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나는 어쩌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도를 알게 되었고, 그것은 실은 이'뷰즈'라는 잡지 때문이었다.     


 이곳 임원되시는 분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데, 그분으로부터 지난 가을 <신카이 마코토 전>을 소개받았고, 나는 가을병이 도지는 것을 최대한 연장해 보고자(그런다고 안 올리 만무했지만) 혼자 그곳을 갔다왔었다. 그분은 내친김에 취재글을 부탁했는데 거절하기가 뭐해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글을 써서 보내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기고가란 명패를 달고 멋지게 편집이 되어 오늘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잡지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잡지 같다. 아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디자인도 감각적이고 고급스럽다. 

여기서 잠깐 주요 컨텐츠를 살펴볼까?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의 역동적 사령탑 국립중앙박물관 최광식 관장

i Design으로 구현되는 디자이노 믹스의 축제를 이끌다 서울 디자인올림픽 총감독 천의영

미래의 행복한 휴먼도시를 디자인하는 행복설계사 팀장정두용 인천도시디자인 팀장 

푸른 강은 흘러라 감독 강미자& 배우 김예리  

불황을 걷을 기다림과 조절- KIAF의 부담과 기대 

현대 무용의 별이 지다 머스 커닝엄 Merce cunningham 

상실의 시대를 건너 구원으로 향하는 여정 <1Q84>와 하루키 

등이다. 내 글은 166p쯤에 자리하고 있다.   

궁금하신 분은 직접 사 보시길...(그럴리야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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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1-3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궁금한데요. 잡지가 참 멋지네요

stella.K 2009-11-30 14:3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받아보고 놀랐습니다. 이렇게 멋있는 줄은...!^^

카스피 2009-11-3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라면 혼자서 30분짜리 단편 에니메이션 별의 ○○(아이고 갑자기 기억이 안나네요)을 만든 그 감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stella.K 2009-11-30 19: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별의 목소리요.^^
 
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아직도 난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에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자살의 소식은 더 더욱. 하루가 멀다하고 매스컴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쏟아내고 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에 비유될만큼 각박해질대로 각박해진 세상에서 다른 어떤 소식은 다 익숙해져도 이놈의 죽음의 소식은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그렇지만 뭔가 망치로 머리를 맞는 느낌이다.  

이 작품을 읽을 때도 그랬다. 난 그저 제목이 그럴 듯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중딩 계집아이의 자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역시 나에겐 멍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난 자살이란 단어에 멍때리는 느낌만 가졌을 뿐이지 그 나머지 것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왜 죽었는지, 뭐 때문에 죽었는지, 그 죽음의 정황에 대해서 추측만할 뿐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의 자살에는 답이 뻔해 보인다. 십중팔구는 왕따 아니면 성적비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청소년의 자살. 그리고 이후에 남은 사람들의 심경에 관해 상당히 사실적이면서도 감수성 짙게 그렸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은 자살한 천지의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고 천지와 관련된 인물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물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그러므로 그 인물 하나하나에 읽는 사람이 공감이 가도록 했다.  

하긴 우리는 누가 자살을 했다면 혀를 끌끌차며 동정부터 앞질러 한다. 그러나 자살한 당사자만이 가장 불쌍하고 동정 받아야 할 존재일까? 살아있는 사람은 다 강한 자인가?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읽다보면 죽은 천지보단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하다못해 천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화연이까지도 함부로 비난할 수 없게 만든다. 

사실 왕따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를 위해 나름 노력들을 하겠지만 왕따가 알고보면 단순한 양상이 아니라는 걸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왕따를 하는 사람도 나름의 매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바보여서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힘이 있어서 왕따의 가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그것의 반대적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천지는 똑똑한 아이다. 아니 영악하다고 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어찌보면 이 아이는 이 이야기의 열쇠를 쥔 인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이들도 나름 영악해 보인다.  

사실 자살은 자신이 약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의 천지는 그렇다. 오히려 이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화가나 있고, 이런 세상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심판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보아진다. 선택이라.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상당히 자의적이며 동시에 오만한 것이 아닌가? 천지의 자기 서술 방식 또한 그렇다. 천지는 영악해서 자신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누군가는 화연을 심판하고 조롱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누가 죽은 천지를 무조건적인 동정으로만 일관할 수 있을까?  

