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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방송의 인기개그 프로그램에서 백수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백수생활백서' 코너가 있었다. 거기서 나온 고혜성이란 개그맨이 얼마나 그럴 듯한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웃겼는지 한동안 그것이 세간에 회자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실업자들을 풍자한 것으로  꽤 인기를 구가했다.

 

실업자의 설움이 얼마만한 것인데 '백수생활백서'가 하늘을 찔렀던 것일까? 희극배우의 성공요인 중에 제일로 꼽는 건, 본인은 무대에서 슬픈데 보는이들은 오히려 카타르시스와 희열 느낀다면 그 배우는 대단히 성공한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표적 인물을 꼽자면 단연 채플린이 아닐까? 그 다음으론 로베르토 베니니 정도?

 

이 책, <백수생활백서>를 읽으면서 갑자기 '백수'의 정의를 내리고 싶어졌다. 그냥 단순히 실업자면 다 백수일까?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업률 몇%라는 수치에, 무조건 일을 안하고 있으면 실업자의 대열에 넣는 것에 대해 억울해할 사람은 있지 않을까? 그들은 여러 이유에서 일을 안하고, 경제활동을 안할 뿐이다. 자신이 경제활동을 하고있다고, 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이런 사람을 얕잡아 보고 우습게 여긴다면 그건 또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과 가치가 다를 뿐이지 그것이 문제가 되거나 병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는 아직도 획일적인 것이 많고, 분류기법이 세밀하지가 않아서 그들을 단순히 실업자의 대열에 집어넣기를 서슴치 않고, 사지육신 멀쩡한데 왜 일을 안 하느냐고 단죄하기도 잘한다.

 

그렇다면 백수를 정의하기 전에, 무엇이 백수가 아니냐를 논해 보면 어떨까? 당연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면 백수가 아니다. 일하다 잘려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 역시도 백수로 보는 건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억울에 한다는 것은 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라는 것으로, 그는 언젠가 복직을 하던가, 아니면 새 일을 찾게 되던가 할 것이다. 또한 부류가 있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평생 무슨 일을 할까, 뭐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들. 그들이 백수라고? 웃기지 마라. 그건 '베짱이'거나 '양아치'라고 하지 그런 부류의 사람한테 '백수'란 거룩한 이름을 부여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럼 어떤 사람을 '백수'라고 하는가? 우선, 백수는 자발적이다. 돈을 벌라고 등 떠밀어도 절대로 그 말에 굴복해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재주를 가졌던 지간에 그 재주로 자신의 안일을 도모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빌붙어 살아도 그것을 부끄러워 해서도 안 되고,  최소한의 용돈벌이는 하되 긴 안목에서의 노후대책이나 재테크를 위한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수'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 하루를 살뿐,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살거라고 하는가 그림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 딱 한가지만을 미치도록 아니 미쳐서 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백수'가 되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이 미래에 돈벌이가 될런지 안될건지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사화는 어떤가? 이런 '백수'를 보호해 주고, 그들도 살 수 있게끔 하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없다. 그들은 나중에 돌봐 줄 사람이 없게되면 기껏해야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최저생계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서 인정만 된다면 억울하게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아도 좋고, 실업률 몇%란 수치를 다소 떨어뜨려 줄 수 있고, 그 때문에 국가의 위신도 올라갈 뿐만 아니라  대외신임도도 올라갈텐데 국가에선 이런 '백수'에겐 관심도 없다.        

  

왜 우리나라는 '백수'라고 하면 문둥병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아까 말했던 부모 잘 만난 골빈 베짱이, 양아치와 결혼할 망정 '백수'와의 결혼은 꿈도 안 꾼다. 이건 그가 아무리 잘 생겨도 거부한다. 왜 그 잘난 인물 가지고 인물값도 못하냐고 다그친다. 그러므로 인물이 좋다는 건 백수가 되는데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다.

 

백수는 말한다. 왜 사람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봐 주질 않는거냐고. 내가 꼭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경제적 가치가 환산이 되야만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면 그 가치가 참된 가치일 것인가?   

