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에서였던가? 인류 역사에 책이 어떻게 처음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밝혀놓은 흥미로운 만화를 본 기억이 있다. 좀 웃기고 단순하긴 한데, 어떤 인류학자(?)가 어느 섬에 표류해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우리 하회탈 같은 얼굴이 웃는 상과 우는 상을 번갈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에 따라 얼굴 표정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것을 더 발전시켜 그 얼굴 모양을 종이에 인쇄했는데, 한 줄은 웃는 상을, 다음 한 줄은 우는 상을 넣었더니 그에 따라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엔 좀 더 다양한 표정의 얼굴을 삽입해 넣었더니 그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것은 문자 이전 책과 인간의 교감은 이랬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케 한 것으로서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만화 중 하나다.  

정말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 인류 역사상 책이 처음 출현했던 건 언제부터 였을까? 

이 책은 책의 문화사 중 열 장면을 간추려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이라는 것도 인간만큼이나 굴곡 많고 책에도 생(生)을 부여한다면 참 쉽지 않은 생을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책에 왜 생을 부여해도 좋은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책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고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그저 잠깐 있다 사라질 것에 역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사이래 책이 책으로 존재하기까지의 역사가 쉽지 않았으니 앞으로 쉽지 않은 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게 첫번째 이유고, 또한 책에는 인간의 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발자취, 생각, 사상 등이 이 책이라는 물건에 오롯이 담겨져 책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게되고 그것을 유지시켜 와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생이 그렇듯, 장수하는 책 즉 오래도록 우리에게 읽혀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단명하는 책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누구에겐가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있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책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부러 태워없애거나 찾는이가 없어 절명(여기선 절판)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엔 분서라고 해서 책을 태워 없애기도 했다지만 요즘엔 웬만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여러 해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의 작품이 분서 다시 말하면 화형식이 보도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에게는 치욕스런 개인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걸 보면서 책을 좋아해서일까 그 사람을 단죄하는 방식이 너무 가혹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 사람의 죄가 중하기로서니 그 방법만은 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도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책과 그 사람의 죄과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할까? 가혹하다 못해 야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만한 일을 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항변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책을 저리 경히 여기는 민족이 사료(史料)를 귀하게 여길까? 싶기도 한 것이다. 본래 사료라는 것이 문자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문자를 담는 그릇이 책이 아니겠는가? 남기고 싶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해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말이다.  

책은 그렇게 단명 또는 절명도 하지만 유령 같은 면도 있어 언제든지 형체를 변이시켜 연명해 가기도 한다. 예를들어 그렇게 어느 문인의 책이 화형 당했다 하면 그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문자화 되어서 책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아님 말구). 어쨌든 그렇게 책은 어찌보면 인간의 그것보다 더 질긴 운명을 타고 낳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책은 아무리 눈을 씻고 지구 끝까지 찾고 싶어도 끝끝내 못 찾고마는 책도 있다. 그런데 반해 책과 영혼과 바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책을 향한 열정이다 못해 열애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행을 하기도 한다. 과연 책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알량한 독서량을 자랑하면서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그냥 책을 조금 읽은 사람이지 취미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정말 취미면 조금 읽어도 상관없겠지만 사실 독서는 취미가 아닌 것이다.  

