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의 문장들 - 업의 최고들이 전하는 현장의 인사이트
김지수 지음 / 해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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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큼 자신의 존재를 공고히 하는 게 또 있을까.

예전, 적어도 새마을 운동에서 민주화 운동 세대까지는 일에 목숨 걸었던 세대다. 그래서 그 인력들이 독일도 가고, 중동도 갔다. 열사의 기후를 이겨내고 일하는 민족은 우리나라 사람들 밖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뭐든지 빨리빨리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에 대한 태도다. 하지만 우린 어느새 그 세대의 일하는 방식을 경멸하거나 비아냥 거리게 되었다. 누가 들으면 섭섭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제 일은 삶에 전부가 되거나 제일의 수단이 아니라는 말도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즉 하나의 사고와 철학 체계로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솔직히 철학이란 게 배고파서는 절대로 잘 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지 않는가.


사람은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딴짓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래가지고 딴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단계에선 철학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나온 18인의 인터뷰이들은 근면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사람은 아닐까 한다. 즉 자신이 이룬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부단히 연마하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건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길거리에서 호떡을 팔아도 자신만의 노하우와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달라 보인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것에 있지 않았을까.


개미가 열심히 일만 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개미 집단을 보면 70%만 일을 하고 나머지 30은 빈둥거린다고 한다. 또 그것에 대해 70의 일개미들은 별 불만이 없다고 한다. 그건 하나의 질서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 빈둥거리는 개미들이 대신 해결해 준다나 뭐라나. 즉 게으른 개미는 그 상황에 맞게 존재하는 것이다. 게으름을 악덕이라고 보는 건 인간밖에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누구는 절대로 100%의 힘을 발휘해서 일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매 순간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 아프거나 번아웃이 됐을 때 구재 받을 수 없다고. 나를 구할 사람은 나 밖엔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일에 대한 사고가 이렇게까지 진화했나 놀랍기도 하다.


난 이 말에 동의한다. 난 원래 그렇게 애써 공부하고, 힘써 일하는 타입이 못된다. 물론 한때는 열심히 일한 적도 있다. 그런데 웬걸 열심히 일했더니 일종의 신경쇠약 같은 것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후로 나는 절대로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난 무조건 피곤하거나 힘들면 쉰다.


'짧고 굵게'란 인생 모토도 건강하고 멋모를 때나 가져 봄직한 거지 나이 들면 이 모토도 바뀐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니 '가늘고 길게'가 된다. 까짓 거 죽기 밖에 더하겠어란 말도 그다지 만만한 말은 아니다. 죽으면 누구 손해인데. 그래서 누구는 근근이 살라 고도 한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인프라가 좋은 시대다. 맨땅에 헤딩이란 말도 옛말이 된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맨땅에 헤딩하지 않는다. 물론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있는 것을 가지고 변형시키고 발전시키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이다.


늘 우리나라 교육은 주입식이 문제인데 가장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할 고등학교에선 일의 기능이나 방법은 가르쳐 줄지는 몰라 일의 철학 같은 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건 역시 그 분야의 멘토를 만나야 (조금이나마)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할 수 있으면 멘토를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일에서든, 삶에서든 멘토를 만나 자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첫 번째로 실린 김미경 대표의 말은 울림이 있다. 그녀는 울고 있는 나를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내가 나를 돕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부라고 했다. 맞는 말 아닌가. 그래서 이런 책도 읽는 것이고.


