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영화 <만추>는 세 번 만들어졌다. 

최초의 <만추>는 1966년 이만희 감독이 고 강신성일과 문정숙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그보다 더 오랜 필름도 보존되어 있는데 왜 이 작품은 유실이 되었던 걸까? 복구는 불가능한 걸까? 그나마 1981년도에 김수용 감독이 김혜자와 정동환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두 번째 필름은 아직 건제하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온 <만추>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감독이 워낙에 영화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현빈과 탕웨이 그리고 미국의 어느 안개 낀 도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다. 더구나 멜로 아닌가? 이번에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보았더니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꽤 남달랐다. 

  

이야기의 기본 틀은 같다.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한부 석방으로 풀려난다. 우연히 기차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2년 후 석방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 기본 틀이다. 하지만 영화로서 보여주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여주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감독의 역량도 다를 것이다. 또한 그때마다 감독은 선배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왜 감독들은 세대를 달리하면서 <만추>를 만들까? 가끔 그런 영화가 있다. 유명한 건 아닌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보석 같은 영화. 이를테면 <길>이나 <파이란> 같은 영화 말이다. 그런 것처럼 감독들 사이에서도 나라면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오감을 간질이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그게 김수용, 김태용 감독에겐 이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영화감독이라면 생애 한 번쯤은 정말 괜찮은 멜로 영화 만드는 게 로망 아닐까? 그런데 <만추>만 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해 아래 새것은 없으니.  


분명 김수용 감독의 작품도 당시로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용 버전을 보니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마치 똑같은 작품을 소설과 영화로 보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김수용 버전은 인물 보단 이야기 구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규모 있게 전달해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김태용은 캐릭터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앞의 작품은 다소 평면적인 느낌인데 반해, 김태용 버전은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든다. 보여줄 것도 많고.    

                                         

                                   

 

사실 지난 세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 옛날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때 당시에는 꽤 세련된 연출을 구가한다고 해도 지나면 빛을 바라고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어색하다. 그건 요즘의 세련된 영화도 같은 운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가 없다. 좀 미안한 말인데,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을 그러니까 30년 전만 해도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중요도가 얼마였을까 의문 스스러워졌다. (이미 했던 말이긴 한데) 영화판에선, 잘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말아먹는 일은 있어도, 못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살려내는 법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는데 왠지 이 말이 그 당시엔 별로 신빙성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감독을 위한 예술이었던 만큼 제왕처럼 군림하고 시나리오가 연출보다 앞서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작품 자체로선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옛날 영화의 평점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왜 관객들은 제작자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낮은 평가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퀄리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투자를 해야겠지만 투자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오는 <만추>는 확실히 시야가 깊고 넓다. 한마디로 <만추>의 글로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배우가 나온다는 것부터도 그렇고, 장소 역시 한국을 넘어 미국이란 나라다. 시나리오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썼다. 언어의 유희를 극대화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영화는 여자 주인공 애나가 복역수이고 72시간 후면 교도소로 돌아간다는 사실 외에 진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영화 속 거짓말은 의도되거나 일부러 가공된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남녀 주인공은 영어란 공통어가 아니면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언어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데 방해되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랑을 완성시켜 준다. 물론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또한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대사를 보면 뭔가 불온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요즘 드라마 작가들 어떻게 하면 시청자의 귀에 걸릴까 고민을 참 많이 하는데, 사각의 브라운관을 앞에 놓고 그렇게 귀에 걸리는 대사를 듣는 맛이 없다면 우리가 왜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겠는가.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뭐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고 이건가 싶으면 저것 같고, 저것 같으면 이것 같다. 내가 내뱉고도 이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그런 불완전성을 잘도 포착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은 친절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훈이 애나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내연녀를 살해한 피의자라는 것이 드러나는데 영화를 되돌려 봐도 훈이가 내연녀를 살해했다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내연녀의 남편이 내 아내를 죽인 피의자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게 우겨서 될 일은 아닌데 좀 불친절해 보인다.

 

사실 <만추>는 김지헌 작가가 1966년에 쓴 작품이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해방이전에 서울로 이주해 경동중학교를 다니면서  영화 예술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시나리오들을 탐독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좀 놀랐다. 솔직히 우리나라 작가들은 소설 아니면 시를 탐독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지 않는가?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니. 게다가 얼핏 그 시기가 3,40년대였을 텐데 그 시절에 읽을 시나리오가 있었을까? 우리나라 영화판은 얼마나 척박했을까? 꿈꾸기 어려운 시대에도 꿈을 꿨다. 그런 걸 보면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며 우린 너무나 쉽게 꿈을 접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더구나 그의 시작은 1956년 미당 서정주의 격찬을 받으며 시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시작이 이러다 보니 유럽 예술영화의 시적 리얼리즘을 국내에 토착화시키면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고양시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각 시대 감독들마다 작업에 탐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만추>가 지금까지 세 명의 감독에 의해 세 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다음은 또 어느 감독이 똑같은 제목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나올지 모르겠다. 그런 감독이 있다면 미리 박수로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나는 기꺼이 봐줄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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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1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추>현빈과 탕웨이 영화 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명절 입니다 건강하게 보내소서!

