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 A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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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가족처럼 질기고도 무시무시한 애증으로 묶인 관계가 또 있을까?  

사람이 좋다가도 싫으면 안 보고 안 만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가족은 그렇지가 않다.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는데로 싫고, 멀리 있으면 싫은데도 걱정이 되는 게 가족이란 존재다. 

더구나 식구가 서로에 대해 늘 사랑하는 마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면 더 바랄나위 없겠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준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려서라도 그와의 관계를 잘라버릴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가족이다. 내가 가족에게 가족이 나에게. 

여기 해체된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다친 눈 때문에 인생을 비관하고 딸은 이런 아버지가 싫어 조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교도소까지 다녀오지만 여전히 그 조직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 또한 이 때문에 아버지는 딸을 미워하고 딸은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나마 이들 중간에서 숨통을 틔게 해 주는 존재는 늦둥이 아들이요 동생이다. 둘은 너무나 이 아들을, 이 동생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아들을 위해 딸이 교도소를 출감한 이후 독립할 것을 명령하고 딸은 아버지가 싫지만 이 동생을 위해서라도 집에 남길 바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그나마 딸의 골수라도 이식해 생명을 연장하길 바랬지만 그마저도 좌절되고 만다. 그러던 중 딸은 아버지 친구를 통해 아버지가 왜 눈이 다치게 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사실 딸이 어렸을 적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워낙에 어렸을 적일이라 이를 알리 없는 딸은 아버지가 그저 나쁜 사람들과 싸우다 다친 줄만 알았다. 그리고 그 울분을 평생 가족에게 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알고부터 부녀지간은 그전까지 냉담했지만 어느 새 어색한 애정을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둘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앞으로의 생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작 딸의 조직과의 인연을 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딸은 마지막으로 조직의 보스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 질긴 인연을 끊고자 하나 채 행동도 취해 보기도 전에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부성애의 십자가를 진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중반까지는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게 그저 그렇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15분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장렬한 느낌마져 갖게 한다. 



특히 아버지역의 주현 씨의 별로 힘들어가지 않은 연기가 정말 볼만하다. 

이즈음 그는 특유의 코믹스러운 이미지에 갖혀 많은 개그맨들이 앞다퉈 그의 이미지를 흉내내곤 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에겐 좋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에 갇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그의 새로운 모습과 묵직한 농익은 연기를 볼 수가 있어서 가히 한국의 막스 폰 시도우(이 사람은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 배우로서 최근 영화로는 <잠수종과 나비>가 있다.)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딸 역을 맡은 수애 역시 단아하면서도 연기적 몰입도가 좋은 배우란 생각이 들게 한다.  

영화를 보다가 드는 생각은 역시 모성애는 늘 잔잔히 흐르는 뭔가가 있지만 부성애는 평소에 수면 밑으로 숨어있어 있는 듯 없는 듯 확인할 수 없는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결정적일 때 있는 힘을 다 끌어 모아 분출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는 그 무엇으로 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인간은 긍정적인 기운을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흐름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도 있는 놀라운 존재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란 평소 땐 지긋지긋 하다가도 결정적일 때 운명도 맞바꿀 수 있는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어찌 가족을 천륜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은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짜임새도 좋고 강추할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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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08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해전에 봤던 영화에요.
수애, 좋더군요.
주현이 딸을 위해 무릎 꿇던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저 위 사진 보니 그러고보니 박원순도 나왔었군요.ㅎㅎ

stella.K 2009-06-09 16:44   좋아요 0 | URL
ㅎㅎ 프레이야님, 박희순이어요. 박원순은 변호사겸 녹색운동 하시는 분이죠.
맞아요. 무릎꿇는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하는구나 싶더군요. 영화 의외로 괜찮았어요. 그죠?^^

프레이야 2009-06-09 17:18   좋아요 0 | URL
ㅋㅋ 제가 요새 잘 이래요. 치매(?)는 아닐테고..ㅎㅎ
왜 박원순님을 생각했을까요?

stella.K 2009-06-09 17:57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그러는데요 뭐.^^

스파피필름 2009-06-0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만큼 영원히 숙제인 관계도 없을 것 같아요.. 물론 화목한 가정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요.. 이 영화 보고 싶어지네요.. ^^

stella.K 2009-06-09 10:49   좋아요 0 | URL
스파피필름님 오랫만이어요. 이 영화 시간 나실 때 한번 보세요. 좋아요.^^
 
지로 이야기 2 - 홀로서기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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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가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로는 이제 본격적인 사춘기가 되었다.  