또한 내 상처에 내가 답하는 것이 철학이라고도 했다. 상처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AI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상처도 받는다. 그래야 성숙할 수 있다. AI는 모든 것을 프로그래밍화하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다. 일을 지시하고 해결해야 하는 고용인의 입장에선 사람보단 AI가 훨씬 좋고 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계는 성능이 좋아질 수는 있어도 결코 성숙하지는 않는다. 성능이 좋아지는 것을 가지고 성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사람을 믿어 줬으면, 기다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일하는 기계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 인간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그걸 자꾸 일 못한다고 구박하거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기계로 대치한다면 인간은 어디서 자아를 실현하며 성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AI가 발달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사람의 숨결이 미처야 가능한 분야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 책은 멋진 책이다. 인터뷰 전문 기자가 발로 뛰어가면서 쓴 글이다. 가끔 어떤 글은 자신의 말을 조금 줄이고 인터뷰이의 말을 더 많이 쓰면 좋지 않을까 싶은 곳도 간혹 보이긴 했다. 하지만 뭐 크게 흠이 될 건 아니고 일에 관해 즐겁게 보고 사색할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사람 백현진이나 장기하 등의 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그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고만 하지 않는다. 난 그렇게 말하는 게 정말 좋았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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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5-26 07: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람들은 일에 미쳐 있지 않죠. 저같은 사람도 피부로 와 닿아요. 이제 주 사일 근무 시대라니깐… 씨제이는 금요일 두시면 퇴근하는 기업도 있다 하던데요. 동생이 말해주더라구요. 이제 개인의 시간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어요!!!

stella.K 2022-05-26 19:49   좋아요 1 | URL
왓, 주 4일 근무 추진한다더리 벌써 그렇게 시행하는 곳이 있군요.
금요일도 두 시 퇴근이면 완전 일할 맛 나겠어요.
예전엔 학교나 기업체도 토요일만 기다리며 다녔는데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하지만 또 그에 못지않게 아직도 열심히 일해야 돌아가는 기업체도 많겠죠?
기업 환경이 일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데...

페크pek0501 2022-05-30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 무조건 피곤하거나 힘들면 쉰다.˝ - 현명하십니다. 저도 그렇게 해요. 이젠 체력이 바닥 나면 몸살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바닥 나기 전에 스톱 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챙기기, 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멘토가 없었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었어요. 멘토가 있었다면 많이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독서 지도 같은 거요. 선배로서 후배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고 추천해 주는 그런 멘토가 있었다면 나의 삶이 지금과 많이 다를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땐 놀기 바빴죠. 그때 독서 동아리 같은 것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생각해도 젊은 시절을 알차게 보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

stella.K 2022-05-31 10:41   좋아요 2 | URL
젊었을 때 한때 열심히 살아왔으며 됐잖아요.ㅎㅎ
그래도 제 나이 또래 사람들 여전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들 생각하면 존경스럽기도하고, 안쓰럽거든 하고.
그들을.생각하면서 너무 게을러지진 말자 생각해요.ㅋ

우리 땐 아예 멘토란 개념이 없었잖아요.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그죠?^^

희선 2022-06-14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려야줘야 한다는 말씀 맞네요 누구나 처음엔 실수하기도 하는데, 잘 하는 사람은 그때를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실수하면 안 되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잘 하는 사람이 도와주면 되겠지요 기계는 실수하지 않고 일을 잘 하겠지만, 사람 같은 마음은 없어서 안 좋을 듯도 합니다 사람을 믿으면 좋을 텐데...


희선

stella.K 2022-06-14 10:13   좋아요 1 | URL
저는. 키오스크도 사실 마땅찮아 않더군요.
물론 기계치이기도 하지만 직원과 고객이 서로
돈 주고 받으면서 인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서로 대면을 잘 안하려고 하니 이러다
자발적인 대인기피증이 걸릴 것 같아요.😂

2022-06-21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1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1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2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2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22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식물의 방식 - 서로 기여하고 번영하는 삶에 관하여
베론다 L. 몽고메리 지음, 정서진 옮김 / 이상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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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식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일 때 부모님은 한때 화초를 거의 공격적으로 사들인 적이 있다. 부모님이 40대 중후반쯤 되셨을까. 그 화초들을 봄이면 마당에 내놓고 찬바람이 불면 안으로 들여놓아야 하는 게 번거롭지는 않을까 싶은데도 두 분은 그 일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셨다. 그걸 보면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식물을 좋아하게 되는 걸까 싶기도 했다. 그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식물을 좋아하는데 따로 정해진 나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나도 나이가 들수록 나무와 꽃이 좋아진다.

