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 출세욕 먼슬리에세이 2
이주윤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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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0쪽 내외. 보통의 다이어리만 한 크기. 이런 책을 읽고 뭐 할 말이 많을까 싶기도 한데 의외로 할 말이 많아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알아주는 작가의 글 쓰기 담론이 아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글쟁이 언니의 솔직 토크' 뭐 그런 느낌이다. 특이하게도 이건 기획물이다.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슬리 에세이'란 시리즈물의 2탄으로 나왔다. 그것도 앞으로 한 달에 한 권씩 펴낼 거란다. 와, 요즘 출판 기획과 작가의 활동이 여기까지 왔구나. 새삼 놀라기도 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인 협회는 있어도 작가 협동조합 같은 건 공식적으론 없는 것 같던데 뜻 맞는 사람끼리 모여 책을 내고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누고, 서로 으샤 으샤 하는 뭐 그런 활동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긴 그 코 묻은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눠봤자 얼마나 돌아가겠냐만. 어쨌든 말이 되거나 말거나 작가들의 활동은 진화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먼슬리가 됐건 뭔 소리가 됐건 작가는 자꾸 떠들고 판을 깔아줘야 한다.


책에서 이슬아 작가에 대해서 말해서 말인데, 알다시피 이슬아는 구독 작가로 유명하다. 저자는 자신은 필력이 없어 그런 활동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이건 누구든 일단 마음만 있다면 한 번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도 해 봤으려고. 누구에 비한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이슬아도 처음부터 구독자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구사하는 문장은 젊은 독자들이 좋아할 만 문장이다. 그들 가운덴 구독을 좋아하기도 하던데 먹힐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싫으면 말고.


지금 생각해도 내가 대담하긴 했지. 작년에 이슬아 삘 받고 나도 어설프게 구독 활동을 했으니. 처음 시작을 했을 땐 과연 구독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 그런 흔치 않은 독자가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독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고, 내 글을 구독해 준 독자들에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대신 난 그때부터 이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후유증이 생겼다.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래도 이슬아는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건 인정! 


2.

독자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무리 기고 뛰고 나는 작가가 글을 써도 꼭 글 못 쓴다고 구박하는 독자는 있게 마련이다. 나도 언젠가 책을 내고 모 사이트에서 이것도 글이냐고 구박하는 독자의 리뷰를 보고 기분 상한 적이 있다. 성격상 또 그런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뭐라고 반박하려다 결국 말아버렸다. 이제 난 독자가 아니라 작가다. 체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면 글은 언제 쓰고 이미지에 스크래치만 간다. 


생각해 보면 독자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저자가 애정 하는 작가 중 한 명이 김애란인가 본데 어떻게 김애란을...?! 할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모 소설을 내 특유의 필봉으로 가차 없이 사시미를 떴다. 그러자 어느 댓글러는 속이 후련하다고 했고, 좋아요도 그때 기준으로 최고점을 찍고, 심지어는 그달의 리뷰에 선정돼 적립금까지 받았다. 그래. 사시미를 뜨려면 이 정돈해 줘야지. 나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독자는 딱 거기까지다. 그 이전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올라오는 리뷰도 칭찬일색이었다. 뻘쭘했다. 잘 썼다는데 내가 더 이상 뭐라고 말하리. 거기까지가 독자의 일인 것이다. 거기에 저자는 악플에 대처하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아주 합리적인 대처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냥 반사라고 하란다. 그 이유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읽으면 되고, 과연 그러면 되겠다 싶다.


3.

저자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다. 계속 쓰는 작가가 되려면 둘 중 하나다. 저자처럼 치열하게 쓰던가 아니면 낮엔 일하고 밤에 쓰거나. 모르는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첫 책을 내고 계속 출판사 사장과 편집자와 케미가 좋아 일을 계속해 오고 있는가 본데 그러기가 쉬운가 싶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기는 개점휴업이라고 첫 책 내면 각자도생의 길을 가지 않을까. 물론 뜻이 맞아 연이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첫 책 내고 출판사 사장한테 엄청 깨졌다고도 했는데 과연 그게 작가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난 워낙에 첫 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출판사 쪽에서 책 내자고 했을 때 2년이나 튕기다 지난 2016년에야 겨우 냈다. 어느 출판 사건 자기네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면 서로 고마운 거지 깨고 깨지고 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출판사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초보 작가일수록 조금이라도 좋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이냐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그래서 내 책이 유명 출판사에선 그냥 하나의 배경 정도밖에 안 되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스펙이라면 스펙 아닐까. 자신의 책을 소개할 때 "거 유명 작가 000가 낸 출판사에서 냈어. 그러니까 끕이 같다고." 구라 치고 싶지 않을까. 이러고저러고 지간에 어느 출판 사건 내 책을 귀하게 여겨 줄 출판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료 따박따박 주고.


