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그래픽 노블)>를 리뷰해주세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어찌 어찌 하다보니 피츠제럴드의 이 작품을 소설로 영화로 그리고 만화로 보는 호사를 누렸다.  

원작을 두고 영화로 만화로 보는 이 작품은 조금씩 달랐고 과연 누가 어떻게 각색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구나 새삼 인간의 창조력에 경의를 보낸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5년 뒤 또는 10년 뒤에 이 작품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소설로 한 번 읽었을 땐 그냥 이런 특이한 이야기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나 영화로 보고 만화로 보면서 역시 울림이 있는 좋은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성공요인은 무엇보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화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영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워낙에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배우의 탁월한 연기 또한 볼만했고 무엇보다 가슴 저미는 사랑이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나 싶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특이한 소설이 있었구나 정도에서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영화든 소설이든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다. 소설은 원작의 맛과 함께 상상력을 배가 시키지만 영화는 실사에 충실해 한 번 보고나면 더 이상의 상상을 불허하게 만든다. 그러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로 얘기할 수 있을 뿐 중간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만화는 어찌보면 소설과 영화 사이의 장단점을 중화시켜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만화로 보는 <벤자민 버튼...>은 영화 보단 원작에 제법 충실해 보인다. 특히 러브 라인을 그다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러브 라인은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관점에선 작품전체를 너무 도드라지게도 만들 수 있다. 원작이 뜻하는 바는 인생이지 사랑은 아니지 않는가?

또한 주인공 벤자민 버튼을 처음으로 등장시킬 때 영화와 만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는 어린 아이 몸에 얼굴은 우굴쭈굴한 노인의 얼굴이었던데 반해 만화는 노인 그대로를 등장 시켰다는 것인데 이건 사실적이지도 않거니와 억지스러워 영화가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내가 만화로 보면서 느끼는 것은, 처음부터 노인인 벤자민 버튼이 그 정신 연령 또한 노인에 맞게 그렸다는 것인데 나는 오히려 몸은 노인이지만 정신 연령은 어린 아이의 그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뇌가 받아들이는 지식과 생각의 깊이는 몸의 변화가 있다고 해서 같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특별히 뇌를 다치거니 치매에 걸리지 않는 이상엔 말이다. 그러므로 몸은 점점 어린 아이가 되가 돼 정신은 노인의 감각을 유지해야 더 실감이 나지않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잊고 갓난 아이의 평화로움인 상태로 죽음을 맞는다고 했을 때 공감하면서 이런 설정도 나쁘진 않겠구나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때론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이루지 못한 꿈과 상처 받은 과거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하면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한 인물의 특이 인생 역정의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끝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성찰하게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벤자민 버튼은 자신의 특이한 삶을 비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평범하지 않지만 그 주어진 조건에 굴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 우린 또 그들 때문에 다시한 번 용기를 내며 살지 않는가? 그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비록 우화이긴 해도 독자들에게 많은 용기와 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범상치 않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만화로 각색되었다는 점에서 작품을 보는 새로운 맛을 선사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여전히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책으로 읽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어린아이가 된 벤자민의 꿈에 괴로운 기억은 머물지 않았다.  

용감한 대학시절과 수많은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매력 넘치던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 

잠자리에 들기 직전 나나가 창밖을 가리키며 "해"라고 부르던 커다란 오랜지색 공이 있을 뿐. 해가 사라지면 눈이 스스르 감겼다...... 

어지러운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다.(11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 어디 가?>를 리뷰해주세요.
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이야기는 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장애인 자녀를 낳고 싶어할까? 하지만 부부가 장애아를 낳을 확률을 로또 맞을 확률에 비유하며 그들을 키우는 애환을 시종 유머러스하게 풀려고 하고 있다.  

나 역시 처음엔 상당히 공감하며 읽어갔다. '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며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았다. 하지만 점점 읽어가면서 느끼는 건 역시 우울한 얘기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저자도 쓰다가 자기 연민과 신세한탄으로 빠지지 않았나 싶어 편치않은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책 어디에선가 동정 같은 건 받고 싶지 않다고 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있는데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톤 역시 조절을 했다고 하는데 글쎄, 내가 볼 땐 그 톤 조절에도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마치 자기 연민이 지나쳐(장애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된다. 아내도 힘들다고 자기를 떠났다. 어찌 자기 연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자조하듯 중절거리는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머도 섞일 수가 있겠지.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글쓰기엔 자기 치유의 목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과유불급은 아닐까?  그것을 하도 하다보니 자신의 장애 아이의 입장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 성 싶기도 하다. 만일 그의 장애 아들이 아버지가 이렇게 뇌까리듯한 이 글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자기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빠, 이제 그만 하세요. 저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 아니라구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라면 그랬을 것 같다. 

