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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화 공식엔 공식이 있다. 즉 사람을 모은다. 자기네들끼리 툭탁거리며 싸운다. 난관을 만난다. 그 난관을 이겨낸 듯 보인다. 그러나 각자의 사정으로 흩어진다. 그러다 이러면 안 된다고 대오각성하고 하나 둘씩 다시 모이고, 으샤으샤한 뒤 아름다운 마무리. 이 영화 역시 그 공식에 충실해 보인다. 

코치가 찌질이들을 모은다. 코치는 나름 똑똑한 사람이다. 선수들 개개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으니. 그 욕망을 자극하면 어쨌든 없던 의지도 다시 살아나며, 궁시렁 궁시렁 말이 많아도 어쨌든 해낸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비인기 종목인 스키 점프라고는 하지만 찌질이 찌질이 그런 찌질이들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런 찌질이 발굴해내는 재주도 코치의 능력 중의 하날까?  

아무튼 이들은 툭탁거리면서 2시간여의 러닝 타임을 잘도 이끌어간다. 한마디로 스포츠 영화는 재미없다는 인식을 날려버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영화계가 스포츠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름 성공적이기도 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성과가 좋지 않은가? 스포츠 영화도 잘만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이어 보여주고 있으니 아마 모르긴 해도 이쪽에 투자를 많이 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스키 점프. 알고 보면 꽤 매력있는 스포츠란 생각이 든다.  

인간이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은 태곳적부터였을 것이다. 그래서 좀 많은 장치들이 고안되고 발명되었을까? 스키 점프도 그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린 이 스포츠에 대해 너무 무관심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관심없는 종목이 어디 스키 점프만인가? 핸드볼도 그렇지 않은가? 뭐하나 재대로 관심을 주는 스포츠가 없다. 그나마 야구나 축구나 농구, 골프는 꾸준히 뭔가의 이벤트가 있어왔고 그래도 주기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으니 이나마 이끌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이벤트 없고 스포트라이트 못 받는 스포츠는 늘 그늘져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이렇게 영화로나마 스키 점프가 주목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그 대우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보게 된다. 


뭐니 뭐니해도 이 영화는 하정우를 위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평소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이 배우가 나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당분간은 하정우 전성시대는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는 배역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냈다고 생각한다. 찌질이지만 속은 영웅이다. 입양아로서 자신을 버린 이 나라와 생모에 대한 원망과 용서 그 중간에서 갈등하는 역할을 잘 소화해 냈다고 봐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특히 하정우를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내게 어떤 나라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비리 공화국. 하루도 사건, 사고가 안 터지는 날이 없는 나라. 데모가 끊이지 않는 나라. 누구든 대통령이 되면 찌질이가 되어버리는 나라.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사람처럼 못 되게구는 나라 국민도 없단다. 살고 싶지 않은 나라. 그래서 이민을 하루에도 몇번씩 생각하게 만드는 나라. 뭐하나 예쁜 구석이 없다. 그래도 외국만 나가면 왜 그리도 애국가만 부르면 가슴이 뭉클하단 말인가? 그것이 꼭 하정우가 맡은 차헌태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 찌질이들 독일 올림픽인지 세계 선수권 대횐지에 나가 꼴등이나 다름없는 13등을 해 놓고도 선수 락커룸 캐비닛에 태극기 달아 놓고 울먹이며 애국가를 부른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뜨거운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차헌태의 생모가 어린 시절 아들에게 토마토를 설탕에 재어 먹였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 추억 때문에 차헌태는 차마 나라를 배반하지 못했고 생모를 원망하지 못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못된 나라. 사니 못 사니 하는 나라여도 우리의 어머니가 아내가 해 준 뜨신 밥과 모유를 먹고 자랐기에 우린 차마 이 나라를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TV 드라마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영화는 찌질이를 개과천선시켜 용이 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TV 드라마는 이 공식이 처음부터 통하질 않는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등장인물이나 배경이 화려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을 해 놓으니 나중에는 가랭이가 찢어져 용두사미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찌질이가 아닌 F4같은 왕자님들을 등장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잘 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는하나 그래도 아직까지 이 나라는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 보단 살려고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살만한 나라요.라고 말해주면 좋지 않은가? 만날 물고 뜯고 싸우다 이런 영화 보면 한 줄기 소낙비를 만난 것 같아 시원하고 뭉클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내용에 비해 러닝 타임이 다소 길다는 느낌도 든다. 하긴 영화관람료 오른 걸 생각하면 본전은 빼고도 남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가 어찌보면 노련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약간 넘친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뭐 그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재 관객수 6백만이 넘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갈지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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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0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CG이지만 저렇게 하늘을 나는 순간의 짜릿함을
대리만족하게 해준 것만으로 이 영화는 제게 좋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다른 부분은 좀, 갸우뚱이었지만요.ㅎㅎ