 

책에서 주인공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외할머니에게 묻는다. 왜 할머니는 소설을 쓰지 않냐고, 그러자 외할머니는 말한다. 소설보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인생을 사는 것이 더 재밌거든. 사는 재미에 빠져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자꾸 미뤄졌지.(316p)라고.이것이 백수의 삶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직 자기 자신으로만 충만한 상태를 즐기는 것. 솔직히 난 인생을 사는 것이 뭐가 재미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란 아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란 말이지 백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도 책을 좋아하고, 저자도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인공과 저자가 좀 다르긴 하다. 언젠가 저자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니, 그녀는 사회생활 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대학원을 갔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백수가 될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렇게 '오늘의 작가상'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작가라는 직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이 아닌가.

 

물론 그녀는 소설 어디엔가, 작가는 직업이라기 보단 정체성에 불과하다고 피력해 놓았다. 나도 거기엔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래도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온전히 글만 써서 밥벌어 먹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게 보면 작가는 직업은 직업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친철하게 <상업문화예찬>이란 책의 예를 들어가면서 역사상 유명한 예술가들이 순수하게 예술활동만 가지고는 자신의 삶을 재대로 영위할 수 없음을 역설해 놓음으로 자신은 여전히 백수임을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274p)

 

'상업문화예찬'이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상당히 많은 책들을 인용해 놓았는데, 그중 단연 이 '상업문화예찬' 은 나의 가장 많은 흥미를 끌었다(난 이책을 언젠가는 손에 넣고 말 것이다). 왜냐구? 나 역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온전한 백수이길 바라지만, 자꾸 일에 대한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나의 이런 유혹에 대해 이 책이 일말의 답을 주지 않을까 한다.

 

솔직히 작년에 잠깐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해 본적이 있는데, 하면서 나는 그 일 때문에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책을 읽는 것과 일. 이 둘 다를 잘할 수 없다면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고 하나만 잘하는 것이 나에겐 차라리 더 유리할 것 같아, 난 그 일을 버리고 내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시 엄밀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백수는 아니었다. 나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뭔가의 일을 꿈꾸고 있지 주인공처럼 책만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좋던 싫던 지금으로선 백수가 아닌 실업자로 분류되야 마땅할 것이다. 일을 기다리는 실업자. 언젠가 나의 날개를 피면 이 딱지도 떨어질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런지 모르지만.

 

내 후배 한 애는 내가 돈을 벌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다 못해 닦달까지 한다. 난 녀석이 좀 무례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 그애의 닦달에 제동을 걸어 본적은 없다. 그럴 때마다 난 오히려 서글퍼진다. 왜 사람을 돈벌이를 하느냐, 안 하느냐로만 구분지을려고만 하느냐고 녀석에게 따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는 녀석의 그런 시각이 마음에 들지않고, 미안한 얘기지만 조금은 천박해 보인다. 그러면 녀석은 그러겠지. 언니는 현실감각이 없고 아직도 구름위를 걷고 있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천박한 것인데. 어디 한번 자기 같이 싱글맘으로 살아보라고, 대뜸 치고 들어 올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내가 참는 수 밖에. 이것이 백수가 된 죄라고 밖에 달리 뭐라고 설명하랴?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백수가 대우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어쩌랴.

 

그래도 이 책이 백수의 위상을 올려놓은 것 같아 나름대론 애정이 갔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을 앞으로 읽을 사람들에게 오해 안 했으면 한다. 물론 그럴리 없겠지만, 백수는 책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이 책이 안 그래도 독서인구 감소 방지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좋은 일이긴 하나, 백수가 책만 읽어야 진정한 백수라고 어디 나와 있겠는가? (솔직히 난 초반에 읽으면서 제목에 불만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때문에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백수가 아니겠는가? 단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책읽기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영악하게 사람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는 것뿐이지. 어쨌거나 이 책은 나에게 즐거운 독서체험을 하게해 준 것마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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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20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적극 동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추천!