작가치고 원고료 날려 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알아봤더니 우리가 알만한 유명 작가도 무명 때 한 번씩은 다 원고료를 떼인 경험이 있더라. 그 말을 듣는데 어찌나 속이 쓰렸던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그런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출판사는 아니다. 어느 단체다.) 작년 말에, 내 책을 내 준 출판사 사람들이랑 오랜만에 만나 게거품 물고 원고료 떼었다고 성토하니까 사장이 듣더니 딱 한 마디 하는데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양아치라고. 그러자 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졌다. 그 말 한마디를 못해 그렇게 게거품을 물었던가 싶었던 것이다. 혹 시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원고료 준다고 해 놓고 안 준 의뢰인 있거든 지금이라도 더 이상 양아치 되지 말고 반드시 지급해 줬으면 한다. 그거 안 준다고 부자로 잘 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 양심은 지키고 살아야지.


4.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그 많은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란 쳅터였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급적 접속사 쓰지 말이라. 부사 쓰지 말아라. 단문으로 써야. 기타 등등의 잔소리 솔직히 좀 지긋지긋했다. 중요한 건 문장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다. 물론 가급적 그런 걸 쓰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면 당연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해서 꼭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강박적이 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신 저자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들어 글이라 생각하지 않고 노래 부르듯 글을 불러 본다고 했는데 그건 정말 참고할만하다. 중요한 건 글의 리듬이라고. 나도 영화 <변산>을 보면서 힙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말인데 노래도 아닌 것이 리듬은 있다. 우리의 글 쓰기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뮤지컬도 그렇지 않은가.


5.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계속 쓰는 삶을 위해 팔리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글은 무조건 써야 한다. 나도 한때는 블로그에 낙서 반, 일기 반 한 글만 쓰는데 무슨 책을 낼까 싶었는지만 결국 책을 냈다. 물론 그것으로 책을 내지는 않았다. 내가 쓴 책은 독서 에세이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난 뭔가를 끄적이긴 했지만 블로그질을 예전만큼 안 하게 되었다. 요는 누가 봐도 되는 글, 누구 보라고 하는 글을 확 줄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어쩌다 신문 연재 기회를 얻게 되었나'를 읽다 정말 찔렸다. 그 알량한 책을 내니 글 쓰기가 더 불편해졌다. 누가 이런 후진 글만 쓰면서 어떻게 책을 냈지? 흉보는 것 같아 스스로 위축되기도 했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것을 깨닫고 좋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1일이다. 했다. 예전에 난 블로그에 100일 동안 뭐라도 쓴다고 하고 그걸 실천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게 또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그런 내공이 모여 책을 내게 된 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저자 말마따나 무조건 써야 한다. 어설픈 글로 투고할 생각하지 말고 남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꾸준히 글을 써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 1일을 아직도 시작도 못하고 난 이렇게 리뷰만 쓰고 있다.ㅠ


6.

이 책은 정말 웃기고, 재밌고, 용기를 주는 책이다. 누구든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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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7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1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동주의 문장
윤동주 지음, 임채성 엮음 / 홍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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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예술가중엔 고독하고, 아련하고, 애잔함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흐가 있고, 생텍쥐페리와 카뮈가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으론 배호나 김광석 등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더 찾아보면 더 많이 나오겠지. 그중에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윤동주일 것이다. 


모처럼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으면서 습작시를 포함한 동시와 산문까지 아마도 그의 모든 작품을 총망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는 모름지기 다작, 다독, 다상량이라고 했건만 윤동주만큼은 다독과 다상량은 했을지 모르지만 다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애송하는 시로 그의 시를 떠올리길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다작보다 중요한 건 사람 자체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말미에 벗들의 회고가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그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동기인 강처중은 그는 여간해서 누구에게도 시를 보이지 않으며 보여주는 때가 있다면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라고 했다. 그는 겸허하고 온순했지만 자신의 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학교 후배인 정병욱은, 그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히면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냥 써진 시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쉽게 씌여진 시'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딱 잡이 뗀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후략)라고 적고 있다. 


