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양 주기철
김인수 지음 / 홍성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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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얼마 만에 완독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언젠가 한 번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4분의 1 정도를 남겨놓고 완독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 두꺼운 책도 아니었고 4분의 1이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다 읽을 수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오래전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읽고 굉장한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해서 두 아들을 공산당 앞잡이에 의해 잃고, 그 앞잡이를 오히려 양아들로 삼았으며 나중에 본인도 순교한 인물이다.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긴 하지만 주기철 목사가 연배가 조금 더 높긴 하다. 또 그런 만큼 주기철 목사가 손양원 목사의 목회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주기철 목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순교를 당했지만, 손양원 목사는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한 것이 다르긴 하다.

 

솔직히 오늘날 순교에 대해선 양가감정이 있는 것 같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순교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거나 나는 과연 순교의 순간이 온다면 정말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도 순교는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강화도에 도착했지만 그는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죽었고 죽을 때 조선어 성경을 뿌리고 죽었다. 그 후 적지 않은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우리나라에 왔지만 풍토병으로 선교는 고사하고 짧게는 몇 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들 중엔 난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지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겠지. 

 

그로부터 200년이 넘어서 우리나라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갔다가 비슷한 이유로 사망한다. 그 역시 죽을 것을 모르고 갔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어머니도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의 선교의 길을 막지 못했다. 죽은 지 8년쯤 되었다는데 지금도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프리카 오지 어느 마을에 묻혀있다고 한다. 

 

한때 나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가 너무 감동스러워서 그것을 각본으로 쓰고 무대에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후 얼마 안 있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했다. 혹시 그때 그 작품을 보고 자신도 순교하겠다고 하는 관객이 나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나 자신도 순교하지 못할 거면서 누구에게 순교를 강요했던 걸까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난 지금도 순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늘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또 생각했다. 사실 토마스 선교사나, 주기철, 손양원 목사를 비롯해 이름 없이 죽어간 순교자들의 죽음은 모두 고귀하고 훌륭하다. 그런데 오늘날 순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너무 양극단을 달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 아니면 도라고, 순교하신 분들의 신앙은 고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생은 실패자인 양 취급하는 건 위험하다. 사실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교하지 못한 사람은 적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순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매일 죽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순교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 죽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사도 요한이 그렇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밧모섬에 유배되어 평생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순교당한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못하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복음서를 쓰는 일을 완수했다. 

 

또한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의 아버지는 주기철 목사와 동문수학 했다고 한다. 그분도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순교 당하리라고 다짐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하해 지방 어디에 교회를 개척하고 50이란 이른 나이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마도 시기적으로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별반 차이도 없었을지 싶다. 어쨌든 그걸 보면 순교도 내가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기 위한 잠깐의 고통 그 이후의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숨에 순교하는 것과 순교하지 못해 그것을 평생 한으로 여기며 사는 삶과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뭐 그런 이분법으로 육체적 순교와 순교적 삶을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순교적 삶도 쉽지는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 책이 순교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 뭐 그런 극단에 치우친 책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삶을 좀 더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거기에 순교를 다뤄야 하는 것 같은데 자꾸만 순교하신 분으로만 인식하고 몰아가는 것 같아 아쉽다. 

 

관련해서, 이번에 완독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사실 주기철 목사는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 아니다. 그건 당연하다. 굳이 말하면 우리나라 기독교 1.5 세대다. 그의 아버지 주현성이 경남에 있는 웅천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따라서 교회를 다니게 된 것. 그게 주기철의 나이 17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교회 분위기는 사뭇 엄격했는가 보다. 여러 번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엄하게 징계를 내렸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엄격했냐면, 계율위반자 즉 신앙과 정치 위반을 하면 책벌 내지는 출교까지도 과감하게 감행했고 그것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기도 했다. 

 

오늘날의 교회 풍경과는 참 많이 다르다 싶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도 엄한 측면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 안 나온다고 징계를 한다는 건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그 시절의 교회는 학교와 비슷했던 것 같다. 학교도 무단결석을 하면 정학 내지는 퇴학까지 시키지 않는가. 당시론 학교가 흔하지 않고 교회의 기능 중엔 교육의 기능도 있었으니 이런 조처는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교회도 개인주의화 하는 경향이 있어 예배만 드리는 경우도 많고, 인터넷의 발달은 교인을 더욱 익명화 시켰다. 그러니 유구무언인데 그렇더라도 이거 하나는 지적하고 싶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좋은데 늦게 와서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 저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것에 대해 설교자나 사회자(그들은 다 교회 교역자들일 것이다.)가 제재를 하지도 않는다. 이 사실을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인들이 알면 기함할 일이다. 

 

오늘날의 담임 교역자들은 신앙을 북돋는 설교를 할지언정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거의 하지 않는다. 또한 예배를 정화시키려고 하는 어떤 의지도 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예배조차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서 그 귀에 대고 순교를 논한다는 건 소귀에 경 읽기다. 순교를 말하기 전에 예배 태도만이라도 고치자고 말하고 싶다. 