Mephistopheles 2006-07-2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리뷰 좀 자주 올리면 안되겠니~~!! (요)

stella.K 2006-07-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오랫만에 리뷰에 댓글을 받아 보네요. 그동안 쓰면서 얼마나 외로웠는데요. 서재 폐쇄하려고 했어요. 엉엉~

소쿠리 2006-07-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원에 다니다가 휴학을 하게 된 20대 후반 남성입니다. 학원강사 자리를 구하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놀고 먹는 백수 신분이 되었지요... 백수를 단지 일 안하는 사람으로 쉽게 구분하는 사회의 편견을 잘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보고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는 살 수 없지 않느냐는 근엄한(?) 충고를 하기도 하지만, 저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 살고 싶지 않아서 쉽고 편안한 길을 포기하고 인문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미래가 많이 불안하기도 하고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님의 리뷰가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stella.K 2006-07-2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위로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6-08-01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8-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self-esteem! 얼마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고마워요. 읽어주셔서.^^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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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 이 책을 그냥 지나칠려고 했었다. 저자가 낮선 이름인데다가, 듣도 보도 못한 <작은책>이라고 하는 잡지에 실린 저자의 글을 모은거라고 하니 그렇고 그런 글모음은 아닐까 해서였다.

막말로 얘기해서 세상에 떠도는 게 글이요, 개나 소나 책을 낸다고 한다. 그러니 잘 고르지 않으면 낭패 보기 쉽다. 더구나 잘 만들어지지 않은 다음에야 누가 거들 떠나 보겠는가? 책 다자인이 좋다고 해서 그책의 내용이 다 좋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역시 겉포장에 약한 법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보기엔 허술해 뵈도 제값 그 이상을 해 내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 만나면 횡재하다 못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이렇게 괜찮은 책이 재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지나칠려다 마음을 고쳐먹길 잘한 것 같다. 평소에 우리나라 버스에 불만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이 다소 촌티나는 책을 그냥 지나친다면 뭔가 후회할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 버스에 대한 나의 불만은 좀 오래되었다. 과속에, 기사의 거치른 언행, 손님들이 미쳐 다 타기도 전 출발하려고 하는 것, 특히나 노약자나 어린아이를 동반하고 타는 경우 그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또는 자신들이 서야하는 위치에서 안전하게 손잡이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출발해 줬으면 하는데, 그런 배려가 없을 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왜 내가 내돈 내고 버스 타는데 이런 최소한의 서비스도 못 받는 것인가? 

무엇보다 버스비 올릴려면 시민들을 볼모로 파업하는 것. 그리고 극적타결이 이루어지면 좀 더 나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노라는 말은 잊지 않지만, 지난 2년 동안(우리나라 버스비는 평균 2년마다 한번씩 올렸던 것 같다) 무엇이 더 나아진 것인지,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시내버스를 욕을 하면 회사를 상대로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버스 기사한테 한다.그러면 버스기사는 대신 욕을 먹어주는 것이지.  그 기사아저씨라고 배차시간 늦고 싶어서 늦고, 사고는 내고 싶어서 내겠는가? 밥 먹을 시간 없고, 화장실 갈 시간도 줄이는데 늦는다. 그럼 뒤에서 궁시렁대는 승객도 있지만 대놓고 욕지거라 팍팍하면서 니네 회사에 고발할거라고 엄포까지 놓는다. 버스기사가 뭔 죄란 말인가?  

버스기사 그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버스기사가 무슨 동네 북도 아니고, 회사 가면 업주한테 당하고, 길 밖으로 나가면 시민들에게 채인다. 느는이 거칠어지는 입이요, 하는니 더러워 못해 먹겠다는 한탄뿐이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는 바로 이런 자잘하고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버스기사의 애환과 삶을 쫄깃쫄깃한 글발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난 또, 버스기사 쳐놓고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처음 본다. 버스기사면 블루칼라에 속하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공부도 못하고, 책 읽기는 귀찮아하고, 오직 기름 때만 쭐쭐이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우린 그들을 잘못뵈도 한참 잘못 보는 것일 것이다. 