물론 이 시는 그가 천재적 영감을 갖고 있어 뚝딱해서 쓴 시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의 해설대로, '어둡고 암울한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뜻으로 쓴 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다시 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촌 송몽규를 비롯한 몇 명이 독립운동으로 뭔가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나설 때 윤동주도 함께 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송몽규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결국 홀로 방에 남아 저 시를 나레이션처럼 읊는다. 감수성과 자의식이 강했을 그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시를 지었을지 알 것도 같다. 송몸규를 비롯한 같은 또래의 학도병은 나라를 구해 보겠다고 할 때 자신은 육첩방에 홀로 남아 신세한탄처럼 이렇게 시나 읊어대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쓰렸을까.


흔히 윤동주의 시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미학'이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워낙에 수줍음을 잘 타고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니 그랬겠지만, 그의 부끄러움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의 <이런 날>이란 시를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 헷말간 권태로 깃들고 /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 부르고 싶다


이 시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런 날'은 곧 일본의 국경일을 말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일본의 국경일에 만주국 국기인 오색기를 함께 게양했는데 우리나라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아이들 역시 나라 잃은 설움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크게 웃고 신나게 뛰어놀 뿐인데 이를 보고 시인은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게 부끄러웠을까. 아니, 그건 안타까울지는 몰라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은 그래야 한다. 생업 외에는, 뛰어노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나라에 사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았을까. 우리나라는 조선조부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그 말기엔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의 나라다. 배우고, 똑똑하고,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국민이 왜 나라 잃은 현실을 아파하고 서러워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든, 왜놈이든 먹고사는데 걱정 없게만 해 준다면 나라를 팔아먹은들 무엇이 대수랴. 그런 자포자기 한 사람이 다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시인은 평생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을 만난다. 거기서 정지용은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지만 시를 쓰지 말라고 한다. 내 나라 말로 시를 쓸 수가 없는데 시는 써서 뭐하겠냐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며 깊은 한숨을 쉰다.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정지용의 부끄러움은 같은 것이었을까. 조국을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오직 시로만 고백했던 윤동주와 한낱 지식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책으로만 일관했던 정지용을 보면서 나라면 어찌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역사는 자꾸 독립투사를 내세워 또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독립투사들처럼 순국을 각오하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불행한 역사를 살아간다면 과연 나는 순국을 각오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이름을 고쳐서라도 내 한 목숨 부지하고 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그럴 것만 같다. 또한 끌려가는 투사들을 지켜보며 함께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초라한 참회록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참회록>

 ......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는 시로 참회록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문재(文才)였지만 친일을 했던 이광수는 끝내 문학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참회록을 썼기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보라. 이광수는 한때 문재였음을 기억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지금도 기억되고 애송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지는가. 그게 단순히 시대를 아파했던 회의주의자의 타령으로만 보이는가.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 한 권 갖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이 시인이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치자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주를 위해 사용하여 '시인 윤동주 지묘'라고 씀으로 이때 처음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그를 더욱 애잔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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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23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잔해서 예술가답지요.

순국... 참 어렵죠. 저라도 죽음 앞에선 제 자신의 생명이 제일 소중할 것 같아요. 그래서 순국자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stella.K 2020-06-23 18:44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제가 있는 건데
저는 아무래도 나라 보다 제 목숨이 더 귀한가 봅니다.ㅠ

윤동주 시인만 생각하면 왜 그리 짠한지...
영화 다시 봤는데 강하늘이 연기도 잘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도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편집도 그렇고, 시나리오 자체가 시 같아요.
누가 자기는 이상과 백석, 윤동주 평전 다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던데 옛 문인을 사랑한다면 이 세 사람은 정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더군요.
저는 이상만 가지고 있어요. 그것도 고운 걸로.ㅋ

transient-guest 2020-06-24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니 민족이니, 종교도, 무엇도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닌가 싶어요. 특히 하루살기에 급급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다만 남의 지배는 확률상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할 때보다 우리를 이롭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가치의 척도가 아닌가 싶어요. 아이들이 식민통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울 수는 있어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물론 독립운동과 선각자들의 희생으로 절대로 한국을 이롭게 할 수 없는 자들을 몰아낸 그 노력과 투쟁은 별도의 이야기입니다만. 윤동주시인은 일찍 죽어서 어쩌면 더 짠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그 만큼 더.