 

교회는 순교의 피를 마시고 세워졌다는 말이 있다. 순교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도 있고. 이건 그냥 수사적 표현이 아니고 실제로 역사에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으면 내가 지금 얼마나 편하게 교회를 다니고 있는가. 예전엔 우리나라에도 신구교를 합쳐 성당이나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던 엄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예배는 고사하고 성경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순교를 당해야 하는 나라가 있다. 먼 데서 찾을 것도 없고 당장 북한만 하더라도 그 핍박이 말도 못 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렇게 허투루 예배를 드려서야 쓰겠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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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8-16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순교는 대단한 일이죠. 요즘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신문의 부고 기사 보면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 떠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50대, 60대에 죽은 경우가 그래요.
스텔라 님은 성경 공부도 많이 하셨을 것 같네요.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공부 잘하는 주인공을 목사로 만들려고 하고, 또 다른 소설에서도 그런 것 보면 예전 시대에는 목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 같습니다.^^

stella.K 2023-08-16 13:39   좋아요 2 | URL
ㅎㅎ 저 많이 안했어요. 다 귀동냥이죠. ㅋ 주기철 목사님이 나온 학교가 평양신학교인데 명문이라고 하더군요. 예전에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해서 기독교 부흥의 진원지였는데 지금은 초토화가 됐죠. 지금은 목사가 너무 많은 시대에요. ㅠ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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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오래전에 사놓고 이제야 완독 했다. 

이 책이 1965년에 초판이 나오고 잊고 있다가 50년 후에 다시 재조명을 받았다지. 그러고 보니 책에도 팔자라는 게 있나 보다. 어떤 책은 거의 나오자마자 주목을 받고 사자마자 읽게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아무리 명작이어도 한쪽으로 쭈그려 있다 늦게 읽게 되는 책이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착한 서사' 장르다. 최근 대표적 작품으로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남아>>가 그렇고, 문학은 아니지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나(읽으면서 이 영화가 유난히 많이 생각났다) <<8월의 고래>>가 그렇다. 독자를 잡아 끄는 강렬한 무엇은 없지만 잔잔하게 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이 책을 어느 만치 읽다가 첫 부분을 다시 읽었다. 내용은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 스토너의 출생 연도와 생몰연도, 농과대학을 다니다 문학을 알고 문학에 평생 바치고 가르치다 죽었다는 정도가 전부다. 하다못해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그가 평생 문학과 대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억해 중세 문헌을 대학에 기증하겠지만, 후대의 학생들은 그가 누군지 이름은 떠올려 보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호기심을 갖고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거라며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쉽게 잊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 부분을 다시 읽고서야 비로소 이 '착한 서사'를 떠올렸던 것이다. (멍청한 건가? ㅋ)

 

스토너가 우리 보다 조금 잘난 점이 있다면 교수였다는 정도가 되려나? 예나 지금이나 교수는 아무나 되는 건 아닐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교수 세계에서 뛰어난 업적이나 능력을 인정 받았냐면 그렇지는 않다. 한때 인기 교수가 될 뻔했고 가르치는 걸 좋아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욕심이 없다. 이내 그는 평범한 교수로 남는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아는 누구와도 흡사해 보인다. 또 누구든 그런 사람 한 사람씩은 알고 있지 않나?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아내 이디스와 평생 맞지 않았고, 그나마 딸이라도 가까이 두고 돌보고 싶어 했지만 아내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뿐인가? 그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다. 점잖은 교수 체면에 내연 관계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뿐인가? 제자 하나 잘못 받아들여 곤욕을 치르고 학장과는 평생 앙숙으로 지낸다. 

 

그런 점에서 스토너의 삶은 우리네 삶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세상 누구나의 바람은 좋은 직장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토끼 같은 자식 낳고 평화롭게 사는 거 아닌가. 지극히 평범한 거 같아도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좋은 직장은 다 남의 차지고 지금 다니는 직장도 언제 잘릴지 모르고 다니고 있다, 제대로 갖춘 것도 없어 결혼은 꿈도 못 꾸고, 설혹 결혼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도 이루기보다 못 이루고 사는 인류가 더 많다. 누구는 또 이 사실을 얼마나 조롱하며 주눅 들게 만들던가. 더 비참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한다. 