물론 부모도 한 인간이다. 힘들게 낳은 내 아이가 정상아에 한참 뒤진다면  저자 같이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장애가 자신의 탓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특별한 신의 섭리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조롱할지라도 그를 낳은 부모는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뇌까리다가 아이를 조롱하는 것 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언제까지 신세한탄만 할 것인가? 아이를 좀 더 강한 아이로 만들고(물론 강해진다고 그 아이가 정상아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약간의 의문이 드는 건 이런 지극히 소박한 장애아를 가진 아버지의 글에 페미나 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의도에서 그런 상을 줬을까? 물론 나름 기준은 있었겠지. 이런 글에 열광해서 상을 주리만큼 프랑스도 장애자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밝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나? 내 아이에 대한 인식과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 장애아 부모에게 돌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인식을 바꾸지 못하고 안으로 숨어든 장애자 스스로에게 돌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책을 입안하는 복지 담당 책임자에게 돌려야 하는 것일까? 

가끔 보면 비장애인은 장애자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다. 장애자가 (아직)되 본적이 없는데 장애자에 대해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그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장애인 당사자와 그의 부모들일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큰 걸 가지고 떠들지 말라. 지극히 작고 디테일한 것 가지고 말해 보라. 그러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비장애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식은 작은 것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몰라서 변화될 의지가 없고 생각이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사는 근처에 장애인 복지관을 짓고 학교를 짓는다면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이렇게 말은 하지만 나도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지하면 잔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역지사지로 풀어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씌여진 파급 효과를 생각할 때 어느 일정 부분 장애아와 그 부모를 이해하는데 공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상도 부여해 주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류의 책은 좀 더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 울지 않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새는 없다고 여기 저기서 장애아인 내 새끼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떠들어 대야 사람들은 겨우 그들의 소리를 들을 것 같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내 아이가 세상에 불의한 대접을 받고 산다. 그들의 부모는 언젠가 세상을 떠나겠지만 누가 그들의 아이를 돌봐 줄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책은 자기 얘기를 했다는 면에서 의도는 좋았지만 그 행간을 너무 숨기고 너무 감정에만 호소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박한 것이 미덕인가? 좀 더 아이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그 이해한 바들을 공유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난 그다지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심하게 말해서 페미나 상도 정말 글을 잘 써서 줬다기 보단 동정이 반 이상이 섞인 상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장애자 부모의 애환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들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는 점.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에이프릴 풀스데이> 아버지로서 (장애자라기 보단) 환자인 아들을 돌보며 느꼈던 점들을 썼다는 점에서 일맥상통 한다는 생각을 했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이땅에 많은 특별한 자녀를 돌보고 있는 부모들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장애아의 아빠는 항상 우울한 표정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마스크를 써야 한다.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쳐서도 아니된다. 장애아의 아빠는 웃을 자격도 없다. 웃는다는 것은 최고로 눈치 없는 행동일 테니까 말이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진 아빠는 곱빼기로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한다. (4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창 - Rear Window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주 오랫만에 <이창>을 다시 봤다. 한마디로 주인공을 많이 굴려먹지 않고도 두 시간 가까이 긴장하며 볼 수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밖으로 난 창문은 크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더군다나 날씨는 밤이나 낮이나 푹푹 찌는데 일상은 너무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하다. 보통 그런 날을 '개 같은 날의 오후'라고 한다지? 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주인공 제프리스에게 바라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매일 건너편 아파트먼트를 지켜보며 사람들을 해석과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제프리스. 그 건물엔 댄서도 살고, 중년의 부부도 살며, 외로운 독신녀도 살고 있으며 작곡가도 산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뚱보 남자와 그 부인이 사는 것도 보게된다. 그런데 어느 날 뚱보 남자네 집 부인이 보이지 않다. 그때부터 제프리스의 상상은 의혹이 되고 그것을 밝히는데 온통 집중이 된다. 거기엔 매혹적인 애인 리사와 매일 출퇴근하는 간호사가 뚱보 남자가 살인 용의자라는 것을 증명해 내는데 합세하게 된다.    