천지를 온전히 동정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엄마와 언니 만지다. 그도 그럴 것이 천지를 낳았고 천지와 한 핏줄을 나눈 사이가 아닌가? 세상은 죽은 천지에 대해 뭐라고  욕 할지라도 그들만큼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참 읽는 나도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특히 천지가 죽고 난 후에도 그들 모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천지의 손길이 닿은 물건 또는 똑같은 일상속에서 천지만 없다는 사실에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엄마와 만지가 나누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위트가 담겨져 있는가? 그래서 더 슬프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슬퍼도 사는 것. 슬픈데 웃긴다. 웃긴데 슬프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엄마와 만지가 나누는 대화가 있다. 만지가 엄마에게 묻는다. 신 같은 거 믿냐고?신은 정말 있냐고? 그때 엄마는 자신있게 대답한다. 자신은 신이란 신은 다 믿는다고. 나쁜 짓 하라는 신은 없지 않냐고? 딸은 또 묻는다. 그런데 왜 나쁜 사람들은 그냥 둘까? 그러자 엄마는 또 말한다. 그래서 잡아가는 사람도 만들지 않았냐고. 하지만 엄마는 차마 이 말 한마디는 내놓지 못한다. '기집애야, 나한테는 니들이 신이고 종교였어.'(113~114p)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이런 부모를 두고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죄악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 역시 아주 가끔은 나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곤 한다. 나 세상 떠나는 건 그다지 슬프지 않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남아 있을 나의 엄마와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세상 떠나는 것도 쉽지는 않겠다 싶기도 하다. 내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마에겐 정말 신이요 종교였을 텐데 그런 내가 엄마의 가슴속에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의 상상은 감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작가는 끝까지 천지의 이야기를, 살아 있는 엄마와 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화연의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어쩌면 세상을 용서하는 천지만의 또한 작가만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천지는 화연이에게 왕따를 당할 때부터 어떻게 하면 그 친구에게 복수할 것인가를 알았을 것이다. 죽음으로 복수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천지의 죽음을 완성할 수 없다. 그런 복수도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닐까? 죽을 것인데 그런 삶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죽음 앞에 누구도 경건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지혜롭게도 유서 대신 다섯 개의 봉인 실을 만들어 살아있는 사람이 퍼즐을 맞추도록 했다. 그것이 용서를 위한 천지만의 방식이고 남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화연이를, 세상을 용서하기 위한 방식. 비록 그것이 '방향 잃은 용서'일지라도 말이다. 

엄마가 만지의 고등학교 입학 상담을 위해 학교를 찾던 날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가 눈을 끈다. 

   
 

요즘 애들은 충분히 똑똑한 거 같은데, 얼마나 더 똑똑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공부하나 말라요. ......(엄마) 

가르치는 입장에서 이런 말 참 우습지만, 어른들이 그렇게 시키잖아요.(선생님)  

어찌된 게 요즘 애들은 단체전은 없고 개인전만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혼자 다 하려나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겠어요.(엄마) 

부모님들이 시상대에 여럿이 올라가는 것보다, 자녀 혼자 올라가는 모습을 더 원하는 게 아닐까요?(선생님)  (160p)

 
   

 부모라면 다 이런 마음일 것이다. 내 아이가 신이고 종교인데 그런 생각 드는 거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오늘 날 교육의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결국 내 사랑하는 아이가 우상이란 말이다. 우상 같은 사랑은 독이다. 내 아이를 우상처럼 사랑하면 병이 들고만다. 왜 우리의 아이들을 혼자있게 만드는가? 애초부터 우리의 학교를 여럿이 함께 시상대에 올라갈 수 있는 단체전의 장으로 만들었더라면 천지 같은 비극은 반복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잘 지내니?"라는 저말이 없었다면 자신 또한 생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어른들이 하는, 너 밖에 없다. 사랑한다. 모두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실은 아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정말 이런 거짓말 우린 몇번이나 하고 살았던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잘 지내?"라는 인사가 너무 일상적이고 건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후 그 입에 발릴 것 같은 그 인사가 그렇게 힘을 지니는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나 역시 앞으로 우아한 거짓말보다 만나는 사람에게 저 질문을 더 많이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개인적으론 작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완득이' 보단 이 작품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무래도 '완득이'는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고 다음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한 글자 한 글자 찍어내듯이 글을 썼을 것 같은 작가의 문체 곳곳에서 묵직한 울림도 받았다. 무엇보다 청소년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지긋한 애정이 느껴져 작가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정말 보기 드문 수작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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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11-2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관심있었어요. 완득이는 그닥 공감하며 읽지 못했음에도 이상하게 작가의 이 후속작 소식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stella님은 잘 계신거죠? ^^