 

누구는 그랬다. 소설은 실패담을 기록하는 거라고. 그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그 실패담을 읽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이러면 안 된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스토너는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아 결국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학문적 업적도 뛰어나고, 사랑과 결혼에서도 완벽했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냥 부러워하고 존경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 없고 그 인생에 공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별로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나중엔 충분히 긍정해 주고 손뼉 쳐주게 만든다. 스토너를 다시 보라. 그를 앞에서 보면 평범한데 뒤에서 보면 또 그다지 나쁘지만도 않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공부했고 가르쳤으며, 악간의 균열이 없지 않았지만 가정을 끝까지 지켰고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사랑? 앞서도 얘기했지만 사랑은 이루는 사람 보다 못 이룬 사람이 더 많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짧지만 불꽃같은 사랑도 해 봤다. 긴 사랑을 했다면 완전 나쁜 사람이고 이렇게 주인공으로도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생은 이렇게 삶 쪽에서 보면 형편없어 보이는 거 같아도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나쁘지마는 않다.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고 훼방 놓는 것 같아도 죽음 앞에서는 그것이 하나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어떤 한 사람의 생을 삶의 관점과 죽음의 관점 양면에서  보여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이 작품도 착한 서사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는다고 했"던 그 말을 스토너는 여지없이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꿈으로 가득 찬 설레던 삶을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노인들의 삶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에겐 꿈을 가지며 살라고 해 놓고 당신은 정작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랐다. 그렇다고 나는 젊고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분들의 삶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건 얼마나 버릇없는 일이 될까. 

 

그런데 난 아직 노년에 이르진 않았지만 이쯤 살아보니 (꿈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이루면 되는 것이고) 비록 노인은 많은 꿈을 이루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 나름의 삶의 의미와 존재 있다는 걸 조금씩 확인하며 살고 있다. 거기 그렇게 살아서 어제 했던 일을 오늘 똑같이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누구에겐 많은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누구는 또 그러지 않던가, 오늘이라는 당신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에겐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날이라고. 이 책은 당신이 위대하지 않아도, 성공하지 못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좋다고 말하는 평범한 위대한 책이다.  

 

착한 서사가 주목을 받으려면 문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래서도 이 책은 주목을 받지 않았나 싶다. (근데 번역은 좀 올드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오체나 하게체는 이제 좀 지양해야 할 문체 아닌가. 요즘도 그런 문체를 쓰는 번역가가 있나?)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 봐야 할 것 같고,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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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8-02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얘기하시는 노년의 삶에 희망을 가져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23-08-02 11:22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그건 울엄마를 보니 알겠더군요. 또 노년이 주는 편안함, 안정감 뭐 그런 것도 있잖아요. 여전히 불안하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런 것들을 구축해 나가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니르바나 2023-08-02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가요 명곡이 있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모르는 길 위에 인생.
한바탕 꿈같은 세상이란 묘사가 적당한 것이 어릴 때 꿈을 꾼게 마치 엊그제 일 같거든요.
죽고 못살던 사랑도, 잘났다고 나대던 짓도 다 한때 일입니다.
스토너의 삶 같습니다.
더운 날씨에 몸, 마음 조심하세요. 스텔라님^^

stella.K 2023-08-03 12:27   좋아요 1 | URL
아, 더위에 니르바나님도 잘 지내시나요? 저는 근근히 잘 버티고 있습니다. ㅎ
그 노래 알죠. 누구는 소풍으로도 표현하던데 전 그 표현이 좋다 싶어요. 자기 할 일 다하고 가정만 잘 이끌어가도 칭찬받을만한 인생이죠. 뭘 더 바라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3-08-03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완독과 리뷰 완성을 축하드려요.
저는 이 책의 리뷰를 쓰려고 벼르다가 쓰고 나면 진이 빠질 것 같아 오늘 100자평으로 올렸어요.ㅋ
읽다 보면 주인공이 좋아지는 소설이 있는데 스토너가 제겐 그랬어요. 이것도 작가의 능력일 듯.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stella.K 2023-08-03 17:11   좋아요 1 | URL
축하는요, 쑥스럽게ᆢㅋㅋ 그래도 언니 덕분에 읽을 수 있었어요.
스토너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예요. 전 일케 일희일비하지않고 과묵하게 자기할 일 하는 사람이 좋더군요. 바람 피운건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ㅋㅋ

2023-08-06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6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9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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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한 면도 있을 텐데 어쩌면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그리도 악하고 교활한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이런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게 또한 놀랍기도 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악만큼 자기 본성에 충실한 존재가 또 있을까. 보통의 작품이라면 인간의 선한 면이나 적어도 인간관계적 측면을 고려한 글을 쓸 수도 있을 텐데 이건 이기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경엔 소돔과 고모라를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한 도시로 묘사하곤 하는데 모르긴 해도 작가는 평대란 가상의 마을을 그렇게 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마르케스의 '백 년 간의 고독'으로 대표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해 낸다. 그래서일까? 어떤 등장인물은 죽었나 싶으면 어느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을 특별히 나누지 않고 언제든지 현실에서의 소환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끼워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상상력이 더욱 풍부하고 확장된 느낌이다.   


평대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아귀다툼은 정말 악마적이다. 또 그런 만큼 이야기는 악마적으로 재밌다. 선이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얼핏 춘희가 후에 에꾸에게나 혹은 교도소에서 별명이 간호사인 여자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건 그저 연대의 의미일 뿐이지 그걸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주요 인물을 남자로 하지 않고 여자로 했다. 남자 작가가 말이다. 뭔가 의도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것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즉 이 이야기는 못 생긴 노파와 금복과 그녀의 딸 춘희의 이야기다. 


