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것은 싫다! 예술은 끝없는 탈주
미학오디세이 1·2·3/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371쪽/각권 1만4000원

이 혼돈의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책장 안에 갇혀 있거나 미술관에 걸린 박제품이 아니다. 현실을 뒤집고 비틀었을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익숙한 것을 거꾸로 던져 놓은 예술이 오히려 진실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가상 이미지가 실제를 대체하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미지들 속에 숨은 진실의 언어를 찾는 힘은 ‘미학’ 훈련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고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예술사가 빚어놓은 현란한 대형 벽화 속으로 들어가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떠돌아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편집자

미학 오디세이’가 10년 만에 3편으로 완간됐다. 94년 에셔의 이상야릇한 그림이 상징하는 ‘가상의 세계’를 화두로 ‘아름다움(美)’의 세계로 탐험을 떠났던 미학자 진중권은 구어체와 문어체를 적절히 넘나드는 글쓰기와 독특한 구성을 통해 전문성과 대중성을 아우른 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줬다. 대중적으로 쉽게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 책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표제로 삼은 2편까지 무려 50만부(!)가 큰 소리 내지 않고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1, 2권이 고전에서 시작해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까지 탐험했다면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을 떠나는 3권은 탈근대의 관점을 두루 살핀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체셔 고양이의 웃음과 모네의 ‘수련’, 영화 ‘장미의 이름’ 같은 익숙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예술과 현실의 경계와 인식 문제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미술 애호가’를 위한 그림읽기 입문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눈에 익숙한 그림들과 너무도 친숙한 이야기의 ‘속내를 읽자’고 자극하는 지적 선동일 수도 있다. 정치와 경제 논리가 아닌 미학의 시점으로 볼 때 현실과 가상의 위험한 경계는 그 맨얼굴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권유하는 탈근대 미학으로의 항해는 현실 일탈이 아니라 현실 탐사가 된다.

이 책은 어느 부분을 펼쳐 읽든 그곳이 당분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탈근대적’ 구성으로 짜였다. 나는 글 머리를 먼저 읽고 마지막 부분인 ‘미디어의 미학:다시 가상과 현실’을 읽은 뒤 그 중간 부분은 무작위로 펼쳐 읽었다.

‘미디어의 미학’은 사실상 우리 시대 문화 전반의 상황과 배경을 집약하고 있다.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가 있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려면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사실과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은 미디어다.’ 이 얼마나 적절한 지적인가. 선형적이고 체계적인 독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내가 지금 책에서 어디쯤을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변죽만 울린다 싶으면 어느새 중심이 출몰한다. 중심인가 싶으면 무수한 갈래들로 흩어진다. 버성긴 갈래들의 숫자만 느는가 싶으면 다시 중심이다. 요컨대 이 책과 저자의 글쓰기 자체가 탈근대적 미학의 실천이며, 저자의 ‘너무 하릴없지도 너무 진지하지도 않은’ 놀이터다. 이에 따라 독자들도 일종의 탈근대적 독서 체험을 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법”이다.

이 책은 상당 분량을 대화(對話) 형식으로 구성한다. 1, 2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길항 구도였다면 3권은 디오게네스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탈근대의 관점을 상징하는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한다.

“현대 예술을 보게. 내용의 독재가 사라지고, 형과 색이 자율을 얻지 않았나?(디)” “무정부의 카오스 상태군요.(아)” “자네 눈에는 질서는 곧 위계질서로 보이나 보지?(디)” “그럼 다른 질서도 있나……?(아)” “게다가 ‘시학’에서 뭐라고 말했나? 전체 줄거리의 진행에 관계없는 삽화들은 빼라고 하지 않았나.(디)” “그래야 짜임새가 생기지요.(아)” “하지만 그게 사회의 구성원리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은 배제되어야 한다. ‘반동분자’ 혹은 ‘반국가분자’로…….(디)”

저자는 오래전에 탈근대 미학을 선취한 벤야민,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과 상대적으로 최근에 속하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을 불러낸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해설하거나 단순 원용하는 건 저자의 관심 밖이다.