stella.K 2009-09-02 20:55   좋아요 0 | URL
앗, 이런...그래서 추천이 없으셨구만요.ㅋ

프레이야 2009-09-02 22:57   좋아요 0 | URL
아앗, 그랬나요?
아까 바빠서 깜박했나봐요 ㅎㅎ
스텔라님 글에 당연 추천이지요.

stella.K 2009-09-03 10:32   좋아요 0 | URL
앗, 그냥...부끄럽고,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얼마전 발간된 <책 읽는 뇌> 의 저자는,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으며,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인 발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말에 공감한다.  

초등학교를 막 진학해서 첫 방학을 맞았을 때 나는 '생활통지표'라는 걸 처음 받아봤다. 그때 나의 체육이란 과목에 '가'를 맞은 걸 보고 충격을 먹었다. 최하점수를 맞은 것도 맞은거지만 이제부터 나의 학교생활이 이런 식으로 점수가 매겨지는구나라는 사실이 좀 더 충격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때 담임 선생님은 나의 학교생활 전반을 기록하는란에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로 기록했고 나는 그것으로인해 언니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뭐 체육이야 워낙에 운동신경이 없으니 가를 받아도 할 말은 없다고 쳐도 도대체 담임 선생님은 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쓰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그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느냐면, 쉬는 시간 10분 동안에도 화장실 갈 일 없으면 그 막간을 이용해 읽기도 했고, 점심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중학교 올라와서는 보통 4교시 끝나고 먹는 점심을 3교시 끝나고 후딱 먹어치운 후 점심 시간을 온통 책 읽는 시간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이 온전히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는 아인줄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셨더라면 그 셍활통지표에 결코 그렇게 쓰시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대신 책을 늦게 읽는 아이라고 쓰셨다면 말이되지만. 그래도 나의 언니는 여전히 킥킥대고 웃었을까? 하지만 책을 늦게 읽는다고 학습 부진아는 아니지 않는가? 그 정도 가지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이 세상은 너무 가혹할 것이다.  

그 시절 내가 즐겨봤던 책은 계림문고라는 아동용 세계문학 전집이었다. 이 책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았는데 아버지께 그 도톰하고 묵직한 문학전집을 사 달라는 말을 차마 못해 낱권으로 이 책들을 사 모았다. 한 권당 350원인가 했는데 3권을 한꺼번에 사면 그 문방구 주인 부부가 천원에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난 내 앞에 앉은 남자 아이를 좀 좋아했는데, 마침 그때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추리소설 읽기가 유행이었다. 그때 어떤 출판산지 모르겠는데 어린이 문고용으로 홈즈나 루팡 시리즈를 15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얇게 만들어 나온 책이 유행이었다. 난 호기심에 그 책을 몇 권 사서 읽긴 했는데 추리물은 그다지 나에겐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남자 아이의 관심을 끌어 보겠다고 책을 책상 바닥에 놓고 읽지 않고 일부러 코높이 가까이 들고 읽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만에 그 아이는 나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치더니 그 책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아싸!'하며 기회가 온 것을 내심 기뻐했지만 나는 짐짓 무관심한 척, "그래? 알았어. 다 읽으면 빌려줄게."했다. 일단 관심을 끄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녀석 마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한테 있었음이 들어나 단칼에 내 마음에서 녀석을 도려내버리고 말았다. '난 너 같은 바랑둥이는 싫어!'하며 말이다. 그후 나는 다시는 책으로 사람의 마음을 후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스티븐 킹의 <캐리>란 동명 영화가 나왔고 연이어 책도 출간이 되었다.  

