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 한 시골교사의 희망을 읽어내는 불편한 진실
황주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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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학교에 들어간 딸 아이가 있다는 황주환 선생님은 시골교사로 10여 년을 지내오셨습니다. 지나온 10년이란 세월이 무상하게도 그 세월이 지나와야 겨우 무언가를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그 깨달은 바를 이렇게 탄탄한 내공이 쌓인 글로 풀어놓으셨는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 교육정책 입안자들, 대학당국과 대통령과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합니다. 이 책을 읽고 바로 서평을 쓰는 것이 아니라서 황주환 선생님의 날카롭고 울림이 큰 직언을 대변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제 생각과 제 사상과 제 몸과 제 인생을 맴돌고 맴돌아서 나오는 한 말씀이기에 어쩌면 조용한 듯 하지만 더 큰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 선생님은 감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에는 교육 문제는 없다고 말이지요. 우리나라에는 교육이 아니라 입시문제만 항상 불거져 나오고 정책이 바뀌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설왕설래하기도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고도 불편한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말하길 꺼린다고도요. 그리고 감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교육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요.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이란 기득권자들의 수하를 만들어내는 공장에 다름이 아니기에 서민 즉, 피지배층의 생각까지 기득권자들의 논리로 무장시켜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언론에서는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교권이 상실되었다는 뉴스를 계속 내보내는데, 실은 그 조례가 있기 전부터 교권은 이미 상실되었고 학부모의 교사 드잡이는 항상 있어왔던 것이랍니다. 이전부터 있어왔던 교권 상실의 문제를 언론이 왜 문제를 삼느냐면 차후에 비정규직의 신분으로 기득권층의 노예가 될 대다수 청소년들의 생각을 짓누르기 위한 통제가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랍니다. 두발 통제, 교복 통제, 체벌로 인한 신체의 억압 등을 통해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면화시키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머리 모양도 자유화되고, 신체에 어떤 것으로도 억압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조금씩 꿈틀거릴 때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학원 강사입니다. 황 선생님만큼은 안 되지만 꽤 오랫동안 해왔지요. 그런 제게 황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 한 구절이 제 가슴에 박혀 버렸습니다. 교실은 굴종과 억압의 장소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비싼 돈을 받고 아이들이 지도해야 하는 사설 교육업체의 일원으로써, 받은 만큼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저로서는 아이들에게 얼마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됩니다. 효율과 성과라는 기치 아래 아이들은 학원의 규칙에 따라 조용히 해야 하고, 그날의 성과를 보여줘야 하며, 기준치에 미달일 경우 그에 합당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황 선생님과는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물질의 부족함 때문에 방황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만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들은 많습니다. 점심을 못 먹을 정도의 가난은 아니지만 소유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져서 아이들끼리도 위화감을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학원은 공교육이 아니기에 빈곤이나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가정이 깨어진 아이들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교육 문제의 근간에는 분배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황 선생님의 통찰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바였습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학업에 따라오려면 부지런히 노력해야 겨우 따라갈 아이를 보고 있으면 부모의 경제력을 가늠하게 되거든요. 그러니 시골은 얼마나 더 참담하겠습니까.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 논술을 잠깐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숱하게 들었던 말이 현상과 본질이었죠. 모든 현상에는 본질이 따로 숨겨져 있기에 겉에 있는 모습으로만 평가하지 말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함을 항상 강조하셨던 논술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황 선생님의 책을 보면서 그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지배계급의 은밀한 의도대로 세상이 - 영화가, 드라마가, 광고가, 문학이, 뉴스가, 신문이, 방송이, 관련 법규가, 지식인들의 언행이 - 움직이고 있는데 그 밑에서 자신에게 치명적인 것을 모른 채로 멍청하게 주입하고만 있는 피지배계급인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선행을 베푸는 소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나름 자위하며 결국 좋은 곳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아무도 나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요. 아무도 자기보다 덜 가진 자를 위해 자기 소유를 기꺼이 내주지 않을 것을요. 안 보고 안 듣는다고 해서 그런 보기에 좋지 못한 일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우리의 모든 행위가 - 신문을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방송을 보는 모든 것이 - 전부 정치적이라는 것까지도요.