그들은 원본과 복제, 복제의 복제인 시뮬라크르, 가상과 현실 등의 문제를 심리하기 위해 소환된 참고인들이다. 그 심리의 시작은 이렇다. “하늘에서 해를 사라지게 해도 수천 수만의 복제된 해들이 세상을 도처에서 비춘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이름의 세상이다. 누군가 진리의 신, 태양신을 제 것으로 독점해도 그것을 우러를 것 없이 세상은 수없이 복제된 작은 진리들의 빛으로 별일 없이 돌아간다. 우리는 원본 없는 세상 위에 복제된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평소 궁금해하던 것 하나. 오늘날의 예술은 왜 이해하기 어렵게만 느껴지는 걸까? 저자는 “현대 예술이 추하고 추상적이며 고통스러운 까닭은 현대 사회가 추할 대로 추해졌으며, 인간 관계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현대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도 사회의 고통을 미메시스(모방)한다. 우리가 현대 예술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곧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것이다. 현대 예술은 대중이 공유하는 코드를 일부러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왜 굳이 그렇게 하려 드는 걸까?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고 혁신하는 게 현대 예술의 숙명이다.

저자는 학문 분야로서의 미학 안에 머무르기보다는 늘 그것의 바깥, 다분히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실천까지 포함하는 ‘존재 미학’을 염두에 둔다. 그 ‘존재 미학’은 저자 자신의 어떤 결의까지도 포함하는 듯하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표정훈·출판평론가·조선일보 서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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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미경 옮김

세종서적

1만8000원

그림은 보는 것일까 읽는 것일까? 당연히 보고 읽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보는 것을 물리적인 지각에만 초점을 맞춰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들어오자마자 우리의 뇌에 의해 해석된다. 해석은 읽기이다. 읽되 우리의 경험과 지식, 기억에 입각해 읽는 것이다. 그림 감상에 있어 보는 것과 읽는 것은 결코 칼로 두부를 자르듯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서할 때 우리는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일까? 읽기를 통해 우리는 본다. 저자의 생각과 의도, 글이 지향하는 바를 꿰뚫어보게 된다. 비록 물리적인 시각 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경험처럼 ‘읽기=해석’에 의해 파악된 세계의 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보는 것은 분별과 관계가 있고, 읽는 것은 이해와 관계가 있다. 분별함으로써 이해하게 되고 이해함으로써 분별하게 되는 것은 대상이 무엇이든 모든 인식의 기초이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독서의 역사’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이 쓴 ‘나의 그림 읽기’는 흔히 보는 행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그림을 읽는 행위의 대상으로 보았을 때, 그러니까 전자 못지않게 후자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때,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그것이 또 얼마나 우리의 지식과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는지 면밀히 살펴본 책이다. 읽는 행위로서 미술감상이란 그 정답이나 한계가 존재할 수 없는 행위라는 점에서 끝 모를 사유의 강물에 스스로를 던지는 행위와 같다. 미술작품의 이미지는 자연의 사물과 달리 즉물적으로 스스로를 천명하지도 않고, 글과 달리 일관된 체계로서 의미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망구엘은 화가의 의도와 개인사, 도상학적 이해, 작품의 시대적 배경,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비평과 해석, 작품을 대하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 등을 두루 아우르며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찾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 비록 정답은 없지만, 아니 정답이 없기에 현재의 시점에서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고 공감을 자아내는 의미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의미망은 다른 이에 의해, 혹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환경과 지식의 토대 위에 형성된 의미망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게 되고 그때마다 깊은 감동을 덤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망구엘은 책을 모두 12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반 고흐의 ‘생트마리 해변의 고기잡이배’와 로베르 캉팽의 ‘화열 가리개 앞의 동정녀와 아기 예수’, 가트너의 ‘서 있는 네 사람’, 피카소의 ‘통곡하는 여인’, 카라바조의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 등 각 장마다 대표 작품을 선정하고 이를 ‘이야기와 이미지’, ‘수수께끼의 이미지’, ‘악몽의 이미지’, ‘폭력의 이미지’, ‘극장의 이미지’ 등 이미지에 대한 깊고 넓은 해석으로 풀어낸다. 그의 박학다식과 그 위를 종횡으로 내달리는 글쓰기는 작품 분석이 해석자의 역량에 얼마나 큰 빚을 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가트너의 ‘서 있는 네 사람’을 통해 “존재는 이유가 없다”고 한 철학자 우나무노의 명제를 확인하고, 피카소의 ‘통곡하는 여인’을 통해 그의 미술의 남성적 폭력성을 추출하는 대목 같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비록 12개의 작품에 한정해 분석을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미술과 이미지 전반, 나아가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관한 복합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그 미시적이고도 거시적인 시선이 뒤섞여 하나의 책으로 융합돼 나온 것이 감탄스러운데, 그것은 미술 감상이라는 포용성과 융통성이 매우 뛰어난 통찰의 바인더가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하겠다. 이주헌·학고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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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칠일 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강연록
발행일 : 2004-02-28 D7 [Books]    기자/기고자 : 김광일
 