1권에서는 제멋대로고 자아가 강한 천둥벌거숭이 였다면 2권에서의 지로는 진지하다.

사람이 진지해진다는 것은 나와 세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에 골몰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2권에서의 지로는 여전히 고집이 세고 동시에 의협심도 강하다. 하지만 세상과 어떻게 타협하고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에 더 많이 치중하다 보니 쉽게(?) 자신의 뜻을 바꾸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선 바람직해 보인다. 그것은 지로 주위에 좋은 선생님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어른이 없다면 지로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소는 삐뚤어지고 독단으로 흐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 인간이 성숙하기까지 주위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람 때문에 독단으로 흐를 수 있는 것도 막을 수 있으며 세상을 좀 더 긍정하고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아사쿠라 선생님은 지로에게 있어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 었던가?

물론 지로 주위에는 항상 좋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로의 친할머니는 여전히 지로에겐 부담스럽고 싫은 존재다. 하지만 1권과 달리 그는 이제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으며 때론 불쌍하다고도 고백한다. 물론 할머니와 좋게 지낼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런 중에도 그런 마음까지 먹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때론 사람의 새로운 발견은 시간이 흘러야 진가가 들어나는 경우도 있다. 지로에게는 새어머니가 그랬는데 그전까지 그에게 새어머니의 존재는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어머니를 새롭게 조망하게 되는 건 상황과 환경의 변화가 가져다 주는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어찌보면 지로는 오늘 날을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오늘 날 지로같은 청소년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이만큼 진지하고 어른스러울 수 있을까? 

학원 다니기도 빠듯한 오늘 날의 청소년들이 언제 이렇게 자기 앞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진지해져 볼 수가 있겠으며 언제 어른들의 말을 청종할 시간이나 기회가 있을까? 그런 기회를 가져도 과연 좋은 말을 들려줄 그런 어른이나 선생이 있을까?  

물론 이것은 또 어쩌면 기우인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오늘 날의 청소년들이 공부만하고 자기가 관심있는 것이 아니면 나머지 것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런 이기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리더로서 내일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다면면 다행이다. 나는 청소년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     

며칠 전 청소년들이 시국선언을 했다. 이것을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다. 그것을 알려면 청소년들이 시국선언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며 과연 시의적절한 것인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을 보면 하나 드는 생각은 우리의 아이들이 생각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중에도 아이들을 잘 지도하고 조언해 줄 선생님이 계시다면 좋을텐데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된다.  

무조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너희들이 무슨 주제넘게 시국선언이냐고 윽박지르거나 반대로 그러한 청소년들의 까지도 정치에 이용해 먹는 선동적인 어른이 있다면 반성할 일이다. 단지 청소년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지라도 그것을 긍정해주고 앞으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미쳐질 것들에 대해 그리고 나라의 장래에 이득이 될 것인지 실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가 판단해 볼 수 있는 그런 것으로까지 사고를 넓혀 주고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지로가 뜻있는 친구와 함께 뜻하지 않게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아사쿠라 선생님 구명 운동을 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읽으면서 오래 전 나는 주일학교 교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 었을까 반성을 하게도 된다. 