스릴러가 다 그렇듯 수 많은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로 엮어져 있다. 이런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를 '신경질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히치콕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미스테리(어느 날 뚱보 남자네 이웃집 개가 죽었다.)와 잡히면 어쩌지?(제프리스의 애인 리사가 뚱보 남자네 집에 몰래 잠입했다 뚱보 남자한테 들겼을 때) 죽으면 어쩌지?(자신을 몰래 추적해 온 것을 알고 제프리스의 집에 들어와 제프리스를 창문에서 떨어 뜨리려 할 때)하는 긴장감을 정말로 잘 보여주고 있다.   


 

히치콕은 정말 천재다!   

흔히들 천재하면 현실과 좀 동떨어진감이 없진않지만, 내가 말하는 천재란 관객이 원하는 것이 뭔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영화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잘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창을 통해 건너다 본 맞은편 아파트먼트에서 여러가지의 인간군상들을 대사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게 했고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영화를 보지만 연극적 요소도 가미했다. 끝날 때도 유머와 위트를 잊지 않는다.  

물론 영화 중간중간 약간은 지루하긴 했다. 하지만 주인공을 너무 굴리지 않고 휠체어에만 앉아있게 하고 영화를 보여주려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종반 20분 정도에서 보는 사람을 바짝 긴장하게 해 줬으니 그런 것쯤은 그냥 용서하고 덮어주자. 그렇다고 아주 많이 지루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초큼이었다. 그래도 이야기 구조는 완벽하지 않은가? 

영화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히치콕은 반드시 넘어야할 산맥으로 여긴다. 어디 영화학도들만 그렇겠는가? 난 스토리텔링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히치콕은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히치콕 옹은!  

 덧붙히자면,
연전에 나의 사부님은 이 책이 절판된 것을 무지 개탄스러워 하셨다. 

우리나라 영화학도들이 오죽 공부를 안하면 이 책을 더 이상 찍어내지 않느냐고 하시며...  

이 책은 헌책방에 가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나의 동기 한 명이 이 책을 천신만고 끝에 구했다. 그것도 알라딘 중고샵을 통해 보자마자 바로! 콜을 했다고 한다. 우린 어찌나 기뻤던지 축배를 터뜨릴 지경이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했겠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상상에 맡기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게 절판이 됐다면 언제 된 걸까? 몇년 전만해도 이 책은 판매 가능했던 걸로 아는데. 동기생들에겐 말은 안 했지만 그땐 정말 살 생각이 별로 없었다. 사도 나중에 사야지하고 찜만해 두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 절판된 것을 알았다. 이 사실을 나의 동기들이 알면 죽일려고 할 거다.  

지금이라도 어느 출판사에서 이 책을 복간해줬으면 한다. 그렇다면 그 출판사는 우리나라 영화학도뿐 아니라 스토리텔링 연구자들에게 다시없는 덕을 베푸는 것이며 자손만대가 복을 누리는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제발 복간해 주세요! 플리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저드 베이커리>를 리뷰해주세요.
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이 참 좋아졌단 생각이 든다. 내가 사춘기 시절엔 따로 '청소년 문학'이란 장르가 없거나 있어도 극히 미미했던 것 같다.  있다면 <얄개전>이나 <내 이름은 마야> 정도랄까? 그나마 그런 책들은 절판된지 워낙 오래라 잘 검색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성장 문학'이라고도 한다지.  그 시절 그런 장르가 활성화 되지 않았던 시절엔 으레 <데미안>을 읽었어야 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고전을 읽어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시절이 좋아 당당히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을 받고 이 분야의 작가도 심심찮게 배출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청소년 만세!다.   

기회가 좋아 청소년 시절을 보낸지 한참 된 나로선 웬간해서 읽지 않을 책을 읽었다. 구병모라. 작년에 알게된 전아리나 <완득이>의 김려령과 함께 차세대 청소년 문학의 트로이카는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찌보면 순수라게 성장 문학으로만 하기도 모호하다. 그러기엔 환상적인 요소도 갖추고 있어서 환상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긴 요즘에는 수순한 한 가지 장르만을 표방하지 않는 장르도 많고 그렇다면 이 작품도 역시 그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또 환상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고도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기도 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성장 문학으로보든 환상 문학으로 보든 삶의 진지한 성찰까지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사춘기에 무슨 삶의 진지한 성찰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춘기도 삶은 삶이다. 왜 진지한 성찰이 없겠는가? 

