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다시 나왔다. 이번이 세 번째 출간이다. 출판사는 그대로다.

 

1995년 처음 출간해서 절판이었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소량 복간됐다. 워낙에 양이 적어 누구는 사네 마네 한동안 서재가 술렁였다.   

 

그때 나도 이책을 살까말까 한동안 꽤나 망설였다. 샀다고 해서 읽으리란 보장도 없지만 귀가 얇아 소진되면 다시 못 보는 건 아닌가 싶어. 하지만 곧 사람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포장이 불량이네. 번역이 아쉽다는 등. 안 사길 잘 했다 싶었다. 

 

이번에 나온 건 단순히 복간을 한 것이 아니라 개정 작업을 한 것이란다. 오류를 바로잡고 한글 맞춤법과 러시아어 표기법을 적극 반영했다는 게 출판사측 설명이다. 그러니 그때 안 사길 더욱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다고 이번엔 꼭 사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좀 잔인하고 비참할 것 같아서 읽을 자신이 없다. 그래도 고맙긴 하다.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한 번 절판되면 복간이든 개정판이든 내기 쉽지 않을텐데 이렇게 내주니 말이다. 이미 알겠지만 이 책의 특징은 역사소설이 아니라 기록문학이라는 것이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번 기회에 사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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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0-11-24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몇 년 전에 그렇게 산 사람 여기 한명 추가요...ㅠㅠ 표지도 제대로 못 봤는데 개정판이라뇨...

stella.K 2020-11-24 19:3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표지는 지난 번과 같던가 비슷한 느낌이던데
고민되시겠어요.
책 좋아하는 사람은 초판부터 개정판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가 본데 뒷북소녀님도 이책에 개정판도
장만해 보심이...^^

레삭매냐 2020-11-24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그 때 샀는디 -

물론 처음에 조금 읽다가 포기했다는.

stella.K 2020-11-24 19:41   좋아요 0 | URL
그때 매냐님 사신 거 저도 기억나는 것 같아요.
재미없던가요? 아무래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죠?
책은 좀 그런 난제가 있는 것 같아요.
기껏 샀는데 나중에 개정판 나오면 억울하긴 해요.
근데 전 이 책이 나중에 개정판이 나오지 않을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어요.
결국 적중했지만 출판사에겐 미안하지만 역시 못 사겠더군요.ㅠ

페크pek0501 2020-11-24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6권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 여기 있어요.
저는 천 쪽짜리까지만 읽겠습니다. 이번에 <닥터 지바고>1,2권을 마련했지요. 총 천 쪽쯤 될 거예요.
언제 읽을지는 알 수 없다는...

stella.K 2020-11-24 19:45   좋아요 1 | URL
오, 닥터 지바고! 저도 요며칠 웬지 생각나는 책이었는데.
죄와벌도 문동판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냥 생각만 있습니다. 나중에 중고샵에서 발견되면 모를까.ㅋ

2020-11-24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0-11-24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러시아 문학 번역 1세대 김학수님 번역이네요.
이분이 번역하신 ‘부활‘은 최고에요.
바뀐 철자법이나 현재 어위에 맞게 고치고 재복간된것도 대단하고 소수 독자들만 구입할텐데 다시 출판한 열린책들도 대단하네요.
저는 수용소 군도 세로로 된거 읽다가 눈알 빠지는 줄 ㅎㅎ

stella.K 2020-11-25 16:51   좋아요 1 | URL
헉, 그런 것꺼정...?!
저도 부활을 두 번인가 세 번 읽은 것 같은데
김학수 번역본을 기웃거려 봐야겠군요.ㅎ

그렇죠? 정말 소수의 독자만 읽을텐데...
세로줄이면 초판 때 읽었나 봐요.
1995년으로 나와있던데 그땐 세로줄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오래 전에 나왔었나봐요.
정말 세로줄 쉽지 않은데 그렇다면 왠지 스캇님 저랑 연대가
비슷한 줄도 모르겠다는 의혹이...?!ㅎㅎ
암튼 대단하세요.^^

scott 2020-11-2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읽으셨던 책 물려받았어요 솔벨로우도 세로줄로 완독 법정스님 책도 세로줄 ㅎㅎ전혜린 수필 번역서도 세로줄 제 친구들은 전혜린이 전혜빈인줄 알아요

stella.K 2020-11-25 17:5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시군요. 아버님이 책을 무척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전혜린이 전혜빈...!ㅎㅎㅎㅎ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전혜린은 가로줄로 읽은 것 같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않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로줄이었을 걸요?
그때 툴툴거리면서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로줄로 읽으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아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역시 쉽지는 않았죠. 어린이 문고본은 가로줄인데 말입니다.ㅋ
 

올해는 이래저래 코로나에 발목 잡힌 한 해로 기록될테지만 이게 또 아주 나쁜 것마는 아니어서 전반으로 울고 웃는 분야가 있는가 보다. 물론 당연 우는 분야가 더 많겠지만 말이다. 그중 의외로 도서 분야야가 웃고 있단다. 그동안은 매년 울상만 지었다고 하는데 올해는 반전의 해로 거기엔 코로나가 효자 노릇을 했다는 것. 사람들이 집에만 있게되니 비로소 책 읽을 마음도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오디오북의 약진이 눈에 띈다고.