그들 속엔 비록 가방 끈은 짧아도 뜨거운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솔직히 이 한 권의 책에 린치를 당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버스에 대한 불만을 기사아저씨한테 싸잡아서 욕을 하는 건 확실히 잘못한 일이었다. 욕을 한다면 그들(버스기사)을 가지고 놀려고 한 악덕업주들이고, 무능한 정부다!

솔직히 매일 버스승객들의 소중한 목숨을 실어나르는 버스라고 한다면 안전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매일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그나마 적어도 운전기사라도 복리후생은 고사하고,컨디션을 보장해줘야 하는데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서 업주들은 이윤만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명줄을 쥐락 펴락한다. 세기는 21세기인데, 업주들의 경영방식은 20세기를 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기업을 생존방식은 윤리경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버스회사들이 알까 싶다.

직업이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상적인 말처럼 들린다. 어떤 직업이든 제대로된 대우를 못 받으면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처럼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자신의 일의 부당함을 외부에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 일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일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이 때로 힘들고 외로운 길이 되겠지만 말이다.

읽으면서 저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말미에 자신에 대해 피력한 글을 읽으면서 역시 그는 반항아적 기질이 다분해 보였다. 하지만 반항아적 기질만으론 인정 받을 수 없고 세상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기질로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어디를 가나 거짓과 탐욕은 존재한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건 '저항정신'일 것이다. 저자가 읽어 온 독서편력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남다른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업주에게 찍혀서 "이 회사의 주인이 누구야?"라고 시비를 걸어 올 때, 그는 당당하게 "우리 노둥잡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그가 멋지다!   

글이 사람의 영혼을 밝혀준다. 아무리 개나 소나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그 가운데 정말 빛과 소금 같은 글들이 있다. 나는 오늘 이 책을 그러한 범주에 넣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제 버스운전하던 손을 놓고 <작은책> 편집장으로 눌러 앉았다고 한다. 사람의 손이 참 멋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저자에게서 본다. 그 손 가지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정을 지켜내고,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며, 영혼을 밝히려 하고 있다. 부디 편집장으로서의 역량과 <작은 책>의 무한한 발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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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쓴 안건모입니다. 리뷰를 쓴 분들에게 뒤늦게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 책을 좋게 평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버스 기사들의 실태가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죠.
월간 <작은책>이라는 진보 월간지를 발행하는 것까지 알고 계시는 걸 보면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작은책 독자님은 아닌지요. 작은책은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시사 문제까지 우리말로 쉽게 풀어 쓴 책입니다. 저희 작은책 사이트에도 들어 오셔서 어떤 책인지 구경하시고 작은책도 널리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달에 한번 글쓰기 모임도 하고 강연도 있고 <역사와산> 이라는 모임에서 다달이 산도 갑니다. 혹시 가까우면 참석하셔서 같이 활동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www.sbook.co.kr
02-323-5391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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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 저자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다. 미국에는 영화철학 관련 세미나가 있는가 보다. 저자는 이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영화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영화철학이라...! 뭐 없으라는 법 없겠지. 법에도 철학이 있고, 과학에도 철학이 있으며, 미술 작품에도 철학이 있는데 영화라고 철학이 없을라고.

언젠가 후배와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야, 대학에 철학 강의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 패쇄하는 대학이 점점 늘어 난다더라. 이래가지고서야 철학이란 학문이 재대로 버텨내기야 하겠니?" 그러자 그 후배는, "철학이 철학 자체로 살아남을 수 없다면 다른 분야와 합쳐져서 계속 발전해 갈거야." 그러면서 철학의 위기론에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그 후배의 말을 들으면서, 그렇겠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웬지 서글퍼 지기도 한다. 철학이란 그 어려움 때문에 나는 선듯 좋아할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인문학의 꽃이요 한때는 강의실이 꽉찰 정도로 그 명성을 구가 했는데, 지금은 여러 실용학문에 밀려 그 명맥만을 유지한다고 하니 안타까울 노릇이다.