stella.K 2020-06-24 15:29   좋아요 1 | URL
중요한 척도죠. 리뷰에 다 쓰지 못했지만, 누가 그런 말을하더군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도 왕조를 회복하지 못한 건
왕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렇겠구나 싶더군요.
유럽도 그렇고, 하다못해 일본도 왕조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게
그냥 그런 게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비록 반쪽이지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도 울나라는 아직도 독재와
싸워야 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고 사는 걸 보면 새삼 희안한 국가란 생각도
듭니다.
짧게 살아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는 것도 크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ㅎ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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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책을 이제야 완독 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책이다. 역사적 사실을 거의 그대로 소설로 옮긴 저자의 필력이 좋다.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와 이후 해방정국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일본을 비롯해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기도 했고, 온갖 사상이 난무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여기선 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의 활약과 삶을 다루고 있는데, 읽다 보면 우리나라 노동 운동이 생각보다 오래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노동 운동은 80년대 어느 날부터 생긴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나름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노동 운동을 했지만 성과는 미미해 보인다.


어찌 보면 사회주의가 나름 이상 적여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성공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에 대해선 더 많은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건 어떤 사상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책에 나오는 실존했던 인물들은 나름 이유 있는 삶을 살았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이 책은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책의 흐름도 꼭 경성 트로이카라는 남성들에만 매어있지 않고, 여자 주요 등장인물에게도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으니 말이다. 193,40년대 여성들이 얼마나 자유분방하며 진취적이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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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침 2020-06-0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 여름한 햇살입니다.
살짝쿵 눈부신 나날이 되시길....
참, 몸도 건강하시고요.....^^
이상, 뜬금포 안부 인사요...

stella.K 2020-06-07 18:5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네요.
진짜 여름어요. 덥긴해도 아직 습도는 그다지 높지 않아
지낼만은한데 장마진 여름이 문제죠?
전 여름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하루하루 가는 게 아까울 정돕니다.ㅎ
기침님도 여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늘 오시면 인사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20-06-09 0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독립운동이나 한국역사의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문학사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고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시대라서 바로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건강하시죠?

stella.K 2020-06-09 15:4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0-06-2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공부하겠다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뭔 얘기를 하는 거야? 번역이 잘못 된 거 아냐? 이러면서 읽었던 기억이...
책에 열정을 갖고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너무 천천히 읽습니다. ㅋ

stella.K 2020-06-20 19:05   좋아요 0 | URL
와우, 대단하셨네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러겠죠?
요즘엔 해설판도 많이 나온 모양인데 말이죠.ㅠ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1 - 1900-1934
장석주 지음 / 시공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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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사춘기 때 문학 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 시기에 우리나라 문학을 좋아하기란 게 쉬운 일일까? 잘 알려진 세계 고전 문학이나 읽어낼 수만 있다면 자타 공인 문학 소년, 문학 소녀는 아닐까. 솔직히 나는 그랬다. 그 시절 우리나라 문학이 싫었다. 우리 문학을 읽는다는 게 왠지 뒤쳐지는 것만 같았고, 뭐 별거 있나 우습게 봤다. 쏟아지던 베스트셀러도 그랬지만 근대 문학은 더더욱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한동안 문고본이 유행이었다. 특히 삼중당 문고는 주머니 가벼운 문학 소녀와 소년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었을까 싶다. 책가방에 그 책 한 권쯤 안 넣고 다니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문고본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너무 채신머리 없을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었다. 실용성은 좋을지 모르지만 장서용으로는 영 아니었다. 나의 오빠나 언니 세대엔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그런 책은 갖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문고본엔 우리 고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김동인의 <감자>나 <배따라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같은 것 말이다. 책이 좀 근사했다면 적어도 한 번은 서점에서 무슨 책인가 뽑아 봤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도 그냥 권장 도서 정도로만 취급할뿐이지 그 모든 책들은 교과 과정엔 없다. 이렇게 학창 시절 국어 교육은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문학 교육은 전무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소감 일부다. 그것도 겨우 1권을 읽고.


이 책이 유달리 감동스럽다거나 우리 근대문학을 요약해 보여주는 건 아니다. 무려 권당 500페이지 내외로 5권까지 근현대 우리 문학을 연대기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도 아는 바도 없지만 유독 일제 강점기 또는 개화기에는 관심이 많다. 그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관심을 갖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상과 백석 등 당대 문학인과 문학 단체와 문학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기-승-전-문학(史)인 것일까.