 

나도 가끔 인터넷 서점에서 맛보기로 들어보곤 했는데 나쁘진 않지만 아직은 구매할 생각은 별로 없다. 나이가 좀 더 들고 책을 보는 게 어려워지면 모를까 현재로선 책이 주는 물성을 더 좋한다. 요즘 책이 얼마나 멋지게 잘 빠졌는가. 하지만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은 그 느낌을 100% 느낄 수가 없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아도 덥개 씌운 예쁜 인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득 독서의 원형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원래 사람들은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묵독 즉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전에 소리내어 읽은 사람은 놀랐다고 하지 않는가. 솔직히 난 소리내서 읽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조용히 읽는 묵독이 맞는 것 같다. 요즘의 그런 진화된 형태의 독서 방법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난 역시 책은 종이책이 아직은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책에 대한 욕심 있는 사람이라면 두꺼운 책에 대한 로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영원한 것 같지는 않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너무 두꺼운 책은 꺼려진다. 눈도 안 좋은데다 손목의 힘이 예전 같지가 않이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덕분에 손목의 힘이 아직 남아있을 때 사 놓은 두꺼운 책들이 내 방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코로나로 책의 매출이 늘어난다고 하니 알라딘은 '집콕 독서의 도전, 1000쪽(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10883&start=pbanner)이란 기획전을 하고 있는가 보다. 그러다 보니 난 왜 이 코로나 시대에 그동안 쌓아놓은 이 1000쪽 내외의 책을 읽어 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본능은 어디 가지 않았을까? <한동일의 공부법>을 읽으니 갑자기 산에라도 오르는 마음으로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 놓은 박종호의 <불멸의 오페라> 1, 2권을 읽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래 전 <박종호의 황홀한 여행>을 읽고 감동해 저 두 권의 책이 중고샵에 뜬 것을 보고 냉큼 샀다. 더구나 이 두 권의 책은 절판이다. 솔직히 절판 딱지만 안 붙어 있어도 아무리 싸게 팔아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놈의 절판이 뭐라고 살까 말까하다 과감하게 질러버렸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다. 그게 벌써 4년 전 일이다. 작년 이맘 때 책박스를 집에서 탈출시켰는데 그때도 차마 내보내지 못했다. 책박스 수거하는 아저씨가 열 몇 박스나 되는 책을 날로 먹으려고 하는데 이 책을 어떻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어디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데 이 책을 깨우려면 또 들쑤셔야 한다. 

 

 

꿩 대신 닭이라고 마침 인연이 있으려니 모처에서 <도미니언>을 이벤트 한다. 이 책은 기독교가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할 수 있는가를 추적한 책으로 무려 800쪽이 넘는다. 이것도 순전히 한동일 교수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도전한 것 자체는 후회하지는 않는데 정말 읽는 건 좀 고역이다. 하루에 25페이지씩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 조차도 어떤 땐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다. 이제 겨우 반을 남겼다. 물론 서평 기일 또한 당연히 넘었다. 주최측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늦게라도 완독하고 서평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냥 완독과 상관없이 조만간 올려야 할 것 같다. 더 늦어지면 마음에 부담감이 쌓여 편치않게 되니.   

 

 <한동일의 공부법>을 읽으면서 생각한 건데, 가끔은 뭐 이런 분야를 연구하나 싶을 때가 있다. 그야말로 그거 공부 한다고 인류가 그렇게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은 분야 말이다. 한동일 교수만 해도 라틴어를 한국어도 풀이한 사전 같은 걸 누가 본다고 세븐일레븐이란 별명을 들어가며 (아침 7시에서 밤 11시까지 공부한다고 하여)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역시도 그렇다. 까짓 두꺼운 책 좀 안 읽는다고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새삼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다. 그거 아니어도 읽어야 할 책은 쎄고 쎘는데 말이다. 

 

그런데 내가 <도미니언>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내가 참 공부 근육이 없구나 하는 거였다. 사람의 육체의 근육은 25세를 깃점으로 매년 얼마씩 감소한다던데 내가 학교를 졸업한 세월이 얼마며 그나마 학원 조차도 안 다닌 세월이 얼만가. 그동안 나의 공부 근육은 퇴화될 때로 퇴화되었다. 물론 난 지금까지 책을 손에서 놓은 책이 없는데 알고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고만고만한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았던 건 아닐까 반성됐다. 한동일 교수는 공부란 몸을 가두고 그냥 하는 힘이라고 했다. 몸을 가둔다. 우리의 몸은 편하고자 하면 한없이 편해질 수 있다. 물론 두꺼운 책을 읽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과는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두꺼운 책을 읽는 건 공부의 각을 잡아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읽고 싶은 두꺼운 책을 드디어 찾았다. 이건 정말 그렇게 밖에는 설명을 못하겠는데 그동안은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책이다. 그것은 양선희 기자겸 작가의 <여류 삼국지>다. 무려 5권이고 한 권 당 분량이 500페이지가 넘는다. 

 

여류란 단어가 붙어 무슨 시대착오냐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 작가가 썼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여류란 그 여류라기 보단 '여류(나余 흐를流)'로 나만의 스타일이란 뜻이란다. 즉 자기만의 스타일로 쓴 삼국지란 뜻이란다. 사실 삼국지는 중국 작가가 본류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이문열, 황석영, 정비석 같은 남성 작가에 의해 쓰여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여류가 아닌 작품이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양선희 작가는 이렇게 여류란 단어를 짖궃게 사용하므로 겸손을 가장한 차별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기억하기론 여성이 쓴 것도 그렇지만 여성을 위한 삼국지로 잘못 기억하기도 했다. 그렇다기 보단 여성의 관점에서 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여성이 보는 삼국지는 다를 수도 있으니. 어쨌든 이게 처음 발간됐을 때 한번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곤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 이 양반이 글쓰기에 관한 책을 내면서 다른 책은 뭐가 있나 찾아보다 우연히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배포가 좀 큰 것 같긴하다. 여성으로 삼국지를 쓴 것도 그렇지만 최근에 쓴 책도 스스로를 '대기자'라고 했다. 그 대기자가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기자만으로도 바쁠텐데 다른 소설도 계속 써 오기도 했다.