stella.K 2019-09-14 13:27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좋았고
김태용 감독이 확실히 영화를 잘 만드는구나 싶더군요.
고맙습니다. 카알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blanca 2019-09-14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추가 이렇게 세 번이나 만들어졌는지 몰랐어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9-09-14 13:28   좋아요 0 | URL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수용 감독의 <안개>를 보았다. 1967년 작이고, 한국의 알랑 들롱이라는 고 강신성일과 1200대 1이란 어마 무시한 경쟁을 뚫고 화려한 은막에 데뷔한 윤정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오래된 필름인 만큼 이들의 리즈 시절을 볼 수가 있다. 특히 배우 윤정희는 문희와 남정임과 함께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윤정희 배우를 보면 정말 미인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연기력은 그다지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그녀가 배우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출연한 작품이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아직도 어색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공교롭게도 19금이다. 하지만 그다지 수위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두 장면 정도 정사 장면이 나오는데 직접 촬영이 아닌 간접 촬영이다. 놀라운 건 야한 장면을 연출하기 보단 정사할 때 둘이 흘리는 땀에 집중했다는 것.이것만으로도 정사씬의 효과는 충분 이상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때만 해도 여자의 정조 관념이 강해 감독이 여배우에게 조금만 노출 장면을 주문해도 영화를 찍네 마네,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란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저런 정사 장면은 어떻게 찍었을까 싶기도 하다. 여배우의 노출 장면은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아는데, 한간의 소문에 의하면 그 노출 장면에 대역을 썼다고도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과연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소설가 김승옥의 유명한 소설 <무진기행>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각색에도 직접 참여했다. 이 영화의 자료를 찾느라 검색을 해 봤는데, 영화 제목에 안개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이 의외로 꽤 많다는 걸 알고 좀 놀랐다. 하긴 영화에서 안개는 꽤 유용한 효과를 낼 것이다. 뭔가 신비하고, 이것과 저것의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없거나 지연시킬 때 안개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을 것이다. 특히 영화는 염세적이기도 하고, 약간의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있는데 그럴 때 안개는 적절하게 잘 사용됐다. 그리고 그것을 작품에 활용할 생각을 했다는 건 당시론 좀 앞선 측면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감독의 연출력이 뛰어나다. 저 시대에 저런 연출을 하다니 놀라울 정도다. 흑백이라는 점이 좀 아쉽기도 했는데, 현대에 일부러 흑백 필름을 사용하는 감독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색할 것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 중 남녀 주인공의 첫 데이트 때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그 유명한 정훈희의 <안개>를 부른다. 물론 립싱크겠지만) 반주를 제대로 넣어 노래를 부른다. 아마 그 장면에서만큼은 감독이 뮤지컬 기법을 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별스러운 게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로는 쉽지 않은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스토리는 새삼 진부해 보이기도 하다. 소설 <무진기행>은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 지금도 문학도는 물론이고 일반 독자들에게 회자되는 작품이다. 나도 읽은 기억은 나는데 내용은 기억에 없다. 영화를 보니 남녀의 속물적인 심리를 대사에서 드러내기도 하는데, 처음엔 이 작품도 권위적인 남성주의 영화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상 그건 좀 의도된 것 같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집에 고용된 운전기사가 딸 쌍둥이를 낳았다며 은근 자랑을 하지만, 겸손의 의미긴 하지만 축하를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딸 쌍둥이를 낳은 걸 가지고 무슨 축하냐며. 주인공 역시 거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요즘으로선 있을 법한 일은 아니다. 쌍둥이가 어디 흔한 일인가? 그걸 어떻게 별것 아닌 일인 양 하겠는가. 또한 남자 주인공의 친구 세무서장(이낙훈 분) 은 여자 주인공(윤정희 분)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출신 성분이 별 볼 일없으면서 까장을 떤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가감 없이 다룬 것을 보면 당시의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뭔가 비판을 가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뻔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허무함과 나른함을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보여며 일탈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도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 다시 무진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보는 나의 입장에선 뭔가 석연치 않다. 그렇다면 여자란 뭐란 말인가. 남자는 잠깐의 휴가를 얻어 고향인 무진으로 돌아온 거고, 거기서 짧은 기간 동안 여자를 만나 욕정을 채우고 떠나지만 남자를 이용해 무진을 떠나고 싶어 했던 여자는 그대로 남겨진다. 과연 후에라도 남자에 의해 여자는 뜻을 이룰까? 그건 누가 봐도 부정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여전히 남성주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긴 60년 대면 아직 우리나라에 여성 문제가 뭔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던 때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와 원작은 다시 만들어지고 써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승옥은 남자의 관점에서 <무진기행>을 썼다면, 누군가는 여자의 관점에서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고 강신성일이나 윤정희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작품 활동이나 이런저런 활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왔지만, 영화에서 남자의 친구 역으로 나왔던 세무서장의 이낙훈 배우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그가 미국 H대 유학파라는 게 알려지고, 외모에서 풍기듯 선 굵은 연기를 하다가 어느 날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배우다. 70년 대 한창 반공의 시대에 <추적>이란 반공 드라마를 기억한다. 남파된 간첩을 잡아내는 수사물로 거기서 그는 수사반장 역을 맡았다. 지금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M본부에서 <수사반장>이 한창 인기를 구가하고, K본부에선 나시찬이란 배우를 앞세워 <전우>란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을 때, 아직 통폐합으로 사라지기 전 TBC에선 대항마로 이 드라마가 방영했을 것이다. 그 드라마 이후 난 TV에서 본 기억이 없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생몰연도가 1998년이다. 분명 이른 타계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생각 보단 길다. 타계할 때까지 작품 활동도 꽤 했다.  

                                           영화 <배덕자(1976년)>의 한 장면

 

그를 이 영화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시 보니 많이 그립다. 배우는 꼭 잘 생긴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연기력으로 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줬던 배우는 아닌가 싶다. (또 그래서 상대적으로 잘 생긴 배우는 연기를 못한다는 속설이 있기도 했다. 요즘엔 별로 통하는 얘기도 아니지만.)   