물론 문학사를 쓴 사람이 장석주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동일이나 문학 평론가 김윤식 교수 또 그밖의 학자나 교수들도 쓰긴 했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 개론서겸 대중서로 이 책은 적절해 보인다. 문사철이 그토록 중요하다면서 우리 문학의 역사를 단편적으로도 알지 못한다면 뭔가를 놓치고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뻗어나갈지 알 수 없다. 정사로 알 수도 있지만 나처럼 어느 특정 분야에 꽂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이 책은 특별히 우리나라 근대 초입은 1900년부터 1934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읽으니 우리나라 근대 사회의 한 단면이 보이는 것 같고, 문학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도 새삼 알겠다. 몇년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가 어떻게 하다 작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굉장한 문학적 내공을 감추고 있거나, 문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그 옛날 문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문을 깨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문학이었다. 언문은 소위 있는 집 자제나 할 수 있었다. 문학엔 사상과 정서가 담긴다. 글로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을 있는 표현하고, 세상을 깨우치고 싶어 했다. 하나 안타까운 건 당대의 문사들 예를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광수를 비롯해 알만한 문사들 거의 대부분이 친일을 했다는 점이다. 험악하거나 간신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친일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처럼 고고하고 선비 정신으로만 무장해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애국심은 고사하고 깨어 있는 양심으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문인으로서 할 일을 다하지 않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작가로서 할 일을 했다. 그렇다면 애국심이나 지식인의 양심과 작가는 별개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야 이광수가 작가로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또 이건 나의 사견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있는 집 자제였다. 친일에 저항하면 따라 올 육체적 고통을 쉽게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의 안위를 도모하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같다. 결국 문학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을 당대 문학인들은 스스로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문학의 대의가 구국의 대의를 대변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문인들에 관해서는 늘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 책을 (늦게나마)읽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기 어렸다고, 자국의 문학이 자국민들에게 사랑 받기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좀 덜할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정말 욕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한숨을 푹푹쉬며 그것도 작품이냐며 험담 아닌 험담을 했더랬다. 원래 작가와 독자는 그런 존재다. 어떤 식으로든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가 좋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작가는 잊히는 법이다. 잊히는 건 또 얼마나 서러운 일이랴. 근대의 작가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들이 언문을 깨우쳤다고 해서 마냥 사람들로부터 환영만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문을 깨우치고도 이것 밖에 못 쓰냐고 희롱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잊힐지 몰라도 그들의 작품은 100년을 살아남아서 후대에도 읽히고야 만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작가와 그 작품들도 그러지 않을까. 문학의 힘은 그런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멀쩡한 책이 오늘은 파쇄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차곡차곡 모아놓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세월을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 100년 뒤엔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또한 역사다. 작가만이 가장 작가답게 현세를 그릴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다.


문득 책을 읽다 작가 홍명희에게 한참 머물렀다. 그는 바로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다. 이야기의 구조만을 생각한다면 허균의 <홍길동전>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다른 건 <홍길동전>은 허구의 고대 영웅을그리지만, <임꺽정>은 실록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정밀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시대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임꺽정>은 1928년에서 1940년까지 몇 번이나 중단과 연재를 반복했지만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조선 초유의 대작", "조선 현대 문학의 거탑"이란 찬사를 들으며 소설사에 남을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하지만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건 따로 있다. 그건 그의 독서법이다. 그는 1907년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 3학년에 편입해 1910년까지 다닌다. 이 무렵 일본과 서양의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3학년 2학기 때부터 독서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한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되도록 속히 읽는다."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유지하며 도스토예프스키와 바이런과 자연주의 계열의 일본 작가뿐 아니라 금서로 분류된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과 풍기 문란 딱지가 붙은 책까지 섭렵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특히 요즘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없지 않은데, 작가 홍명희가 살아 있다면 이 사실을 알면 썩소를 날릴 것도 같다. 사실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만 해도 이것은 보편적 독서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속독이 유행이기도 했다. 한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한 책을 슬쩍 끼워 보기 시작하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반성해 본다. 물론 비판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독서의 성실함일 것이다. 작가 홍명희는 이 독서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곧추세우며 책을 읽었을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것저것 조금씩 건드려 놓은 책중 하나인 이 책이라도 마치기 위해 허겁지겁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펴낸 장석주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 날개 부분에 그가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가 나와있는데 얼마나 지난했을지 감히 짐작이 간다. 그 덕분에 나 같은 독자는 편안히 앉아 읽어보지 않는가. 참고로 홍명희는 원고자 1만 3천장의 분량을 12년에 걸쳐 쓰고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장장 8년에 걸쳐 원고지 2만 장에 걸쳐 이 책을 썼다. 가히 문학계의 수도사답다. 그도 그럴 것이 1992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후 두 달만에 풀려나 무작정 제주도 서귀포에 방을 얻어 썼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이 책 마지막 5권까지 다 읽고나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상상해 본다. 생각보다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안 읽었을 때 보단 달라져 있겠지. 그 한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아, 그리고 하나. 근대 작가들도 청소년 시절엔 하나 같이 외국 문학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도 사춘기 때 외국 문학만 읽고 우리 한국 문학은 안 읽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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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5-2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맞춤법 검사에서 하나도 걸리지 않고 한 번에 무사 통과된 글이다.
믿을 수가 없어 몇번씩 확인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야호!
이러다 어떤 사람 매의 눈으로 잡아내면 어쩌지..ㅋ