 

요즘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계급이라는 말도 불편해한다고도요. 하지만 싫어한다고, 불편하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기득권자들은 가진 것 없는 우리가 그런 말을 안 하길 바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테니까요.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인종청소할 때 그들은 ‘학살’이니, ‘제거’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신 ‘경로 이동’, ‘최종결과’라는 일상적인 말을 쓰길 좋아했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불편한 양심의 가책을 모른 척 하기에 수월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을 반영하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무한 경쟁’을 강요하지만 실상 ‘완전경쟁’이 가능하지 않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병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은 유대인 학살의 전범인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모습을 담은 철학 사상책입니다. 거기서 중간관리자였던 아이히만이 하는 말이 참 걸작입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상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거든요. 그의 진술에 대해서 여러 심리학자들이 평가를 해본 결과, 그는 정신적으로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실로 자신을 무죄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사람을 대량 학살해놓고서도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요. 한나 아렌트는 말합니다. 진정한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생각 없음’이라고 말이지요. 상관의 명령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악까지 행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가난해서 점심을 거르는 상황에 놓여있지 않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에 더 생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이히만처럼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으니까요.

 

서북부 유럽에서는 육체노동자의 임금이 정신노동자의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머리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몸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먹고 싶을 때 통닭을 배달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더러운 곳을 청소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물건을 보내고 싶을 때 운반해주는 기사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임금의 형평성과 모든 교육비의 무료화와 의료비의 무료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서북부 유럽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들처럼 복지국가가 되기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상위 몇 %에 달하는 기득권자들은 복지국가가 어쩌면 공포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밥그릇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요. 우리 아이들을 현실에 찌들지 않게 할 방법을요. 우리가 우리 소리를 낼 방법을요. 모든 현상은 분명 어떤 본질을 품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거저 주지는 않습니다. 과거 민주화 항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거 전태일이 분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노동자들은 여전히 16시간씩 일하고도 풀빵 하나 사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거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르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는 눈물로, 핏방울로 치렀던 것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용산 대참사에도, 거대한 괴물 삼성에도, 이 땅의 모든 사립학교에도, 비리의 온상인 교장선임제에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의심하며 봐야 할 것입니다. 황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알지 못했던 교사들의 일상이 보입니다. 교장선생님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리가 많이 생길 수 있는 것인지, 왜 교육청에서는 교장선생님을 뽑을 때 교사나 학부모가 선출하게 하지 않는 것인지, 사람을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만 보는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더불어 시골 교사로 10년째 살아온 황 선생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되셨는지 그에게 영향을 준 여러 권의 책도 알려주십니다. 한 번 뜬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습니다. 바보 같이 맹종하며 살았던 과거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평생 세상을 감시하며 이 세상을 조종하는 본질을 꿰뚫어내는 참된 시민으로 거듭나는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다 같이 동참합시다. 이 책은 한국시민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겠습니다. 별점은 백만 개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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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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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학과를 나오셨다는 인문주의자 최성일 씨의 글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거야 원... 나는 국문학과를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글을 잘 쓴다는 고루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이것은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란 생각이 들었다. 비문이 많다거나 글을 말도 안되게 썼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쉽게 읽혀지지가 않았다. 제일 처음 당혹스러움을 느겼던 부분은 서문이다.
 

‘나의 첫 과학책’은 『소년소녀발명발견과학전집』(국민서관, 1971)이다. 그러니까 이 아동 전집은 내가 네 살 때 세상에 나왔다. 달수로 따지면 3년 6개월이다. 이 책의 존재를 안 것은 1970년대 후반, 형들이 보던 1970년대 초반 어린이 잡지를 통해서다. 나는 아버지에게 월부 책장수가 팔았을 이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어느 서점에서 책을 사다 주셨다. 책갑만 없었을 뿐이지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 p. 4~5

 
문장에 비문은 없다. 하지만 온갖 구어체와 짧은 길이의 문장으로 쓰여져서 문맥의 흐름이 끊겨버린다. 사실은 내가 평소에 서평을 쓸 때 저런 식으로 쓸 때가 많았는데 아는 분이 구어체로 쓰지 말라고 주의를 주셔도 책의 첫인상대로 문체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름의 개성이라고 치부하고 그런 식으로 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 본 구어체는 나를 참 당혹스럽게 했다. 요즘 소셜네트워크가 활발해지면서 심각한 수준까지는 아니여도 간간히 구어체와 외계어가 보이는데 그 정도는 애교로 보아 넘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공적인 통로인 단행본에서까지 그런 표현을 보아 넘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은가 한다. 평소 과학책을 좋아하는 문과 성향의 일반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과학책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궁금해서 이 책을 들었는데 결단코 어렵지는 않지만 문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읽는데 난항을 겪었다.
 