뭐 좀 뻔한 말 같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책은 밥이고 옷과 같다고 생각한다. 밥은 삼시세때 먹으면서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이 질문을 받고도 여전히 밥만 먹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책은 옷이다. 사람이 벌거벗고 살 수 없듯이 책도 그런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몇해 전, 옷 좋아하는 엄마와 책 좋아하는 내가 혈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안 읽는 책은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자 지지않고 엄마도 안 입는 옷 있으면 버리라고 맞섰다. 그러나 엄마는 옷과 책이 같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엄마가 옷 좋아하는 거랑 내가 책 좋아하는 거랑 무엇이 다르냐고 항변했다. 서로의 취향이 다른 걸 가지고 아무리 딸이라도 상대의 것을 비하시키는 엄마의 태도가 나로선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날까지도 엄마와 체형이 얼추 비슷해 일부 옷은 같이 입거나 가끔은 엄마가 내옷을 사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엄마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책 선물을 해 본적이 없다. 더구나 눈이 나빠 읽을 수도 없다. 그러니 옷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 신세지고 있으니 나의 그런 태도는 항변이라기 보단 불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가끔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가에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지금 내 방엔 읽은 책 못지 않게 읽어야할 책이 잔뜩이다. 어느 순간 이것들을 보면 미소 짓고 싶고 뿌듯할 때도 있지만 읽어야할 책에 비해 나의 독서의 속도는 형편없이 느리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눈이 나빠질지 모르니 빨리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 맞는가 묻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나의 책들은 싸게 싼 책들이거나 기증 받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만약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엄청 비싸다 하면 일단 그 의지를 접고 만다. 그리고 무슨 책이 떴다고 해서 그것을 기필코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도 못된다. 그러니 내가 진정한 비블리오 마니아인가?라는 질문에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못 읽을 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영히 '책'에 대해 궁금할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책의 역사에 대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책이란 게 다 그렇듯이 자기 궁합에 맞는 책이 있고 맞지않는 책이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나와는 딱 맞는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읽다보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종종있다. 

편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테면 이 책은 글쓴이가 편저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뒤에만 참고문헌을 밝혀두었다. 그 보단 오히려 쳅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 실린 이야기라고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읽어 볼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념의 인간 야곱 - 야뽁강을 넘어서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형과 같은 날 태어났으나 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관심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형을 시기했던 열등감 많은 남자가.  

그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갖는 그런 꿈이 아니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열정 하나만으로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다지만 그의 꿈은 보통 사람이 갖는 그런 꿈이 아니었기에 열정 하나만으로는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꿈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의 쌍둥이 형과 어머니 뺏속에서부터 몇 분 상관으로 장남의 자리를 내어줘야 했기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자권을 빼앗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영원히 차남으로는 살 수마는 없었다. 그러나 차마 형과는 겨룰 수는 없었기에 기회를 틈타 장자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아주 기발하고도 우스운 방법으로 장자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냥 장자권만 자신 것으로 만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를 도운 어머니가 그 때문에 멸문을 당해야 했고, 장자권을 갈취한 것 때문에 형을 피해 낮선 땅으로 가 교활한 외삼촌 밑에서 20년 동안이나 뼈 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와중에 외참촌의 딸을 사랑했지만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원치 않은 그녀의 언니도 아내로 맞아야 하는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삼촌의 사위가 되었지만 여전히 종속되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때고 그가 당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교활한 장인에게 통쾌한 복수도 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끔은 반전이 일어나 주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장자권을 뺏은 형으로부터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늘 겁내하고, 평생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뜻하지 않게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리며 그들에게서 낳은 자녀들 때문에 평생을 마음 졸이고 고통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하는 아내와도 오래도록 해로하지 못하고 아내가 막내 아들을 낳다가 목숨을잃는 비운을 맞는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낳은 첫째 아들을 그의 다른 아들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잃어야하는 비운도 겪어내야만 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는 여기에 일일이 다 적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이만하면 하나님도 버린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 도대체 그놈의 장자권이 뭐라고!   

하지만 그의 인생의 시작은 참으로 창대했다. 보라, 그의 어머니가 꿈을 꿨는데(그것은 동시에 신탁이기도 했다.) 뱃속의 쌍둥이는 두 민족을 가리키며 형이 아우를 섬긴다고 했다. 아우가 형 보다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재는 어떠한가? 그는 오랜 세월 형의 낮을 피해 살아야만 했고 더 이상은 남의 땅에서 자손을 번식시키며 살 수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 먹지만 도저히 형을 만날 자신이 없다. 2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복수의 서슬이 시퍼런 형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놓아줄 수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사투였다.  