올봄 울진에 큰 산불이 났다. 이글거리는 불에 타들어 가는 나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것들이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얼마나 뜨거울까, 발 달린 짐승이면 피하기라도 해 볼 텐데 그 뜨거움을 온몸으로 맡고 있으니 보는 나도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새까맣게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도 새싹이 돋고 나무가 자란다는 것이다. 숲의 복원력이 놀랍다. 그만큼 식물의 생명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하긴 동네 공원에 볼 품 없이 서 있는 나무도 나보다 나이가 많을지 모른다. 600년 이상을 사는 소나무도 있다니 않았는가. 어디 그뿐인가. 시멘트 바른 담벼락에서도 풀꽃이 자란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자라고 싹을 틔우는가 궁금하고 관심이 갈 만도 하다.

이 책은 이런 막연한 식물의 생장 방식에 대해 보다 정밀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식물은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조율하고 조절한다. 또한 경쟁하고 협력하며 친족 범위를 넓힌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환경을 변화시키고, 다양성의 호혜적 이익을 인식하고, 서로를 돌보기도 한다. 그냥 어느 곳엔가 심어져 땅으로는 뿌리를 단단히 하고 위로는 가지를 뻗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식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뭔가를 끊임없이 작동시키고 있었다. 참으로 은밀하고 긴밀하지 않은가.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이 사는 방식은 경이롭고 놀랍다. 어쩌면 그래서 우린 앎의 경지가 넓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참, 그래서 그렇게 시작된 나의 부모님의 화초 가꾸기가 나름 오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사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한동안 엄마 홀로 화초를 돌보다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키우지 않게 되었다. 글쎄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아 계셨다면 화초 키우기가 좀 더 오래갔을까. 두 분이 함께 화초를 애지중지 돌보는 모습도 좋았는데 지금 엄마는 연로해서 돌볼 여력이 없다. 성격상 긴밀하고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은 동물보단 식물을 더 좋아하고 반응하는 존재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이 작고 가볍지만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알차다. 식물에 관심 있는 사람은 한 번쯤 읽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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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5-19 2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식물도 경쟁이 심할 거예요 서로 돕는 것도 있겠지만... 소리가 나지 않아도 식물은 나름대로 힘을 다해 사는군요 나무는 사람보다 오래 살고... 식물, 나무는 산불이 나도 피하지도 못하네요 세상에 사람만 있으면 안 좋겠지요 식물이 사람보다 더 빨리 세상에 나탔겠습니다 함께 살아야 할 텐데,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네요


희선

stella.K 2022-05-20 15:15   좋아요 2 | URL
그렇겠죠? 지구에서 일생을 산다는 건 다 쉽지 않은 일 같아요.
경쟁도 해야하지만 서로 협력해야 공존한다는 걸 식물도 알고 있다는 게
참 신비로운 것 같아요.

mini74 2022-05-20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바라기를 심었는데 아직 아기해바라기라서 햇빛 따라 움직이더라고요. 아침 위치랑 저녁 위치가 다른 ㅎㅎ 넘 신기했어요. 전 식물연쇄살인마라 ㅠㅠ 파나 심어놓고 먹을까 했는데 언니가 해바라기씨 하나를 주더라고요. 또 보고있으니 좋긴 합니다 *^^*

stella.K 2022-05-21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식물연쇄살인마! 저도 그런데ᆢㅋㅋ 지금 한창 예쁘겠어요. 아기 해바라기. 예쁘게 잘 키우세요.🤗

페크pek0501 2022-05-24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식물도 서로 경쟁하며 자란다는 걸 어느 책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어요. 많은 나무가 함께 있을 경우에 힘이 있는 나무가 더 좋은 자리를 확보하여 줄기를 뻗으며 자라겠지요.
제가 화초에 물을 줄 때 처져 있던 잎이 갑자기 확 올라올 때가 있어요. 이때 놀라운 생명력을 느끼죠.

