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시지
탐 크라우터 지음, 이종환 옮김 / 예수전도단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과연 예배를 재대로 드리고 있는 것일까?'란 물음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그 예배 후 거의 충동처럼 교회 구내서점에서 사 버린 책이다.

오늘 날의 예배는 그 집중도가 떨어지고 있다. 예배 중에 뭔가가(그것이 설교든, 찬양이든 아니면 다른 특별한 순서든)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도저히 내 뜻과 의지로는 집중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예배를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배가 어떠니 저떠니 불평하고 비판하는 게 보편화 되버린 세대해서, 한번쯤 나의 예배 자세는 어떠한가를 점검해 보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될 듯 싶다.

그러나 이 책은 평신도를 위해 썼다기 보단, 끊임없이 예배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액면 그대로 보면, 저자가 음악 목사라는 점에서 찬양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될만한)을 위해 썼기 때문에 얼핏 예배를 드리기만 하는 사람에겐 어필이 잘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글은 매우 평이하게 써졌기 때문에 그냥 누구나가 가벼운 마음 읽고 생각하고, 점검해 보기에 그리 나빠 보이지도 않는다.

사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배가 진정한 의미에서 과연 '드리는 것'일까? 우린 너무나 흔하게 일상어처럼 '예배를 봤냐'고 한다. 교회가 무슨 콘서트 공연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예배가 공연자의 포퍼먼스를 보는 것도 아닐진데, 우린 어느센가 보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는 주일에 한번만 드리는 것이 아니며, 매번 매순간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본을 보였던 사람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의 로렌스 형제였다. 그는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는 주님을 생각하므로 늘 예배 드리는 삶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사실 예배를 그냥 '보기만'하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배를 능동적으로 섬겨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찬양, 연주, 안내 등등으로. 그런 사람은 낮아진 마음을 갖기가 참 어렵다.  특히 리더의 입장에 서면 일은 더 심각해 진다. 자꾸만 시야가 좁아지고, 권위를 앞세우려고 하며, 사람을 쉽게 비판하거나 정죄하기 쉽다. 그 점에 있어서 이 책에서는 다윗의 예를 들으면서 도전한다.

다윗은 그가 섬기던 왕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번씩 주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그 왕위를 찬탈해도 오히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충분한 위치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께서 기름부은 자를 자신이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울을 드대로 죽였다면 또 다른 피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리더를 보는 눈은 늘 곱지가 못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대통령이 됐던, 한 학급의 반장이 됐건, 교회 청년회 회장이 됐건 간에 말이다.

나도 어느틈엔가 그런 시야를 갖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내가 교회에서 나름대로 독보적인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 였다. 난 이 책에서 그 부분을 읽었을 때(이 책 말미에 나온다) 나는 예배를 섬기는 자였지만 진정으로 드리는 사람은 못되었다는 걸 절감했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많은 아픔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면, 같이하는 사람이 어떤 류의 사람인가를 빨리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성경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한다. 결국 나는 예배에 그리 성공한 사람은 못됐던 것 같다. 

예배를 섬긴다는 것은 예배 시간이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시스템을 완벽히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 분의 임재와 은혜를 만끽하는 것이다.

이 책은 예배학에 관한 개론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냥 예배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독려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같이  '과연 내가 예배를 재대로 드리고 있는 것일까?'를 점검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한번쯤 권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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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오늘, 서준식 형제의 삶을 다시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많은 경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경전을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도 그런 '경전'과 같은 책이 몇 권 있는데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이 그 한 권입니다.

인권운동가 서준식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조국'을 만나러 왔다가  '유학생 간첩사건'에 연루, 그후 17년을 감옥에 있었습니다. 함께 체포되어 고문 끝에 분신자살을 시도했던, 그래서 지금도 그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형 서승 선생은 19년을 그곳에서 보낸 뒤 <서승의 옥중 19년>이라는 책을 썼지요.