민족이라도 일으킬 즉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토록 찌질하게 자기 형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는 씨름하는 과정에서 엉덩이 뼈가 탈골돼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댓가였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그가 팥죽 한 그릇에 형에게 장자권을 샀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불구의 몸이 됐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겠다는 그 언약을 산 것이다. 그에 대한 표로 그는 불구의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겟다는 약속 하나 받은 것 외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장자권은 가졌지만 형 보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던 것도 아니다. 분명 태어날 때 민족을 일으킬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났지만 그는 왕 커녕 족장도 되지 못했다. 이쯤되면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그의 아들들의 모반과 아내를 상처(喪妻) 한 것, 그토록이나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은 것 등은 그가 야복강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란 말씀을 듣고도 계속됐던 그의 비운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의 말년에 잃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해후하게 되고 그가 마련해 준 처소에서 편히 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 외에 그의 복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아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모진 세월을 보내야만 했는가? 

이것이 저자 송봉모 신부의 성경 인물 시리즈중 야곱에 관한 부분을 풀어 놓은 것을 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사춘기 때 신앙에 입문하고 성경의 제일 앞부분이 가장 많은 손 때가 탈 정도로 창세기는 많이 읽었다. 읽을 때마다 나는 요셉에게 매료 당했지 그의 아버지였던 야곱에게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찌질하고 비겁한 사내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나이가 들고부터는 요셉보단 야곱에 더 많이 동화되고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의 모진 인생 여정에 가슴 뭉클해 누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후일엔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이있지만 그는 한번도 창대해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말 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까지 부른다. 이것은 대단한 영예로써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언급되지만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누구를 빚대어 지칭하신 이 세 사람 밖엔 없다.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해서 하나님은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가? 도대체 이 사람이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기에 이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인가?   

그러나 그를 가만히 생각해 보라. 야곱이 우리네 인생과 얼마나 흡사한가? 거짓말이나 하고, 사기치고, 위험한 상황에선 비굴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뭐하나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 그는 그렇게 미약하게 시작해서 고통속에 살다가 쇠하여져 간 것이다. 그런데 또 보라. 성경이 읽혀지는 곳마다 이 사람의 일생이 읽혀지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들 뇌리속에 각인시켜 놓으시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가운데 늘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야곱이 쫓기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야곱이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을 때 어디 계셨을까? 아들을 잃었을 때 어디 계셨을까? 거기 그렇게 그와 함께 계셨다. 그 고통속에, 그 고독속에, 슬픔 속에 말이다. 그것을 증거하시고자 하나님은 성경이 씌여지고 읽혀지는 곳에 이 사람의 삶도 읽혀지도록 하신 것이다.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끔 하나님 믿고 입신양명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말도 심심찮게 듣고, 또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매스컴의 영향 때문이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몇 퍼센트 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으려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믿고 성공했다면 그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 뿐이다.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고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고 아무 고통이나 고난이 없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나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나의 고통과 고난 앞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가 아닌가를 알면 되는 것이다.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어떤 인생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보다 더 고난 받지 않았으며 더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세상 어떤 사람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만큼 고통 당했거나 그 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통 당하거나 평범하게 살 뿐이다. 야곱의 인생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야곱의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야곱을 예시로 하여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 야곱의 고통속에, 고독속에, 기쁨과 외로움 속에 항상 함께 하셨든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내 인생 속에도 함께 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 믿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야곱과 같이 비겁하고 굴욕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을 창피해 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야곱 그 별 볼 일 없는 그 사람의 계보를 통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다. 이게 새삼 나를 놀랍게 했다. 그래서 성경이 읽혀지는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야곱의 일생이 전해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야곱은 그 나라 왕조의 기록속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엔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제 나이 먹어 세상에서 크게 명성은 떨칠 것 같지 않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내 이름 하나는 올라 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야곱처럼 말이다. 내가 앞에서 어렸을 때 요셉을 좋아했다가 나이 들어 야곱을 좋아했다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요셉은 자라 갈수록 큰 인물로 성장해갔지만 야곱은 갈수록 작아졌고 노쇄해져 갔다. 그는 젊었을 땐 욕망의 덩어리었지만 얍복강의 사건을 계기로 영의 것들을 생각하는 인물로 바뀐 것이다. 요셉을 보면 리더는 정말 하늘이 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야곱은 인간적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에서 영적이고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나이들고 늙음이 전혀 추하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님을 야곱을 통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르긴 해도 성서인물을 강해해 놓은 책 중 가장 탁월한 책이 아닐까 싶다. 문체는 평이하면서도 그 영적 깊이는 정말 놀라우리만치 깊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알라딘 서점에 블로그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모르긴 해도 7,8년 전쯤이 아니었을까?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무렵 전후로 해서 웬만한 인터넷 사이트들은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각자 자기네 사이트 블로그에 둥지를 틀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알라딘도 그에 뒤질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만큼은 블로그라고 하지 않고 '서재'라고 말하긴 하지만.     