요즘엔 마케팅을 잘해선지 영화나 드라마가 뜨면 덩달아 그 작품의 원작 소설도 뜨지만, 당시는 그런 것들의 기반이 워낙에 약해 영화는 나름 성공했던 것 같은데 책은 그다지 재미를 못 봤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비단 <캐리>의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영화가 뜨면 책이 재미가 없다거나, 책이 재미있으면 영화는 재미가 없다는 속설이 공공연히 나돌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영화로 뜬 작품이 책으로는 안 뜰 수가 있단 말인가?  

좀 웃긴 건, 나는 <캐리>란 영화는 보지 않았으면서 책은 몰래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당시 나는 어려서 그 책이 명목상 금서 목록이긴 했지만, 그 책을 그렇게 들고 다니면 아이들 사이에서 나름 주목을 받기도 했다. 물론 공포물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이유는 따로있었다. 즉 거기서 보면 주인공 캐리가 동급생 여자 아이들 보다 초경을 늦게 시작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의 묘한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동시에여자 아이들은 불편했던 까닭이다. 여자 아이들은 그런 책을 태연하게 보고 있는 나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감추긴 했지만 요즘 시쳇말로 그까이 꺼 가지고 뭘 그러나 아이들이 좀 유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난 곧 그 책을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엎어버리고 말았다. 왜냐구? 당연 재미없었으니까다.  

번역이 잘 안된 건지 아니면 내가 그때만해도 아직 그런 걸 소화해낼 그릇이 못되었는지 암튼 완독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영화의 한장면에서 따옴직한 돼지피를 뒤집어 쓴 캐리의 모습을 앞표지에 실은 그 책은 그렇게 아이들에겐 나름 신비한 끌림을 줬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후 나는 여전히 다른 책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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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아마 저 오른쪽의 컷을 책표지로 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저주 받을 세로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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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읽었던 책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라즈니쉬의 <자기로부터의 혁명>같은 어려운 책에 도전해 보기도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확실히 지적 허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나는 동네 단골 주인 아저씨한테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저술가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사람이 쓴 책이 있냐고 물어 아저씨를 당황하게도 했고,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겠다고 하면 속으로 왜 이런 책도 번역되지 않았냐며 우리나라 출판의 낙후성을 비난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다는 생각 밖엔 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책들은 지금 읽는다고 해도 아찔하게 어려운 책들이다. 오죽했으면 니체의 책 가지고 농짓거리가 다 생겼을까? "자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이 책은 정말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책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 시절 난 까만 건 글자요 하얀건 종이인 이 두 권의 책을 과감하게 첫 페이지 첫 글자로부터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글자까지 꾸역꾸역 읽어냈다. 왜 덮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재밌다던 스티븐 킹의 '캐리'도 덮은 내가 그때는 책 읽기의 괴로움을 몸소 감내하며 꾸역꾸역 읽었던 것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책을 샀을 당시엔 울적해서 샀는데 집에와 막상 읽으려고하니 도저히 못 읽겠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우연한 기회에 그책을 다시 손에 들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그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쿠센버그란 독일작가의 <바보는 웃지 않는다2>였다. 그야말로 정말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바보일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웃을 수도 없었다. 그 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 책을 샀던 서점으로 갔지만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책은 절판이되고 그책을 출판했던 출판사조차 없어지고난 후였다.     

그러고 보니 과연 지금까지의 나의 독서 이력을 볼 때 내가 정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알고보면 이 책은 이래서 못 읽고, 저 책은 저래서 못 읽었다. 또한 책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안 읽고 못 읽는 책 역시 많아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기를 놓쳐서 못 읽게 되는 경우도 읽다. 그러니 나는 정말로 책 읽기를 좋아하는가? 고려해 봐야할 일이다.  

또 책 중엔 남들은 좋다는데 나는 맞지 않는 책도 있다. 사람도 자기에게 맞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책도 사람이 쓰는 것만큼 궁합이 맞는 책이 따로 있게 마련인 것 같다. 그럴 때 갖는 마음은 여러 갈래다. 어떤 경우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책을 좋다고할 수 있단 말인가? 분개할 때도 있고, 어떤 땐 남들은 능히 읽는 책을 왜 나는 못 읽을까 자책을 하게되는 책도 있다.  

