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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시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외 47명 지음, 김정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8월
평점 :
《독일시집》이 나왔다. '시선집'도 아니고 '시집'이라니. 이 자신감은 무엇인가. 그럴만도 한 것이, 48명의 시인들, 320편의 시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 많은 시들을 직접 선정하고 번역까지 한 김정환 시인의 말마따나 '이만한 분량인 것이', '이러한 구성까지 갖춘' '독일시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김정환 시인은 40여년 간 읽고 고르며 다듬어온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시인과 함께 반평생을 넘어,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넘어 함께 호흡해 온 숨결이 담긴 시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일시집'인만큼 다양한 시인들의 이름을 만나볼 수 있다. 괴테, 횔덜린, 하이네, 니체, 릴케, 보르헤르트 등 익숙한 이름들부터 거의 들어보기 힘들었던 울란트, 주칼마글리오, 티트게, 오필트 등등까지. 단행본으로 엮어 나올만큼 유명한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 소네트》도 있고, 횔덜린의 <휘페리온>, <빵과 포도주>, 괴테의 민중시들과 니체의 잠언 같은 시들이 담겨 있다. 한 권의 거대한 시집이면서 각각 시인들의 소(小)시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성이다.
다양한 시인들의 이름만큼이나 다채로운 시들이 담겨 있다. 연대로는 중세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두터운 전통의 독일 개신교 서정시부터 근대 표현주의, 상징주의 시들까지 한 가지 결로 설명할 수 없는 시들의 집합이다. 자연물을 통해 신을 느끼고, 신과 교감하고 노래하는 시부터 인간을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말했던 니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다종다양한 시들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건, 운명을 향해 도전하는 인간의 숨결이다. 종교적 색채가 묻어난 시이든 그렇지 않은 시이든, 어느 시에나 세상과 고투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서 오라 그렇다면, 오 정적, 그림자 세계의! / 만족이다 나, 비록 나의 현악이 / 나를 그 아래로 이끌지 않더라도. 한 번 / 살았다 내가, 신들처럼, 그리고 그만하면 되었다."(<운명 여신들에게>, 횔덜린), "끌어당겨라 이제 우주를 네게로! 그렇지 않으면 너 질질 끌려갈 것!" (<고유한 말>, 호프만슈탈), "장미는 '왜'가 없다, 꽃 피는 거다, 꽃 피니까, / 유의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묻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지." (<2행 시편 II>, 실레시우스)
분명 친절한 책은 아니다. 김정환 시인의 번역은 다른 번역자들의 번역과는 다른 구석이 있기에 익숙치 않다. 다른 시선집들에는 흔하게 들어가 있는 시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라든가 작품에 대한 친절한 해설은 전혀 없다. 시가 실린 순서도 역자의 말에서 밝히듯 '누구는 모아놓았고 누구는 흩어놓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독일시집》이지만 김정환 시인의 시집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꺼운 책을 손에 들어야 한다면 어떤 이유를 댈 수 있을까? 역자의 자신감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 구성과 기획이라서? 릴케의 연작시라든가, 괴테의 민중시들이라든가, 트라클의 표현주의 시들, 게오르게의 상징주의 시들 등등 이 책 하나면 독일 시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글쎄, '언제나 넘쳐나는 것은 짝퉁'인 시대에서 그 짝퉁을 분별하는 가늠자가 되어준다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여전히 시는 오늘도 세계를 탐험한다. 언어는 변하지만 세상을 경험하고 극복해가는 인간의 노력은 여전하다. 쓰여진지 수백년이 지난 시들이 여전히 울림이 되는 이유겠다. 그 시들이 박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권해본다.
어떤 오래된 책에서
부딪혔다 내가 어떤 말과,
그리고 그것이 나를 제대로 갈겼고
타고 있다 나의 나날 내내
(<그 말> 부분, 슈타들러)
어떤 오래된 책에서 부딪혔다 내가 어떤 말과, 그리고 그것이 나를 제대로 갈겼고 타고 있다 나의 나날 내내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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