특별히 이 작품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액자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 같은데  주인공이 위저드 베이커리에 숨어들어 겪는 에피소드는 그 나름의 좋은 구성과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주인공을 그다지 힘있게 바꿔 놓지는 못하고 있어서 종반에 가까울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고 자조하듯 끝나버리는 것도 별로 신통치가 않아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작가가 처음부터 주인공의 욕망이나 인생관에 대해 잘 드러내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주인공이라고는 해도 소극적이고 목격자 또는 관망하는 인물로 밖엔 보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끝도 별로 특별한 전망 없이 아, 얘는 이러면서 크고 역시나 소시민답게 기성 세대에 편입해 살겠구나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작년에 문학계를 온통 들썽이게 만든 <완득이>를 보라.(개인적으로 난 이 작품이 아주 많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완득이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욕망 때문에 독자 역시도 읽는 맛을 느꼈고 함께 흥분했었다. 이전에 이런 이야기가 흔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독자들은 어쩌면 이런 책에 목말라 했었을 것이고 그 목마름을 <완득이>가 정확히 스트라이크를 날려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올해 우린 얼마나 전망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말에 의하면 내년은 올해보다 더 어려울거라고 말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위로 받고 싶고, 무엇인가로부터 힘을 얻고 싶어한다. 주위엔 안 되는 사람만 봐왔기 때문에 누구라도 힘 있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픽션이던 논픽션이든 말이다. 언제까지 작가는 독자들의 바람을 외면한 채 독야청청할 수 있을거라고 보는가? 물론 작가는 잘 아는 이야기를 써야하고 스스로재미를 느껴야 한다. 하지만 독자를 외면하고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를 사로잡는 획기적인 이야기를 쓰거나 그럴 수 없다면 독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시도는 좋았으나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성장 문학의 틀은 갖췄으돼 주인공을 전망있게 그리지 못했으며, 환상 문학을 시도했으나 그 이야기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은 어떨지 기대하고 싶어지기는 한다. 다음 차기작은 좀 더 농익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패쓰^^)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그림자를 판 사나이> 환상 문학의 계보를 잇는다면...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환상 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에 관심있는 이.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못 오지. 인간의 몸은 그 자체가 우주이지만, 사랑을 위해서조차 내놓기에 턱없이 작고 모자라. 그런데 고작 증오를 위해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11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표류기>를 리뷰해주세요.
대한민국 표류기
허지웅 지음 / 수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턴가 에세이류가 좋아지기 사작했다. 이 말은 예전엔 에세이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단 말도 될 것이다. 그냥 잡기라고 생각했고 개인의 사적인 생각을 주저리 주저리 털어 놓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쪽 방면의 책들이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쪽 방면의 책들을 폄하하는 눈을 버리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젊다고 생각했을 땐 남의 생각이 그다지 귀에 들려오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젊다고 생각했을 땐 세상에 적당히 눈과 귀를 열어놓고 또 적당히 눈과 귀를 닫아놓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원하던 원치 않던 나도 기성 세대라고 말하는 그 세대에 진입하게 되고 보니 예전보다 더 세상 일에 문외한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난 작년부터 신문을 구독을 그나마 작년부터 구독을 철폐한 뒤로 세상에 더 문외한이되었다.) 물론 기성 세대가 되면 다 세상 일에 문외한이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여기서 말을 고쳐야겠다. 문외한이 아니라 무뎌지는 거겠지. 그게 그건가?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처럼 세상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시시콜콜 말이 많을까? 특히 정치 얘기! 신물이 난다. 다른 나라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정치에 우리나라만큼 관심이 없다고 한다. 알아서 잘 하겠지하는 믿음인 건지? 당신은 그 일 하쇼. 난 내 일이나 하겠소. 하는 무관심을 가장한 똘레랑스인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은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정치 얘기를 한다. 저렇게 똑부러지게 잘 할 것 같으면 여의도 가지 왜 햇볕을 등에 쬐고 저 입질들일까? 시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귀를 닫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도 그런 게, 그렇게 살다보니 한편 남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러다 보니 그런 에세이류가 읽혀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은 에세이라고 하기엔 부드럽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에세이는 문학중에도 고급 장르로서 굉장히 정갈하고 작가의 생각을 정제해서 보여주는 것이 에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기엔 이 책은 거친 구석이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은이의 필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초두에는 정말 낙서 같이 써 놓은 글들이어서 킥킥대고 웃으면서, 이거 정말 낙서집인가?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칠긴 해도 읽으면 읽을수록 젊은이다운 패기가 느껴져서 읽는 맛이 남 달랐다.     