stella.K 2022-05-24 16:43   좋아요 1 | URL
언니도 화초를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언니와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종들은 다 경쟁을하면서
사 나봐요. 또 그러면서도 경쟁만하며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도 되고.^^

프레이야 2022-05-28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식물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니 어찌보면 훨씬 강한 것 같아요 동물보다. 제가 식물 가꾸기에 능력이 부족한데 그게 정성과도 연관있겠죠. 이 책 마음 가네요 찜!

2022-05-28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8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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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보았을까? 사춘기 시절 있었던가. 연기를 잘했던 배우 추송웅이 원숭이 분장을 하고 찍었던 연극 포스터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오랫동안 이 연극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이 독특한 배우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에 따라 이 작품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다 이렇게 그래픽 노블을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새롭게 안 사실은 아직도 <빨간 피터의 고백>이 계속 공연되고 있었다. 추송웅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공연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좋은 작품은 그 누구를 통해서라도 계속 이어진다.

난 원작을 카프카가 쓴 줄도 몰랐다. <성>이나 <변신> 같은 대표작이나 쓴 줄 알았지 이 작품을 카프카가 썼다니. 예전에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읽어 볼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안 봤을 것 같긴 하다. 솔직히 프란츠 카프카는 내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작가라서 말이지. 누구는 <변신>을 재밌게 읽었다고도 하던데 카프카는 내게 늘 독서의 좌절을 안겨줬던 작가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래픽 노블이어서일까?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카프카가 이런 작품도 썼나, 읽으면서 새삼 놀라기도 했다.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작품으로 카프카를 다시 가까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도 한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봤던 어느 애니메이션이 생각난다. 로봇 사용이 일상화된 미래에서 인간은 이제 그것을 노예처럼 부리며 편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 중앙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로봇이 인간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무력으로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그 가운데 주인공의 모험과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런 이야기에 로봇 대신 원숭이를 대입시키면 꼭 이 작품이다. 그 애니메이션의 원작자 보다 카프카가 시대를 먼저 살았으니 모르긴 해도 그가 카프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인간은 참 특이한 존재다. 뭐든지 인간 좋을 때로 다듬고 길들이는데 선수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모든 분야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 책도 바로 그런 것을 일깨운다. 원숭이가 인간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원숭이의 동물성을 줄이고 인간성을 극대화 시켜 서커스에 이용한다. 그래서 인간이 된 원숭이 '빨간 피터'가 나중에 어떤 형상을 하게 되는지 지켜 보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에게만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다스리는 권세는 죄가 들어오고 나서 오염이 된다. 즉 하나님은 선함으로 다스리기를 바라셨지만 그것은 다분히 파괴적 된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어떤 건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이 진지하고도 흥미로운 작품을 보면서 문득 카프카는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좀 더 인간적이 되길 바라서 쓰지 않았을까.

개인적 취향이고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난 지금도 동물을 의인화한 동화나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작품은 주로 어린아이를 위해 만들어지고 상상력을 고취시키기도 하지만, 이면에 동물을 동물 자체로 보기 보다 인간이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어 편한 마음으로 보게 되진 않는다. 또한 동물을 희화화시키기도 하지 않는가. 물론 동물에겐 인격이 없으니 그런들 누가 뭐랄 사람은 없겠지만 거기에 인간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이 투영되기 마련이니 인간은 삼가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의 오랜 질문 중 하나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노크하고 도전을 주는 게 작가의 역할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카프카는 진정 대단한 작가고, 위대한 작가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으로 오래된 옛 작가를 만나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출판사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참고로, 이 책은 출판사에서 서평 도서로 받은 건데 독일어 원서가 함께 왔다. 평생 프랑스어로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받고 보니 뿌듯하고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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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5-15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가 썼다는 것은 저도 지금 알았어요. 카프카는 정말...천재야 천재.
저희 세대에게 빨간 피터의 고백 = 추송웅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극 포스터가 각인되어 있지요.
아직도 공연중이라니. 이제라도 보고 싶네요. 딸, 아들, 사위 모두 연극인들이니 혹시 그들이 관련되어 있으려나요?