 

아무튼 난 평소에도 집콕족이라 특별한 독서 계획을 세우고 그러진 않았는데 알라딘의  기획전을 보니 별개로 잊고 있었던 책을 찾았겠다 나만의 두꺼운 책으로 <여류 삼국지>에 도전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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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0-22 0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만의 스타일이라는 여류의 뜻이 맘에 들어요 ^^ 저에게 두꺼운 책이란 그저 학교다닐때 교과서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ㅋㅋ 요즘 조금 지루한 집콕생활이 길어지다보니 긴이야기로 그 시간을 채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ㅎㅎ

stella.K 2020-10-22 18:42   좋아요 1 | URL
고전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버전으로 계속 나와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밝혔다시피 삼국지가 대표적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여성 작가가 그 행렬에 동참했다는 게 기대를 갖게 하더군요.
전 사실 삼국지 변변히 읽지 못했거든요.
전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인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현대 버전으로
쓴 소설이 있는데 못 찾겠어요. 외국 작간데...
두꺼운 책 기회가 좋은 것 같은데 한님도 도전해 보시죠.^^

han22598 2020-10-23 05:59   좋아요 1 | URL
어릴때부터 책장에 삼국지 10권 떡하니 버티고 있었는데 ㅎㅎ
몇번 시도는 해봤는데 1권 또는 2권에서 항상 중도포기했었어요 ㅋ
도스님 책도 여러버전이 있나보네요.

여러버전 섭렵은 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될 것 같고,
이번 기회에 길다란 이야기 한개라도 끝맺음 해볼께요. ^^

페크pek0501 2020-10-2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전,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는 삼국지를 정비석 저자 걸로 읽었는데 총 6권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한참 독서에 빠져 지낼 때이긴 해도 꼭 끌리지는 않아서 10권짜리 대신 6권을 택한 거였어요. 내 스타일의 책은 아니더라도 꼭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완독했죠.
천 쪽 도전이라고 하면 저도 한 셈이죠.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 두 권짜리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두 권짜리를 완독한 걸 들 수 있겠어요. 이젠 두꺼운 책은 자신 없어서 피하게 되더군요. 350쪽 이상이 되면 구매하지 않으려 해요. 꼭 사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오디오북을 저는 좋아합니다. 2년 전부터 애용하고 있어요. 폰에 저장해 두고 들어요. 눈의 피로를 줄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종이책 읽다가 피로하면 오디오북을 켜요. ㅋㅋ
(저 오디오북에 대해 너무 길게 써서 댓글로 페이퍼 쓸 일 있나 싶어서 밑으로는 지웠어요. 하하~~)

stella.K 2020-10-24 15:38   좋아요 0 | URL
의외로 삼국지를 안 읽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ㅋ
저도 이문열의 삼국지 첫 권을 읽다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이내 안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웬지 관심이 가요.
언제고 사 볼까 생각중이어요.
저 <도미니언>은 협찬 받은 거라 서평을 써야하는데
좀 걱정이더군요. 읽는대로 잊어버려서 뭘 써야할지 모르겠어요.ㅠ
저도 300페이지 내외의 책이 좋더군요.^^
 

요즘 밤이면 EBS2에서 하는 강연 프로를 계속 듣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강연>, <마스터>, <클래식>을 연이어 방송하고 있는데 유명 강사진의 강연을 들을 수 있어 좋다.

 

나는 한동안 이것을 보느라 다른 방송은 거의 못 볼 지경이었는데 그렇다고 매번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건 아니다. 보다가 깜빡 잠이 드는 경우도 많다. 밤에 불 끄고 누워서 들으니 그럴 수 밖에. 또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원래 강의든 강연이든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난 학교 때 공부를 못 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예나 지금이나 관심 있는 건 책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강연을 듣는다는 건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도 밤마다 강연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불꽃이 팡팡 터지는 느낌이다. 한밤의 향연이라고나 할까.

 

암튼 지금까지 가장 오래 편성을 한 건 강신주의 강연이다. 매일 25분씩 한 주에 네 번, 4주를 강연했으니.  

 

첫날 강신주 교수를 봤을 때 그가 아닌 줄 알았다. 일부런지 아니면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살이 엄청 빠졌다. 그러다 보니 얼굴에 굵은 주름도 보인다. 특히 이마. 한 10년 전쯤 그의 독자와의 만남에서 봤을 땐 거의 깍두기 머리에 약간은 촌티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살이 빠지니 세련된 것도 같고. 늙은 것도 같고, 암튼 묘한 조화다.

 

그는 이번 강연에서 아낌의 인문학을 강연했는데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아껴달라고 한다. 들으면서 과연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린 사랑 포화 상태에 있지 않나? 그것도 말로만. 사랑과 아낌이 같은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은 뭔가 그득히 채움이지만 아낌은 오히려 빼고 깎는 느낌이다. 