결국 그러다 보니 좀 어렵거나 나한테 맞지 않는다 싶은 책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배짱이 생겼다. 그런 책은 읽어봐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뿐만 아니라 시간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읽을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맞지도 이해도 못할 책 가지고 씨름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편독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은 어느 하나에 길이 들면 그것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이 생기게 마련이다. 물론 내가 못 읽고 안 읽는 책도 있지만 출판된 책들을 보다보면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책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책은 이건 좀 아닌데 싶은데도 속아서 읽게 되는 책도 있다. 그러면 좀 억울한 생각도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보면 알면서 속아주는 관계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에 비하면 책에 속아 주는 것쯤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게도 된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책에 대한 집중도 떨어졌으며 그렇게 10분 15분의 막간을 이용해 책을 읽는 열정도 없어졌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면, 책이 예전에 비하면 훨씬 많아져서일까? 홍수 중 가뭄이랬다고 그렇게 많은 책들 중 만족된 독서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예를들어 5권을 읽었다면 그중 만족된 독서를 했다고 생각되는 책은 한 권 정도나 될까?  

이렇게 책을 읽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여전히 즐거운 일인 동시에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시지프의 후예들일 거라는 것이다. 나는 방금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몇 시간 내지 하루가 지나서 금방 또 다른 책을 펼쳐들거란 점에서.  

그 똑같이 되풀이되는 행위속에 무엇이 남을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책을 좀 더 사랑하자. 나를 좀 더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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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라딘이 나를 버렸다.
    from stella09님의 서재 2009-09-05 13:29 
    http://blog.aladdin.co.kr/trackback/stella09/3063747  알라딘이 나를 버렸다. 이 페이퍼 정말 열심히 썼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단 말인가?ㅠ.ㅠ   
 
 
hnine 2009-08-3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글 중에 나오는 책들이 저도 대부분 아는 책이어서 반가왔어요.
연노란 색 표지의 계림문고, 낱권으로 팔던 책이었지요. 저도 기억해요.
그 추리소설 시리즈를 내던 출판사 이름은 저도 가물가물하네요. 저도 무척 좋아했는데.
혹시 그것도 계림 출판사 아니었던가요? 까만 색 표지의.

stella.K 2009-08-31 11: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그 추리소설 계림출판사에서 나온 것 같긴한데
확실할까 싶어 밝히지 못했답니다.
나이가 들으니 옛날 생각 참 많이나요. 그죠?^^

헌책방IC 2009-08-30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술을 많이 마시면 그 다음날 많이 괴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시지 않으려니, 또 마시고 싶은 게 술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마시면 그 다음날 또 괴롭고. 그래도 또 마시고. 왜. 좋으니까.ㅎㅎ
글 곳곳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실례 좀 했습니다.^^

stella.K 2009-08-31 11:15   좋아요 0 | URL
ㅎㅎ 앞으론 술 드지 마시고 책 읽으세요.^^

하늘바람 2009-08-3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많이 공감이 가 웃으면서 읽었어요. 왜 나이들면 집중도가 떨어질까요 제가 요즘 그러네요

stella.K 2009-08-31 11:25   좋아요 0 | URL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할걸요?ㅎ 그래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지연시켜 주는게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읽으세요.^^
 
말레나 - Malen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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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영화를 보면 참 능청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자기는 너무 심각한데 보는 사람들은 너무 웃긴 거. 이탈리아 영화를 보다보면 그런 요소들을 의외로 많이 발견하게 돼 영화를 보는 것이 즐겁다. 

여기 또 그런 한편의 영화가 있다. <말레나>다.  

이 영화는 어찌보면 사춘기 소년의 성적 판타지를 극대화시킨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스틸 사진을 보라.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쪼르륵 앉아 있다. 그중 맨 오른쪽에 지중해의 햇빛을 받아 허옇게 들떠 보이는 남자아이가 이 영화의 화자인 레나토다. 또한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영화제목 그대로 말레나. 모니카 벨루치가 이 역을 맡았다. 그녀는 영화내내 고혹적인 자태로 걷는게 인상적이다.   