처음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굉장히 낮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제법 익숙해질 무렵 세상에 이것처럼 신기하고 재밌는 게 없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여기 저기 타인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고 그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기쁨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몇몇 굵직굵직한 블로거들이 있었고, 그중 '로쟈'라는 분도 있었다. 

이 분도 알라딘 서재 초창기 멤버중의 한 분으로 알고 있다. 내가 처음 이 분의 서재를 알고 드나들었을 때가 아마도 러시아 유학 말기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땐 공부하느라 바빴는지 드문 드문(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닌) 페이퍼가 올라 오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참 남달랐다.  다른 서재인들이야 국내겠지만 그는 해외에서 글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마치 해외에 사는 누군가로 부터 편지를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렇게 올라 온 글 또한 내공이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여기엔 그렇게 내공있는 서재인들 몇몇이 있는데 선입견이겠지만 그들은 선듯 알은 체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로쟈라는 분 역시 이미 오래전에 즐겨찾기를 했지만 쉽게 아는 체 하기가 뭐 했다.(즐겨찾기만 해놓고 인사 한번 제대로 못하는 건 무슨 짝사랑이냐?) 

그런데 타인의 서재를 기웃거리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 성격등을 나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또 그러기도 전에 섣불리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고 쉽게 짐작해 버리는 것 중의 하나는 서재 이미지다. 이것은 확실히 교란인 것 같긴한데, 서재 이미지가 사물이나 동물이 아닌 유명한 사람(대개는 영화배우를 쓰긴 하지만)을 쓰는 경우 선듯 그 서재 주인과 동일시 해 버리는 우를 범한다.   

나의 경우 한 때 영화 배우 올리비아 핫세나 오드리 헵번을 서재 이미지로 쓴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들 배우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렇다면 나를 크게 오산한 것이다.  

이미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로쟈란 아이디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나 역시도 처음에 로쟈 룩셈부르그를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난 희안하게도 이 분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란 말인가? 이 모순은.  