 

아무튼 그 문제의 강연집이 최근 책으로 나왔다. 읽어보고 싶긴한데 오래 전 <감정수업>을 사 놓고 읽지도 않았다. 읽으려면 그것부터 읽어야겠지.

 

어제 알라딘 TV에서 그가 나온 걸 봤다. 난 그가 그렇게 웃기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 웃기는 사람이라면 K 본부에 나올 땐 꽤 근엄하게 하고 나오는 거다. 입담이 장난이 아니다. 

 

요즘 어찌어찌하다 보니 웃기는 책을 많이 읽게 됐다. 요즘 대세는 잘 생긴 것 보다 웃기는 거라고 하던데. 책도 문장이 좋은 것 보다 웃기는 게 대세는 아닌가 싶다. 작가도 웃길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웃기지 못하는 작가는 작가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박상영 작가 알라딘 TV 고정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던데 뭐 어디 가면 굶겠냐마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나? 본인이 그렇게 바라는데 고정시켜 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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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7-3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거 라디오 방송으로 조금 들은 적 있어요 아침 11시부터 12시까지 텔레비전 방송으로 한 걸 라디오 방송으로 해주는 거예요 텔레비전 방송보다 좀 늦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텔레비전 방송이어서 목소리만 들으면 누군지 몰라요 처음에 이름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하지 않을 때도 있더군요 그렇게 잘 듣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네요 예전에는 그 말 안 한다고 그러더니 지금은 넘쳐나죠 그래도 진심이겠지요 저는 거의 안 하지만...


희선

stella.K 2020-07-30 14:39   좋아요 1 | URL
아, 그게 라디오에서도 하는군요.
저는 라디오는 잘 안 듣는지라......
이런 프로 좋긴한데 새삼 드는 생각은 모든 강연자가
다 강연을 잘하는 건 아니구나 싶어요.
어떤 사람은 좀 헤멘다 싶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강연 잘하고 그걸로 돈 버는 사람 좀 부럽긴 하더군요.
강신주도 어떤 땐 좀 헤멘다 싶은데 그래도 이 사람 강연 들으면서
철학을 좀 알아야겠구나 싶더군요.

syo 2020-07-30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봤는데, 진짜 상영님 말 겁나 잘하던데요?? 부러웠다.....

stella.K 2020-07-30 14:44   좋아요 0 | URL
스요님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ㅎㅎ
입담 좋은 사람 보면 부럽긴하죠.
알라딘 TV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긴한데
의외로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안 보는 사람도 있긴한가 봐요.
박상영 작가 웃기니까 급관심이 가더군요.
공중파에선 어쩌면 그리도 점잖던지 깜빡 속고 있었습니다.
알라딘 TV 끝까지 봐요. 웃겨요.팧하하하하~

페크pek0501 2020-07-3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신주 님의 책을 사 놓고 훑어보기만 하고 정독을 못한 1인입니다.
저는 밤에 일찍 누으면 오디오북을 듣거나 유튜브로 강의 들어요. 눈을 감고요.
눈을 쉬게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ㅋ

stella.K 2020-07-30 21:27   좋아요 1 | URL
앗, 저도 방금 언니 서재에 다녀왔는데...ㅎㅎ

진짜 그 프로 정말 좋은 게 눈감고 듣기만 해도 된다는 거예요.
그러다 잠 들면 땡이지만...ㅋ
물론 어떤 강연은 재방송도 해서 나중에 챙겨보기도 하죠.
그건 아직 올레 TV에서 다시보기 서비스를 안 해 주더라구요.ㅠ

후애(厚愛) 2020-08-0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이에요^^
이제 무더위 시작인 것 같습니다.
대구는 비가 그리 많이 내렸는데도 시원하지가 않았어요.
습도가 있어서 불쾌지수에요.
건강 챙기시고요, 시원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20-08-01 14:57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8월이 가장 덥다고는 하지만 입추가 있고,
말복이 있고, 여름의 끝이 보이는 달이기도 하죠.
조금만 견디면 될 것 같습니다.
모쪼록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히 여름 나십시오.^^

Mirrr 2020-08-16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서든 자주 보고 싶은 박상영 작가님🤍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긴 하다. 사실 지난봄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문제의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샀다. 그전부터 가격이 유난히 싸다는 것 외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이게 한 시적으로 특가로 팔고 기간이 지나고 나면 정가에 판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정가로 바뀌기 전에 서둘러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 또 평소 버릇대로 앞부분만 읽고 다른 책에 한 눈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김봉곤 작가의 수록작이 문제가 되자 갑자기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읽고 나니 마음이 좀 착잡해졌다. 


 

 

 

 

사실 작가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먼저 <소설 보다:봄-여름 2018>에서 처음 읽었다. 읽으면서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이 별로면 다음에 또 읽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김봉곤 작가는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성적 취향이 같지 않다는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보수적인데 비해 어쨌든 그는 진보적이니. 그런데 이번에 작품을 읽으면서 의외로 그가 좀 달리 보이기도 했다. 전작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고 그는 아마도 계속 이쪽으로 글을 쓰지 않을까 싶다. 보통 작가들의 그런 태도를 나쁘게 말하면 우려먹는다고 하고, 좋게 말하면 천착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볼 때 그의 주제는 나와는 맞지 않지만 그런 태도나 사유는 충분히 인정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먼저 읽었던 작품보다 훨씬 잘 읽혔고, 작가의 성격이 보여서 좋았다. 