송병선 옮김

현대문학

1만2000원

‘스티븐슨이 말했듯이 ‘매혹’이란 작가가 가져야만 하는 근본적인 자질 중의 하나입니다. 매혹이 없으면, 나머지는 모두 소용없는 것입니다. ’(16쪽)

이 책은 보르헤스<사진>가 칠일 밤에 걸쳐 강연한 일곱 가지 문학 얘기를 주제별로 묶은 것이다. 1977년 여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세오 극장에서 행했던 강연 초록을 여러 차례 수정한 끝에 1980년에 발간했고, 이번에 한국어로 초역됐다. 그가 선택한 주제들은 ‘신곡’ ‘악몽’ ‘천하룻밤의 이야기’ ‘불교’ ‘시’ ‘카발라’ ‘실명’ 등이다. 죽는 날까지 마치 유언장처럼 그를 뜨겁게 달군 주제들이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독자들에게는 수많은 고전과 현대물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일종의 독서 에세이로 보일 것이다.

“천국은 도서관과 같은 곳”이라고 비유한 보르헤스는 1955년 아람부루 정부에 의해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됐다. (231쪽) 아르헨티나 출신의 그(1899~1986)는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 ‘도서관장’이란 직함을 가장 영예롭게 생각했다. 밀튼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말년에 시력을 잃었듯이 그는 도서관에서 엄청난 양의 지식에 함빡 빠졌다가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실명에 이르게 된다.

‘20세기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 현대 환상문학의 거장, 소설을 죽음에서 구해낸 작가’로 불리는 보르헤스는 이 책에서 그가 어떤 작품과 사상들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문학 속의 보르헤스와 더불어 현실의 보르헤스를 보여주고, 인간적인 보르헤스도 알게 해준다. 이 책을 한마디로 줄이면 보르헤스의 문학적 운명을 밝히는 책이다.

‘항상 나는 내 운명이 무엇보다도 문학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게는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모든 것, 특히 나쁜 일들이 장기적으로는 글로 변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246쪽)

한 가지. 보르헤스의 어머니인 레오노르 아세베도는 9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아들의 책 한 권을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두었다. 그러나 그 책을 제외하고는 보르헤스의 집에 그의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보르헤스는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책들과 ‘중요하지 않은’ 자기 책들을 뒤섞어 놓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허영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67쪽) 김광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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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신화 속 신들은 시대에 따라 변신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해
이진성 지음 / 아카넷 / 560쪽 / 1만8000원


“제우스는 헤라와의 사이에서 아레스를 낳았고, 레토와의 사이에서 아폴론을 낳았어요.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와 결혼해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리스 신화(神話)에 나오는 신(神)과 영웅들의 계보를 줄줄 읊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진성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그리스 신화의 이해’는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그리스 신화 붐을 보며 “이제 신화라는 ‘고전(古典)’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이다.

“그동안 그리스 신화 관련 서적은 대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나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참고한 에피소드 중심의 서술이 많았습니다. 이런 방식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신화의 숲’을 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됐죠.”

그보다 먼저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서 ‘그리스 신화 붐’이 일어났을까?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지적 호기심이 늘어나게 됩니다. 외국여행의 기회가 많아졌고 서구와의 왕래도 흔한 일이 됐죠.

그런데 서양 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 문명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초창기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던 대학생들이 이제 부모가 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읽힌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단지 그것뿐일까? “또 있죠. 그리스 신화에는 아이들이 열광할 만한 ‘재미’가 있습니다!” 신화에는 다른 문학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는 환상성과 초현실성이 존재한다는 것. “600만불의 사나이나 수퍼맨 같은 SF 수퍼 히어로들은 모두 그 원형이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 신화’에 있단 말입니다.”