stella.K 2009-11-30 12:3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책은 정말 다르더군요.
hnine님도 읽으시면 감동 받으실 것 같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 고마워요.
님도 잘 지내시죠?^^
 
배리 린든 - Barry Lynd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한 인간의 흥망성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인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스토리면에선 크게 감동이 없다. 단지 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힘이라면 18세기 영국을 충실하게 재현해 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이 영화만큼 한 인간을 그리는데 충실한 영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영화가 없지는 않다. 20세기를 통털어 손가락 안에 드는 저 유명한 오손 웰즈 <시민 케인>이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가히 18세기 <시민 케인>을 연상케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는 '남자의 원형'을 충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가난한 레이몬드가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며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되는가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을 위기에서 자신의 연적과 결투에서 승리는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도망자의 신세라는 점에서 그는 처량하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중이었고 자원 입대를 하면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군에 입대를 한다. 하지만 그는 적당한 때를 보아 군대를 이탈하고 적군에 편입해서는 거기서 첩자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살기위해 적군과 아군에 동시에 첩자 노릇을 해 목숨을 부지한다. 주인공의 이런 모습은 살기 위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어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 후 그는 군에서 공적을 인정 받고 하사금도 받지만 역시 그의 인생은 레이디 린든을 만났을 때야 비로소 그 정점에 달한다. 하지만 레이디 린든은 이미 결혼한 몸. 명망있는 린든 경의 부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따뜻한 행운의 햇볕을 쪼이도록 허락한다. 다행히도 린든 경은 허약한 몸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만 죽는다면 레이디 린든과 결혼해서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 레이몬드는 가난하지만 잘 생겼고, 린든 부인은 젊고 아름답지만 남편은 이제 곧 죽을 것임으로 생의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때 둘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사랑을 불타오르게 만들 수가 있었다. 영화에서 보면 나래이션이 레이몬드가 린든 부인을 사랑하는데는 불과 6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하긴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면 그 말은 상당히 믿을만한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6 시간도 너무 긴 시간인지도 모른다. 순간을 영원에 빗댄다면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인간의 마음의 순차적 변화다. 가난할 땐 사랑이 전부일 것 같다. 그래서 결투도 불사하지 않는가? 잘 생겼지만 가난하고 하지만 사랑에 목숨걸 줄 안다. 여성으로서 어찌 이런 남자한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모성본능이 꿈틀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변한다. 아니 이럴 땐 진화한다는 말로 그 변화를 정당화 하기도 한다. 누군들 돈 많고 아름다운(또는 잘 생긴) 사람을 배우자로 원하지 않을까? 이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결 같은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이루어지고나면 거기서 해피 엔딩을 맞으려고 하지 않는다.  


동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 영화는 한 인간의 흥망성쇄를 다룬 드라마라고. 인간은 한 가지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의 것을 추구하게끔 되어있는 존재다.  

레이몬드는 결혼과 동시에 국왕에게 그의 이름을 자신의 부인의 성과 같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하고 그의 이름은 그때부터 배리 린든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종의 평민에서 상류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상류사회가 가져다 주는 안락과 나태함과 방탕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꼭 완전한 행복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그에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불안한 미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내의 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의붓 아들은 훗날 배리 린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는 배리 린든을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다. 그를 안타깝게 보는 건 그 다음이다. 