동생 서경식 씨는 위의 두 권과는 조금 다른 책들로 그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오늘 소개하는 <나의 서양미술순례><청춘의 사신>이 그것입니다. 이 두 권은 서경식 씨가 유럽 등의 여행을 통해 만난 그림들을 소개하는 색다른 미술책입니다.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 '유럽 여행에서 만난 그림을 소개하는 책을 썼다'는 것에 많은 분들이 조금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는데요, 서경식 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형님들이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구속된 것은 1971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였다.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형님들처럼 일본 사회를 떠나 한국으로 건너가서 뭔가 진실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그 철없고 막연한 인생설계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두 형님이 옥중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고 있고 자주 고문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회사에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구체적인 '생활' 같은 것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지하실에 처넣어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지하실은 어둡고 눅눅하고, 게다가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간다. ...나에게 예술은 그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다.' (<청춘의 사신> 머리말 중에서)

그리하여 1983년 서경식 씨는 처음으로 유럽 여행에 나섭니다. 석 달 간의 유럽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그림들과 자신의 생각을 주로 엮어 쓴 책이 일본에서 1991년 출간되었던 <나의 서양미술 순례>입니다.

복잡한 심사를 안고 떠난 여행이었던만큼 지은이가 주목하고 감동하는 그림들은 보통의 미술책에 당연히 등장하기 마련인 그림들의 목록과 비껴갑니다. 또 보통의 책들과 달리 지은이는 그림에 대해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합니다. 예를 들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가 만든 두 개의 노예상을 보며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 형들 중의 하나는 베토벤을 숭상하고 루오를 사랑해서, 필시 차입해준 책의 삽화 같은 데서 보았을 이 '노예'를 예찬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예찬 어쩌고 할 관조적인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또 한 형과 함께 투옥되어 이 시점까지 12년을 살았건만 석방될 희망이 없었다. 도대체 예술감상 같은 것과는 멀찍이 격리되어 있었다. 반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빈사상태라고 할 수 있다.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59~60쪽에서)

<청춘의 사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비해 그림과 화가에 대해 더 찬찬히 설명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제목 '청춘의 사신'은 에곤 실레의 그림 '죽음과 소녀'을 쓴 글의 소제목이기도 한데, 그 그림을 만났을 당시 자신의 상황을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나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부모님이 두 분 다 세상을 뜨신 직후였고, 나 자신은 가족도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승리를 기약하기 어려운 지루한 투쟁, 이루지 못한 꿈, 도중에 끝나버린 사랑, 발버둥치면 칠수록 서로 상처밖에 주지 않는 인간관계, 구덩이 밑바닥 같은 고독과 우울, 그런 것 뿐이었다. 내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그래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것이 막연했다. 죽고 싶다고 절실하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죽음이 항상 내 곁에서 숨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서경식 씨는 글의 곳곳에서 10년 동안 일본과 한국의 오가며 두 형을 옥바라지해야했던, 그러나 끝내 출옥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던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곳곳에서 드러냅니다. 세상이 참으로 어수선한 요즈음... 이들 형제의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고 김선일 씨의 어머니가 지금 겪고 계실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을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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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r830 2004-06-2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건 사라지지 않아요^^
맘에 드는 말이네요
믿고 싶은 말이기도 하구요
퍼갑니다^^

mannerist 2004-06-2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말이 더 뭉클하더군요.

(전략)

It alwayas comes down to just two choices. Get busy living or get busy dying.

...

I hope Andy is down there.
I hope I can make it across the border.
I hope to see my friend and shake his hand.
I hope the Pacific is as blue as it has been in my dreams.
I hope.