특히 난 춘희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기도 아니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악마적으로 자기 본성에 충실한 인물만 보다가 춘희는 뭔가 달랐다. 그건 확실히 작가의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가가 춘희란 인물을 창조해내지 못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춘희는 적어도 악한 인물은 아니다. (아, 그런 인물이 더 있긴 하구나. 文이라는 금복의 기둥서방 겸 춘희에게 벽돌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주는 사람과 금복과 의자매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쌍둥이 자매 정도.) 한마디로 불쌍한 존재다. 금복이 춘희의 아버지는 좋아했지만 그 씨를 받은 춘희는 사랑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춘희는 벙어리에 살이 뒤룩뒤룩 찐 거구다. 그리고 머리가 나쁜 바보라지만 그 보단 자기 세계에 갇힌 자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녀가 통뼈라는 것. 정말 의학적으로 증명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통뼈는 웬만해서 다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말을 못 하는 것 때문에 한때 방화범으로 몰려 교도소에 가야만 했고, 거기서 악의 실체와 바닥을 보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장군의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특사로 풀려나고 결국 대화재로 유령의 도시가 된 평대로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춘희를 방화범으로 오인하도록 만든 평대의 대화재란, 금복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여러 권모술수로 성공한 사업가가 된다. 게다가 여자에서 남자로 전환하기까지 한다. (여기엔 작가의 약간의 그럴듯한 설명과 이 이야기가 마술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썼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 대부분의 말로가 그렇듯, 성공하는 순간 몰락한다고 금복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건 또 창녀인 수련을 자신의 애인으로 삼으면서부터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하고 살아야 하는데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수련이 금복을 배신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술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금복이 세운 극장(그녀는 칼자국에게서 영화를 접하기 시작해서 나중에 극장까지 세우는데, 작가의 초기 주요작엔 영화판에 관한 이야기를 을 자주 그리곤 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을 비롯해 '나의 삼촌 부르스 리' '고령화 가족'등)에서 누가 흘린 휘발유에 모르고 담배에 불을 붙이다 극장 전체를 불에 태워 금복은 물론 많은 인명 패해를 두고 평대의 대화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영상으로 봤다면 대단했을 것 같다.) 그 화재 이후 춘희는 극장에 와 봤을 뿐인데 경찰은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혼자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애꿎은 방화범으로 몬 것이다. 게다가 춘희는 말을 못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나는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금복의 생애와 최후를 보면서 역시 악의 속성은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거라더니 그것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놀랐다. 그리고 글 쓰기 강의를 들으면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되는데 막상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좋은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춘희는 평대의 딸이다. 자신을 잡아다 참혹한 교도소 수형생활을 하게 만든 평대로 저주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돌아온다. 돌아올 때 그녀는 교도소 수형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그 마을엔 유일하게 그녀만 존재했기 때문에 다른 옷을 사거나 만들어 입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에 따라 그 옷은 무려 10년 동안 벗지 않아 찢어지고 해질 때로 해진다. 


아무튼 그런 곳을 돌아와 엄마의 가업이자 文 씨에게서 배운 벽돌 굽는 일을 한다. 그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그러다 어렸을 때 잠깐 만난 적이 있는 트럭 운전사가 평대에 오고 정분이나 임신을 한다. 트럭 운전사와 춘희의 관계는 상상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들의 관계의 첫 시작은 춘희가 만든 벽돌을 트럭 운전사가 외지에 팔아 주겠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차츰 춘희에게 옷도 사 주고, 먹을 거며 필요한 가재도구 등을 사주며 제법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트럭 운전사는 춘희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떠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춘희는 본능처럼 아기를 낳고, 본능적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나마 훗날 트럭 운전사는 마음을 돌이키고 춘희에게로 향하지만 눈사태로 눈 속에 파묻혀 죽고, 얼마 안 있어 아기도 죽고 춘희도 죽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20년을 훌쩍 뛰어넘어 웬 듣보잡의 한 건축가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그는 한 건축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건물을 짓는데 벽돌 때문에 주최 측과 충돌을 빚는다. 그런 과정에서 춘희의 벽돌 제조 방식을 알게 되고 그것이 자신이 찾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웬걸 인걸은 간데없고 몇 장의 벽돌만이 남아있다. 그게 참 묘한 울림이 있다. 


같은 죽음이라도 금복은 악의 화신이면서 비극적으로 죽어갔지만 춘희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생명과 희망을 죽은 후에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약한 것에 강함이 있다고 이것을 남자의 이야기로 했으면 어쩔 뻔했겠는가. 