한 인간이 성공을 향해 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이 비정상적일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동정하거나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성공을 이룬 한 남자가 이루어야 할 마지막 단계는 뭐가 있을까? 배리 린든의 경우는 기사 작위 즉 명예인 것이다. 이 명예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평민 출신이었다. 그만한 부를 누렸다면 그만한 부에 어울리는 명예도 있어야 할 터인데 그는 여전히 평민의 수준을 못 벗어나는 신세였다. 이 '경'이란 작위를 얻기 위해 그는 돈을 물 쓰듯이 쓴다. 결국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그것은 결국 정상에 선 그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그에게 늘 위협이 되었던 의붓 아들이 결투를 청하게 되고 배리 린든은 그 결투에서 다리를 절단하는 큰 부상을 입고 만다. 그리고 그의 말로는 초라하게 끝을 맺는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은 욕망이란 생각을 해 본다. 때론 이 욕망을 제어하길 원해 수도원에도 들어가고 극단적인 금욕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만한 것이기에 이런 반대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단 말인가?  그것 또한 또 다른 면에서의 욕망은 아닐까? 어찌보면 배리 린든은 지극히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감히 그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댈 수가 없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얻게 되는 교훈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시시각각 끊어 오르는 욕망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배리 린든은 그렇게 쓸쓸하고 불쌍한 말로를 맞지만 그는 한 인간으로 나고 자라서 인간으로서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으니 아쉬움도 후회도 없을 듯하다. 물론 그의 노년이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고 죽기까지는 어느 만큼의 용기와 운도 따라줘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나래이션의 효과를 보고 있다. 누군지는 모르나 나래이션이 처음부터 끝까지 배리 린든을 주관적인 인물이 아닌 객관적인 인물로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게다가 무슨 연극처럼 3막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럴까? 정말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도 받는다. 무엇보다 18세기 영국을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사극을 좋아라는 사람이라면 빼놓지 말고 봐야할 작품이 아닌가 한다.  

연출이나 의상, 음악등 기술적인 면도 탁월하고 기교 또한 빼어난 수작이다. 더구나 주인공 배리 린든 역에 영화 <러브 스토리>의 타이틀롤인 라이언 오닐이다. 영화 매니아라면 빼놓지 말고 봐 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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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버드의 어리석음 - 세상을 바꾸지 않은 열세 사람 이야기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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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턴가 역사는 승자 독식의 기록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것은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 그렇다 보니 그렇게 증명된 것처럼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양지의 역사'는 우리가 접할 기회는 많지만 '음지의 역사'는 접할 기회가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양지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음지의 역사가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장되어 갔는지를 우리는 알리가 없다. 

누가 역사를 논할 때 거대담론만을 논하며 양지의 것들만을 논하라 했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칫 가리워져 잊혀질 뻔한 것에도 빛을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또한 역사 기술자가 응당해야 할 몫은 아니겠는가? 이 책의 저자 폴 콜린스는 똑똑하게도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찾아 자신만의 독특한 일인칭 방식으로, 13명의 똑똑하나 바보스러운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13인의 인물들은 각 분야에서 한때는 남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요즘 시쳇말로 대박 인생을 살다 끝끝내는 역사속에 스러져간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의 쓸쓸한 말로를 보는 것은 확실히 유쾌하지마는 않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다. 좀 더 엄중할 필요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들도 알고 보면 한때는 인류 문명에 이바지했던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멸을 했건, 시대가 그들을 뒷받침 해 주지 못했던 역사는 공정할 필요가 있고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 책을 그다지 성실하게 읽어내지는 못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번역의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남의 나라 역사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의 편협함이 문제인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낮선 느낌이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읽다보면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을 하게 된다. 그렇게 역사 속에 가리워진 사람들 그래서 누가 기억해 줄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의 역사도 사료적 가치로 인정하고 보관해 놓는 미국이란 나라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와 같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꺼내 내놓을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도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만). 하다못해 여기 소개된 13인의 초상을 소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점은 우리가 본받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를 말할 때 이인자, 패자 즉 역사적 음지의 사람들은 기억도 알지도 못한다. 그들이 잘 했으면 어떻게 잘하고, 못 했다면 어떻게 못 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한 채 사장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 반면교사의 의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공에 목마르고 사람을 단죄하려는 속성 때문에 그것에 부합되는 사람들만을 부각시켜 표적을 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도 아니면 모라는 편협된 사고 방식으로만 역사를 주입 받는 것이다. 그래가지고서는 창의적인 국민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라도가리워진 것에 애정을 보이고 좀 더 풍부한 역사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새삼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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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8-1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링크 타고 찾아서 흥미있게 소개글을 보다 리뷰 중에 스텔라님이 보이더라구요. 반가워서 와봅니다.^^

전 책 속 인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왠지 그냥 괜히 응원하고 싶어지더라구요.

stella.K 2010-08-14 14:27   좋아요 0 | URL
에그, 고맙습니다. 이책 저는 좀 그랬지만
과학쪽 그것도 과학사쪽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괜찮게 읽힐 것도 같아요.