그런데 그런 서문의 글이 그대로 본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서문에서 자신이 만난 과학책에 대해 나열해두는데 서문에 나왔던 책이 본문에 나올 차례가 되면 서문과 거의 흡사하게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글을 쓸 때는 같은 내용이라도 다르게 표현하여 새롭고 참신함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비단 나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문을 봐도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듯한 문체에 서문에서 봤던 그 말이 그대로 베껴쓰기해서 나오니, 순간적으로 서문을 다시 읽고 있나 착각을 했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성의없는 글이라 하겠다. 인문주의자라 자처하는 그에게 과학은 자신의 전공이 아니니 좀더 편안한 분위기로 가려는 의도는 읽을 수 있으나 그 의도가 상당히 지나치지 않았나 한다. 어쨌든 모든 사람에게 찬사를 받을 순 없으니.
 
총 39권의 주요 과학책을 들어 조목조목 분석해놓는데, 한 꼭지에 두 권이 같이 편집된 경우도 있어서 실제로 설명된 책은 39권이 조금 넘는다. 가장 좋아하는 과학자인 칼 세이건에 대한 책이 앞부분에 와있고, 각기 좋은 점이나 나쁜 점 등을 설명해놓는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오탈자나 번역의 미흡함을 지적해놓은 부분이다. 아무래도 과학에 정통하지 못하다보니 그렇게 꼬집어서 오류를 수정해주지 않으면 잘못된 정보 그대로를 기억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참 고마웠던 부분이다. 다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떠올랐을 뿐. 그런데 어쩌면 나는 과학책을 좋아하는 마음에, 이 책에 큰 기대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깊이있는, 그리고 편파적이지 않는 정보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였는데, 이 책은 그런 내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해서 더 크게 실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여기에 등장하는 책들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뮤지코필리아』와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로, 전자의 저자인 올리버 색스의 경우에는 나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신경학자이고 내용도 충분히 잘 전달해주어서 좋았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몇 쪽 할애하지도 않고 누구나 아는 내용만 나열해서 상당히 별로였다. 나는 그 책을 읽을 때 정말 생각할 거리도 많아지고 내용도 더 깊이 이해하면서 읽었는데, 최성일 씨는 그냥 책의 내용을 몇 가지 옮겨와 적은 것 같은 불성실함을 보여주었단 생각이 든다.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을 쓴 가마타 히로키 교수의 요약도 훌륭하지만 그 외에도 자신이 정리하고 평가한 것까지 알기 쉽게 전달해준 것이 내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이 책을 넣었단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평가이고, 같은 책을 읽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오해의 소지는 항상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다방면의 상식을 얻고 좀 가볍게 쓰여져서 부담 없이 과학책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강권한다. 과학책의 입문서로는 나쁘지 않을 것이, 쉽고 재미난 일화를 간간히 넣어주고 폭넓은 범위의 내용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다만 창조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라면 그 성향이 달라서 읽기에 불편할 것이기에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한 마디 하자면,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라 믿음일 뿐이라는 말에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진화론도 같은 기준에 의거해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분명 최성일 씨가 비판한 책에는 둘다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 것인데, 진화론에 대해서만 그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어쨌든 빅뱅이론이니 초끈이론이니 하는 우주를 설명하려는 이론은 반복가능할 수도 없고, 전적으로 추측과 수학적인 모형으로만 평가를 받아야 하는 가설일 뿐인데 그것이 사실인 양 설명하고 전파하는 것이 참 의아할 뿐이다. 사실 아무도 빅뱅을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지 않은가. 그러면 같은 비중으로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가설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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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과학 - 생생한 판례들로 본 살아 있는 정의와 진리의 모험
실라 재서너프 지음, 박상준 옮김 / 동아시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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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만 지나면 새로운 과학 기술이 하나씩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하다. 웬만한 과학 기술의 명칭을 알지 못하고서는 대화에도 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삶의 모든 요소에 과학적인 기술이 들어가는 요즘 시기에, 그 해석에 있어 논란이 되는 것도 무척이나 많을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사는 데는 분쟁이 따라오는 법. 우리가 분쟁을 조정하는데 활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인 재판을 통해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과학적 지식이라고 모든 것을 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선까지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면 안 되는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모호하게 해석된 과학 지식이야말로 사람 잡는 선무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유죄를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기에 항상 과학 지식은 판사나 검사, 그리고 미국의 경우 배심원들에게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혹 이런 내용만 들으면 상당히 간단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떤 과학적 증거가 타당하다고 증명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히려 과학적인 지식에 완전히 반(反)하는 재판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그 결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찰리 채플린의 친자 양육비 지불 소송의 경우, 혈액성 상으로는 절대 친자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이지만 배심원들은 그에게 양육비를 보내라는 판결을 냈던 것을 보면 법정에서는 과학적 지식의 정당성만 가지고는 승소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심원들의 인정과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법정에서 채플린이 어떤 태도를 보였기에 정확한 과학적 지식에 반(反)하는 판정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정에서의 일이 이렇게 되어간다면 우리는 과학을 법정에 세울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일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바로 쉴라 재너서프 박사이다. 