에서 사회 문제, 특히 자본에서 나오는 문제들을 굉장히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일상화된 사람의 덤덤함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그 부분이 놀랍다. 시선은 차갑지만 온기는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 알면서도 '확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감을 믿는 단단함이 반짝인다. 



사회의 우울을 읊기 쉬운 시대에 작은 희망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슬픔을 겪고 있더라도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시선이 모든 수록작들을 관통한다. 눈이 부시지는 않더라도 확실하게 빛나고 있는 용기를 가진 책이라서 덮은 뒤 좋은 여운이 오래 남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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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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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들어서고야 마는 것은 나의 정해진 패턴이었다. / 첫 문장


9년 전 캄보디아로 4개월간 해외 봉사활동을 갔던 동이, 혜란, 석이. 귀국 후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동이는 혜란으로부터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사람은 외따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개인의 평온을 위해 다른 사람이 힘을 쓰고 있으며, 나의 생활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사람이란 서로에게 빚을 지고, 빚을 지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캄보디아에서 해외 봉사를 하며 친하게 지내던 세 친구는 세월호 참사 이후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부채감에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나의 현실이 버거워 외면하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곤해한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그리고 우리는 몇 달 전에 큰 또 한 번의 사고를 겪었다. 운이 좋아 나를 빗겨갔을 뿐인 국가적 참사들. 사회는 그 참사를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 날보다 더 안전해진 제도 아래 실질적으로 득을 보는 것은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때때로 잊히지 않는 것이 바로 영원"이라고 책은 말한다. 잊히지 않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영원이라면 우리는 영원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기꺼이 져야만 하는 것이다.



+ 왜 요즘 예소연 작가가 주목받는지 알 것 같은 작품이었다.

++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인덱스가 덕지덕지 붙어있던데 ㅎ...저두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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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 1~2 세트 - 전2권
샬럿 브론테 지음, 송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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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출간


이게 은행나무에서 나오네요! 기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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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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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내 시간은 여행도 취재도 연구도 아니라 ‘사는 것’이었다. 관계를 만들고 대화를 나누고 호의, 기쁨, 감동과 경이, 긴장, 때론 불안과 불쾌 같은 순간순간의 감정을 지닌 채 하루하루 일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 p.276


읽으면서 계속 남극의 풍경을 상상했다. 새하얀 유빙과 그를 바라보는 새까맣고 동그란 펭귄의 등 같은 것을 생각했다. 세상의 끝에서 그 까만 눈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눈에 담고 있을까. 


'남극'하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생겨나는 부채감을 안고 책을 폈다. 미디어에서 많이 보는 것처럼 무거움과 무서움이 있겠거니, 그 안에서 기후를 위한 어떠한 교훈을 남겼겠지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작가는 남극에서의 일상을 적어내려갔다. 남극에서 마주한 거대한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사랑스러움 같은 것들. 인류가 남극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작가는 그보다 무정하며 담담히 존재하는 자연의 경이로움, 인간도 그곳에서는 한낱 종種의 일종일 뿐이라는 그런 겸손함을 적어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거만하게 내가 너를 살리니 죽이니 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은 너무 작다는 게 느껴지는데 지구 전체에 생명력을 흘려보내는 남극에 서 있으면 나라는 개인은 과연 어떻게 느껴질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남극의 생물들과 그 모든 것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남극 땅은 일종의 희망과 같다.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라는 책 제목이 계속 떠올랐다. 자연의 거대함, 끊임없이 태동하는 생명력. 나는 남극을 너무 약하게 보고 있었다. 자연과 인류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이 필요했고, 나는 이 책으로 힌트를 얻었다. 인간은 많은 것들의 도움으로 생을 이어간다. 인간종 뿐이 아니라 많은 종들과 공생하기에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다. 공존과 우정이 만들어내는 연대 의식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쉽게 많은 것을 파괴할 수 있을까. 차가운 땅에서 작가가 가져온 희망이자 미래의 방향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보다 대륙 자체의 '자연성'이 앞섰고 그 안에서 인간은 모두 다를 것 없는 '종'이었다. / p.252


+ 펭귄 일러스트가 진짜 가슴 터지게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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