오래된 유럽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감독의 저력이 대단하다 싶다. 나중에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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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9-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또 한편의 레전드 영화를 보셨군요.
이낙훈, 당연히 기억하지요.
나중에 이분이 외화 번역도 하셨다는 것을 알고 놀랐는데 해외유학파였군요.
<추적>이라는 반공드라마도 저는 생각나는데 전 수사반장을 더 좋아했지요 ㅋㅋ

stella.K 2019-09-03 14:51   좋아요 0 | URL
아, 번역할 수도 있었겠네요.
제가 듣기론 하버드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 하버드 유학파라면 대단한 거죠.
어려운 공부해서 왜 하필 배우를 할까 싶은데
옛날엔 딴따라라고 낮게 봤잖아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무나 연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 강추합니다.
옛날 배우들라 좀 뻣뻣하긴한데 연출력은 요즘 감독들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김수용 감독이 요즘 감독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영자의 전성시대 (HD텔레시네) - [할인행사]
김호선 감독, 염복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영화 제목은 많이 들어봤다. 유명한 조선작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 1975년도 작이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 보지 못하고 이제야 봤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이 작품이 꽤나 야한 작품인 줄 알았다. 일명 포르노. 그런데  지금 보니 그다지 야한 영화도 아니다. 야하다면 때밀이를 하는 남자 주인공 창수(송재호 분)가 영자(염복순 분)를 자신이 일하는 목욕탕으로 불러 등을 밀어주는 장면 정도랄까? 그것도 앞에 가릴 건 타올로 다 가리고. 등급도 15세 관람가다. 하긴, 예전엔 포르노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등급이 세분화되지도 않았거니와 흥행을 생각해 의도적으로 야한 영화로 몰아갔는지도 모른다

 

포스터가 좀 조악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전엔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를 사람이 일일이 그리기도 했으니 당시로 저 정도의 그렸다면 잘 그린 축에 속한다. 또한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뭔가 묘한 느낌도 들면서 여자를 상품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아니면 사회 분위기에 따라 영화 포스터를 보는 시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용은 야하다기 보단 오히려 사회 비판적 요소가 강해 보인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산업화와 더불어 페미니즘 또는 사회 불평등이란 관점에서 얘깃거리가 많아 보인다.


70년 대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던 때이기도 하지만 그건 산업화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 산업화가 과연 좋기만 했던 것인가에 대한 단적인 예를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왔고, 그에 따라 도시화는 한층 속도를 내기도 했다. 또한 거기에 편승에 시골 처녀들도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이 가는 곳은 공단 아니면 버스 안내양이나 부잣집 가정부고, 번 돈은 쓰지 않고 시골집에 부쳤다. 그 역을 맡는 건 대부분 시골집 맏딸이 대부분일 것이고, 그들은 동생들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며 가정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못 견디거나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벌겠다면 술집으로 빠진다.  


어찌 보면 우리의 영자는 바로 이런 정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잣집에 가정부로 도시살이를 시작했으나 주인집 망나니 아들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결혼을 꿈꿔으나 해줄 리 없어 그 집을 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취직하지만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된다. 결국 자신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형질의 인긴이라는 걸 알고 그때부터 몸을 팔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막살 때마다 가정부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창수가 구원남으로 나타나곤 한다. 도시라고 해서 망나니 짐승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알뜰히 돌봐주며 영자와의 결혼도 꿈꾸는 순정남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고아에 힘없는 주변인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그 시절 있을 법한 두 남녀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사회 고발적 의미도 있다. 왜 여자는 돈을 벌면 불행해져야 하는가. 요즘 같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지만 당시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여자는 그저 남편의 그늘에서 자식 낳고 가정 건사를 잘하는 것이 미덕인 양 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이 여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여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영화엔 다분히 남성주의 시각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영자의 가정부 시절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요즘 같으면 성폭행을 성폭행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시절은 무조건 가해자 보단 피해자 더 피해를 본다. 문득 대척점에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 생각났다. 톨스토이는 오히려 남자가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회개도 하더만, 문제작이라고는 하나 그런 양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역시 톨스토이는 톨스토이다 싶다.


엔딩도 그렇다. 창수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뭐 거기까진 그럴 수도 있다. 영자는 자기 자신을 너무도 잘 안다. 창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엔 자신은 너무나 흠도 상처도 많다. 자살의 충동을 이기고 자신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도 좋다. 그런데 동병상련이라고 신체부위는 다르지만 같은 불구자와 결혼을 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는 건 다소 억지스럽다. 과연 영화 어느 부분에 영자가 전성시대를 누렸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돈을 좇아 서울 상경을 했다는 죄로 지지리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을 창수란 구원남이 있어 전성시대라는 걸까? 아니면 천신만고 끝에 비록 불구라고는 하지만 착한 남자 만나 아이 낳고 잘 살게 된 게 전성시대라는 걸까.