 

 

약물 효과 알리고 소비자 선택 쉽게
거금 들여 전문 작명업체에 의뢰도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doctor@chosun.com

 


▲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위), 레비트라(아래 왼쪽), 시알리스(아래 오른쪽) 발매 기념 행사 모습들. 비아그라(Viagra)는 힘을 상징하는 ‘비고르(vigor)’와 ‘나이아가라(Niagara)’를 합성, 활력과 폭포의 강력한 물줄기를 연상시켰고, ‘레비트라(Levitra)’는 프랑스어 남성관사 ‘레(le)’에 라틴어로 생명을 의미하는 ‘vita’에 어원을 두고 있다. ‘시알리스(Cialis)’는 보다(see)와 ‘앨리스(Alice)’의 합성어로, ‘놀라운 세상’을 경험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조선일보 DB사진]
약 이름이 바뀌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제약사의 마케팅 대상은 의사들에게 집중됐다. 특히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 의약품은 더욱 그랬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 약에 대한 마케팅 대상이 점차 소비자, 즉 환자에게로 전환되고 있다. 인터넷 정보 검색과 환우회 활동 등으로 환자들이 이제 자신이 먹는 약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 부드러워진 이름들

과거 약 이름은 약물의 성분명이나 작용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오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주름 치료에 쓰이는 ‘보톡스(BOTOX)’는 주성분인 ‘보툴리눔 톡신’을 소재로 이름 붙인 상품명이다(물론 보톡스가 인기를 끌면서 요새는 그런 작용을 하는 약물을 통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인다).

하지만 이제는 약물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이미지 또는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 국내 발매가 시작된 콜레스테롤 강하제 ‘크레스토(Crestor)’는 산 정상 또는 최상이란 의미를 갖는 ‘크레스트(Crest)’와 행위자를 만드는 영어 어미 ‘or’의 합성어이다. 콜레스테롤 치료 목표치 도달에 있어 최고의 약물이라는 뜻이다.

약으로 가능한 삶의 질 향상을 묘사하는 약 이름도 나온다. 예를 들어, 천식 및 알레르기 비염 치료제인 ‘싱귤레어(SINGULAIR)’는 하나(single)와 공기(air)를 합한 이름으로, ‘한 가지 약물로 천식과 알레르기 비염을 함께 치료하여 편한 숨쉬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뜻을 담았다.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치료제 ‘스피리바(SPIRIVA)’는 ‘영혼(Spirit)’을 흡입하는 약물이란 의미를 담았다. 피부질환 치료제 ‘제마지스(Zemagis)’는 ‘습진(Eczema)’과 ‘방패(Aegis)’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습진을 막는 강력한 방패를 의미한다.

아무런 뜻도 없이 전 세계적으로 똑같은 발음으로 불리게 이름 붙인 약도 있다. 아토피 피부염 치료제 ‘엘리델(Elidel)’이 그런 경우다.

■그래도 지킬 건 지킨다

약 이름은 기존에 발매 중인 경쟁 약물들과 혼동되지 않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의미를 담지 않아야 한다. 약 이름이 퇴짜를 맞는 경우는 의사들이 처방전에 휘갈겨 쓸 경우 다른 약품과 혼동될 가능성이 있는 이름, 들었을 때 기존의 약과 너무 비슷하게 들리는 제품명 등이다. 작명을 하는 제약회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판매할 약물의 경우, 가능한 모든 국가의 자료를 뒤져 그 나라 말로 저속하거나 잘못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은지도 알아본다.

최근에는 제약사들도 약효를 최대한 잘 표현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름을 만들기 위해 거금을 들여 전문 작명업체에 의뢰하기도 한다.

■X·Z자 유난히 인기

위산억제제 ‘넥시움(Nexium)’, 비만치료제 ‘제니칼(Xenical)’, 혈전증 치료제 ‘엑산타(Exanta)’, 금연보조제 ‘자이반(Zyban)’, 항생제 ‘지스로맥스(Zothromax)’ 등 최근 약 이름에 ‘X’와 ‘Z’가 유난히 많이 들어간다. 이는 발음하기 좋을 뿐 아니라 혁신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 X파일, 매트릭스(Matrix) 등 영화제목이나 자동차 렉서스(Lexus) 등에서처럼 이들 문자는 첨단기술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A’로 시작되는 브랜드명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환자가 이름 알면 치료도 잘 돼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고혈압 약을 복용하는 환자 3명 중 2명은 자신이 복용하는 약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본인이 먹고 있는 고혈압 약 이름을 알고 있는 환자가 그렇지 못한 환자에 비해 혈압 조절이 더 잘되고 있다는 것. 물론 약 이름을 아는 것과 치료효과 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환자가 약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치료받고 있는 방법이나 약물에 대해 그만큼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환자의 치료 의지와 관련되어 치료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 건강관리와 질병 치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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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멸종직전… 인간의 홀대로 죽어가고 있다
 