그녀는 과학기술학과 비교정치학, 법과 사회연구, 정치와 법인류학, 정책분석을 아우르는 영역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25년 전부터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법과 과학의 접점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선견지명적인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회에 과학의 영역이 점점 커질 것이란 예측을 어떻게 하셨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그녀의 내공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와 미국의 그것은 배심원제와 같이 형태나 비중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과학에 관련된 무수히 많이 축척된 미국의 판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법정이 과학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결정짓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판결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건별로 그리고 피해가 생긴 뒤에야 소급해 다루듯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소송이란 방법을 밥 먹듯이 행사하는 미국의 판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담배를 펴서 폐암에 걸리더라도 담배회사를 고소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테지만, 미국의 국민들은 다르지 않은가. 어쩌면 이런 연구가 미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이유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법을 이용하고 법에 호소하는 자질을 가진 미국인들의 민족성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지금에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화학 살충제인 DDT의 위험성을 알게 된 것도 이런 법정 싸움 덕분이다. 효율이 뛰어나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DDT는 자연환경 속에서 남아 축척되는 가운데 갑각류, 연체동물, 어류의 생체 조직에 해를 끼치고 어류를 먹이로 하는 새들의 생식 주기도 망가뜨린다. 실험 결과, DDT는 인간에게 암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밝혀졌고 미국에서는 신속하게 DDT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농작물해충과 같이 한 생물체에게 유해한 것은 다른 생물체에게도 유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면서 독성 화학물질에 대해서 다시금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또한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법정 싸움을 통해 그 논의되어야 할 항목이 점차적으로 넓혀질 수 있었다. 특히 정신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장애인이나 치매에 걸린 환자인 경우에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회생가능성이 미약하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병으로 식물인간이 된 20대 중반 여자가 있었다. 이 경우에 산소호흡기를 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를 안락사시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상태에 대해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기회를 얻었고 기계를 떼어내면 죽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살아있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더 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육신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멀쩡한 경우에 죽기를 요구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여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많은 논란이 되었다.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걸리고, 정상적인 판단은 내리나 육신이 부자유스러운 경우에는 살인죄로 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안락사에 대한 문제까지도 논의해볼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책은 각각의 판례를 살펴보면서 그 판결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금 정리해주는 친절을 발휘한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접할 때면 쉽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여러 명의 서문을 지나오고 개념이 정리된 제일 첫 장만 무사히 넘어가면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책 내용 자체가 미국의 판례를 든 것이라서 사건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내용 파악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미국의 사건을 잘 몰라도 책에 한 줄씩 설명되는 내용을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보다 분명하게 알고 싶다면 아무래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온다면, 특히 센세이션이 된 실제 사건들로 구성된 책이 나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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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 - 대통령들의 경제교사, 최용식 소장의 경제학 혁명
최용식 지음 / 알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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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회의주의자란 경제학이란 학문이 실생활 경제를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이 책은 실물경제를 예측하지 못했던 기존의 경제학에서 예측가능한 미래경제학의 필요성을 제시하면서 경제를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제시해주는 책이다. 몇 권의 경제책을 들여다보면서 문외한의 눈으로 본 경제학이란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경제학과 실물로서의 경제학이 따로 구분되어 있고, 경제학도라고 하면 의례히 학문과 실물은 다르다라고만 배우는 것 같았다. 심지어 경제학을 잘 모르는 나라도 충분히 현학적인 경제 용어만 몇 개 구사할 줄 알면 경제학자로 이름을 내밀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무도 경제학자에게 경제를 예측하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거의 사회통념처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드는 망상이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실제로는 경제학자들은 상당한 식견과 내공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에 보면, 내 망상을 그저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말이 등장한다.