지금 그의 서재엘 가 보면 몇 년째 지젝의 이미지를 쓰고 있다. 몇 년째 같은 사람의 이미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는 지젝을 좋아하며 실제로 제젝과 닮아 있을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운이 좋게도 타인의 서재에서 그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역시 이미지의 동일화는 위험한 것이며 동시에 교란으로는 이것만한 것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젝 보다 못 생겻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진만 가지고 말한다면 지젝 보다 그가 3배는 잘 생겼을 것이다. 또 모를 일이지. 지젝도 젊은 시절엔 빠지지 않는 미남이었을런지. 지금은 묵직한 할아버지 인상이 아닌가?  아마도 그가 몇 년째 지젝을 이미지로 쓰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지젝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튼 오래 전 어느 날이던가? 그가 곧 귀국을 할 것이며 귀국해서 보자는 짤막한 글을 본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귀국했고 또 예의 짤막한 귀국인사로 시작해서 오늘 날까지 알라딘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자랑하는 서재인이 되었다.(조회수에 관해서 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유학 전에는 카테고리별로 그가 직접 쓴 글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여기 저기서 주워 모은 것들을 한 페이퍼에 정리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 같다. 하긴 바쁜데 언제 개인글을 쓰겠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로쟈라는 분, 굉장히 성실한 분 같다. 페이퍼 정리는 물론이고 여러 댓글러들에게도 친절하게 답글을 단다. 다 읽어 보진 않지만 어떤 이의 댓글에 단 답글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도 바뀌었다.

그 많은 페이퍼들을 어떻게 했나 했더니 어느 새 그것들을 또 재정리해서 육화해 책을 냈다.  

얼마 전, 그가 책을 냈다고 이벤트를 하겠다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그것은 정말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은 이벤트를 해도 이 분만큼은 이벤트는 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이사하면 떡돌이도 하는데 자신의 책이 처음 나오는데 이벤트 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을까?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벤트 공고문이 의외로 재밌어 나는 한참 킥킥대고 웃었다.  

원래 항상 웃기는 사람 별로 웃기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별로 안 웃길 것 같은 사람이 진짜 웃기는 법이다. 한마디로 그의 유머는 묵직했다. 이벤트 글 하나가 이만큼 사람을 웃길 수 있다니! 물론 이벤트 상품은 막 출판되어 나온 그의 띠끈 따끈한 책을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벤트 미션이 녹녹치 않아 책을 보고는 싶었지만 애저녁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좋은 기회에 책을 읽어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렇게 많은 자료들을 그러 모으더니 이런 근사한 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저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책은 그가 낸 이벤트 미션 보다 2배는 어렵다. 나는 그것이 그가 글을 어렵게 쓰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나도 나름 책을 좋아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읽는 책들은 지극히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모름지기 문.사.철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폭넓게 읽어야 하는데 나는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류의 책만 좋아해 이 책 조차도 버거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요즘 인문학의 흐름을 개인적인으로 조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부분은 그나마 나의 얕은 식견으로 짐작이 가능한 부분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좀 어려웠다. 읽으면서 스스로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나의 무지에 대한 반성의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블로그가 생기니 소통이 보다 용이해졌고 여러 사람의 생각이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 좋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하지만 공부는 정말 남에게 주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뺏어 올 수 있어야 한다. 즉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로쟈님의 서재를 찜해 놓고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그의 페이퍼를 읽게 되면 우리 역시도 인문학에 눈이 열릴 것이다(로쟈님 정도는 아니어도). 하지만 이도 매번 용이하지가 않다고 핑계를 댄다. 게을러서가 첫번째 이유요, 내가 관심없는 분야라고 그냥 눈도장만 찍고 마는 것도 부지기 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서재는 확실히 지식 창고 개방형이다. 그의 서재에서 뭐 하나를 건져가도 건져 갈 수 있으니 대놓고 도둑놈 심보가 되어야 하고 더 탐해야 한다. 또한 고마워 해야 할 것이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일일이 발품 팔았어야 하는 건데 매번 정리해서 창고에 쌓아두고 퍼가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  

어림 짐작을 해 보니 그의 나이가 40대 초반은 지나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80년대에 초반에 중학생이었다고 하니) 사십. 불혹의 나이기도 하지만 뭐 하나에 정통할 법한 나이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나는 뭐했나 돌아 보게도 된다.  