아무튼 지로는 참 멋진 아이다. 본권은 청소년기가 주를 이루어 씌여진만큼 청소년기는 아무래도 생각이 많은 시기라 내용 역시 어느 만큼은 사변적인 생각과 대화체 문장들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어찌보면 조금은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만큼 작가 자신의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읽는데 어려움이 있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1권 때도 그랬지고 자전적 소설이라 더욱 그렇긴 하겠지만 이 소설은 가식이 전혀 없다. 조미료 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담백함 그 자체만을 담았다.(어찌보면 7,80년대 소설을 읽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그래서 누구는 건조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배재되 있기 때문에 인생의 맛 그 순수함을 느낄 수 있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좋다는 느낌을 받는다. 진실을 담은 문학 작품은 그래서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는가 보다.(우리나라엔 이제 소개가 됐지만 일본에서는 꽤 오래된 작품인 듯 하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더불어 또 하나 생각한 것은 우리도 이 책처럼 자기 자서전 하나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것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든 아니던 지간에 말이다. 그러면 지로처럼 감사할 것들이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진지하게 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살아 온 걸 책으로 쓰자면 10권쯤 나올 것이라고 하면서 왜 단 한 권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의 '자서전들을 씁시다'란 책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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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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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이쪽 분야의 전문가(창작법에 관한 이론가들)가 아닌 현장 작가들이 그들의 글쓰기 노하우를 밝힌 책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나 역시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니 이런 책에 눈이 안 갈수가 없다. 이 책은 내가 글쓰기 분야에서 본 가장 최근에 발견한 책이 아닌가 한다.    

이런 책 읽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잘 쓰는 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글쓰기에(특별히 소설 쓰기에) 뜻을 뒀다면 이런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글은 쓰지 않으면서 이런 책에만 탐닉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책들을 읽어보면 하나 같이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무조건 '써라!'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이 말은 내가 소설가 이승우씨가 쓴 소설론을 읽고 리뷰에 인용한 제목이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stella09/883139) 내가 아는 또는 체험한 이야기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소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도 그것의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책이 좋다. 그래. 구슬을 꿰지도 못하면서도 난 이런 책이 좋은 것이다. 

누구는 이런 나를 두고 그런 책에서 차마 글을 쓸 용기는 없고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오래 전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공부는 못했으면서 참고서만 딥따 산 적이 있다. 참고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내가 오늘도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저자가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를 인용했듯이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누군가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해 줄 때(150p)라고 했듯이, 이 책 또한 나를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길 바라서일 것이다. 즉 다시말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눈을 맞추고 귀를 여는 것을 통해 그의 기쁨에 기꺼이 동참해 주는 것이라고 하면 글을 안 쓰기에 적절한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소설 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책상 가득 자료들을 모아 놓고 쓰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런 것 하나 없이 오로지 노트북 하나 또는 펜과 종이만을 가지고 자신의 체험과 생각들을 풀어나가는 것. 이 둘중 어느 것이 더 쉬워 보일까? 

전자는 많은 자료들을 모아야 하는 수고로움과 필력이 받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후자는 나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인 것만은 사실이고, 창작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역시 하나 같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고 하니 그것에 부합은 된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동시에 자신의 아품을 들추어내야 하고 때론 부끄러움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아프다.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대단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매번 여기서 무너지곤 했다.  저자는 이 암초를 너무나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요. 이것은 결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지요. 독자가 불편한 것 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인 겁니다.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일치의 나날인 겁니다.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요. 이것은 결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지요. 독자가 불편한 것 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인 겁니다.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일치의 나날인 겁니다.(153p)   

 예전엔 글을 쓰는 목적이 독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야 앞서 인용했던 아니 에르노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내 말을 하고 있군요."라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어줍잖은 생각이었다. 작가가 뭐라고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서 위로와 평안을 준단 말인가? 저자가 말했듯이 글을 쓰는 것은 독자 보다 열 배, 백 배 불편한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 오직 그것 뿐인  것이다. 그래야 아니 에르노의 말이 진실로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투쟁적으로 치열하게 글을 쓰지 못했다. 그저 의무감이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몇 줄 끄적여 보는 것뿐 창작의 고통을 (조금은)알기에 그 고통속에 나를 맞기고 희열을 느끼는 것을 감히 감내하지 못하겠다.(아마도 내가 작가가 되지 못했다면 나는 목숨하나 기식할만 하던가 발자크처럼 5만잔의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수도복 한벌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인 줄로 알라.) 