stella.K 2022-05-15 20:35   좋아요 0 | URL
아, 사위도 연극인인가요? 정말 연극인 집안이군요.
따님인 추상미 씨는 얼마 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던가, 뭐 그랬던 것도 같던데...
독실한 크리스찬이더군요.
뭐 하나 했더니 CBS 기독교 방송 프로 진행을 맡고 있더군요.
이젠 아줌마가 다 됐어요. 나름 미인이었는데.ㅋ

프레이야 2022-05-15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독일어 원서가 따라왔군요. 좋으시겠어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멋짐요. 카프카 원작이었다는 건 저도 처음 알았네요. 나인 님처럼 저도 추송웅 배우가 생각나는데 말이죠.

stella.K 2022-05-15 20:35   좋아요 1 | URL
첨엔 좀 부담이 되더군요.
독일어 까막 눈인데 이걸 어디다 써 먹나 싶은 게.
가지고 있다 나중에 사 보고 싶은 책 있고 적립금 궁해지면
중고샵에 팔까 봐요.ㅋ
책이 참 좋더구요. 인상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앉은 자리에서 뚝딱
읽을 수 있어 좋더군요. 제가 책을 워낙 굼뜨게 읽는데 넘 빨리 읽어 오히려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ㅋㅋ

2022-05-15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2-05-19 17: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예전 어떤 영화가 떠오르네요. 오랑우탄이 나오는 영화인데 주인공 남자와 오랑우탄 사이에 우정이 가능한가, 하는 걸 지켜 보았었죠. 서로 의사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오해를 낳고 그래서 오랑우탄이 폭력적으로 변해 버려서 안타깝게 보았었죠. 저는 우정을 쌓는 게 가능하다는 결말을 기대했었거든요.
인간은 정말 신비로운 존재예요. 길들이면 길들여지고 권력을 잡으면 독재적이 되고 또 겸손해지다가도 아쉬울 게 없어지면 교만해지고요. 가장 궁금한 게 인간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이에요.
실제로 외계인이 나타나서 함께 사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 나타날 것 같아요.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마음의 변신이 가능한 게 인간이니까요.

스텔라 님의 서재에 몇 번 들어왔었는데 새 글이 없어서 오래 쉬나 보다 했다가
오늘 이 글을 보니 반가운 맘에 댓글 남깁니다. ^^

stella.K 2022-05-19 20:31   좋아요 1 | URL
아웅, 언니!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작년인가 무슨 우리나라 코미디 영화에 오랑우탄이 나오는 영화
하나 본 것 같네요. 근데 왜 제목이 생각이 안 날까요. 나름 재미있었는데.ㅠ
인간이 뭔가를 장악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하는 건 정말 오만한 거라고 생각해요.
함께 어울리고 공존하는 거지.

요즘 갱년기라 그런지 의욕부진에 몸도 찌뿌듯하니 안 좋으네요.
지난 주 초에 1박2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이후로 다리도 안 좋아졌어요.
오늘 서평 하나 새로 올렸는데 그것도 얼마만에 올린 건지 몰라요.
또 하나가 남았는데 서평은 읽었으면 바로바로 남기는 게 좋은데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리뷰하려니 좀 거시기 하네요.ㅠ
 