때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이 마을은 말레나가 나타난 이후 들썽이기 시작한다. 남자들은 말레나를 지켜보느라 침을 줄줄 흘릴 정도고, 여자들은 이 '위험한 여자'로부터 남편을 지켜내야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막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사내아이들은 말레나가 여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을 여자들은 애초부터 말레나를 너무 질투한 나머지 창녀라고 수근거리고 다녔고 실제로 그녀를 모함하기까지 한다. 그러던 중 말레나는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일자리를 구해 보지만 쉽지가 않다. 동네 아낙들이 그녀에게 일자리를 구해주지 않기로 결의했고, 남자들 역시도 아내들이 무서워 말레나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 마을 아낙들 꽤나 드센가 보다. 아니면 남정네들이 너무 약하거나. 어찌 그리도 졸지에 과부가 된 여자에게 이리도 못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 그뿐인가? 남자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말레나의 불리한 상황을 이용해 도와주겠다고 접근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그녀는 서서히 마을 남자들의 놀이게 감으로 전락해 간다.  

그런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말레나의 아버지가 공습으로 인해 건물이 붕괴되면서 압사당하는 사고를 겪게되고 만다. 말레나는 그때까지 자기를 지켜준 마지막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 진짜 창녀가 되기로 결심한다.(이때의 모니카 벨루치의 이미지 변신이 놀랍다.) 

한편 레나토는 말레나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영화 전편에 걸쳐 그녀 덕분에 그의 정신적 키의 50뼘은 더 컸을 것이다. 또한 그의 관음증을 통해 말레나의 전락과 마을 사람들의 위선을 가장 정확하게 지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육체도 그의 정신만큼이나 하루아침에 훌쩍 커버리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러나 그의 정신에 비하면 육체는 형편없이 아직도 작다. 그래서 영화 내내 한번도 말레나와 맞닥뜨리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가슴만 쓸어내려야 했다.  

결국 그 어린 육체가 할 수 있는 건 소년들이나 입는 반바지를 이젠 입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과 말레나 속옷을 훔쳐 아버지로부터 변태라는 오해를 받으며, 말레나의 수호천사를 자청하는 정도가 전부다.  

수호천사를 자청해서는 누구라도 말레나를 험담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응징에 들어간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응징이라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마을 아줌마의 핸드백에 오줌을 갈기는 정도?ㅋ 아, 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런 소년이란 말인가? 

하지만 레나토가 어른이 되었음을 가장 정확하게 직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말레나만 보면 흥분이 지나쳐 기절을 할 때 여자들은 부적을 사용하며 온갖 주술을 써 보지만 정작 레나토의 아버지는 그를 홍등가로 밀어넣는다. 거기서 총각 딱지(?)를 떼라고. 그 얼마나 현실적이면서도 웃기는 발상인가? 13살 어린 아이에게 말이다.  

이 영화는 가부장 혹은 마초들을 냉소하기 위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여자를 지키는 건 여자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다. 말레나를 보라. 좌청룡우백호라고 할 수 남편과 아버지가 죽자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마음껏 놀려댔는지를. 그래서 역으로 그런 그들을 놀려주기 위해 말레나는 스스로 창녀가 되었다. 하다못해 적대국인 독일 병사들조차 상대하면서 한껏 놀려주지 않았던가?   

그런 말레나에게 표창을 못해줄 망정 전쟁이 종식되자 마을 여자들은 흥분한 나머지 성난 군중이되어 말레나를 마녀사냥 하기까지 한다. 말레나를 마을 사람들이 보는 갈기갈기 찢고 짓밟아주는 것이다. 그랬을 때 남자들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레나토 조차도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할 뿐 구해 줄 수가 없다.(여기서 아무리 모니카 벨루치지만 역을 소화에 내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말레나는 결국 찢어진 마음을 안고 얼굴을 가리운채 마을을 떠난다.   

그런데 왠일인가? 말레나가 떠난 후 지금까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남편이 팔 하나를 잃은 채 마을에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심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자기네들이 말레나를 어떻게 했는지를 알면 그를 똑바로 대할 수가 없다. 그때 용기있게 말해준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레나토 뿐이다.  