작가는 서사를 다룸에 있어서도 남다르다. 이를테면 기존의 작가들은 기승전결에 너무 사로잡혀 그 틀에서 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 난 소설을 거의 안 읽었는데 요즘 작가들은 기성 작가와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하지만 천명관 작가는 확실한 서사에 오히려 뒤에 가서 뭔가의 묵직한 울림을 줘 독자로 하여금 오랫동안 가슴에 감동을 머금게 한다. 


그것은 또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던 만큼 영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왜 영화도 잘 만든 영화는 감동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뒤에 가서 한 방을 터트려주면 관객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한동안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지 않는가. 


작가는 훗날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쓰기도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감방에 가두는 모순적인 방법을 취하므로 작품의 감동을 극대화시킨다. 사실 이건 말이 쉽지 거의 특기를 넘어 신기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또 신기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그런 작가들 있지 않나, 글 쓰는 게 가장 쉬웠다며 등장인물이 말하면 자신은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라던 그 신기의 작가들. 그렇듯 일필휘지로 막힘없이 썼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작가는 시나리오를 썼다 소설로 전향했다. 모르긴 해도 시나리오를 썼을 때 보다 소설을 쓸 때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여러 번 다른 글에서 우려먹긴 했지만)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설은 누구의  예술일까? 답은 나왔다. 작가(소설가)의 예술이다. 우린 이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그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천명관 작가가 아닐까 싶다. 소설을 외면하는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겐 좀 자신감을 가져도 좋은 대목이 아닐까 싶다. 


지난봄 우리 문학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바로 작가의 이 작품이 영국의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 비록 수상까진 못 갔지만 그런 권위 있는 상에 후보만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확실히 외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마술적 리얼리즘과 우리나라 현대사를 작가 특유의 문체로 녹여냈다는 점이 찬사를 받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 개인적으론 먼저 읽은 '나의 삼촌 부루스 리'가 더 영화적으로 썼으며 더 애정이 간다. 

작가의 시작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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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3-07-20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이 달의 리뷰로 당선되기를 기대해봅니다.^^

stella.K 2023-07-20 10:08   좋아요 1 | URL
오, 정말요? 믿쑵니다. ㅎㅎ
사실 어떤 책은 넘 좋은데 리뷰 쓰기가 애매한 책들이 있어요. 특히 소설책들. 이 책도 좀 그랬는데 하나하나 생각을 모았더니 이렇게 썼네요. ㅋ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3-08-0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7-20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줄거리는 대충 건너 뛰며 읽었는데두요.
넘 정성들여 쓰신 느낌이 팍 듭니다.^^
작가를 애정하시는 마음이 아주 그냥....ㅋㅋㅋ
시간되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상을 타진 못했군요? 아쉽지만 최종 후보까지 올라간 것도 상을 탄 거나 똑같은 영광이겠죠?^^

stella.K 2023-07-20 18:31   좋아요 1 | URL
아주 그냥ᆢ!ㅎㅎ 솔직히 내용은 마음에 드는 건 아녜요. 너무 악한 사람이 많이나오고 하루키처럼 섹스가 넘 많이 나오는 것도 좀 불만이긴 한데 창작 방식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고도 끝에 가서는 뭉클한 엔딩도 좋고 능청스러운 개그도 마음에 들고 여러모로 배울게 많은 작가란 생각이 들어요. 책나무님도 어여 읽어보세요.^^

2023-07-20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1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7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7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7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9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9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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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작가는 한 권도 읽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한 권만 읽게 되지 않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나의 삼촌 블루스 리'를 재밌게 읽어서 곧이어 이 책을 읽었다.    


첫 번째 수록작인 '프랭크와 나'는 문학상 수상작이라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편의 사촌 형이 랍스터 사업을 같이 하자며 그가 살고 있는 캐나다로 시찰을 하러 오라며 남편을 불러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그때부터 아내인 나의 불안은 시작된다. 남편은 착하고 좋기는 한데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경제력은 별로다. 또 그렇게 먼 곳으로 혼자 보내는 건 왠지 불안하고 미덥지가 않다. 한마디로 물가에 내놓은 아아 같다. (이런 사람 집에 한 사람쯤 있지 않나?)


어쨌든 남편은 물 건너에 있으니 매일 전화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주지만 그 전하는 말들이 실로 범상치가 않다. 갱단을 만났다고도 하고, 갱단 두목이 자기 사촌 형과 이름이 같은 프랭크라고도 하며 그 두목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자세히 말해주기도 한다. 


또 그러다가 어떤 땐 연락이 두절되기도 한다. 그러니 아내인 내가 겪는 불안은 그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더구나 남편을 캐나다로 보낼 때 없는 돈에 오빠에게 꾸기까지 했다. 연락이 두절됐으니 행방불명이면 대책이 없다. 피가 바짝바짝 마를 것이다. 물론 나중에 남편과 연락이 닿고 후에 무사히 귀국해 예전의 일상을 되찾는다.  