저자는 참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도 짚어낸다. 작가로서의 재능의 문제에 대해, 자세에 대해 또는 무엇을 쓰고 그리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또한 작가에게 열려진 길에 대해 저자는 하나 하나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고 있다. 또한 나아가서 독자와의 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고, 오늘 날 매체의 발달로 인해 근대소설처럼 활자 하나로만 승부할 수 없는 현실과 그것들과 어떻게 조우하며 해결해 나갈 것인가(특히 제7강 매체와 이야기의 변신,<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 기대어나, 제15강 따뜻하게 영화 품기 <복수는 나의 것>과 <집으로>에 기대어 같은)는 상당히 현실적이며 현대의 소설 쓰기에 확실히 좋은 지침이 될만 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어찌보면 내가 지적한 내용들은 작가가 글쓰는 첫번째 조건은 아닌 듯 싶다. 작가에게 있어서 '왜 쓰는가'에 답을 달지 못하면 위의 모든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작은 기적을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의 잠을 앗아간 소설들처럼, 내가 쓴 소설이 새벽까지 읽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하리라. <불멸>은 "이 소설을 읽은 후 인생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라는 놀라운 엽서 한 장과 맞바꾸기 위해 쓰여졌을 따름이다.-<불멸>,작가의 말(252p)

이 소박하고 진실한 말에 "나도"라는 대답으로 응수하지 못한다면 이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내가 이 글을 읽는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더불어 그는 또한 오늘날의 소설 쓰기가 너무 테크닉 위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저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인류사적 행위'로 파악합니다. 잔재주가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디지털 기술로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설령 컴퓨터가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것들은 단지 삶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척'할 뿐이겠지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입니다.(266~267p) 
 

그렇다. 글쓰기란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만큼 진심이 담겨있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늘 우리가 두려워 하는 건 테크닉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제가 좋아도 그것을 받혀주는 그릇이 미약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문학계의 관행이 그것을 부추기지 않는가? 특히 여타의 문학상을 타고 나오는 것을 보면 화려한 테크닉과 수사를 무기로 삼은 듯하다. 그리고 아예 그것을 표방한 문학상도 있다. 여기에 얼마나 진심이 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런 화려한 테크닉만을 무장한 작품들은 일찌기 문학계에서 단명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것은 믿을만한 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백년학생'이라고 했다. 그만큼 죽을 때까지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뜻이겠지. 그에 비해 김탁환은 글쓰기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천년습작'을 각오하라고 주문한다. 이 말이 던져주는 무게가 묵직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름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느 소설가도 완벽한 작품을 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작가도 매번 습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작가에게 따로이 정해진 습작기란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요즘 흔히 잘 나가는 일은 다 그 때가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며 나이들면 들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써라. 이 사대의 작가 김탁환이 맛난 술 익히며 기다리겠다고 하지않는가? 그가 따라 주는 술 한 잔은 마셔봐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여, 책표지가 마음에 든다. 특히 뒷면에 연출된 것이긴 할테지만 맨발에 의자에 앉아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저자의 사진이 참으로 많이 피곤해 보인다. 그게 결국 작가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상적이다.    

 또 하나 덧붙이는 건, 이 책을 읽은 후에 김탁환으로 검색해서 그의 책들이 현재 서점에 얼마나 나와 있는지를 알아 봤다. 그가 그리도 많은 책들을 내놨건만 이중 반 정도는 품절이거나 절판 상태다. 힘 없는 문학작품이 단명하는 거야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아직도 대중에게 많이 읽혀야 하는 책들이 단명하는 거 좀 문제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것의 문제가 출판사에 있다고 해야하는 건지, 독자들에게 있다고 해야하는 건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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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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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많은 오류를 범하면서 산다. 

인간은 오해할 수 있으며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의심하고 실수하며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많은 실수와 오류를 범하고 때로는 그것을 쉽게 인정을 하면서도 결정적일 때 절대로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강철 같다.   

여기 한 엄마가 있다. 약재상을 하며 지능이 낮아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들을 데리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아들의 지능은 유치원생 수준이라 방금 자기가 한 말, 한 일을 너무도 쉽게 잊어 먹는다.  

이런 바보 아들이 어느 날 살인을 저질렀다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믿을 수 있겠는가?  