그의 작품을 두고 사소설이니 오토 픽션이니 하는데 그건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 소설을 쓰는 일련의 작가들이 있다는 걸 나는 적어도 5, 6년쯤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이 장르를 접했을 때 이것을 소설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산문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대충 난감해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주로 자전 소설 또는 자전 에세이로 불리기를 좋아했고, 그것은 일정 정도의 형식미와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했다. 그것이 2000년대 들어오면서 개인의 삶, 취향, 경험이 중요시되면서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오토 픽션도 부각되기 시작한 것 같다. 또 그런 만큼 이전 세대는 사소설은 일본에서 유행했던 만큼 우리나라에서 선 터부시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건 또 요즘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조차 그렇게 불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2015년에 나온 이석원 작가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란 책은 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출판사의 결정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라 하지 않고 이야기 산문집이라고 했다. 사실 자전 소설이나 자전 에세이라면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다루거나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형식은 없고 마치 일주일이나 한 달치 일기 또는 삶의 한 정경을 소설로 자유롭게 쓴 듯한 느낌이다. 그때 난 뭔가 모를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모르긴 해도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작가가 많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이런 책은 독자의 관음을 충족시켜주지 않는가.       


그렇게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작가들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의 사생활 침해가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건 또 오토 픽션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쓰든 인물을 가공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오토 픽션은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면을 그리니 더하지 않을까. 문득 오래전에 성석제 작가의 독자와의 만남에 간 기억이 생각난다. 질의응답 시간에 주변 인물을 쓰다 보면 그들로부터 소위 민원이 들어오지 않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시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본인인 줄 잘 모르거나 알아도 대충 웃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드물게 멱살을 잡혀 본 적도 있는데 그럴 땐 출판사가 나서서 대신 해결해 준다며 알듯 모를듯한 대답을 했다. 하긴 그렇게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작가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소설에서조차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그리겠는가. 그래도 그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은가 보다.


난 김봉곤 작가의 문제의 소설을 읽기 전에는 침소봉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으니 피해자에게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솔직히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물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작가가 좀 더 신중하지 못한 걸 탓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C누나는 작가만 알고 독자는 모른다. 그냥 짐작하기로 작가와 친한 사이인가 보다. 그러니까 그렇게 연애 상담도 하지. 그 정도다. 전후 맥락을 봐도 작가는 C 누나의 말을 잠깐 인용한 수준에서 끝난다. 그런데 소설을 있는 동안 그 일은 일파만파가 됐다.


처음 출판사는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하면서 다시 책을 발행하겠다 했다. 그러더니 다음엔 아예 작가의 작품을 빼고 발행할 거라고 했다. 또 그러더니 이번엔 작가가 아예 상을 반납했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과연 이럴 사안인가 싶어 소설의 문제의 부분을 다시 한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읽어보니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공감이 가긴 했다. 내가 작가의 변호인도 아니니 이건 작가가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고 해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말은 이미 작가 자신이 충분히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여자면서 참 형광등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용서하시라. 하도 음담패설이 난무한 세상에 살고 있어서 일까 그들의 대화는 음담패설 수준에 끼지도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둘만의 사적인 대화라고만 생각했다. 굳이 그렇게 보자면 오히려 작가는 C 누나 보단 그의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어머니를 부조리한 인물로 묘사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게 문제가 된다면 앞서 얘기한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또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읽은 지 좀 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책에서 작가는 어느 이혼녀를 소개팅으로 만나 가까워지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읽다 보면 얼굴이 붉혀지는 장면도 없지 않은데 작가야 이렇게 쓴다곤 해도 상대는 과연 자신의 이야기가 그렇게 까발려지는데 괜찮을까 아무리 익명이라도 하지만 말이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생각하고 썼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잠시 해 봤다. 지금까지 말이 없는 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잘 넘어갔나 보다. 하지만 난 정작 영화 <롤리타>를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알다시피 나보코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어느 소아성애자의 비극적이고도 파괴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난 그걸 보면서 새삼 내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건지 잠시 현깃증이 났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수컷에 의한, 수컷을 위한, 수컷의 이야기라지만 그 화법에 질리고 말았다. 하긴 본격적으로 여성이 화자가 되거나 주인공으로 나온 소설은 2세기가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수컷의 화법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기하급수적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현대 남성 작가가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글을 쓴다고 해도 여성의 감성과 화법을 이해하고, 어느 부분에서 상처를 받는지를 채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세상에 어떤 작품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작품은 없다.


고의든 아니든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를 구하는 건 마땅한 일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수상을 자진 반납했다니 과연 그답다 싶기도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웬만해서 밀면 밀리는 대로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순응하지 저항하는 법이 없는 그런 캐릭터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 편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독자나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야 하는 동료 작가들의 입장에선 쓸 자유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볼멘소리를 듣는 것 같다. 원래 작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연대할 때는 또 연대하지 않는가. 모르긴 해도 이런 일은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작가의 설자리는 좁아지고, 이렇게 패가 나눠져서 서로를 비난하고(물론 건전한 토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상을 반납하고, 책을 다시 찍고 그럴 건가? 또 어찌 보면 이건 편집자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본다. 아무리 오토 픽션이고, 솔직하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작가라고는 하나 편집자가 제 기능을 발휘해 줬다면 문제가 되지 않거나 축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말에 의하면 김봉곤 작가도 출판사에서 편집 일도 한다던데 설마 자기 작품을 편집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쨌든 이번 계기를 통해 문학 종사자들의 고민이 더 깊어질 듯하다. 나는 이쯤에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 한 예를 들어 보겠다. 그것은 <나의 투쟁>이란 두꺼운 4권짜리 자전소설을 쓴 그 이름도 어려운,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다. 그는 원고를 쓰고 출판하기 전 책에 등장하는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 허락을 받고, 그 과정에서 절교가 선언된 지인도 있었다고 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과연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나라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을 작가인 사람과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나눈다면 그 근거를 무엇에 두겠는가. 작가는 끝까지 써서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고, 작가가 아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침표에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저 수고를 포함시켜야 한다면 당연 그것을 해 낸 사람이 작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 일인가.  