정말 영자가 전성시대가 되려면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성폭력을 치료할 수 있며, 응당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법적인 제도가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 영자가 자기다운 삶을 살아야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70년 대 영자들은 전성시대를 맞지 못했으며,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흡한 상태다. 작품이 갖는 의의가 있긴 하지만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2천 년 대 영자의 전성시대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옛날 영화를 본다는 건 묘한 매력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의 리즈 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고,  지나간 시대를 엿보고 옛 추억에 잠길 수도 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염복순 배우를 기억할 사람이 있을까. 이름이 그래서일까? 나름 요염한 데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도 어릴 때 본 배우라 나는 이 배우가 한창 활동했던 끝자락에서 기억할 뿐이지만 나름존재감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조금 더 인기를 얻어도 좋았을 텐데 70년대 일명 여배우 트로이카라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에 가려 스크린에서 일찌감치 잊힌 배우는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70년대 말 정도까지 활동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것 같다. 누구는 가수 이효리를 닮았다고 하는데 얼핏 비운의 배우 이은주 느낌도 난다. 물론 여성스럽기는 이은주이지만 선 굵은 연기는 염복순이 앞선다. 내친김에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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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8-2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본 적이 없어서 상품 페이지를 찾아 보았는데, 출연자 중에 송재호와 최불암이라는 요즘도 유명한 분들도 계시네요. 이 영화가 1970년대 영화라서 볼 기회가 없었고 잘 몰랐어요. 오래 전 영화니까 요즘 영화와 많이 다르겠고, 그 때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과 지금 사람들의 생각이 다른 것 만큼의 차이도 있겠지요. 그런 것들 생각하면서 보면 예전 영화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리뷰 잘읽었습니다.
stella.K님, 좋은 하루되세요.^^

stella.K 2019-08-28 14:59   좋아요 1 | URL
사실 요즘 영화를 생각할 때 되게 낮설고 어색한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그 시대의 정서나 감정들을 고려해서 보면 나름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송재호 최불암뿐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들이 많이 나옵니다.
서니님 잘 모를지도 모르는데 도금봉과 박주아 아줌마도 나오죠.
70년 대 조연 전문 배우로 유명했습니다.
혹시 기회되시면 서니님도 함 보세요.^^

니르바나 2019-08-27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니르바나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극장에서 관람하였습니다.
이장호감독의 <별들의 고향>과 함게 수십만명이 극장을 찾아
관객수를 시대 지수로 조정하면 천만 영화의 계보에 해당될 작품이었구요.
제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없지만,
소설가 조선작이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을 극본화했던 작품입니다.
염복순은 그 후로도 여러편의 드라마,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작품이 워낙 유명해서 다른 대표작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알려주신 대로 소리 소문 없이 지내서 궁금합니다.
지금 연세가 꽤 되었을텐데요.


stella.K 2019-08-28 15:08   좋아요 0 | URL
염복순 배우를 아시는군요. 반가운데요?
나름 매력있는 배운데 잊혀져 아쉽더라구요.
그 시절 여자들은 결혼하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라 그녀도 결혼하면서 그만두지 않았나 싶어요.
언제부턴가 왕년의 배우들이 활동을 안하는 게 못내 아쉽더라구요.
그런데 니르바나님 왕년에 충무로 좀 누비고
다니셨겠는데요?ㅎㅎ

hnine 2019-08-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으로 읽었습니다 극장엔 출입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에 ㅋㅋ
저 기억해요 염복순이라는 배우. 지금 뭐하는지 궁금하네요. 탈렌트로 TV에도 나오던 배우였는데요. 입가에 점이 매력적이던.
김호선 감독은 장미희가 나온 <겨울여자>의 감독이기도 할걸요 아마.
stella님, 옛날 영화를 종종 찾아보시는것 같아요. 덕분에 저도 stella님 글 읽으며 옛날 추억에 잠길 수 있어 좋습니다.

stella.K 2019-08-28 15: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거 개봉 당시엔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을 거예요.
저도 이번에 영화 보면서 책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엔 영화가 시큰둥합니다.
하다못해 그 유명한 <기생충>도 전 아직 안 봤어요.
그래도 아주 알 볼 수 없으니 올레 TV에서 보여주는
옛날 무료 영화들을 가끔씩 보고 있어요.
보고 있으면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하죠.흐흐

cyrus 2019-08-2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자가 결혼한 남자가 장애인으로 설정한 점. 이 점이 흥미롭네요. 요즘 제가 하고 있는 페미니즘 공부의 주제가 장애학과 관련이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안 봐서 결말에 대해서 의견을 내기가 어렵네요.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애인 남성과 비장애인 여성의 만남. 관심 가져볼만한 주제인 것 같아요. ^^

stella.K 2019-08-29 19:02   좋아요 0 | URL
아냐. 둘 다 장애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 하잖아.
장애자들끼리도 그렇게 하지. 사실 그건 엔딩에 잠깐 나올 뿐이고
그래도 이 영화는 여성사의 관점에서 봐 줄만한 영화라고 생각해.
글치않아도 보면서 네 생각 잠깐 났어.
기회되면 함 봐봐.^^

cyrus 2019-08-30 07:44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

transient-guest 2019-08-3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영화나 책을 보면 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당시의 성인식, 사회상, 사고 등등. 그려내고자 한 건 아마 산업화의 그늘 같은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만...

stella.K 2019-08-30 14:3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래서 가끔 옛날 영화 보면 옛 생각이 아련히 떠오르곤 하죠.
70년대 영화들이 산업화의 그늘을 다룬 작품이 많긴하죠.
안 그래도 그 시대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 영화 안 본 것들이 많은데 보기가 쉽지 않네요.ㅠ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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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의 책을 읽으니 내 안에 책 읽는 뇌가 모처럼 세로토닌이 발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이윤기처럼 살면 좋겠다 싶다. 인생을 흔히 고해니 고통의 연속이니 하며 세상 못 살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꼭 그러기만 하겠는가? 인생은 유레카다. 발견에서 기쁨을 누리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것 없이 재미없어 어찌 살겠는가.