나름 재밌고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스타일리시한 면이 느껴져 좋았다. 그러면서 (이국적이라기 보단) 무국적 느낌의 하루키 단편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기시감은 이 작품에서만 느껴지는 건 아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천명관 작가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게 지난 2천 년 초였으니 아무래도 하루키의 영향을 안 받았을 리 없다.    


기왕 '무국적 느낌'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국 작가가 썼다고 해서 등장인물을 꼭 한국 이름을 쓰란 법도 없다. 프랭크('프랭크와 나') 토마스(유쾌한 하녀 마리사' '프랑스 혁명사-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 마리사(유쾌한 하녀 마리사') 등 외국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다못해 '더 멋진 인생을 위해-마티에게'는 미국식 이름이 대거 등장(?)하면서 작가의 주특기인 영화 그것도 마틴 스코세이지의 애정을 드러낸다. (근데 내용은 영화와는 별로 관련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일종의 맥거핀 같은 건가?)     


그나마 국적을 알 수 있는 건 '프랑스 혁명사-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과 앞서 언급한 '더 멋진 인생을 위해-마티에게 정도를 제외하면 짐작하기가 어렵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무슨 프랑스나 프라하의 어떤 여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작가는 도도하리만치 글쓰기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에 갇히지 않으려는 작가의 어떤 의지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쨌든 상상력이 풍부하면서도 힘이 느껴진다.   


게다가 '프랭크와 나', 표제작 '유쾌한 하녀 마리사', '비행기'의 공통점은 화자나 주인공이 여자다. 가끔 남성 작가가 여자를 또 반대로 여성 작가가 남자를 화자나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보곤 하는데 난 그게 좀 신기하다. 뭐 여러 등장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릴 수는 있겠지만 보통의 자신감이 아니면 그렇게 쓸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쓸데없는 기우란 생각도 든다. 뭐 그러니까 작가겠지만 특히  중편 '비행기'는 50대 여성의 불안하고도 다채로운 심리를 잘 표현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기대하지 않고 읽다 빠져들었다.   


또한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알아채고 남편에 대한 살의와 증오심을 화자의 하녀 마리사의 수다스러움과 유쾌함에 슬쩍 묻어버리는 '유쾌한 하녀 마리사' 역시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잘 쓰지 않는 고백체로 썼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건 '프랑스 혁명사- 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화를 각색했는데 참신한 시도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작가들 너무 자기 창작에만 매몰되지 않았으면 한다. 가끔은 각색에도 도전해 봤으면 한다. 


이 이야기는 그 유명한 토마스 칼라일과 존 스튜어트 밀에 관한 이야기다. 거 알지 않나? 토마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사'를 쓰고 어찌어찌해서 존 스튜어트 밀이 검수해 주기로 했는데 그만 하녀가 그 원고를 불쏘시개로 쓰는 바람에 일순간 재로 날려버렸다는 그 유명한 일화 말이다.


사실 이 일화는 여타의 설교가들이 즐겨 사용화는 예화이기도 하다. 즉 후에 토마스 칼라일은 그 원고를 다시 쓸 수밖에 없었고, 초고 때 보다 훨씬 잘 써서 세계적인 명저가 되었다는 훈훈한 미담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이 작품에서는 흥미롭게 살이 더 붙는다. 그리고 그 관점을 원고의 주인인 칼라일이 아닌 존의 관점이다. 즉 존이 볼 때 토마스의 원고는 형편없었다. (거기엔 토마스에 대한 시기심도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자신도 바빠 죽겠는데 선배의 원고를 봐주겠다고 해서 그 원고를 집으로 가져온다. 물론 후회하면서. 일종의 공명심 같은 거였겠지. 그런데 하녀가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녀의 잘못도 아니다. 왼쪽과 오른쪽을 잠시 착각해서 말한 존의 잘못이었다. 즉 왼쪽(?)의 것이 평소 불쏘시개용 종이 묶음이었는데 말을 잘못하는 바람이 그런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엔 남의 원고를 날려 먹었으니 소스라치게 돌란다. 그런데 이내 뒤따라 오는 감정은 묘하게도 잘 됐다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어쩔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그렇지 않아도 자신도 원고를 불쏘시개용으로 쓰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걸 자신의 하녀가 대신해 줬으니 손 안 대고 코 푼 거 아니겠는가.  마침 자신의 집에 온 토마스는 존의 미소를 보고 내가 모르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냐며 호기심을 드러낸다. 알면 경천동지할 일인데.  


물론 그렇게 초고를 잃을 수밖에 없는 칼라일에겐 비극적인 일이지만 원고는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글이 된다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라고는 하나 어디 초고만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려고 하는가. 그건 완전히 날로 먹겠다는 거지.  아무튼 재미있었다. 주변의 등장인물과 배경을 살려서 이야기가 훨씬 풍성하고 코믹하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라는 작품은 확실히 독자에게 작가가 386 세대라는 것을 새삼 각인시켜준 작품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386 세대라면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유리 겔라를 아는지 모르는 가로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단순한 마술사가 아니었다. 초능력자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숟가락을 구부리는 신공을 펼칠 뿐만 아니라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따라 해 보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로 구부러지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 숟가락이 구부러진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적이 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심지어 집을 나와 노숙자 신세가 된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딸에겐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숟가락을 구부린 기적을 잊지 못해한다.