어떤 작가도 자신의 이야기에 등장인물을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그 인물의 부조리한 일면을 드러내 줘야 할 때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의식을 했든 못했든 실제 하는 인물이 상처를 받았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나는 지금 김봉곤 작가를 옹호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일은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 두서없이 써 봤다. 더불어 작가를 보는 일반인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작가라는 직업이 매력적이기는 하다. 존경도 많이 받고. 하지만 매력적이라고 해서 인품도 훌륭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완벽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 그런데 간혹 그렇게 착각하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유일하게 전지적 시점을 구사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다. 이건 또 신의 시점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넓은 의미에서 신은 공평하긴 하지만 가끔은 신 조차도 전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지는 않는다. 그런 것처럼 작가는 완벽할 거란 기대 같은 건 안 했으면 한다.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언젠가 누구라면 알 만한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것도 자조적으로. 작가는 언제든 나쁜 사람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말을 하는데 작가는 정말 그냥 되는 건 아니겠구나 싶다. 작가란 그런 것이다. 나는 김봉곤 작가의 필치에서 그가 심지가 굳건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모쪼록 미안한 일은 미안한 일이고 작가로서 계속 정진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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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07-24 0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렵고 미묘한 사안이에요. 스텔라님과 동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편집과 검열의 과정의 전문화도 필요한 것 같아요. 작가의 쓰고자 하는 욕구와 타인의 사생활 침해 부분의 균형은 사실 스스로가 엄격하게 찾으면 제일 좋지만 외부의 좀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이 필요하지요. 작가로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참으로 무거운 것 같아요. 스텔라님의 열린 시선이 참 좋아요.

stella.K 2020-07-24 16:15   좋아요 1 | URL
전 어쩌면 김봉곤 작가가 편집자를 따로 두지 않았거나
편집자의 말을 듣지 않았거나,
편집자가 미처 그 문제를 잡아내지 못했거나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즉 우리나라는 과연 편집자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웬지 전 이 책이 갑자기 좋아지더라구요.
예전에 젊은 작가들 재미었다고 했는데 그건 저 또한 젊어서인 것 같고
지금은 좀 아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물론 생각뿐이지 막상 이들의 책은 못 읽을 거면서...후후

읽느라 고생이었을텐데 끝까지 읽고 댓글 달아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꼴은 저래도 저거 쓰느라 한 3일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물론 김봉곤 작가의 그런 결단을 두고 같은 작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작가의 방식도 존중해 줄 필요는 있다고 봐요.
꼭 저항하는 것만이 세상을 견디는 방법은 아니거든요.
심지가 있는 사람 같았어요. 잘 추스르고 또 좋은 글 썼으면 좋겠어요.
작가. 참 쉽지 않은 직업이예요.^^

희선 2020-07-26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젊은작가상에 실린 소설인가 보네요 그 책 사두고 아직 안 읽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 일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해요 예전에도 자기 얘기 썼다면서 작가 고소한 사람 있겠지요 글을 쓰려면 그걸 쓰겠다고 허락을 받고 쓰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주 다르게 쓴다면 모를까 그 소설을 보는 사람은 잘 모를 테지만, 당사자는 그걸 보면 기분이 안 좋겠지요 글과 그 사람이 똑같은 사람도 있지만 아주 다른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것도 잊지 않아야 할 텐데... 어떤 소설가는 아는 사람이 그 소설에 나오는 거 나 맞지 묻기도 했답니다 그건 아니었다고 하는데...


희선

stella.K 2020-07-26 11:52   좋아요 1 | URL
실제로 그런 일이 있긴 있군요.
사실 그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긴한데
나쁜 의도가 아니고 맥락을 이해한다면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 될까
싶기도 해요. 물론 먼저는 작가가 슬기롭게 쓰긴해야겠지만
일일이 그걸 챙긴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도 편집자가 더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점점 작가들 글 쓰기가 쉽지 않겠다 싶어요.
돈 많은 작가라면 변호사라도 산다지만...
 

 

국문학자이자 민속학자인 고 김열규 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독서의 시작은 할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직 한글도 깨지지 않았을 어린 시절 할머니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떼를 쓰면 할머니는 늘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옛날 옛날, 그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한다. 여기서 '이바구'는 이야기를 일컫는 경상도 말이지만, 떼바구, 강떼바구는 별 뜻이 없는 말이다. 모르긴 해도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갑자기 시작하기가 뭐하니 시간을 끌기 위한 일종의 시동을 거는 그런 건 아닐까. 문득 이렇게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싶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어렸을 때 할머니께 옛날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면 할머니는 조근조근 짧고 굵게 몇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내용은 기억에 없다. 한글을 아직 깨치기 전이고, 재미 보단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 자꾸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던 건 아닐까. 