마침 이 아들에게는 질 나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아들에겐 유일한 친구이겠지만 엄마는 평소 아들에게 이 친구와 놀지 말라고 틈만나면 타이른다. 하지만 아들은 그것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가 아들이 그 친구와 놀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단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 친구로 인해 아들이 악에 물들까 봐서이고 아니면 나중에라도 헷고자를 당하게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분명 이 친구가 사람을 죽인 범인이며 그 누명을 아들에게 씌웠다고 생각하고 그 증거를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친구의 집을 잠입해 증거를 확보한다.  너무도 당당하게 그 증거를 경찰에 보이지만 왠걸 그것은 보기 좋게 불발이 되고 만다.  

엄마는 오히려 덤태기를 쓰고 명예를 훼손했다 하여 아들의 친구에게 돈을 물어주게 생겼다. 그뿐인가?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지만 그 변호사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싸구려 변호사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엄마는 아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 할수록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지면 떨어 질수록 날개가 생기는 법이다. 더구나 그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모성애 때문이라면 한층 더 높이 날수가 있는 것이다. 

평범한 촌부에 지나지 않았던 엄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점점 더 똑똑해지고, 담대해지며, 영리리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에서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대 엄마여, 그렇게 단 날개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엄마가 원하는 대로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으며 당신의 날개는 거기서 부러지고 만다.  

설마 내 아이가? 그 바보 같고 사슴 같은 눈을 가짐 내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그것을 나더러 믿으라고? 

그것은 정말 엄마로서는 믿고 싶지 않았고, 믿을 수가 없었으며,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아들의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인 고철장수 노인을 둔기로 찍어 살해를 하고 그 사실을 인멸하기 위해 노인의 집을 불 사른다. 그리고 엄마는 들판으로 나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묘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무지한 모성애에 바치는 제의라고나 할까? 

카인만이 아벨을 죽여 놓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자지간에도 모녀지간에도 자매지간 또는 이렇게 모자지간에도 또 다른 모습으로 항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아이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믿는 엇나간 이 모성애도 궁극적으론 자기애의 다름이 아니지 않을까? 우리가 그렇게도 자애로워 마지않는 이 모성애란 것도 것도 말이다. 

옛적부터 지금까지 우리네 엄마들은 혹시라도 자식이 잘못되면 그것은 내 아이 탓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친구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며 시대가,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카인의 항변과 그 모양새만 다를뿐 그 이치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또한 그것이 모성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아이를 지키고 싶은 게 모성이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확실히 자기 안에 내재해 있으며 무지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것. 자신이 아는 것 외에 나머지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극한 자기애. 그것을 보편적인 언어로 '자기애의 오류'라고 밖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오류는 이 엄마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감독은 경찰의 무능함을 조롱이라도 하듯 아들은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나고 애꿎은 다운증후군의 청년을 살인범으로 몰아 죄인으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진실을 아는 건 '마더' 혼자일 뿐이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 또한 자신만이 안다. 이 무슨 천형이란 말인가?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하고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잊기 위해 마더는 스스로 자신의 혈자리에 침을 놓고 춤추는 관광버스 그 틈속에 자신을 숨겨버리고 만다.     


영화 내내  신들린 듯한 연기를 했던 김혜자. 그녀 외에 누가 이 연기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왠만한 수사관 못지 않은 냉철함과 영혼이라도 맞바꿀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 간극을 두려움과 공포, 광기로 스크린을 꽉 채웠던 그녀에게 정말 가슴에서 울어나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과연 그녀는 우리의 국민 어머니란 찬사가 조금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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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1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1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1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1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6-0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러가야 하는데요..
잘 읽었습니다. 꾸욱!

stella.K 2009-06-01 10:49   좋아요 0 | URL
대체로 영화에 대한 반응은 좋은 편 같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무슨 영화가 이러냐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뭐 그다지 유쾌한 영화는 아니죠.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프레이야님은 명품 리뷰를 볼 줄 아시네요. 음하하하~
어제 유난히 공들여 쓴 리뷰걸랑요.ㅎㅎ
 
2기 서평단 활동 종료 설문 안내

지난 3개월 간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빨리 빨리 읽어내지 못해서 그렇지 나 역시 책 욕심 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써 일주일에 한번씩(어떤 땐 두 번도 오더만) 서평단이라고 해서 알라딘에서 보내주는 책이 무척 많이 기대가 되고 설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떤 책은 내 취향에 맞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알라딘에서는 엄선한 신간 서적을 보내줬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책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궁리)였는데 이건 정말 알라딘 서평단이 아니었으면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호사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해 좋은 책을 서평단 책으로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 좋은 방법으로 알린 책은 양철북의 <지로이야기1>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스트인 동시에 워스트였다고나 할까?  