그래도 80년대 초 들어서면서 소위 철학에세이류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면서 철학이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에 대한 수해를 입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철학에세이류는 다소는 애매모호 했다. 철학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에세이라고 하긴엔 또 좀 어색하다. 그냥 철학 개론서를 쉽게 풀어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철학 개론서류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밖에.

그후 내가 이런 류의 책을 즐겨읽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철학을 쉽게  풀이한 책들은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서 선택의 폭도 다양해지고 개중엔 꽤 괜찮은 책도 나온 것 같다. 

이 책 역시도 영화라고 하는 매개를 통해 철학은 이런 거라고 소개하고 있다. 얼핏보면 철학책이 하도 인기가 없으니까 요즘 영화 안 보는 사람 거의 없겠다, 접목시켜 또 하나의 칵테일을 시도한 듯도 싶다. 하지만 저자의 세련된 문체와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저자는 어떻게 영화를 통해 철학을 깊이있게 설명해 놓을 수 있었을까?

읽다보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니체의 이론을 녹여내고, 헤겔의 변증법을 이렇게 끼워 맞추고, 최신 철학 개념을 이렇게 섞어 넣고...기타 등등. 뭐 이러면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영화 제작자나 감독은 철학 지식이 해박해 그렇게 종횡으로 끼워 맞출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런 스토리를 이렇게 비주얼 하게 보여주면 될 것인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떠한 스펙트럼을 들이대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져 보인다. 저자 이왕주  씨는 철학자답게 아주 노련하고도 세련된 문체로 자신이 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철학을 잘도 설명해 내고 있었다. 덕분에 자꾸만 좁아지려고 하는 나의 시야와 사고가 조금은 넓어진 듯도 하다.

뭐 다 아는 얘기겠지만, 철학은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사고체계를 구체화시켜 준다. 예전 고대철학은 이것이 진리가 아니겠는가라고 제시해 준다면, 현대로 진입할수록 진리를 말하기 보다는 현상을 직시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의미가 더 강해 보인다.

특히 저자는 <슈렉>이라고 하는 에니매이션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너무나 잘 설명해 내고 있는데, 나 역시 이 에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깔깔거리며 잘 만들었다고 생각만 했지 이런 철학이론이 내재되어 있는 줄은 잘 몰랐다.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사회에 작동되고 있는 합리적인 원리, 규칙, 질서, 코드 등에 간하게 반발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의 욕망과도 일치한다.

왜 세상은 뭐든 정해진 대로만 돌아가는 것인가? 잘 생긴 사람이 출세할 확률도 많고, 잘 생긴 사람과 사랑에 성공할 확률도 많고, 부자는 부자끼리만 결혼을 해 부의 세습만을 노린다. 왕자와 공주는 만나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얼마나 재미없는 세상인가? 이런 가치 체계를 패러디를 통해 유쾌한 반란을 꾸면던 작품이 <슈렉>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통쾌해 했었던가?

저자가 말하는 <와호장룡>이란 영화는 어떠한가?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장자의 '무위'를 인용해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잘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개인은 고려하지 않은채 학벌과 재산 늘리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요즘의 세태를 고집는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선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흔들렸던 나를 다시한번 추스르게 되는 계기가 되서 저자에게 감사하고 싶을 지경이다.