지금은 대충 훑는 것에서 리뷰를 썼지만 훗날 내가 인문학에 바늘 구멍 하나 정도 통과할 정도의 식견이 생기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달래 2009-06-3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분이 좋다고 한 책 한 권 읽다가 둑을 뻔했어요. ㅋㅋ
하나도 이해를 못했거든요. 알고 보니 느무 어려운 책이었어요. ^^;;
인문학... 제겐 넘 어려워요. ^^

잘 지내시죠? 글은 잘 되시구요?
늘 기대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요... ^^*

stella.K 2009-06-30 16:54   좋아요 0 | URL
흑, 부끄럽습니다.ㅠ. 이제 조용히...ㅋㅋ
 
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블리오 문학이란 장르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책을 소재로한 문학을 일컫음인데 당장 생각나는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그밖에도 '꿈꾸는 책들의 도시'나 '바람의 사나이'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뭐가 있을까? 오래전에 <TV 문학관>에서 김탁환의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원작을 방영한 것을 최근에 본적이 있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솔직히 우리나라가 책을 참 안 읽는 민족 중 하나라는데 과연 이런 고급한(?) 문학을 구사하는 작가가 있을까 싶었는데 보면서 과연 김탁환이다! 찬탄을 자아냈다.(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는 좀 아쉬웠다.) 그후 이걸 책으로 읽어 볼까해서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찾아 봤더니 절판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는 알려진 책 보다 안 알려진 책들이 너무 많고 이미 알려졌더라도 그것의 책으로거의 생존은 참 짧은 것 같다. 그래 어쩌자고 그 책이 절판이 되었더란 말인가? 정말 서럽다. 잊혀진다는 것은!(물론 헌책방 같은데 가면 아직은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약간은 다른쪽으로 흘러갔다. 이번에 읽은 이 책 '편집된 죽음' 역시 상당히 재밌고 흥미롭게 읽힌다.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듯하고 더구나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어(작가는 스릴러가 아니라 서스펜스라고 하긴 하지만)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건 복수극이다. 과연 이런 완벽한 복수극이 있을 수 있을까 싶게 기가막힌 운도 따라준다. 너무 완벽해 현실에선 존재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사람의 로망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이 채울길 없는 인간의 로망을 책이나 영화가 채워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채워 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잘난 사람의 복수는 쾌감이 반감이 된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어딘가 찌그러져 있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뭔가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뭐든 완벽해 보이고 잘나 보이는 사람한테 하는 복수가 좋아 보인다. 왜냐구? 대리만족의 쾌감이 있으니까.  

세상에 잘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문제는 그 몇 프로 되지 않는 인간이 평범 내지는 평범 이하의 사람을 가지고 놀고 짓밟는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자극을 받는 것은 그들의 정의감이다. 정의란 이름으로 그 잘난 사람을 응징하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주인공도 우리가 볼 때 꼭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가진 기술 중에 '위조문서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나 갖는 능력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이 놈의 '평범'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상대적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막다른 골목이나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가진 능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에드워드도 애인 야스미나가 죽은 것이 그의 친구이자 적인 니콜라의 짓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역시 이 작품의 압권은 주인공의 복수의 과정이다. 유려한 심리 묘사와 책의 위조 과정이 마치 영화를 보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느 영화 감독이 영화화 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만하다 싶다. 기회가 되면 영화로 보고 싶은데 아직 영화로 보기엔 다소 요원한듯도 하다.(언제 방영했었나? 아는 분은 연락 바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허리우드 냄새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적 글쓰기 보단 아예 허리우드적 글쓰기를 작정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작품은 다분히 나르시즘적이다.(차라리 아예 작가를 나르시스트라고 해야하려나?)  

솔직히 나는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닌데 영화나 글쓰기만큼은 허리우드적이 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싶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세계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 나름 고민을 갖는 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허리우드적인 것이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소설이나 영화가 허리우드를 쫓을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세계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이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공부한 탓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공부해 보라. 허리우드 작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좀비가 되어 이 모양이 되는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나 할까?ㅋ)  

그래도 뭐 일단 '재밌다'는 점에선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허리우드표는 재밌는 것' 또는 '재밌는 건 허리우드' 뭐 그런 공식이라면 문제는 여전히 남을테지만 어쨌든 재밌는 건 사실이다.  