그는 책에서 자신에겐 행복한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그는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꼭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과 환경이 생긴다고 했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작가와 번역가로서 어떤 책이나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꼭 출판사로부터 그 분야에 대한 번역이나 조사를 의뢰받는다고. 원서를 정독할 절호의 기회가 생기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즐거움에 출판사에선 돈까지 준다고 하면서 '책 읽기', '책 옮기기'에 관한 한 자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는 꽤 행운아처럼 느껴진다.


이왕 행운아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생각해 보자. 그거 왠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만 같다. 그렇지 않은가? 남은 그렇게 좋은 일이 많이도 생기는데 나만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행운도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 이윤기는 자신이 그럴 수 있기까지는 어느 정도 떠들고 다닌다고 괄호 쳐 놓고 얘기한다. 작가의 괄호 친 말은 보통 내용과 크게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참고로 밝혀둘 때 쓰이기도 한다. 우린 바로 이런 괄호 쳐 놓고 하는 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행운이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굴러들어 오지 않는다. 그것도 알고 보면 준비된 자에게 들어온다. 그러니 행운을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떠들어라. 그래야 행운이 알아듣고 그 사람에게로 갈지 모른다.


그런 것을 보면 난 왠지 작가가 인생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겸손하게 말해 '행복한 징크스'란 것이지 알고 보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가는데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좋게 말하면 책략가고, 나쁘게 말하면 꾀돌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야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관심 있어하는 쪽은 늘 책이었다. 그는 60년 대 초 한 출판사에서 초등생을 겨냥한 각각 100권짜리 소설 전집과 위인 전기을 읽으면서, '일찍이 나에게, 장차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그의 입말이 참 좋다.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사냐니. 


그러고 보면 꽤 일찍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을 발견하고 가슴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그리고 그건 훗날 번역으로, 신화 연구로, 소설가로 아깝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직함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기는 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와 움베르고 에코의 여러 소설 그중에서도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희랍인 조르바>의 번역은 그 말고도 몇 명의 번역자들이 더 있다. 그리고 이윤기를 포함해 대부분 영역을 번역한 것으로 아무리 번역이 뛰어날지 몰라도 중역의 오명을 피하지 못한다. 게다가 완역본도 최근에야 나왔다. 물론 난 아직 그 누구의 번역본으로도 읽지 못했지만 그 누구의 번역본을 읽는다면 이윤기 번역본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그의 번역본이 갖는 아우라가 결코 작지 않으며, 그 역시 그 소설은 자기 문학의 '성서'라고까지 했다. 그러니 이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번역본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이윤기에게서 왠지 조르바의 느낌도 나는 듯하다.(나는 책으로는 못 읽었지만 영화로는 봤다. 영화 속 조르바 역을 맡은 앤서니 퀸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에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낀다는 건 엉뚱하게도 그가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번역을 언급할 때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당연 이태리어로 글을 썼겠지만, 그는 이태리어를 번역했던 것이 아니고, 영어로 된 것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은 철학자 강유원 박사로부터 찬사와 오명을 동시에 받는다.


옛날 일제 강점기 아무리 유명한 작품도 영어나 일어를 중역으로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흉이 안 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독자들의 욕구가 높아져 중역은 웬만해선 읽지 않으려고 한다. 게다가 우린 학(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가. 물론 학문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에 완벽함을 기하는 거야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다가 사대주의에 갇힐 수도 있다.  


그도 자칫 그럴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말하는데 무엇으로 반박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으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있으면 그건 우리가 알던 이윤기가 아니다. 그는 에코의 소설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독과 오역으로 인한 질타 속에서도 '중세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이 그토록 다양하게 변주하던 신화에 대해, '창'을 '도끼'라고 썼다고 해서 '문화를 오역한 자'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111p)라며 반박했다. 그는 어쩌면 학적인 완벽함보다 사상의 자유로움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문득 자유인으로 살았던 조르바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우리나라는 단편이고 장편이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무조건 다 '소설가'라고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오직 장편을 쓰는 작가에게만 그 이름을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라이터(글 쓰는 사람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는 거기서 충격을 받았을까? 나중에 기어이 장편소설을 쓰고 기어코 노블 리스트가 되었다. 그건 좀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미국만 해도 그렇게 장편을 쓰는 소설가를 대우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장편을 꺼려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스스로 소설은 죽었다고 말하는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배면에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쓰기도 전에 패배의식부터 갖게 되는 이 분위기는 언제쯤 걷히게 될지. 이윤기 작가는 그것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는다. 소설 가지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히려 나무라는 듯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 책 곳곳에 깔려있다. 문득 답답해지거든 문학 선배로서의 그에 대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호기심이 많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싶다.


책을 읽으면 그가 글을 쓰는지, 말을 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쉽게 쓴다. 한마디로 착착 감긴다. 그걸 두고 껍진껍진한 입말이라고 한다는데,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으로 글의 추세는 이렇게 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작가 박경덕은 생각하는 대로 글을 쓰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쓴다는 '말글'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지식욕이 대단했다.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욕구만으로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보인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틀어박혀 숨만 쉬고 살지 말자. 그런 욕구가 있어야 세상을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살 수 있다.


그런 욕구로 그는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오래 장수하며 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책상에 앉아 번역에 몰두하던가, 지중해 어딘가를 헤매고 다닐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꽤 된듯하다. 아직도 그의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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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19-07-1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새 리뷰를 쓰셨네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노땅 소리 듣겠지만
분명 요즘 작가들은 스텔라님 어린 시절보다 넓이는 모르지만 문학적 깊이에서
작가적 역량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 문학이 주는 감동을 퍼스널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고 나서
게임이나 스마트폰 검색 같은 생활 유희가 문학의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이죠.