이 책은 알다시피 3권으로 되어있다. 한 권의 책의 두께가 웬만한 책 두 권을 합쳐놓은 분량이어서 읽기가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왕 서평단 책으로 선정할 양이라면 전권을 다 보내주던가 그것이 어려웠다면 아예 선정을 포기했어야 했다고 본다. 뭐란 말인가?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함은...? 물론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가장 안 좋은 것이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창비의 <위저드 베이커리>다.  

이것은 가제본 형태로 왔는데, 왔을 때는 아직 출판이 안 된 상태였던 것으로 안다. 다른 여타의 출판사에선 가제본을 보내준 경우 나중에 정식 출판본을 보내줬던 것으로 아는데 창비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이 책은 창비 주체의 무슨 문학상을 받아 호기심에 가제본으로나마 읽긴 했지만 책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출판사의 성의 없음에 읽고 나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다. 아무리 호기심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 가제본 형태의 책을 읽는단 말인가? 

서평단이 무슨 꽁자 책이나 좋아하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 하는 것도 아니다. 없는 시간 쪼개 읽고 서평을 올린다. 어찌보면 서평단도 고객인데 이런 가제본이나 읽자고 서평단을 하겠는가? 너무 성의없어 보인다.    

물론 선택의 문제고 나도 처음엔 가제본으로 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가제본 형태의 책은 가급적 읽지 않으려고 한다. 나중에 출판본을 보내주지 않는 이상.  

이왕 싫은 소리하는 김에 더 해야겠다. 


지금까지 서평단으로 보내준 책들 중 일부를 찍은 것이다. 

초기엔 저런 책도장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렇게 찍어서 보내준다.  

보내주는 쪽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받는 서평단의 입장에선 그다지 썩 유쾌하지는 않다. 너무 서평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것 같다.   

서평단이 무슨 책을 꽁자로 못 받아 걸신든 족속도 아니고 이걸 꼭 찍어서 보내줘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무척 신경이 씌였다. 알라딘은 내가 만약 서평단이라면 저런 책을 받고 싶은가 한번쯤 생각해 봐 줬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책 뒷면에 비매품 서평단 책이란 바코드가 있는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만약 꼭 저렇게 할 필요가 있다면 조그맣게 하던가 또는 예쁘게 할 수는 없는가? 

알라딘은 서평단으로 하여금 명예롭게 해 줬으면 좋겠다.  

물론 안 그래도 서평단 들겠다는 알라디너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앞으로 3기, 4기 계속 이어질텐데 그들이 서평단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서평단이 된 것을 정말 명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서평단이 된 사람들을 마음으로나마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는 좀 그런 훈훈한 일들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물론 나 한 번 이렇게 서평단 되고 끝내면 그만이다. 이런 덥기 시작하는 날 이런 말을 구구하게 늘어 놓는다는 게 지금까지 성실하게 책을 보내준 알라딘에게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알라딘은 이미 나의 오랜 단골 서점이 되었다. 난 알라딘이 앞으로도 계속 좋은 서점으로 남아 줬으면 한다. 그래서 그 애정에 한 말씀 올린 것으로 여기고 앞으로 알라딘 서평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다. 

참으로 미안한 것은 보내준 책에 비하면 몇 편 안되는 서평을 올렸다. 이런 사람이 과연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나 자신 반성중이다. 보내 준 책중 나중에라도 완독을 하게되면 서평을 올리겠다. 

그동안 좋은 책을 보내준 알라딘에 다시한번 심심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덧붙여, 설문은 이 글을 대신한다. 설문 내용이 너무 성의가 없어 뵈 그다지 설문에 응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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