버선발 이야기 - 땀, 눈물, 희망을 빼앗긴 민중들의 한바탕
백기완 지음 / 오마이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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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을 읽으려면 적지 않은 순우리말에 감동과 당황스러움을 교차하게 될 것이다. 알지 않는가, 한국어의 거진 대부분 한자어를 변형시키거나 한글 발음이란걸. 거기에 외래어와 온갖 줄임말이 난무한다. 언어는 발달하고 진화해야 하지만 과연 이런 걸 두고 그렇게 말해도 좋은 건지 모르겠다. 누구는 오히려 언어 공해라고도 하던데 나 역시 그 말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해마다 알지도 못하는 단어나 문장이 나오면 이걸 최초로 쓴 사람은 누구일까, 이 말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또 그 가운데 순우리말은 사어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재탄생되는 걸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백기완 선생은 학력이 없다. 그런 분이 순우리말을 살려 민중 동화를 썼다. 국가가 정한 학력이 없다 뿐이지 학식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이 책을 읽고 놀라워한다면 그게 어쩌면 선생께 결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순우리말이 이렇게 많았었나? 내가 그걸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하는 깨달음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쓸 수도 있는 것을 우린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사장시켜 온 것은 아닌지 뜨끔하기도 하다. 순우리말을 쓴 이분의 의도가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뒤꼭지가 서늘하기도 한다. (물론 난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이분의 족적이나 이미지로 봐선 그냥 재미 삼아 썼을 리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언젠가 언어가 깊어지면 이렇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글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이 책의 발문을 쓴 김병기 기자는 단숨에 읽었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단숨에 읽을 수 있다는 건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우리가 백석의 시를 흠모하지만 그게 못지않게 낯선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쉽지 않다는 게 나의 느낌이다. 그리고 무슨 동화가 이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툴툴거리며 저만치 밀어두고 싶어진다. (사실 실제로 그랬다. ㅋ;;) 


그래도 이 책을 함부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저자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많지 않은가. 어쩌면 쉽게 읽히길 바라지 않았던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나마 감사한 건 이 책은 뒤에 저자기 쓴 순우리말을 따로 모아놨다. 이건 저자의 의도인지 아니면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다 싶다. 


이 이야기는 저자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이라고 한다. 제목에서 '버선발'은 감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기다리던 사람을 맞을 때 버선발로 맞이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더 정확한 의미는 '맨발'이라고 한다. 버선을 신을 발의 의미로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 


또한 '니나'는 우리나라 민요에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란 가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니나노의 니나 로 '민중'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민요는 옛날에 민중에 의해 불렀던 노래였을 것이다. 하지만 '민중'이란 단어는 지난 80년대 이후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대신 '대중'이란 말로 바꿔 써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민중은 사회주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단어는 원래 불렸던 대로 불러야 그 의미가 살아나는 단어들이 있다. 


한때 백기완 선생의 존함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접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저 엄혹했던 80년대다.  80년대를 실제로 살았으면서도 난 그 시대를 몸소 겪어내지 못했다. 물론 그 시절 최루탄 가스 한 번 안 마셔 본 사람 있으며, 시위 현장 한 번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그 시대를 겪어냈다고 감히 할 수 있을까.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겐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바로 그렇다. 지금은 그게 뭔가 모를 부채 의식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와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재현되어서도 안 된다. 그냥 이렇게 역사 공부하듯 지난 시절을 반추하고, 이런 분이 계셨더라고 기억해 주는 것이 다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백발의 포효하는 듯한 이미지. 그게 내가 백기완 선생을 기억하는 전부다. 특히 방금 어디에선가 바람을 흠뻑 맞고 돌아온 듯한 휘날리는 헤어스타일은 그의 트레이트 마크다.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 분이 이제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앞으로는 책으로 업적으로만 이 분을 기억할 뿐이다. 그중 기억할 것은 이렇게 순우리말로 소설을 쓰고 늘 민중을 생각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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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30 2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글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아오 ㅎㅎㅎ 주책이죠. 그 시절이 떠올라서 그런가봐요. 저희집이 대학 근처라 초등때 하굣길 최루탄에 매일 울면서 왔지만 ㅠ 그 오빠 언니들이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백기완선생님 참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이네요. ~

stella.K 2022-03-31 10:35   좋아요 2 | URL
제가 리뷰로 누굴 울리고 하는 사람이 못되는디 전 그저 읽어주셔서 고마울다름이구만요.😭
그렇죠? 백기완 선생님 이름 정말 오랜만에 들어요. 이분이 그 성치않는 몸으로 지난 국정농단 촛불집회 때 맨 앞자리를 지키기도 하셨다는군요. 지금은 편히 쉬고계시겠죠?