더 이상 이윤기 선생 같은 분들을 만나기 쉽지 않은 문학적 토양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윤기 작가의 부재가 더 아쉽습니다.
스텔라님도 공감하시죠.


stella.K 2019-07-16 15:05   좋아요 0 | URL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이곳에 따로 글을 올리지 않아도
아깝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잘못 생각했네요.
그러면 니르바나님과 이렇게 안부 인사도 못하는 건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잘 지내시죠?

맞아요. 이윤기 작가는 정말 아타까운 작가입니다.
언젠가 EBS에 나와 인문학 강의도 했었는데
그게 왜 그렇게 지금도 선명한지.ㅠ

2019-07-16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6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6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처음 자전거를 탄 딸을 위해 선생이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는 일화가 나와요.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은 그 일화를 언급하면서 자신을 ‘신화를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해 천천히 뒤에서 밀어주는 존재’라고 묘사했던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중학생인 저를 신화의 세계에 갈 수 있도록 천천히 밀어준 분이 이윤기 선생이었어요. 그 분 아니었으면 신화에 대한 매력을 몰랐을 거예요. ^^

stella.K 2019-07-16 19:58   좋아요 0 | URL
맞아. 나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분을 통해 알게 되었지.
그리고 소설도 읽고, 에세이도 읽었는데 후회해 본적이 없어.
아직도 읽은 책 보단 안 읽은 책이 많은데
따님하고 쓴 플루타크 영웅전인가? 그게 여러 권 있더군.
근데 출판된지가 꽤 돼.
언제고 이분의 선집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도 따님이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어.
참 아까운 분이지.

서니데이 2019-07-18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선생은 번역서가 많지만,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닌 이윤기 선생의 책이네요.
오늘 날씨 많이 더웠는데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밤 되세요.^^

stella.K 2019-07-19 14:03   좋아요 1 | URL
직접 쓴 글이 생각 보다 많아요.
원기왕성한 분이죠. 전 항상 비실비실인데.ㅠ
여러모로 부러운 분이시죠.

페크(pek0501) 2019-07-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출현이십니다. 환영합니다!!!!!

이윤기 선생의 작품을 저도 몇 편 읽었어요. 그의 부고 소식에 안타까웠던 게 생각납니다.

stella.K 2019-07-21 19:54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잠깐 짬을 내어 올렸습니다.
읽기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올핸 이상하게 완독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그날 그날 내키는 대로 읽고 있습니다.
그래야 제 방에 쌓아둔 책들 손떼라도 묻혀 보겠더라구요.
물론 이 책은 완독했습니다. 오랜만에 이윤기님의 책을 읽으니
좋더군요. 더구나 이런 글쓰기 책을 좋아하거든요.^^

2019-08-13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Q. 이 책은 언제 샀나?

 

A. 책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산 것으로 기억한다. 사 놓고 조금씩 읽다가 최근에 다 읽었다. 웬만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신간은 잘 안 사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상하게 관심이 많이 갔다. 책 자체 보다는 작가에게 관심이 많이 간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이 작가의 활동을 접했다. 자신의 SNS에 구독자 모집을 하고 독자의 이메일로 한 달에 20번. 자신의 글을 월요일부토 금요일까지 전송한다. 그리고 구독료가 1만원이란다. 그게 꽤  흥미로웠다.

 

Q.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처음엔 좀 놀라웠다. 과연 한 달에 만원씩 내고 볼만한가? 책이란 서점에서 값을 치르고 사서 보는 게 일반적인데 굳이 만원씩이나 내고 이메일로 본다는 게 어떤 의민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작가가 그렇게 독자들에게 전송한 글들을 모아 책을 냈다. 어차피 이렇게 책으로 나오는데 책으로 사 보지 굳이 돈을 더 줘가며 이메일로 본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바뀌더라. 책을 사 보는 독자의 입장에선 그런 생각 당연한 것 같은데, 작가의 입장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번 내봤고, 한 때는 나도 연재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블로그에 몇 번 하다 중단했지만.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다. 나는 그렇게 연재를 하다 중단했지만 이 작가는 그것을 무려 1년을 했다. 그것도 당당히 구독료를 받고. 이 작가는 했는데 왜 나는 못하고 중단했을까 갑자기 회의가 밀려오더라.

 

Q.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하다 중단 했지만 내가 연재를 했던 때가 아마 10년도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블로그에 올리고 댓글 호응 받는 것도 감지덕지지 어떻게 독자에게 돈을 받겠는가. 그땐 그런 생각에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정말 격세지감이란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때나 이때나 책은 무조건 출판사를 통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다. 조금만 뚝심을 발휘했다면 그렇게 연재했다 책으로 냈을 것이다. 물론 그후 비슷한 방식으로 나도 책을 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새로운 패러다임 같다. 

 

사실 이 책을 사기 전 작가에 대한 기사를 어느 무가지 잡지에서 보았는데 자꾸 보게 되더라. 어떻게 이런 작가가 있을 수 있을까? 자꾸 궁금해지니 결국 책도 따끈따끈한 신간일 때 사 보게 되는 것이다.