나는 보통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라고 말하곤 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내가 한글을 깨친 후 책에 관심이 생겨서 돈 주고 사서 보기 시작한 때가 대략 그때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서는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라 남에게 의지하여 건 독서 행위라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김열규 교수는 할머니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던 때를 독서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데 반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요즘 귀로 듣는 오디오북도 있지 않은가. 오디오북이나 조부모에게서 옛날 얘기를 듣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단지 오디오북은 좀 더 조직적이고 기계적이라는 정도가 될까. 


그렇게 시작한 김열규 교수의 독서는 청장년 시절에 한창 맹위를 떨치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느슨해진다. 노년의 책 읽기는 산책하듯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다 말다 어슬렁대는 것이 산책인 것처럼 책 역시 읽다 말다 하는 것이다. 


...... 읽기와 걷기가 절로 겹쳐진다. 가령 한참을 어슬렁대다가 갈림길에 왔다 치자. 어디로 갈까? 망설일 것이 전혀 없다. 왼쪽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오른쪽 손바닥으로 탁! 친다. 침방울이 튀는 쪽으로 자동적으로 발길이 향한다. 들고 온 책을 어디쯤 펼칠까 하는 것도 비슷하게 결판이 난다. 바람이 책장을 넘겨주면 거기서부터 읽으면 된다.

그런가 하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풀썩 풀밭에 주저앉아 더없이 멍해 있는 것도 산책의 재미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가 내려놓고 멍하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것도 산책하듯 읽기의 바른 자세다.(159p)


요즘 같이 공기도 믿을 수 없는 때에 얼마나 그림 같은 풍경인지. 언젠가, 무슨 책을 읽다 독서도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읽고 약간 뜨악한 적이 있었다. 난 그때까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여러 이유가 있는데, 좋아하는 책을 그냥 평생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는 거지 무슨 노후를 생각한단 말인가. 더구나 난 책을 좋아하지만 많이 읽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계획을 짠다는 건 내 사전에 없다. 닥치는 대로 읽는다는주의다. 또 이건 좀 모순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독서는 취미 같은 것이 아닌가. 취미는 여건이 허락되고 마음이 허락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싫으면 언제든 접고 원하면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난 이 취미를 죽을 때까지 할 것 같으니 노후의 독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처럼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이 자주 떠오르는 때도 없다. 거기 보면 남자 주인공이 꼭 책을 읽으면 첫 장부터 읽지 않고  끝장을 읽은 후 첫 장을 읽기 시작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만일 천재지변 같은 게 있어 끝을 못 읽게 되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란다. 처음엔 그게 참 엉뚱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언젠가 읽겠다고 모아 둔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은 백퍼다. 사다 놓은 책의 마지막 장이 어떤지, 완독은 고사하고 손때라도 묻혀둬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영화<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


느림보 같긴 해도 나도 한때는 치열하게 책을 읽었던 때가 있다. 그때 난 어렵거나 지루한 책은 영락없이 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때가 오면 난 저자나 역자를 차마 비난하지 못하겠다. 왜 책을 이렇게 썼냐고. 다 내가 소양이 부족해서 못 읽는 걸 누굴 비난하겠는가. 그게 언제부턴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 세상엔 나에게 맞지 않는 책이 있고 읽지 못할 책이 있다. 그럴 땐 빨리 다른 책을 읽기로 한다.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들은 많은데 그런 걸 가지고 자책하는 건 시간 낭비다. 그러다 보니 완독에 대한 강박도 좀 버리게 됐다. 


바람이 펼쳐준 페이지부터 읽는다. 왠지 낭만적이면서도 숨이 쉬어지는 독서다. 이걸 풍독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흔히 연말에 또는 월별로 자신이 몇 권의 책을 읽었는가를 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노년엔 아무래도 눈도 안 좋아지고 집중력도 떨어질 테니 어느 순간 그렇게 세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책을 완독에만 매달리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읽되 내가 오늘 얼마의 독서를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라고. 그것이 권 수를 세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오늘이란 하루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내일은 아직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냥 허락될 거라고 믿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독서는 오늘 하루만 할 수 있다. 실존적인 독서를 하는 것이다. 


요즘엔 책을 대신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 요점 정리의 요정 설민석 같은 사람 말이다. 그것도 일종의 독서 행위라면 그가 나오는 TV 프로를 보면서 "그 프로를 보느라 책을 못 읽었어." 이런 말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것의 단점은 원작자의 문체의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정도가 될 텐데, 독서의 주요 행위는 작가의 문체를 아는 것보다 그 내용을 얼마나 내 것으로 이해했느냐 또는 다른 사람과 얼마나 토론이 가능한가 가 아닐까? 누구는 그런 데서 주워듣고 아는 척하는 거 얌생이 같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원래 독서 토론이란 아는 척하는 것이고, 얌생이 독서법도 독서는 독서라고 인정해 주자. 요는 독서 행위를 한 두 가지에 국한시키지 말고 넓은 시각으로 보자는 말이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프로를 시청하면 어느 땐가 한 번은 꼭 그 책을 사서 읽게 되지 않는가.