왜 더운 여름엔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라는 건지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강추할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노석미 그림 / 살림Friends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지즈 네신은 터키의 유명한 풍자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 몇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가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난 그의 작품을 이전에 대해 본적이 없었고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그를 만났다.  

작가가 유명하긴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우리가 잘 아는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터키작가 오르한 파묵도 경의를 표한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난 또 유감스럽게도 아직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터키 작가는 아지즈 네신이 처음이었고 그건 다소 낮선 경험이기도 했다.  

사실 뭐 꼭 '낮설다'는 표현을 굳이 써야하는 걸까? 문학이란게 국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긴 해도 결국 인간에 관해 말하고 인간성을 추구하는 게 문학이고 보면 하나로 통하는 뭔가가 있다. 그래도 굳이 낮설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터키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3세계 국가일 수 밖에 없고 그동안 국내에 터키 문학이 그다지 많이 소개가 되지 않았으며 거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그 나라가 이슬람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처음 대해 본 문학작품 치고는 묘한 매력이 묻어난다. 이국적인 매력이라고나 할까?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 작가는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유년 시절을 잘 녹여내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료로 이렇게 글로써 빛어낼 수 있다면 우리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글로써 표현해 볼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자신 안에 있는 여러 가지가 자극 받을 수 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나 역시 어린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예를들면,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오줌 싸고 돌아와 엄마를 속여 옷이 갈아 입은지 오래 됐으니 빨아야할 것 같다고 하나 하나 벗어내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있은 기억. 아버지 친구분들이 술이 취에 밤늦게 들이 닦쳐서는 술김에 어린 나와 내 동생에게 돈을 준다는 것이 5천원짜리를 받은 것이다. 그때 돈 5천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 그 시절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하루 군것질 10원씩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5000일은 엄마에게 손벌리지 않아도 될 테니 동생에게 너와 나 둘이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했다가 실패했다.(그때는 5000일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날 위해 피아노를 사 주셨지만 난 그것을 기뻐하기 보다 부담스러워 전전긍긍했던 기억 등이 읽으면서 오버랩이 되었다.    

작가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고, 모르긴 해도 노년에 이르러 썼던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어린 시절은 늙어도 변하지 않은 채 우리안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아득해져 오는 느낌이다.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작가는 가난해도 좋은 부모님 밑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물론 어머니가 병약했던 건 작가에겐 안타까움이었겠지만 곳곳에 부모님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묻어나 있다. 

작가는 특별히 풍자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풍자 작가라. 이것이 보기엔 쉬운 것 같아도 풍자를 표현하긴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인생을 관조할 줄 알아야 하고 거기서 유머를 길러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항상 물어 본다고 한다. 왜 풍자 작가가 되었느냐고. 그러면 그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한 후 하지만 자신을 풍자 작가로 만든 것은 자신의 삶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눈물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고 있다.(24p)  

작가의 말이 참 의미심장하다. 그의 눈물이 자신을 풍자 작가로 만들었다니!  그렇다. 이건 분명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은 눈물뿐이고 고로 슬픔과 고통이 많다. 하지만 거기서 위트와 유머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 하나의 풍자를 건져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인생을 곱씹은 나날이 있어왔는지 우리는 다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문학이란 도구는 얼마나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가? 

세상에 아지즈 네신만한 또는 그 보다 더한 눈물과 아픔을 지닌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 안에만 간직하고 있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킴으로 그는 오늘 날까지도 터키가 가장 추앙해마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삶도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슬픔이 그 누군가에겐 웃음이 되고 약이 될 수만 있다면 그의 삶은 그 누군가에게로부터 경의를 받아 마땅한다. 그것이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니어도 말이다. 

오늘 아지즈 네신은 특별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풍자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있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