주말인데 루체님 뭐하고 지내시나요?
휴일까지 모쪼록 즐겁게 보내세요.^^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우선 표지 정장이 마음에 들었다. 흘려 쓴 글씨체도 마음에 들고. 아주 어렸을 때 읽어보고 다시 안 읽었던 여자들의 로망 신데렐라를 이 기회에 다시 읽는 감회도 새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의 오류를 바로잡고 거기에 깊이있는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이 책을 쓰느라 노고가 많았을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신데렐라가 왜 재투성이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즉 신데렐라의 어원을 설명해 주고, 그후 본문에서는 신데렐라의 독일어 버전과 영국 버전을 수록해서(그것도 원문과 번역을 함께) 우리가 읽고 있는 일명 '재투성이 아가씨'와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글쎄, 나는 이 책을 워낙에 오래 읽었던지라 지금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 나온 이야기는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내가 읽었던 이 이야기는 미국판을 수입해서 의역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이 이야기의 원뜻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니 그런 줄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내용이 확실히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의붓 엄마와 그의 딸들이 신데렐라의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새끼 발가락을 자르고 뒷꿈치를 깍아내도록 부추기고 실제로 잘라냈다는 내용은 황당하기도 하고 엽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가 어렸을 적 읽은 '재투성이 아가씨'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신데렐라가 재투성이의 원래 이름인 줄 알았다. 즉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씨 같은 것이 신데렐라고, 재투성이는 그녀에게만 허락된 고유대명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솔직히 신데렐라 외에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재투성이란 말을 쓰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이 둘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 서문을 보면, '재투성이'로 옮긴 프랑스 원전 낱말은 '쌍드리옹Cendrillon'이고 독일어 원어는 '아셴푸틀Aschenputtel' 이라고 한다. 이것은 직역을 하면 '재투성이'이고 이른바 '부엌데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씬데르스Ciders인데 그것은 프랑스어의 쌍드리옹과 그 뜻이 비슷한 '그을음'에서 나오고 그 소리와 뜻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에 거의 겹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면 '씬데뤨라Cinderella'가 되고 그것을 우리말로 되면서 아주 부드럽고 가벼운 발음 신데렐라가 된 것이라고 한다.(11p) 이렇게 어원을 알고 보면 책은 더 흥미로워진다. 그리고 읽다보면 정말 그런가 싶은 것도 새롭게 재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동화 한 편에 이렇게 심오한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해설에서 옷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도입부분을 보면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은가?) 민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융의 집단무의식을 얘기했다가, 기독교 사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고희 같은 당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 이야기도 하고, 불교나 동양 사상, 서양 사상 등을 종황무진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난 그저 신데렐라 이야기도 단순히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다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포괄적이어야 하는가? 한편 놀랍기도 하고 한편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갸웃해지는 것은 어차피 어린 아이를 위한 동환데 동화는 그 자체로 음미하고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꼭 이렇게 까지 파헤쳐야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하긴 이렇게 말하면 동화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부터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해리포터'가 대단한 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책이 그다지 교훈적이거나 깊이가 있거나하진 않다고 본다. 그저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데 대단한 공을 세웠다는 정도로 인정만할 뿐이다. 책을 읽는 성인인 나로선 그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동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훈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훈적이진 않아도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구실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쪽에 서야하는가? 그냥 재미있으면서 약간의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이면 안되는 것일까? 