이렇게 보면 철학은 지혜의 학문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가끔은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생각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를 때 이런 책 한번쯤 읽어 주면 생각이 정리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아무리 인문학의 쇄퇴를 걱정한다고 해도 우리가 인문학의 세례를 받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영화라고 하는 친숙한 매체를 가지고 이렇게 친절하게 철학을 풀이해 주니 읽으면서 흐뭇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철학에세이류에만 매달릴 것인가 회의도 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철학이 내게로 가까이 왔다면 언젠가는 내가 철학에 가까이 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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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0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작년에 구입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수요일에 문예진흥원 주최 강연회에서 이왕주 교수님에게 강연듣고 사인도 받았죠. 열정적인 분이시데요.

stella.K 2006-08-0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지런하심다. 담뽀뽀님.^^
 
이것이 진짜 축구다 - 끝나지 않은 축구전쟁의 역사
SHO'w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공은 둥글다'고 말한 사람은 옛 서독의 축구 감독 제프 헤르베르거였다고 한다. 그후 이 지극히 당연한 말이 축구에 관해 언급하는 가장 흔한 표현이 되었고, 한국의 축구 아나운서와 해설가들 입에 가장 흔하게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 둥근 축구공 하나가 무엇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태우고, 이 둥근공 하나를 골문에 밀어넣고, 못 밀어넣고에 따라 그처럼 희비가 엇갈리고, 천국과 지옥을 몇번씩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지난 우리나라 대표팀과 스위스 전은 너무나 아쉬운 경기였다. 이것 때문에 경기종료 휘슬이 불리자 이천수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울었고, 우리도 울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이제 더 이상 12번째 선수라고 하는 붉은 악마의 함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고, 16강에만이라도 진출해서 여전히 우리를 흥분시켜 줘야할 대표팀을 더 이상 독일의 그리운드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안타까움을 위로하듯 읽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펼쳐든 순간 축구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술술 쏟아진다. 읽는 내내, "어머나, 이런 일이 있었다니..."하며 자꾸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축구만큼 사람의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될듯 될듯하면서도 안 되는 천금 같은 골을 기어이 골대 안으로 집어 넣었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이 좋아 누구는 축구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그 마음 졸이는 안타까움이 싫어 지난 2002년 우리나라에서 치뤄진 월드컵도 처음부터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축구는 각 나라의 역사와 함께 했고, 그 나라의 이미지를 살리기도 했고, 죽이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축구가 그 나라에서 어떻게 토착화 했으며,  어떻게 그 나라의 역사와 함께하고, 발전해 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라운드에서 두 팀이 그냥 무조건 공을 따라가고, 넘겨 주고, 골대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라마다 축구공을 모는 스타일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기술이 다르다니 말이다. 또한 축구가 한 나라를 위로 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의 대표팀 같은 경우 2002 한일 월드컵에 국비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 자비로 원정에 나섬으로 헝그리 정신을 보여 주기도 했고, 그러면서 그들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건 비단 아르헨티나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16강에 진출한 가나는 돌아가 학교와 병원을 짓겠다고 했고, 우리와 한차례 경기를 가졌던 토고의 선수도 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2002년도에 그처럼 우리를 흥분케 했던 것은, 경기침체로 웃을 일 없었던 우리에게 태극전사들의 승전보는 희망을 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니 조그만 공 하나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느니만큼 월드컵의 명암도 뚜렷해, 지는 경기를 하는 경우 훌리건들의 난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선수들이 욕을 먹는 것은 차라리 약과다. 잘못해서 선수들이 암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으니 축구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희망만을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은 이미 말한바있지만, 축구가 그 나라의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발전해 가는가를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새롭게 안 사실은, 훌리건이 잉글랜드에서부터 나왔는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흥미로 왔고, 초기 축구는 공이 아니라 덴마크 왕자의 잘려나간 머리통으로 차기 시작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각 나라 월드컵 대표팀의 선수와 감독의 면면을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 특히 히딩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네덜란드의 토털풋볼을 구사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축구 감독들의 리더십이나 전술이란 어떠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이쉽게도 이 책에서는 그다지 많이 할애 하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고나니, 예전엔 우리나라팀과의 경기만 주로 보았던 나의 시야의 좁음이 다소는 넓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어떻게 싸우는가 지켜 볼 마음이 생겼다.