왜 작가는 그때를 소환하는 걸까. 바로 그 386 세대가 오늘날 어떤 삶을 사는지를 작가 특유의 웃픈 현실로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386 세대는 대단했지. 하지만 세월 흘러가면 그냥 추억을 먹고 사는 평범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마침 이 소설을 읽은 즈음 한 TV 프로에서 유리 겔라의 근황을 전하는 방송을 봤다. 역시 한번 초능력자는 영원한 초능력자인가 보다.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그에 대해 열광할 즈음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서는 그를 좋게 말해서 쇼맨 정도로 보고 외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다 운 좋게도 우리나라를 만난 거지. 지금도 자신의 SNS를 통해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대통령 선거 때면 후보로 나와 황당한 공약을 펼쳤던 누가 생각나기도 했다.) 


우린 그때 유리 겔라에 열광했지만 그보다 앞서 프로 레슬링이나 프로 권투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린 그렇게 열광할 어떤 존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시간들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작품은 무슨 대단한 의미보단 정말 이야기의 재미 그 자체에 많은 공력을 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인다. (물론 모든 작품이 다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작가는 장편에 특화된 작가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천명관 작가의 발견은 좀 늦긴 했다. 그래서 이제 와 이런 얘기 하는 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작품을 내줬으면 좋겠다. 나에겐 어떤 신통력이 있는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알아볼 때쯤에 문을 닫던가, 멀리 떠나던가 그러더라. 이 작가에게만큼은 나의 그런 신통력이 안 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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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7-13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별 넷이로군요?^^
혹시 <고래>는 읽어보셨나요?
전 아직 읽기 전이라 궁금하네요.

stella.K 2023-07-13 17:31   좋아요 1 | URL
네. 지금 읽고 있어요. 왜 부커상 후보에 올랐을까를 생각하며 읽고 있는데 마르께스도 생각이나고. 암튼 잘 쓰긴 했는데 갠적으로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젤 좋다는 느낌이어요.^^

니르바나 2023-07-14 0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생명력은 독자의 발견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스텔라님 처럼 자신의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만나는 것이
작가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니까요.
요즘은 그 가치가 하락했지만 전에는 얼마나 많은 예비작가들이
각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하며 당선되기를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좀 과장하면 요즘 로또 복권 당첨처럼 어려운 일이었지요.
사법고시 패스보다 제자의 신춘문예 당선을 높이 평가해주시던
소설가 황순원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stella.K 2023-07-14 10:41   좋아요 2 | URL
맞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인 경우도 많고, 젊을 때 한창 이름을 나렸던 작가도 벌써 5,60줄 타면 작품활동 잘 안하잖아요. 옛날이나 그렇지 요즘 5,60은 원로축에 끼지도 못하는데ᆢ 독자들이 안 봐주면 위축도는 건 사실이지만 언제 독자들 보고 글 썼나요? 그냥 가오 잡고 계속 쓰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저같이 눈에 띄는 날도 있을텐데.ㅎㅎ

물감 2023-07-14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태클은 아닌데요, 저는 고령화가족 한 권만 읽어봤습니다...ㅎㅎㅎㅎ

stella.K 2023-07-14 10:42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럼 나의 삼촌 브루스 리까지만 보세요. 그럼 안 잡아먹지~요. ㅋㅋㅋ
 


지난 한달동안 이용하는 통신사에서 컨텐츠를 무료로 볼 수 있게 해 줘서 나름 부지런히 원없이 봤다. 나이 드니까 영화도 시큰둥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액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왜 이 영화에 사람들이 환장하는지 알 것도 같다. 예전 액션 영화는 주인공이 반드시 어려움에 직면하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를 보여주는데 이건 그런 게 없다. 그냥 보면 범인을 찾아내고 무조건 응징한다. 그게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걸 영화 관계자들이 알았나 보다.


내가 쫌 좋아하는 손석구 피의 칼부림을 하는 건 확실히 보기가 역한데 마동석 때문에 그게 상쇄가 된다. 거침이 없고 두려움도 없다. 확실히 악을 응징하는 캐릭터는 언제나 환영을 받는다. 나름 귀엽기도 하고 매력적이다. 특히 그의 핵주먹은 믿음을 준다. 마지막 버스 대결신은 가히 압권이다.     


자막 많고 대사 많은 영화 이젠 별로다. 벌써 10년도 더된 작품인데 지금 봐도 좋다. 하긴 애니매이션의 장점은 그런 거 아니겠는가. 대사가 거의 없다. 그냥 보고만 있는 것으로도 그림을 보는 것처럼 너무 편하고 좋다. 