페크(pek0501) 2020-05-27 22:58   좋아요 0 | URL
맞춤법 검사라는 게 있습니까?
저는 자신 없는 낱말은 아예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고 쓰는 편이라서요...

그보다 저는 요즘 한글 파일의 맨 위 보면 찾기, 라고 있잖아요. 그걸로 반복되는 낱말을 걸러 내는 작업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반복적으로 쓰는 게 많은지 깜놀입니다. 예를 들면 것, 이라는 낱말을 치는 거예요. 그러면 열 몇 개가 나와요. 그러면 다른 말로 대체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있다, 라는 낱말도 반복해 쓰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또 것이다, 라는 말을 제가 잘 쓰더라고요.
참고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답니다. 미리보기로 보셔도 됩니다. 앞부분에 나와 있는 걸 보고 구입했거든요.



stella.K 2020-05-28 19:13   좋아요 0 | URL
엇, 그거 있는데. 사이트마다 있지 않나요?
한글에도 있는데 전 옛날 버전이라 그런지 많이 걸러내지 못하더군요.
작년에 브런치 개설했는데 그건 좀 많이 걸러주는 것 같아서
일단 거기에 쓰고 맞춤법 검사한 후 이쪽에 옮기죠.
그 검사시키면 빨간 줄이 쫙 뜨는데 없어서 신기했어요.ㅎㅎ

<안정효의...>는 오래 전에 사 놓고 완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읽으면 좋긴한데 참고서 같이 써 놔 가지고 꼭 어느 정도 읽으면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
저는 글 쓰기 책은 이윤기나 김연수 작가처럼 쓰는 걸 좋아하는데 말이죠.ㅋ

2020-05-27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8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0-05-28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겠지만, 뒤에서 두번째 단락 세번째 줄 원고지를 원고자라 쓰셨군요 찾으려고 한 건 아니고 글을 보다 보니 보였습니다 원고자라는 말이 있어서 괜찮았던 거겠습니다

홍명희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한 책을 보면 다른 책은 안 봤군요 제가 그러는데... 요즘은 책 여러 권을 보라는 말을 많은 사람이 하기도 하더군요 그건 소설이 아닌 책일 때가 아닐까 싶어요 소설은 흐름이 있으니 그걸 놓치면 안 좋잖아요 그저 제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저는 어떤 책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군요 시작했다 그만둔 책도 조금 있지만...

저는 중, 고등학생 때는 책을 모르고 읽지도 않았네요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싶어요 그때 한국 소설을 잘 안 보는 건 국어나 문학 시간에 하는 공부여서 그랬던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 그걸 알고 시나 소설 찾아본 사람도 있겠습니다 공부로 할 때는 재미없어도 그냥 볼 때는 재미있는 게 문학이 아닌가 싶어요


희선

stella.K 2020-05-28 19:04   좋아요 0 | URL
기계도 완벽한 건 아니라니깐요.ㅎㅎㅎ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단지 맞춤법 검사하면 빨간 줄이
쫙쫙 치는데 신통하게도 그게 없는 거예요.
여태까지 그런 일 한 번도 없었거든요.ㅋㅋ