요컨대 저자가 이렇게 파헤치고 분석하는 거야 나쁠거야 없지만 솔직히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는다. 그냥 신데렐라를 말하려 하다보니 여기 저기 흩어진 지식을 모아 짜깁기를 했다는 느낌이지 통찰했다고는 보기는 좀 어려운 듯하다. 즉 안타깝게도 짧은 분량에 너무 많은 지식을 소개하려다 보니 포괄적이고 개괄적인 논의는 될지 모르나 저자 자신의 생각은 그다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말미에 나오는 저자 나름의 교회 비판론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미 말했던 부분이라 식상하기까지 하다. 대안없는 비판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그래도 어느 부분 공감하고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동화는 대부분 "옛날 옛적에..."로부터 시작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로 마치지 않는가? 나는 항상 이것이 불만이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로 마치면 다란 말인가? 그 이후에 펼쳐질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인내해야하는가는 왜 빼고 말을하는 것인지 무책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은 몸통 하나에 팔과 다리가 각각 넷, 머리도 둘이 달렸었다. 그런데, 신이 사람의 몸통을 위해서 아래로 쪼개 둘로 만들어버렸다. 그 때 쪼개졌던 흔적이 지금도 사람에게 남이 있는데, 배꼽이 그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람을 이렇게 쪼개놓고 보니 세 부류의 쌍이 생겨났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그 쌍이다. 이들은 쪼개져 나간 제 짝에 너무도 애착한 나머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사람에게서 다시 합쳐지려는 마음 즉 사랑의 기운을 조금 덜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사람에게서 조금 덜어내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되려는 기운 즉 에로스는 사람 마음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러니, 에로스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를 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 즉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다. 결혼은 그런 사랑의 제도화일 것이다.(192p)

 
   

 이렇게 말을하고 있으니 왜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 같다.  

또한 신약성경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3절의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과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동화(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인과응보를 비껴나가는 게 문학의 미덕이나 되는 양 여기게 되었다. 그래야, 세련된 문학이고 현대 문학이라고 말한다. 심지오는 어린이 문학에서조차 인과응보는 덜 떨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세상살이가 인과응보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서글픔 경험 때문일 것이다.(200~201P)  
   

 그렇다고 하면 옛날엔 인과응보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가져야 하는 미덕은 계속이어져 와야한다고 말한다. '그림 형제 이야기'는 종교적이다'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재투성이' 역시 그렇다고 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말미에 샤를 페로가 1697년에 쓴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신발>을 부록처럼 소개해 놓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정말 '재투성이'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남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래봤자 재투성이의 아버지와 왕자 정도인데 그들은 여기서 거의 하는 일이 없다. 왕자는 그저 굳은 결의로 재투성이와 사랑을 이룬다는 정도고 아버지는 재투성이가 의붓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그토록 핍박을 당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초두에만 잠깐 언급될뿐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자들이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을 벌이는 것처럼 나온다. 더구나 의붓 어머니는, 그 유리구두에 자신의 딸의 발을 맞추기위해 새끼발가락을 자르고 뒤꿈치를 자르는 엽기적인 모성애를 드러내면서 마치 여자를 이기적인 동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콩쥐 팥쥐'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을 말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해를 극히 왜곡시키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누군가는 새로운 재투성이, 즉 남자와 여자를 새롭게 보게하는 이야기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책은 아쉬움이 좀 남지만 그래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보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니 한 번쯤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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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11-1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다닐 때 Vocabulary 특강을 들었는데 그때 그 강사 선생님께서 cind-가 '재'를 뜻한다면서 신데렐라가 원래 '재투성이'에서 왔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저 어릴 때 계몽사 10권짜리 동화책에서 네번째 권 제목이 '재투성이 아가씨'였지요.
말씀하신대로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각색해서 써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네요.

stella.K 2009-11-19 12: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계몽사 것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땐 어린이 동화책 하면 계몽사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요.
후에 계림문고도 나오고 그러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hnine님과 제가 함께 나눌 추억이 많네요. 그죠?^^

2009-11-18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11-1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설공주만한 오역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동일한 저자가 쓴 백설공주는 진짜 공주가 아니다?'를 읽었는데, 이번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로군요. 인과응보 권선징앙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담긴 동화라는 분석은 독일어과 수업에서도 들었던지라(심연은 단편과 다르지요) 흥미가 생기는군요. 결론:보관함.

stella.K 2009-11-20 12: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은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해석에 대한 시도는 좋은데 생각만큼 깊이는 잘 모르겠어서
그 책을 당장은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안 그랬으면
호기심에 연이어 읽었을 텐데 말이죠.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