일각에서는 월드컵의 상업성, FIFA의 관료주의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것은 명실공히 세계인의 축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바라기는 세계가 너무 월드컵에만 치중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책도 보면 월드컵을 겨냥해 나왔고, 내용도 거진 98% 이상이 각 나라 대표팀들이 월드컵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 횟수를 거듭할수록 월드컵이 도도해지는 수 밖에. 좋은 경기란 게 꼭 월드컵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제목을 월드컵에 맞추던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축구를 하나의 스포츠로 즐길 줄 알아야 그 스포츠가 건강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하나에 치중해서 거기에 온 사활을 다 걸고 안되면 허탈해 하는 것은 건강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길 때 확끈하게 즐기고, 졌을 때 태극전사들에게 애정어린 박수를 보내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는 것이 정말 좋아 보였다.

우리는 분명 승리에 목마르다. 우리팀은 아쉽게도 이번 월드컵에서 별로 빛을 바라지 못했지만 2010년 월드컵에서는 다시 한번 저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 앞으로 4년을 어떻게 기다린담? 그 4년 동안 다른 경기에도 관심을 가져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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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짜 축구다 - 끝나지 않은 축구전쟁의 역사
SHO'w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절판


"감독의 역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인간관리다. 두 번째는 용병을 포함한 선수의 관리다. 나는 그동안 히딩크처럼 선수 각각을 파악할 수 있는 타입의 인물과 만났던 적이 없다. 그는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까지 팀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마크 비두카(호주 대표팀 공격수)-92~쪽

"포기하면 그 순간이 곧 경기 종료다."
90년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던 농구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대사다. 마지막 경기에서 감독 안 선생님이 이 말을 하는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말은 농구장이 아니라 축구장에서 나왔다. 94년 오렌지 군단의 멤버인 마크 오베르마스가 처음 한 말이다. -95쪽

입만 살아있다.

한국전에 대한 이탈리아의 억지 중에 가장 유머러스한 것은 트라파토니 감독의 말이다.
"과체중의 남미 주심이 (둔한 몸매 때문에) 빠른 경기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 적을 편들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또띠도 시적인 문구를 사용하며 거들었다.
"만약 이것이 승리라고 한다면, 나는 일생동안 패배자이고 싶다. 만약 이것이 축구라고 한다면, 나는 이 스포츠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한국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들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토 바지오만큼은 이탈리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패배의 책임을 한국과 심판이 아닌 아주리 군단에게 돌렸다.
"지금 싸울 수 없는 사람에게 다음이나 내년을 말할 자격은 없다." -149쪽

원조 리베로와 영원한 리베로

리베로는 이탈리아어로 '자유'라는 뜻으로,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 전술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리베로는 중앙 수비수이면서도 센터백들과 달리 대인마크의 임무보다는 자유롭게 수비와 공격에 가담하면서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포지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격하는 수비수'로 잘못 알려진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최종수비수 홍명보가 보여준 공격적인 모습 때문이다. 리베로 역할을 재대로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적인 선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보면 리베로가 얼마나 만만치 않은 임무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리베로 포지션을 최초로 획립시킨 인물이 바로 프란츠 베켄바우어다. -173쪽

Football or Soccer

풋볼과 사커의 명칭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 전 세계가 풋볼이라고 부르는 것을 왜 미국(그리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과 일본 등)에서만 사커라고 부르는 것일까? 1986년 FA에 의해 잉클랜드에서 축구 규칙이 제정될 당시 현대축구를 '다른 풋볼(즉 럭비나 격투기 축구와 같은)'과 구별하기 위해 '합동 축구(Association Football)로 명시한 바 있다.
Soccer는 이 합동(Assoc~)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어 1980년대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Soccer는 근대 영국식 영어로 축구와 럭비가 거의 구별되지 않았던 시절에 둘을 구별하기 위해 럭비를 '러거'라고 줄여서 부르고 이 러거에 대비되는 축구의 별칭을 사커라고 한 것이다. 물론 럭비가 축구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간 지금 굳이 쓸 필요는 없는 말이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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