남편은 기꺼이 말레나를 찾으러 가고, 1년 후 둘은 또 다시 마을에 홀연히 나타난다. 그때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말레나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게되고 그녀는 기꺼이 그들의 손을 잡는다. 영화는 거 봐라. 여자에겐 역시 남자가 있어야 한다니까!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말했던 대로 이 영화는 가부장을 냉소하기 위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낀 건 이 영화는 어쩌면 성경의 그 유명한 예수님 간음한 여인, 즉 너희 중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치라는 말씀의 또 다른 패러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엔딩에서 레나토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여운을 남긴다. 정확한 건 옮길 수 없지만, 그후 나는 성인이 되어서 몇몇 여자들을 거쳤지만 정말 마음을 준 사람은 말레나 밖에 없다나? 나는 그 나레이션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말 믿어? 말아? 후후.  


이 스틸 컷이 좋다. 바다의 풍광도 좋지만 기운 자전거가 왠지모르게 운치를 더한다.  

아, 이 영화 언제고 한 번 더 봐야할 것 같다. 아직 안 봤다면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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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8-29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제게 모니카를 닮았다고해서 다운 받아놓은 영화였는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스텔라님의 리뷰와 강추에 힘입어 빨리 보게 될것 같아요.

stella.K 2009-08-29 18:05   좋아요 0 | URL
보시면 제 리뷰 보다 더 진한 감동을 느끼실 것 같아요.
꼭 함 보세요.^^

stella.K 2009-08-29 18:08   좋아요 0 | URL
헉, 그런데 반딧불이님이 모니카를 닮으셨다고요?
사진 올려주세욧!ㅋㅋ

하늘바람 2009-08-2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본 것같은데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stella.K 2009-08-29 18:06   좋아요 0 | URL
저도 언젠가 다시 보게될 것 같아요. 바람님도 꼭 보세요.^^
 
한승원의 소설쓰는 법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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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한승원을 알게된 건 10년 전쯤에 읽은 <사랑>이란 소설을 통해서였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분히 샤머니즘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강렬하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문체는 지금도 또렷히 기억한다.  

그후 그의 다른 작품도 읽을만도 한데 그 강렬한 문체가 눈이 부셔서였을까? 나는 단 한 작품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선생의 책을 또 한 권 읽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읽은 건 그의 소설이 아니라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다.   

다른 여타의 작가들의 글쓰기에 관한 책은 종종 읽어왔다. 내가 이런 책을 읽는 것은 물론  그들의글쓰기의 노하우를 알고 싶어서다. 물론 읽기만 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자기 연마가 있지 않으면 그런 책들은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을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심한 모욕이 될 것이다. 어떻게 글을 쓰지 않을거라고 해서 이런 책을 읽지 말라 하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런 책이 나름 재미가 있다. 물론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읽기도 하겠지만 읽다보면 작가들의 세계관이나 스타일, 보이지 않는 이면들을 볼 수가 있어 나름 흥미롭다.    

나는 지금까지 이승우 씨와 스티븐 킹, 김탁환 씨 등의 책을 읽었는데, 이승우 씨는 논리가 있으면서 깊이가 느껴지고, 스티븐 킹은 마치 오두막 집을 짓는 느낌이다. 또한 김탁환 씨는 그 스펙트럼이 넓다고나 할까?   

그런데 비해 한승원 선생은 글쓰기에 관한 책 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깊이를 잘 녹여내고 있어서 위에 나열한 책과는 또 좀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비록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소설만큼이나 에로틱하며, 샤머니즘적이며 불교적이고 기독교적이다. 즉 말하자면 그 필력이 글쓰기에 관한 책에서도 그대로 녹아진 느낌이든다는 것이다.  