저는 요즘 우리나라 근대 문학을 읽어 볼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론 많이 못 읽겠지만 왜 진작 못 읽었을까 후회가 되더군요.
희선님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 권씩 읽어보시죠.
암튼 오타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난 2월, 우리 영화 <기생충>이 세계 주요 영화제를 석권하고 마침내 미국의 아카데미까지 넘보고 있을 때, 미국의 한 원로 배우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름 아닌 커크 더글라스다. 향년 나이 103세. 고인에겐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난 그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 활동을 같이했던 영화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타계했기 때문에 그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커크 더글라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글쎄,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외국 영화를 안방에서도 보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대략 1970년대에) 우리에겐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이라 일컫는 세대가 있었다. 바로 그때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던 1 세대 배우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무튼 그의 부고 소식을 들으니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간 배우들이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를테면 앤서니 퀸이나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오드리 헵번 등등의 배우가. 그들은 정말 화면 안에서 빛났다. 


가 빈센트 반 고흐로 분하고 나왔던 1956년작 <열정의 랩소디>란 영화는 정말 볼만하다. 사실 이 영화 이후에도 고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보다 많이 만들어졌다. 드라마도 있는 것으로 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러빙 빈센트>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론 실사에 고흐의 필치를 살렸다는 측면에서 기술의 승리를 보여준 건 맞지만 때문에 오히려 감동은 좀 반감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보단 모든 고흐 전기 영화의 아버지 격인 이 <열정의 랩소디>가 오히려 인물에 충실해 보인다. 특히 커크 더글라스가 연기한 고흐는 정말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게 몰입도가 상당히 좋다. 


우리는 흔히 고흐를 두고 고독의 화가라고 말한다. 왜 그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잘 알다시피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친구와의(화가 세잔) 우정을 지켜나가는 것도 서툴렀고, 사랑은 더더욱 그랬다. 고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 아쉽게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잃어야 했다. 누가 보면 사랑은 밀당인데 그런 테크닉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비웃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이 어디 테크닉만 가지고 되는 것일까. 사랑을 고백했다 거절당한 그를 보면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못해도 한 번 정도는 더 노력해 봐야 하는 건 아니냐고 한다면 그건 어쩌면 그는 물론이고 상대에게도 모독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문득  <봄. 봄>과 <소낙비>의 작가 김유정을 떠올렸다. 그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죽고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집안이 급격히 기울었다. 그는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난봉꾼인 형과 고집불통에 수전노의 아버지가 서로 불화하는 것을 보며 우울한 소년이 되어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만다. 어머니를 여읜 지 2년 만의 일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나이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그는 소년 시절부터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했던 것 같다.


형은 아버지와 불화했지만 유정에게만큼은 잘해 주었다고 한다. 형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을 때도 그만큼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형이 재산을 거덜내고, 고향인 강원도 실레 마을 이혼한 둘째 누이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을 때 사랑이 찾아왔으니 상대는 박녹주였다. 박녹주는 김유정 보다 나이 많은(그래 봐야 두 살 연상이다) 화류계 판소리 명창이다. 하지만 둘은 어울리지 않은 짝이었고,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인회남은 악몽에서 깨어나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유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박녹주에서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담배 연기 가득 찬 방에서 밤낮없이 연애편지에만 매달렸고, 나중엔 자신을 안 만나 준다고 그녀에게 협박과 공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박녹주를 사랑한다'라고 혈서까지 써서 일기장에 간직하기도 했단다. 이쯤 되면 집착을 넘어 광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훗날 그의 집착적 짝사랑은 끝나긴 했지만 몇 년 후, 박봉자라는 여인을 사진만 보고 반하여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는 실패다.


이런 김유정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그가 일찍 어머니를 여읜 데서 온 외로움 때문일 거라며, 실제로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뿔뿔이 출가해버린 누이들에게서는 예전과 같은 애정을 기대할 수 없기도 했으니 한편 이해할 것도 같다. 그렇다면 사진으로만 본 박봉자란 여인에게 사랑을 퍼부었던 것도 그녀가 그의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정도라면 고흐는 김유정에 댈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김유정의 집착이나, 고흐가 훗날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기까지 둘의 공통점은 우리가 미쳐 다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갔다는 점일 것이다. 고독이 예술에 절대적인지 그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둘은 우리가 인정해 줄 만한 예술가임엔 틀림없다. 하나는 미술에서, 하나는 문학에서. 그리고 이들의 생애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만 접할 수 있는 우리는 그저 쓸쓸함으로 그들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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