페크pek0501 2022-04-04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늘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셨던 분이죠. 그래서 한국적 이미지에 인상도 좋으시죠.

쉽게 읽혀지지 않는 글은 저는 피로하더라고요. 잘 쓴 글이라도 강한 집중력을 요하는 글은 점점 안 읽게 돼요. 쉽게 읽히는 글을 선호하게 됩니다. 순우리말을 사랑하지만 말이죠.
모두 한 분씩 떠나네요. 백기완 선생님도 이어령 선생님도... 우리도 언젠가는 떠날 날이 오겠지요...

stella.K 2022-04-04 18: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런데 지금 안 읽힌다고 나중에도 안 읽히는 건 또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좀 뒀다가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구요.
저는 점점 소설을 못 읽겠더라구요. 물론 결이 저한테 맞는 소설이 있으면
그건 잘 읽히는데 아무리 유명한 베스트셀러라도 다 좋은 건 아니더라구요.
최근 <바람의 그림자> 오래 전에 사 놓고 이제야 읽었는데
재밌다고 난린데 1권 겨우 읽고 2권은 안 읽게되더라구요.
그냥 김탁환 소설들 읽다 말았는데 그거나 다시 읽어야겠다 싶어요.ㅠ
 
The Earthian Tales 어션 테일즈 No.1 - alone
김보영 외 지음 / 아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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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우리나라에 문학잡지의 수가 꽤 되고 얼마 전부터는 특정 장르만을 전문으로 한 문학잡지도 나왔다. 그렇다면 다른 장르의 문학잡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이렇게 SF 문학의 창간호가 나와 주었다. 다양한 문학 전문 잡지가 나온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새삼 이게 있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사람은 얼마나 억울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디자인이나 만듦새도 뭔가 모를 포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책 책상이나 서가에 꽂혀 있으면 흐뭇해지며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언뜻 보기에 잡지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봐 앞으로 허투루 만들지 않겠다는 이 잡지만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벌써 오래전에 SF 전문잡지가 나온 것을 생각할 때 많이 늦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아직 마니아층이 그다지 두텁지가 않으니 그럴 것이다. 내가 기준이 될 순 없겠지만 SF에 대한 나의 이력은 어렸을 때 본 TV 시리즈 '스타워즈'와 '스타트랙'이란 양대산맥이 있었고, 만화로는 '은하철도 999'와 '캐산(?)'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본 영화로는  <인터스텔라>나 <마션>, <반도>(이 영화를 액션물로 구분했는데 내가 볼 땐 SF라고 생각한다) 정도가 얼핏 떠오를 뿐이다. 90년대부터 간간히 드라마도 만든 것으로 아는데 작품성은 몰라도 그다지 흥행을 논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전문작가를 양성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분야가 발전하려면 문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 근래 부쩍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SF 바람이 불고 있다. 이 잡지만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작가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하긴 문학 전반에서 활동 작가의 수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매체가 증가되었으니 그럴 것이다. 이 잡지도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 시, 만화, 평론, 인터뷰 등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SF를 말하고 표현하는 줄은 몰랐다.  


물론 난 전문가가 아니니 수준이나 성과를 논할 순 없지만 수준을 말하기 전에 일단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이런 잡지가 나와주면 작가가 작품 활동을 하기도 좋고 독자 역시도 다양한 작품을 읽을 수 있어 좋을 것이다. 