특히 지은이가 기자 경력도 있는만큼 최민수 폭행치사 사건 이면을 다룬 글들이나 연예인들을 인터뷰하고 나서의 느낌 등을 써 놓은 글들을 보면 날카로우면서도 기자다운 기지가 느껴져 오히려 멋지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은이의 나이가 올해로 만 서른이다. 본인은 그 나이가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아직도 충분히 젊은 나이다. 그래서 그럴까? 책은 젊은이다운 비판적 글들로 가득차 있는 듯 하다. 그것이 또한 젊은이의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이만한 비판 의식도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문득 책을 읽다보니 내가 꼭 지은이 만한 나이 때 꼭 지은이 같이 비판 의식으로만 가득찬 내 옛 주일학교 제자 녀석이 생각났다. 나름 나와 통한다싶어 꽤 많은 것들을 얘기하고 공유했던 제자였다. 하지만 그때 난 녀석이 너무 심하다싶은 생각을 한켠 했더랬다. 저렇게 떠든다고 해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데 그냥 자기 일이나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녀석은 이 책의 지은이 보다 4살 정도가 많은데, 그 녀석은 작년 촛불집회나 쇠고기 정국을 어떻게 볼까 궁금했고 지금은 만날 수 없음이 아쉽게 느껴졌다. 모르긴 해도 어디선가 지은이처럼 떠들고 있겠지?  

사실  이 책은 끊임없이 자지말고 깨어있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특히 2장에  속하는 '큰 사람들의 나라'에선) 그러기가 쉽지 않을텐데 그것도 당차게. 

어딘가 불편하면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좋아지던 좋아지지 않던 그것은 둘째의 문제다. 불편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잘하는 줄 안다. 그러나 문제는 너도 나도 서로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정말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정말로 불편한 건지 모르겠다. 

단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건 이 책 역시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내고 현상에 대해서 말은 하고 있지만 대안은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대한민국 표류기'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상만 집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표류하는 무엇에 무슨 대답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특히 지은이의 개신교 유감에 관한 글은 나 또한 교회 다니는 한 사람으로 유감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기독교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독교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은이가 보지 않은 것을 썼을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 날의 기독교 전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 지은이가 보는 것이 전부라면 그런 기독교는 나라도 안 믿는다. 또한 뒤에 예수님이라면을 썼을 정도라면 지은이는 예전에 신자였거나 적어도 기독교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지마는 않은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이슈화 되면 거기에 따르는 선의의 피해자가 있는 것처럼 그 글은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난 그 부분에 대해 시비나 논쟁을 하겠다는 뜻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서평 리뷰를 빌어 쓰지도 않았겠지. 서평은 서평일 뿐이다. 그런 것처럼 지은이가 써야하는 글에 예외 조항을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나는 독자로서 그냥 한번 읽고 말 일이다.     

물론 '표류기'였던만큼 대안은 이 젊은이한테 물어선 안될 것이다. 그저 허지웅이란 젊은이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누가 읽기엔 '뉘집 자식인지 제법 똑똑하게 잘 썼네!' 정도가 될 것이다.    

내가 그에 대해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다면 그는 요즘 젊은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위해 치열하게 일해야 했고 거기서 부딪히고 체험했던 것을 고스란히 글로 쓰고 있다는 것(지금도 그의 블로그에 가면 계속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다.)이 부러울 뿐이다. 부딪히지 않으면, 비판하지 않으면 그리고 쓰지 않으면 나는 없다는 마음으로 썼던 것 같다. 그 살아있는 의식이 부럽다. 몇 살을 먹어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고 있는 한 늙지 않을 것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우리나라에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이가 있다니!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통과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뭔가 남다른 생각에 자극 받고 싶을 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세상을 조정하는 건 악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는 너무 쉽고 무책임하다. 정작 걱정해야할 건 차리리 우리 안의 악마다. 무관심이라는 악마다. 지금도 무엇인가를 외치고 행동하는, 관심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부조리에 비관과 자조로 일관하기를 거듭하다 우리는 결국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진짜 지옥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진짜 악마를 보게 될 것이다. (29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