“책 노릇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책이다. 책이 멸종위기 직전에 처해 있는 종(種)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고 서두를 꺼낸 ‘책’은 “요즘 들어서는 나날이 더 힘들어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지브코비치<사진>의 이 소설은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책의 일생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시니컬하게 그렸다. 책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으로 의인화해 책이 겪은 온갖 수모를 보여준다. 책의 탄식과 하소연 그리고 비분강개에 공감하면서도 작가의 뛰어난 재기와 유머 감각으로 (책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종 미소짓게 만든다. 유고슬라비아 작가의 작품이지만 그 내용들이 우리의 출판현실과 꼭 닮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다가 졸리면 제자리에 갖다놓기는커녕 옆에다 휙 던져 놓고 천연덕스럽게 코를 골기 시작한다. 우리는 밤새 또는 다음날까지도 활짝 펼쳐진 채-이 얼마나 채신머리 없는 자세인가-읽던 자리에 내박쳐져 있어야 한다. 가랑이를 찢어져라 벌린 채 몇 시간씩 혹은 종일 버티고 있다고 상상해 봐라. 우리 중 몇몇은 다시는 제대로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고 남은 평생을 기형으로 살아가야 한다.’(18~19쪽)

인간의 역사를 대신 기억해 왔고, 인간을 더욱 지적인 존재로 돋보이게 했던 책이 그에 합당한 대접은커녕 말도 안 되는 무시를 당하고 있는 현실이 책의 시선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책 보기를 밥먹듯 하고, 책장이 잘 안 넘어가면 더러운 침을 묻히고, 책장 아무데나 마구 낙서를 해대며, 싫증이 나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이 책이다. 서적상들 또한 매출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면 ‘가격 할인’이라는 미명하에 책을 헐값으로 해치운다. 책은 인간을 위한 지적인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지적 생명체’인데 인간이 책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책들이 모여 사는 도서관은 사창굴로 묘사된다.

‘팔자가 더 사나운 것으로 치자면, 도서관에 내던져진 불쌍한 자매들을 따라갈 책이 없다. 도서관에 있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시설이 바로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문 앞에 홍등만 달지 않았지, 다른 건 모조리 사창굴 그대로이지 않은가!’(35~36쪽)

어떤 책들은 도서관에서 평생을 갇혀 지내기도 한다. 콜걸이 불려나가듯 관외 도서 대출이 가능해진 요즘에는 그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재수 없게 인기라도 있으면 현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수천 명의 손님을 상대해야 한다고 털어놓는다.

이 소설은 또 책의 운명을 좌우하는 출판사 사장, 문예대행인, 편집자, 인쇄소, 서적상 등이 만들어내는 기상천외하면서도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준다. 우선 한 권의 책이 만들어져 판매되고 폐기 처분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임신과 출산 등 인간의 일생에 비유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모든 작가들에게 원하는 만큼 글을 쓰게 하라. 그래야 행복하다는데 어찌 막겠는가. 단, 콘돔을 사용하게 하라. 글이면 무조건 책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작가라는 작자들은 본능의 충족만으로 그치지 않는다.’(92쪽)

출판사들은 이런 작가들의 공격에 방어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겉으로는 문화사업인 양 점잔을 피우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논리가 앞서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출판풍토를 공격하기도 한다. 작가는 컴퓨터와 전자책의 등장으로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종이 책의 앞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전한다.

소중한 존재라 해놓고 아무렇게나 내던져지고 있는 책의 수난, 팔리지 않는다고 폐기처분되는 책의 학살현장 그리고 헐값에 팔려나가는 망신스러운 모습을 통해 우리 출판 시장의 모습을 아프게 꼬집고 있다.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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