 

Q. 책을 꽤 오랫동안 읽어 왔다. 책에 대한 생각이나 기준 뭐 그런 게 있을 것 같은데...

 

 A. 책을 꽤 오래 전부터 읽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책을 오래 읽기도 한다. 책 한 권을 읽는데 짧아야 일주일이고 열흘을 넘겨 읽는 게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많이 읽지도 못했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 많이 오래 읽다보니 나름의 분류가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어려운 책, 쉬운 책, 객관적으론 좋으나 개인적으론 별로인 책. 남들은 그저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좋은 책, 남도 좋고 나도 좋은 책. 좋은지 나쁜지 남도 모르겠고 나도 모르겠는 책 등등이 있을 것 같다.  

 

그중 가장 좋은 책은 나를 대변해 주거나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책이 아닐까? 더 나아가 행동하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 같다.  

 

솔직히 <안나 카레니나>나 <닥터 지바고>가 세계적인 고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걸 읽고 심장이 뛰거나 무슨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책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히려 남들한텐 별 것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에세이다. 더구나 난 작가의 나이를 한참 전에 지나왔다. 작가 특유의 진지함과 재기발랄함, 요즘 2,30대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새롭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주 많이 감동스러운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확실히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뭔가 행동하게 만들었다. 

 

Q. 그게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A. 이를테면 나도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독자 직거래로 이메일 연재를 시작했다. 벌써 두 달째다. 다 이 작가 덕분이다. 작가가 아니었다면 난 그렇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건 누가  최초로 했는지 모른다. 이슬아 작가도 어떤 작가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쓰는 건 자서전? 자전 에세이 또는 자전 소설? 요즘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따로 두질 않으니 좀 애매하긴 한데 아무튼 그런 계통(?)의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은 <기억 수집가-유년시절>이다. 뭔지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자서전이든 자전 소설 에세이든 그건 쓰는 사람이 온전히 기억에 의해 쓰는 것이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붙여 보았고 현재는 유년시절에 관해서만 쓰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유년시절에 관한 것만으로도 결코 작지않은 분량이 될 것 같아서다. 그냥 어렸을 때 기억 나는대로 두서없이 자유롭게 쓰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시간순으로 배열되는 느낌이다. 아무튼 유년시절의 기억을 자유롭게 쓰는 중이다.

 

Q. 두 달째 이어 온다면 구독자가 꽤 있다는 말인데 직접 독자를 상대로 글을 전송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A. 구독자가 많은 건 아니다.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 같다. 난 정말 구독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구독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올렸을 때 많이 떨렸다. 나 역시 안 해 보는 일을 하는 것이고 파워블로거도 아니기 때문에 과연 구독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9명이나. 광고에 그런 문구를 넣었다. 단 한 사람만 신청해도 그 사람을 위해서 쓰겠다고.

 

사실 이 문구는 이슬아 작가가 처음 시작할 때 썼던 걸 벤치마킹 한 것이기도 한데 지금이야 핫한 작가가 됐지만 처음 광고를 했을 때만해도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는가. 누구나 처음은 있지 않은가. 독자가 많고 적은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 글을 읽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적잖이 안도했고 기뻤다.    

 

이슬아 작가는 일주일에 다섯 번을 보내준다는데 그건 너무 버거운 것 같고, 나는 거기서 하루를 뺀 4일 그러니까 목요일까지만 보내는데 처음엔 그것도 좀 버거웠던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해 볼만하다. 

 

보내면서 순간순간 이 작가를 생각했다. 처음에 이 작가도 그랬을까? 나 보다 어리지만 당차고 배울 게 많은 작가란 생각이 든다.

 

 

Q. 아까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봤다고 했다. 지금은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독자에게 연재를 보내고. 그 차이나 장단점은 뭔가?

 

음...작가중엔 연재를 싫어하는 작가가 있다. 대표적인 작가가 하루키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그런 말을 했다. 매일 일정량을 써서 어딘가에 보내는 것이 부담스러워 싫다고. 그 양반은 정말 그럴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엔 꼭 해야하는 의무가 있지 않으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마감이 있어야 쓸 생각이 난다. 그건 아마도 오래 전, 교회에서 연극 대본을 썼는데 마감에 시달리며 썼다. 그게 몸에 베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연재가 좋은 것 같다. 

 

또한 작가와 고독을 거의 동의어로 보고 작가는 철저하게 고독속에서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떤 작가는 적당히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취미 활동도 겸하면서 즐겁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철저한 고독속에서 글을 못 쓰겠더라. 아마 그래서도 대본 쓰기를 즐겨했던 것 같다. 대본은 어느 정도 배우들과도 소통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보기도 하는데 난 그게 좋다. 이를테면 이 일이 그런 것 같다. 독자와 간간이 소통하며 글을 쓴다. 난 그게 즐겁다.  

 

하지만 이 방법이 꼭 다 좋은 건 아니다. 출판사를 통하면 일단 뭔가 보호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와 교정을 봐주는 사람이 있어 다소 부족하고 실수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또 일정 원고료를 받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비해 독자 직거래만으로 언제 돈을 모으겠는가.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는 이상. 게다가 편집이며 오타, 맞춤법 심지어 광고까지 작가가 다 해야한다. 피곤한 일이다. 오타나 맞춤법의 경우, 분명 세심하게 뜯어보고 전송을 했는데 다음 날 다시 보니 어떻게 내가 이런 글을 보낼 수가 있을까 해서 다시 문장을 다듬어 보낸 적도 있다. 특히 오타는 좀비같고 신출귀몰하기까지 한다. 이걸 독자에게 보냈다고 생각하면 경악할 정도고 정말 이 일은 오래 못할 일이다 싶다.

 

하지만 작가라면(또는 작가를 지망생이라면) 한 번 정도는 수련 삼아 꼭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작가의 마음은 독자를 향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출판사에 가 있고 기타 여러 문학상에 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건 당연한 것 같다. 시스템이 그러니까.