좀 놀라운 건 여성 작가들이다. 얼핏 여성 작가들은 SF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물론 전체적인 비중은 그리 크진 않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꽤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하긴 외국만 해도 르귄이나 머거릿 애트우드 여사는 이 분야에선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고 동시에 원로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늦게 시작한 만큼 아직 젊은 분야다. 그만큼 가능성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SF의 공식은 디스토피아인가 새삼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들의 분위기가 밝지마는 않다. 느낌도 쇳소리가 많이 나는 것 같고. 하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렸을 때 봤던 SF 만화에서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로봇이 오작동을 일으켜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고 지배하는 암울한 세계를 그린 작품이 있었다 (앞서 말한 '캐산'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보면서 덩달아 나도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솔직히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겠는가. 그게 꼭 로봇이 아니고 다른 것을 대입시켜도 말이 된다. 예를들면 산업폐기물 같은 거 말이다. 사람 편하지고 뭔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어느 날 수명이 다하고 쓰레기가 되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AI는 우리의 피부만큼이나 접촉성이 강한 물질이 되었다.  


그래도 이 책에서의 단연 압권은 곽재식의 단편 '백세 포스터 그리기 대회'다. 이 작품은 이제 의학의 발달로 영생을 살게 된 사람들에게 100세만 살자고 권장하는 포스터 대회를 여는 어느 학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풍자적이면서도 빵 터지는 것이 엄지 손가락을 높이 쳐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역시 우울하다. 작품이 아니어도 우린 100세까지 살게된 게 축복이냐 저주냐 말들이 많지 않은가. 이 작품은 그걸 휠씬 뛰어 넘는다. 그나마 우울하지 않게 그렸다는 점에서 곽 작가의 재능에 환호할 뿐이지.  


하지만 SF는 미래에 과학의 발달로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 그런 의미에서 다소 예언적 요소도 있으며(그것이 진짜든 꾸며낸 것이든) 어떻게하면 인류를 인류답게 할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만한 장르도 없지 않나 싶다. 이제 뭐든지 우리가 만들면 세계적이 된다. 그래서 K로 시작하는 분야가 많아졌다. 난 앞으로 SF도 그럴 거라고 믿는다. K-SF의 무한한 발전을 응원한다. 이제 곧 통권 2호가 나올 모양인가 본데 모쪼록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순항했으면 좋겠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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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22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부분의 분야에서 남성의 수가 여성의 수보다 많은 걸 보면 아직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예요. 신문만 보더라도 필진의 남성과 여성의 성비는 8대2 정도 된다고 합니다.
SF 분야에선 여성 작가가 많았으면 싶네요. 티브이 드라마 분야가 그나마 여성 작가의 뛰어난 활약이 있었죠.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만든 로봇의 지능이 너무 발달해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거라는...ㅋㅋ 이 비슷한 영화를 보기도 했고요. 먼 미래의 일이라서 제가 사는 동안은 일어나지 않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집니다.^^

stella.K 2022-03-22 18:20   좋아요 2 | URL
지난 주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 보니까
밀레니엄버그를 다루더라구요.
그제야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웃었죠.
뭐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요?
한 23,4세기쯤 있을까 말까한 일이겠죠.ㅋ
그런 영화 뭐가 있는지 생각 나시면 갈켜 주세요.^^

희선 2022-03-23 0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 많지 않을지 몰라도 꾸준히 SF 쓴 사람은 있는 듯해요 새로운 사람도 나오고... 이런 잡지가 나오다니 잘됐네요 아작은 SF 소설을 주로 내는 곳이군요 거기에서 잡지도 만들었군요 이 잡지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희선

stella.K 2022-03-24 18:06   좋아요 1 | URL
머지않은 미래에 sf작가들이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울나라는 거의 전인미답의 분야기도하니. 다음 달에 나올 2호도 잘 생겼더군요. 저는 잡지는 별로 성실하게 못 읽는데 그래도 가급적 창간호는 갖고 싶더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