난 내가 이 작품을 이미 본 줄 알았다. 그랬더니 처음 봤다. 그럼 내가 뭘 보고 봤다고 착각하는 걸까...



클레이 애니매이션이다. 미국과 호주, 보모의 방치속에 살아가고 있는 18세 소녀와 44세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의 일종)을 앓고 있는 아저씨와의 무려 22년간의 우정을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음산하고 괴기스럽다. 팀 버튼의 애니매션을 연상하게 되는데 놀라운 건 실화를 바탕으로했고,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이 불행한 환경속에서 산다고 꼭 그 사람의 운명도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걸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작품. 작품을 논한다는 게 별로 의미가 없어보이긴 한데, 고백하자면 난 이 작품을 이번에 처음 봤다. 멋지긴 한데 아무래도 시리즈로 보는 건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아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우연히 영화 채널에서 봤는데 아쉽게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번에 다시 봤는데 나름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70년대 미국 이민 사회를 그렸다. 

난 한예리의 차분한 연기도 좋고, 윤여정의 자기중심적인 연기도 좋긴한데 왠지 스티브 연의 연기가 마음이 간다.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책임지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인가.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가장이 된다는 건 역시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아내의 바람대로 장모를 모셔와 함께 살기로 했는데 이번엔 손자와 외할머니가 잘 못지낸다. 할머니는 좋아하는데 데이빗은 할머니가 너무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데이빗을 연기한 앨런 김의 연기가 정말 좋다.) 아무튼 그럭저럭 살아갈 것만 같은데 이번엔 외할머니가 뇌졸증에 걸린다. 또 그런 중에도 어렵게 오랫동안 바라 온 일을 처음으로 성사시키고 가족 모두와 기쁨을 나누고 싶은데 그 순간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깨닫고 또 싸운다. 그리고 정말 이혼을 결심한다. 그런데 가만히 있기로 한 친정 엄마가 뜻하지 않게 화재를 내 헛간을 태우고 만다. 헛간엔 납품할 물건을 쌓아뒀다. 그걸 잃어버리게 생겼다. 

하지만 그게 꼭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평소 땐 죽일듯이 싸우다가도 그런 뜻하지 않는 일이 닦치면 놀라운 응집력을 발휘한다. 그게 가족이다. 친정엄마가 불을 냈으니 적어도 한동안은 이혼의 이자도 내지 못하게 생겼다. 남편의 입장에선 좋은 일일 것이다. 또한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외할머니와 손자의 관계도 처음으로 손자가 할머니를 걱정하는 어른스러움이 발휘된다. 

한국의 사위 같으면 그런 장모라면 의식하건 말건 마구 원망을 퍼부었을지도 모르는데 미국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지 장모를 탓할 마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장모가 심어놓은 미나리 밭을 아들과 함께 나와 미나리를 딴다. 그게 참 짠하다.         

좀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 굳이 흠을 잡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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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7-13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범죄도시 같이 주인공이 승리하는 장면이 많은 게 저도 재밌더라고요. 더글로리, 도 그래서 성공했던 것 같아요. 예전 영화는 주인공이 당하기만 하고 관객이 마음 졸이게 한 게 많았어요.
더글로리처럼 이미 계획해 두었던 것(복수)을 보여 준다면 승리할 승산이 높으니 리얼리티가 없다는 평가를 피할 수 있을 듯요.
가족이란 그런 거죠. 제가 본 외국영화도 그런 게 있었어요. 둘이 이혼하려고 결정했는데 그때 아이가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나서 부부가 합심하여 아이 찾기에 나서고 그러면서 서로 위로하고 결국 아이 찾고 부부가 화해하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불행에도 장점이 있는 셈이죠. 간단 리뷰 좋습니다.^^

stella.K 2023-07-13 14:42   좋아요 1 | URL
이번에 지니 TV가 예쁜 짓을 했어요.
예전엔 아주 가끔 5천원 3천원 TV 쿠폰 주더니.ㅋ
어제 자동종료 했는데 좀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월정액 사서 보진
않으려구요. 계속 TV만 보게되서.ㅠ
더 글로리도 그렇군요. 힘 자랑하는 거 별론데 마동석 정말 매력적이예요.
귀엽기도 하고.
본 중에 제일 좋았던 건 ‘일루셔니스트‘랑 ‘미나리‘가 좋았던 것 같아요.
두 작품은 언니도 꼭 보세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니르바나 2023-07-14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영화 많이 보셨네요.
니르바나도 <미나리> 좋게 보았던 것 같아요.
남들이 좋다하면 그저 따라가보는 영화 관람 수준이라서 좀 그렇지만
봉준호감독의 <기생충>에 이어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stella.K 2023-07-14 10:31   좋아요 2 | URL
잘 계시죠? 늘 저의 볼품없는 글에 댓글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ㅎ
영화는 정보력이 중요하죠. 아무거나 볼 수는 없잖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저도 두 작품 모두 재밌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