 

하지만 이 일은 온전히 독자만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창호지 하나를 두고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물론 아주 모르지는 않지만) 그들의 실루엣을 앞에 두고 글을 쓰는 것 같다.

 

게다가 작가가 직접 원고지 한 장 팔아 보지 않고 작가의 삶을 논할 수가 없을 것 같다.ㅎ 정말 작가가 모든 것을 다 해 보면 조금 과장해서 출판사 하나 차리겠다 싶다. 실제로 이슬아 작가는 <헤엄>이라는 1인 출판사를 운영중에 있다.

 

그리고 공부도 정말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혹시 글 쓰는데 뭔가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감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하며 보게 된다.

 

Q. 정말 생활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A. 하루살이 인생이란 말도 있는데 정말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오직 이 달만 생각한다. 그 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첫 달은 그렇게 9명의 구독자가 있어 비교적 순탄하게 시작을 했다. 그리고 그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고 있을 때 다음엔 또 어떻게 하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이번에 구독한 독자가 다음 달에도 여전히 구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재로 전달의 구독자 거의 반이 이번엔 구독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내가 뭘 잘못했나 약간 의기소침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빨리 떨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여전히 나에겐 독자로 남아 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새롭게 신청하는 독자들이 있다. 물론 새로운 독자들 거의 대부분은 나의 지인들이다. 내가 어디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내 글 한 번 읽어 보라고, 딱 한 달만 읽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읽어도 좋다는 장삿꾼 같은 멘트를 하고 있다.ㅎ 그야말로 매문이다. 내 글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몇주 전, 거의 10년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마치 목적있어 만난 것처럼 내 글을 권했다. 그런데 의외로 너무나 순순히 그러겠다고 해서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또 어떤 사람은 놀라워 하며 한껏 관심을 표명했지만 요즘 책도 별로 읽지도 않는데다 SNS 에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구독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독자는 읽을 때마다 거의 매번 짧은 피드백을 보내 오기도 한다. 그밖에 여러 이야기가 많지만 생략한다.

 

그런 일을 통해 내가 많이 달라졌다. 좀 더 적극적이 됐고, 이렇게 저렇게 독자의 소식을 알게되면 예사로 넘겨지지 않는다. 그를 위해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결국 기도라도 하게 된다.  

 

난 요즘 거의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해 볼 수 있을까에만 골몰해 있다. 더불어 세상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다.

 

Q. 그밖에 무엇을 해 봤나?

 

A. 이슬아 작가가 이달 초부터 연재 시즌2를 시작했다. 작가가 거의 매일 보내주는 연재를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독자로 체험해 보고 싶어 구독을 신청했고 지금 받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확실히 작가의 글을 책으로 읽는 것과 이메일로 읽는 건 다른 것 같다. 거의 비슷할 것 같은데, 나의 메일함을 보면 청구서나 스팸 메일 또는 업무에 관한 메일이 전부다.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인터넷에 여러 많은 글들이 넘쳐 난다. 그런데 구독료를 내고 본다는 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구독료를 내고 보니 다른 글이 아무리 좋고 유익하더라도 내가 돈 내고 보는 글부터 챙겨 보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공짜를 좋아하는 것 같아도 그 보다는 돈을 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만족하면 그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작가의 이메일 연재 시즌2에 적잖이 만족한다. 글을 정말로 진지하게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시즌 2는 지난 시즌과 달리 작가가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뷰도 하고, 시각 장애자를 위해 음성으로 자신의 글을 읽어주기도 하고,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도 하고, 동료 작가를 위해 자신의 지면을 내어 주기도 한다. 정말 기획이나 운영을 잘 하는 것 같다.

 

Q. 부럽다는 생각 안 드나?      

 

A. 당연히 든다. 사람은 어차피 질투의 존재 아닌가. 특히 작가는 문화계 셀럽들과 인터뷰를 자주 시도할 모양인데 그게 참 부럽다. 발이 넓고 그야말로 발로 뛰는 작가구나 싶다. 작가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한창훈 작가는 왜 작가가 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작가는 그렇게 생각 보다 쉽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냥 웃자고 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부럽다가도 포기가 되는데 딱 한 가지 안 되는 게 있더라. 언젠가 이 작가가 자신의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그 앞에서  폼 잡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거의 만 부 가까이 팔린 것으로 안다. 넘었을지도 모르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느 싯점이 지나면 내 글을 구독해 보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구독 신청하고, 무사히 출판도 하고 그러면 좋겠다.

 

Q. 독자 직거래 이메일 연재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작가 보단 오히려 독자의 역할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승자독식의 사회 아닌가? 작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청탁은 받는 사람만 받고, 책은 내 본 사람만 내는 것 같다. 더구나 문학계 카르텔과 성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특정인이 작가를 키운다는 생각은 이제 좀 없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의 비중이 더 커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중세 시대 호사가들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사 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것이 당대 문예부흥을 이끌기도 했다. 독서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귀족이나 양반들만 할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그러나 이제 독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또한 후원은 작은 액수로도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난 독자들이 단순히 어느 작가의 책을 사 보는 것에서 작가를 후원하는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 직거래 이메일 연재는 단순히 독자가 작가의 글을 구독료를 내고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 작가를 후원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느 작가가 이런 또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적어도 한 명의 작가만이라도 후원의 의미에서 구독을 했으면 한다. 이슬아 작가는 스스로를 연재 노동자라고 했는데 이 연재 노동도 해 보니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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