앞서 나온 ‘신화의 숲’ 이야기로 돌아가자.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나온 벌핀치의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지만 몇 십년 전 우리말로 그 책이 번역됐을 땐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서양의 고대사와 지명·인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신화의 총체적인 이해’를 노린 일종의 개론서다. 말이 ‘개론서’지 분량은 600페이지에 가깝다. 신화의 성격과 특징, 형성 과정을 먼저 제시한 뒤 ‘창세 신화’ ‘올림포스 신화’ ‘영웅 신화’의 3개 장으로 구분해 신화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뒤 그리스 신화의 역사적 변모와 연구사까지 소개했다.

“서구 문화가 세계성을 확보하게 된 원인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담겨져 있어요. ‘개념 중심’의 고전이 힘을 얻은 동양에 비해 서양은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작가적 상상력’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상력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용되고 반복되면서 서구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제우스 신은 십자가를 든 배불뚝이 수도승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가장 도덕적인 인물’의 형상화였다는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이 교수가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시절로 올라간다. 유학생인 그의 눈에 비쳤던 유럽문명은 온통 그리스 신화에 침잠되고 채색된 듯한 모습이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라오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비너스의 탄생’…. 서양문명 공통의 고전이라고 할 그리스 신화를 모르고선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 오르페우스 신화를 소재로 ‘신화 및 신비주의적 발상’이란 제목의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10대학 신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신화 탐구 역정’을 계속됐다.

“새학기에 책 제목과 같은 교양강의를 개설했어요. 수강생이 300명 가까이 몰리는 걸 보고 젊은 학생들이 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실감했죠. 강의실이 넘쳐 많은 학생들이 그냥 돌아갔습니다만….” 이 교수는 그리스 신화 중 가장 감명깊은 부분을 묻자 “인간의 욕망·질투·명예와 온갖 전쟁·영웅담이 펼쳐지는 트로이 전쟁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의 백미”라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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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예술의 뒷면에 어른거리는 경제의 그림자

예술의 역사-경제적 접근 … 이재희·이미혜 지음 / 경성대 출판부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예술에도 작용한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 등장한 근대소설은 경제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시장 경제가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동하는 중간 계급의 생활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들이 유행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왕정과 귀족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제도가 엄존했기 때문에, 소설가들은 비사실적인 우화와 귀족의 생활을 반영하는 에로티시즘에 탐닉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왕이나 귀족 등 고귀한 신분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지만, 18세기 영국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전 세계를 무대로 부를 축적했던 당시 중간 계급의 세계관을 대변했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동안 금욕적으로 지내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크루소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재화를 거두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중간 계급의 자유방임주의를 반영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앞서서 자유주의를 예찬한 셈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어떻게 富를 축적했나

18세기에 바로크 미술이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로 넘어가면서, 화폭에는 궁정의 풍속이 아니라, 귀족들의 사냥과 아유회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됐다. 위선적인 궁정 생활에 싫증이 난 귀족들이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전원 생활을 이상화했기 때문이다.

궁전 안에 시골집을 지어놓고 양치기 놀이를 즐겼던 귀족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미술에서는 양치기 소년이 자주 등장했고, 그림 속의 양치기는 거친 노동에 시달리는 청소년이 아니라,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양떼를 바라보는 기품있는 인물로 묘사됐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노동문학이 크게 떠올랐다. 후원자를 잃은 작가들이 실업자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면서, 당시 증가된 노동자 계급에 심정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작가들은 왕과 귀족에 이어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지를 비판하면서 하층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동 문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문학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은 19세기 후반에 문맹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노동문학에는 관심이 없었다”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답답하고 비참한 일상 생활을 다룬 소설보다는 귀족과 중간 계급의 생활을 다룬 통속 소설을 읽으며 잠시나마 환상에 젖는 편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생활을 다룬 에밀 졸라의 소설들은 주로 중간 계급에서 널리 읽혔다. 하층민들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를 통해 안락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중간 계급들 덕분에 졸라의 소설들은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10만부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와 불문학자가 공동으로 펴낸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의 예술사를 훑어 가면서 시대별로 예술과 경제의 상호 작용을 확인시켜준다. 난삽한 이론보다는 풍부한 사례들을 대거 동원하면서 서양 예술에 드리워진 경제의 흔적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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