사실 난 그 옛날 <사랑>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선생이 불교 신자거나 적어도 불교 사상에 심취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분은 불교 신자라기 보단 범신론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내가 이 책에서 놀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이런 글에서도 자유자제로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두고 감히 말하건데 '소설 사상가'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수식어가 있으며 이렇게 불린 사람이 있어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읽다보면 선생이 얼마나 글쓰기를 사랑하고, 글을 쓸 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태워가며 글을 쓰고 있는가가 느껴진다. 하지만 사랑이란 말, 자신의 영혼을 태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고 고행인지 조금이라도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실감하고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기꺼이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이 세계에 오라고 초대한다. 올곧게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자신의 글만 써 낼 것만 같은 선생은 오히려 이런 상업주의에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 남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즉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말씀하시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그 옛날 생전 처음으로 글 쓰기를 배워 보겠다고 만난 나의 사부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 분은 자신이 과연 글을 쓸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척도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내 안에 분노나 원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작가가 되어서 그들을 보란 듯이 눌러줄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과 글쓰기를 다 마쳤을 때 그 다음 번에도 글을 또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나의 사부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건 그것의 동기와 정의가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좀 아니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서 미움이나 원한 때문에 내뱉는 독설과 가시가 그러한 세상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 한승원이란 작가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은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의 몫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 하고 용서하고 더불어 살려 하고 착하게 살려고 한다. 착하게 살려 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작가는 좋은 눈(시각)이 만드는 것이다. 좋은 눈은 착한 생각과 좋은 책 읽기와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의지를 가질 때 더 잘 만들어진다.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꽃 한 송이가 되어 세상에 장식되려 하는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이 나에겐 좀 더 옳은 말 같다(지금은 그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치시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그 옛날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도 못할지 모르고). 

그런데 우리의 한승원 선생 또 짖궂게도 책 말미에 이런 말씀도 남기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가'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하시면서 소설가를 창녀에 비유한다.  
"고객이 오르가슴에 이르도록 연출할 뿐만 아니라 고객이 성적으로 그녀를 제압한 제왕이 되도록 연기도 능숙하게 해야 한다. 침대안에 들어온 고객으로 하여금 성적으로 열등감을 맛보게 하거나 그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소설가도 창녀와 같다. 당신은 고객인 독자를 위해 성심을 다해 책을 읽어야 하고 열정적으로 소설을 써야한다. 독자가 당신의 책을 읽는 한 시간을 위하여 작가인 당신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나는 소설가를 잡식성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 몸을 파는 창녀가 몸뚱이 하나만으로 창녀 행위를 하지 않고 자기의 온 인생, 온 운명을 던져서 미친 듯이 고객을 위해 사랑행위를 하듯이 소설가는 먼저 책 읽기에 미쳐야 하고 소설거리를 하나 붙잡으면 그 소설을 미친 듯이 써내야 한다." 

지금히 당연한 말이지만 창녀에 비유하니 처절하면서도 묘한 느낌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뜻 있는 작가는 자기를 스스로 유배 보낸다. 그 유배지는 자기가 마련한 작가실이다. 작가는 그 유배지에서 자기를 양생해야 한다. 작가는 세상과 자기에게서 유배당할지라도 외롭지 않은 기이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자기 소설 속에 설정한 인물들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과연 멋진 말이다. 그러니 작가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자위하며 휘청대지 말지어다.   

아무튼 작가 한승원 선생은 멋진 분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소설 사상가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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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2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외롭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 말의 의미가 진정 작가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녀 비유는 글쩍글쩍~

stella.K 2009-08-24 11:59   좋아요 0 | URL
비유가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전 마음에 드는데요.ㅎㅎㅎ

Sati 2009-08-24 21:11   좋아요 0 | URL
창녀 비유는 요네하라 마리의 <미녀냐 추녀냐>를 연상시키는데요.

stella.K 2009-08-25 10:23   좋아요 0 | URL
헉, 정말요? 이 사람에겐 관심이 많은데 아직 읽어 본 적이 없네요.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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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가 요즘 흔히 하는대로 영화화 될 것을 생각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무엇보다 추리였던 만큼 혹시나 놓치고 가면 맥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처음엔 꽤나 신경 써서 꼼꼼히 읽어 나갔다. 무엇도다 북유럽 작가가 쓴만큼 기대는 더욱 증폭히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읽고나서의 허망함이란 북유럽의 한기만큼이나 시리다고나 할까? 어떻게 이런 작품을 아가사 크리스티에 견주겠다는 건지 좀 심하다 싶다.(물론 그 수식어라는 거 다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거 진작에 알고 있긴 했지만)  