 


특히 필자는 경제학자와 경제전문가의 비판을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지금까지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글을 발표해 왔고 실명으로 다른 경제학자나 경제전문가를 직접 비판하기도 했지만 경제학계와 경제전문사 사회는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는 침묵을 깨고 어떤 비판이든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 p.9

한국의 그린스펀이라 불리는 최용식 소장의 이런 말이 있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경제에 둔한데 더욱 더 혼란해져버렸다. 그러니까 대학에 몸담고 있는 경제학자들도 실물경제를 주창하고 나선 재야 경제학자의 활동에 대해 가타부타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마치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 책을 다 읽은 이상 또 이 주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관심을 두지 못해 이후에 어떤 반응이 있다고 해도 나는 알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일단 위에 인용된 글로 봤을 때는 암암리에 모든 경제학자들이 최용식 소장의 주장에 깊이 공감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학계에 몸 담고 있는 학자이면서 미처 그런 실물 경제를 파악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의견은 경제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이 하는 말이니,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현 경제학이란 학문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먼저 살펴 그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기타 다른 이론과 통합하여,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현실 경제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원래 경제학이란 학문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최용식 소장이 제시한 미래경제학도 완벽한 이론은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다고 미리 언질을 해둔다.(p.71) 이 미래경제학의 이론 구조를 보면 3개의 층과 3개의 방을 가졌는데, 순서대로 가격이론, 소득이론, 체제이론이 각각의 층을 이루고, 각각의 층은 또 결정원리, 변동원리, 카오스원리로 나뉘어져 있다. 이중 각각의 카오스원리가 경제현실을 합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했을 뿐, 카오스현상의 발생원리는 찾지 못했고 체제이론의 결정원리의 정확한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고 밝혔다. 체제이론의 결정원리는 아예 경제학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문화사나 역사학, 사회학이나 정치학 또는 미래학의 영역에 속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만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미래경제학도 앞으로 더욱 발전해나가야 할 분야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면 당연히 나타나는 경제 영역을 21세기인 지금에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참 희한한 일인 듯 싶다. 우리가 소비를 안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생산요소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데, 그런 것을 한데 묶어서 설명해보라고 하면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참 웃기다. 심지어 그런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께서도 말이다. 이렇듯 경제라는 영역은 언뜻 살아있는 생명체를 다루는 것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영역 같아 보인다. 그런데 미래경제학에서는 그 점에 주안점을 두고 예측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 경제학에서는 경제현상을 정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예측하기 때문에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기업의 독점적 초과이윤은 현실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만 현 경제학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론이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재화의 희소성과 완전 경쟁을 상정해놓고 경제학을 바라보는데 실제로 재화가 희소하고 완전 경쟁을 한다면 궁극적으로 하나의 독점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는 모습으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대부분의 자원은 희소하지만 상대적인 폭을 가지고 있고, 완전 경쟁이 아니라 불완전 경쟁인데다가 모든 것이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까지 설정해두어야 우리가 바라보는 경제현상을 파악해낼 수 있다. 게다가 경제학의 가장 기초인 수요와 공급이라는 두 가지 기준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일차적인 이론이다. 모든 경제 현상은 한, 두 가지의 단편적인 원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 움직이게 되기 때문인데 이제껏 현 경제학에서는 이런 식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 큰 오류를 불렀다. 또한 미래경제학은 시간과 차원이라는 두 가지 범주를 넣어서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좀 더 현실과 밀착되게 설명할 수가 있다고 한다. 수요가 높아지는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그 원인이 단지 가격이 낮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예 소득이 높아져서 수요곡선 자체가 이동했을 수도 있기에 차원이 다른 경우를 상정하고 파악해야 훨씬 현실을 잘 드러낼 수가 있다.

 