김열규 교수가 젊은 시절 그렇게 맹렬하게 독서를 했던 건 그땐 여가 시간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는 1932년 생으로 그 시대가 그렇듯 책 읽는 것조차도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영화 <동주>에서도 보면, 시인 윤동주 역시 독서만 줄곧 해 대는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만일 이들이 이 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책만 읽었을까? 이 시대는 어쩌면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히 독서만 하기 힘든 시대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봐야 하고, 동아리나 모임에도 나가야 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요즘에도 독서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옛날의 기준을 가지고 독서가를 생각하면 안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어느 때부턴가 에세이류를 많이 읽게 됐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면 장편소설을 읽을 경우 구조나 얼개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비해 에세이는 그런 파악을 할 필요 없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금방 공감하게 된다. 게다가 요즘 에세이는 인문학적 소양까지 갖추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 좋은 에세이를  읽지 않는다면 얼마나 손해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내 마음은 늘 소설에 가 있다. 그것도 고전 소설. 앞으로 내가 얼마를 더 살지 모르겠지만 어느덧 나도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 보다 조금 짧아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전에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이 책을 읽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면 평생 후회할 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그 책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 한 권, 한 권 읽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목록을 만들어도 나는 3분의 1도 다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가 생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평소 게으르고 어영부영하는 성격이라 그것을 망칠 수도 있다. 그래도 세워 보고 싶다. 아예 계획 없이 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완주는 못할지라도 계획을 실천하다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김열규 교수는 그렇게 노년의 독서를 산책하듯 한다고 했지만 그 독서는 조금도 느슨해지거나 틈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노련해졌고 웅숭깊어졌다. 그는 토마스 만이나 릴케에 대한 존경을 굳이 숨기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선택한 작가는 츠바이크였다. 특히 츠바이크가 쓴 <에라스뮈스 평전>를 좋아했는데, 알다시피 에라스뮈스는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인문학자다. 그는 츠바이크가 그 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므로 에라스뮈스가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런 츠바이크를 김열규 교수는 숭배했다.  

'제1의 에라스뮈스와 제2의 에라스뮈스, 츠바이크! 제1의 츠바이크와 제2의 츠바이크, 김 아무개! 우리 셋은 그렇게 피가 통하는 한 동아리가 되기를 나는 축원했다. 그것이 현실이 될지 아니면 꿈으로 끝날지는 나중 문제였고 우선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311p).'


누구는 방에 책을 쌓아 놓는 건 정신적으로 나무에서 피톤치드를 마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고도 했다. 언젠가 저 책을 읽어야지 하는 기대가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나. 일 일이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쩌면 내가 저 책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아직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앞으로 읽을 것을 생각하면 기대감으로 충만할 때가 더 많다. 읽다가 누구 한 사람에게 꽂혀 그를 알고 싶고, 사상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면 그건 성공한 독서고 훌륭한 독서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김열규 교수의 저 말에 빛 댄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서평집은 많이 봤지만, 독서 가지고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줄은 몰랐다. 김열규 교수는 진정한 독서 고수다. 문장이 쉽고 깊이가 있는 것이 본받고 싶은 문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이런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건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읽는 동안 마음이 든든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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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3-19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나 책장에 쌓인 먼지가 건강에 좋지 않아요. 집에도 미세 먼지가 많이 있다고 하던데, 아마도 미세 먼지가 가장 많은 곳은 서재일 거예요. ^^;;

stella.K 2020-03-20 11:3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넌 꼭 이 공들인 글에 초를 쳐야겠냐?
기껏 애써서 써 놨구만.
너와 같은 말에 울엄니가 하시는 말씀이 있지.
그래도 7, 80년 건강하게 살아왔다고.
너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체질은 아니라고 보는데.ㅋㅋ

니르바나 2020-03-20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고 있는 김지안 작가님의 <네 멋대로 읽어라>이후 최고의 서평집인가 봅니다.^^
김열규 교수님이 서울 생활을 끝내고 낙향하여 고향 가까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
편안한 모습으로 인터뷰 하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2층으로 오르던 목재 계단에 발 옮기기 어렵게 책이 쌓여 있고
서재 문 밖까지 온통 점령한 책들이 참 인상적이었죠.
연구를 위해 관련도서를 읽는 다른 학자들의 서재 풍경과 달리
저명한 국문학, 민속학자이면서도
다양한 책읽기를 진정 사랑한 애서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2020-03-20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20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20-03-2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정말 많이 봤던 영화압니다.^^
몇 번을 봣는지 기억도 없네요.
정말 좋았던 영화지요.

좋은 꿈 꾸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stella.K 2020-03-21 15:3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오래 전 멕 라이언 리즈 시절에 한번 보고
여태 다시 못 보고 있는 영홥니다.
그런 사람이 아는 채를 하고 있네요.ㅋㅋ
근데 맞죠? 해리가 책 맨 뒷장부터 읽다가 다시 첫장부터 읽는 이유.
후애님 같으신 분이 계셔서 팩트 체크부터 하고
글을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ㅠ
좋은 주말입니다.^^

페크pek0501 2020-03-2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에세이를 읽을 때가 제일 편한 독서가 되는 것 같아요. 목차를 보고 글 제목이 끌리는 걸로 골라 몇 개씩 읽고 나서 읽었다는 표시를 목차에다 해 둡니다. 여러 에세이책을 같은 날에 읽을 수 있는 장점도 있고요.

오디오북을 애용하는 편입니다. 하루에 30분~50분 정도는 듣는 것 같아요.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들을 수 있는 건 장점이에요. 종이책을 여러 번 읽는 건 어려운데 비해 오디오북은 편하죠. 그런데 오디오북으로 들어서 좋은 건 꼭 종이책으로 사게 되더군요. 이중으로 책값이 드는 건 단점. ㅋ

stella.K 2020-03-23 12:2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나이들면 에세이가 편해요.
어렸을 때 에세이도 글이냐? 했던 때가 있었는데 정말 무식하면 용감한 거죠.

오디오북은 전 아직 생각 안해 봤는데 조만간 써야할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