물론 나야 추리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많이 읽지도 못했다. 하지만 추리라고하면 상당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하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고, 중간을 지나서는 엄청난 뭔가 엄청난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추리 매니아가 아닌 나도 알고 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영화화 될 것을 생각해서 쓴 작품이 여실했던만큼 영화적 문법을 확실히 보여줬어야했다고 본다. 그것은 영상적 이미지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이 책은 480여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없는 인물 묘사나 상황 묘사로 페이지를 채워 늘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살해된 알렉스가 아니라 경찰관 파트리크와 전기 작가라는(난 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추리 작가나 범죄 소설가라면 설득력이 있는데 왠 뜬금없는) 에리카의 활약상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역할이라는 게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다. 너무 정적이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웬 연애질이란 말인가? 뭐 같이 일하다 보면 눈이 맞아 연애도 할 수 있다지만 여기선 그 번지수가 아니다. 그냥 학창시절 못 이룬 사랑을 어찌하다 보니 같은 일을 하게되서 나이들어 이루는 그야말로 독자들은 별로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내용들이다.   

거기다 양념 격으로 심심하면 한번씩 나와주는 에리카의 동생 안나와 제부의 갈등 관계. 집에 관한 추억과 현실적인 문제도 나열만 있다 뿐이지 이걸 가지고 재대로 된 요리도 못하면서 페이지 수만 할애하고 있다. 마무리 짓지 못하는 이야기를 왜 그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인지... 

어디 그뿐인가? 에리카와 알렉스는 친구 관계라고는 하지만 아주 친한 친구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조금 우정있게 지내다 멀어진 친구 사이다. 작가적 호기심은 있을 수 있겠지만 죽은 친구를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그것도 전기가 아닌 소설로. 그런데 소설 내용은 없고 글 쓰는 건 너무 어렵다고 칭얼대기만 한다.  

어디 그뿐인가? 400쪽 정도에 다다르면 죽은 알렉스의 감추어진 비밀이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진술 되어지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성폭력은 개인에게 있어서 처참한 상처를 입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독자에겐 새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독자는 같은 성폭력이어도 뭔가 대단한 비밀이 벗겨지는 것을 원하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아버지에 의해 진술될 것을 앞에 그처럼 장황한 나열이 필요했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딸을 위해 책을 써 달라고 에리카에게 부탁하고 격려까지 한다. 이게 정상적인 정서를 가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원래 부자는 못된 사람이어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가문의 수치스런 역사를 감추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이긴 하다. 그렇다면 통조림 공장을 하며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로렌트 가문에 대해 파트리크와 에리카는 뭘했는가? 그래야 한 사람은 사건을 파헤치고 한 사람은 글감을 찾아야 한다. 둘 다 진실을 찾되 서로 그 기능은 다른.    

알렉스를 10살 때 성폭행했다던 유아성도착자라던 닐스 로렌트는 이름만 거론될 뿐 작품을 통털어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안데르센(?)과 그의 어머니 베라. 결국 아들 때문에 알렉스를 죽인 것이 되는데 이 설정이 맞는 설정인 것인지? 복수는 로렌트의 노마님에게 해야하는데 왜 애꿎은 자기 아들과 같은 처지인 알렉스를 죽여야 하는 것인지? 그런 모성이라면 닐스를 어떻게든 찾아내 아작을 내주던가 노마님에게 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닐스 로렌트가 끝까지 가리워진 신비의 인물로 나오는데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암시만 줄뿐 마땅히 독자를 납득할만한 어떠한 설득력도 없다. 그리고 베라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나오지도 않은 채 끝은 되게 모호하게 관련없는 진술로 끝나고 있다. 

이외에도 문제점은 많아 보이지만 더 거론하고 싶지가 않다. 그저 이렇게 결함이 많고 되다만 이야기가 영화화 됐다니 그 영화는 어떨까? 궁금할 뿐이다. 한마디로 뭐하나 시원하게 재대로 건드려 주는 게 없다.  

나 역시도 아가시크리스티의 부활이니 어쩌니 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긴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수식어는 좀 뺐으면 한다. 돌아가신 추리의 여왕님 관속에서 다시 일어나실라.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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