이 책은 참으로 예리하다. 이제껏 우리나라를 침체기에 빠뜨린 여러 경제정책을 조목조목 근거와 실례를 들어 비판하기도 하고, 경제현실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경제관료나 경제학자들이 경제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다며 경제현실과 맞붙어 치열하게 살아온 금융인이나 기업인을 정책입안자로 세우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한다. 역시 재야의 경제학자가 쓴 글이라서일까. 왜 소위 말해 잘 나가는 경제학자들이 최용식 소장의 의견에 가타부타 하지 않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누가 제 밥그릇을 빼앗기는데 동조를 할 수 있겠는가. 대놓고 부정하는 것도 영 모양이 좋지 못할 테니까 침묵을 지키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최용식 소장이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앉는 것이다. 만약 그런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조금은 우리나라 경제 정책이 살아나지 않을까 싶은데... 1960년대부터 2000대까지 우리나라의 경제를 조목조목 따져서 앞뒤 상황을 파악하고 평가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맡길 수 있는 분이라고 본다. 후기에 이 책을 내는 것으로 제 소명을 다하셨다는 최용식 소장이야말로 꼭 필요한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국내에서는 경제학자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다면서 외국으로 눈을 돌려보라고 하시는 젊은 경제학자들을 향한 소장의 조언은 우리나라 경제학의 전망에 대해 암담함을 느끼게 했다. 그 분이 20년 동안 경제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라는 것이 기득권을 차지한 경제학자들의 무반응이라니... 최용식 소장이 서문에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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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마 - 빈털터리 고아에서 노르웨이 국민영웅까지 라면왕 Mr. Lee 이야기
이리나 리 지음, 손화수 옮김 / 지니넷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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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서 국민영웅으로 불리는 라면왕이 있다는 소식은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여러 방송사에서도 방송을 내보냈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지 못해서 그 위력이 얼마나 큰지는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지는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전쟁 통에 다리에 파편이 박혀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노르웨이 병원에서만 무상으로 치료해주겠다고 해서 노르웨이 땅을 처음 밟았던 그 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겠지만 그 나라에서도 한국이란 나라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최초로 노르웨이 땅을 밟은 한국인으로서 유명세를 얻긴 했지만 다리를 다 고쳐도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진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은 난리통에 돈을 벌게 해준 구두닦이였는데 노르웨이에서는 어떤 장사라도 신고를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서 포기해버리고 굶어죽지 않으려고 요리사를 선택했다.
 
어쩌면 그에게는 운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딱히 요리가 아닐지라도 충분히 다채로운 생각을 해내고 성공도 하고 경영자로서도 그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냈지만 그의 시작은 요리였다. 그런데 이런 고된 일에도 충분히 자신의 역량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리사 과정을 다 마치고 호텔에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노르웨이의 교육을 무시한 채 허드렛일만 시켰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열심히 해내고는 좀 더 시간과 공을 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의 차별성을 여기서부터 그는 드러냈는데, 감자 하나를 깍아도 어떤 감자요리이냐에 따라 모양을 달리 깍아놓는 수고를 했다. 그 수고는 요리사들의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었으며 더불어 이철호의 성실성과 차별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어쩌면 귀찮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는 수고일 수 있었다. 이철호 씨에게서는 그런 수고로 그에게 기회가 생겼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런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아무런 보상이 없었을지라도 그는 기쁘게 그 일을 했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어떤 누구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성공을 목표로 하거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일 것이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역량이 되어 나중에 그 어떤 일을 할지라도 그는 그만큼의 내공이 쌓인 것이니 절대로 손해봤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인격이 성숙해지고 인생에 대해서 겸허해지고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름 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그런 시련과 역경이 없었던 인물이 전혀 없다. 그 말인 즉슨, 사람인 이상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기만 하면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발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잘난 줄 착각도 하게 된다. 전에 봤던 『빌딩부자들』이란 책에서도 단지 돈에 대한 책이지만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었다. 저자가 만나봤던 100억 미만인 부자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지만 100억 이상 되는 부자들은 항상 겸손해하며 부자란 때가 맞아서 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등장했다. 그들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그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기에 절대로 헛된 고생은 없는 것이다.
 
이철호씨가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요리사가 된 이후에 다른 아이템을 찾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라면이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맛본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한국의 농심이란 회사와 계약을 맺고 공급을 하는데 이 때도 독특한 그만의 방식이 등장한다. 계약을 맺을 때는 무조건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맺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계약에서 손해봤다는 마음이 들면 그 이후에는 재주문은 없을 테니까 처음에는 손해봐도 그냥 전시만 하다가 나중에 큰 주문이 밀려들어오게 되었다. 실은 농심은 자신의 상호가 그대로 나가길 바랐지만, 이철호 씨는 노르웨이에서 그가 가진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면 더 잘 팔릴 것을 설득해서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더 큰 공급망과 계약을 할 때도 무리라고 보이는 계약금을 달라고 하면서 라면의 가치를 믿었고 실제로 그 때 부른 계약금을 상회할 정도로 대박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노르웨이에는 다른 라면도 많이 생산되지만 가장 비싼 이철호 씨의 라면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요리사였기에 매운 맛을 빼고 좀더 기름진 맛을 첨가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한 나라의 국민영웅으로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영예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가 타국일 경우, 그 영예는 어쩌면 상상할 수 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노르웨이 훈장까지 받게 된 그에게는 아마도 아낌없는 찬사만이 필요할 것이다. 그가 겪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과 두려움과 참혹함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에서 얻은 그의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처세술은 그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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