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백설공주>를 봤다.

몇년 전, 줄리아 로버츠가 악한 계모역을 맡았다는 바로 그 버전이다. 90년대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놓았던(좀 식상한 표현이긴 하다) 우리의 줄리아가 일선에서 물러나 조연을 맡았다. 그것도 악역이라니. 그래도 조연이라고 하기엔 제법 비중이 있는 역할이라 그냥 쓰리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미국 영화는 비주얼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또 그런만큼 이 영화는 비주얼 갑이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이야기와 조금은 다르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래도 뭐 크게 바뀐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아쉽기도 한데, 백설공주를 일종의 전사로 만들어 놓은 건 나쁘지 않은데, 계모에 대한 이미지가 아쉽다. 계모가 남편을 죽게 만들고 세금을 자기 치장에 써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왜 여자는 그런 인물로만 그리는지 모르겠다. 남자를 악인으로 만들면 최소한 사치하는 인간으로는 안 그리던데...

 

그래도 볼만하다. 그런데 엔딩은 좀.. 감독의 취향인 것 같긴한데 무슨 인도풍의 노래를 부르고 끝난다. 차리리 발리우드 버전으로 영화를 만들어 그렇게 끝난다면 이해하겠는데 다와서 이건 뭐지 싶기도 하다.

 

백설공주 역의 릴리 콜린스는 처음 보는 배운데 진한 눈썹을 제외하면 진짜 예쁘긴 하다. 줄리아의 시대는 가고 릴리가 온 줄도 몰랐구나 싶다. 그나저나 줄리아 이 영화 이후 출연작이 있나 했더니 2018년까지 그래도 꾸준히 영화 출연을 했네. 내가 그동안 이 친구의 출세작 몇 작품 외엔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싶다. 그저 메릴 스트립만큼이나 오래 가는 배우가 됐으면 한다.

 

주일 날 아침에 tv에서 영화 채널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본다고 해도 끝까지 볼 수도 없고. 그런데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옛 시절을 생각하며 봤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영화속에 흘렀던 노래들은 지금도 흥얼거릴만큼 어렵지않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가끔은 좀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도 잘 나간다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도 음악은 좋지만 따라나 부를 수 있나. '도레미 송'이나 '에델베이스' 못 부르는 사람 있는가? 중학시절 영화가 너무 좋아 책도 사 봤다. 하지만 책은 좀 별로였다.     

 

그런데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서보니 새삼 영화가 현실성이 별로 없지 싶다. 스토리 배경이 2차 대전 전후였던 것 같은데 전혀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문득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이 났다. 마치 당대 유럽의 어느 유명한 호텔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다. 과연 유럽에 잘 사는 귀족들은 얼마만한 부를 가지고 있을까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뭐 그도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이 많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개 장교가 혼자 7명이나 되는 자녀 양육에, 입주 가정교사와 적지않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호텔 수준의 연회가 전시 상황에서 가능할까? 새삼 이런 것들이 보이더라. 역시 이런 영화는 한 번만 봐야한다.

 

내용은 잘 이해 못하겠는데 몇 편의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보여주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픽사 애니메이션도 좋긴한데 둘중 어느 것부터 보겠냐고 묻는다면 난 당연 프랑스 것부터다. 그만큼 프랑스 애니메이션은 독특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다. 더구나 이 애니메이션은 밤의 이미지를 극대화 했다. 그러면 난 환장한다. 더불어 아프리카와 이집트풍을 적절히 믹스한 느낌이다. 나중에 한 번 더 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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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7-2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설공주에서 백설공주는 전사가 되는군요 계모는 여전히 나쁘게 나오고... 계모하고 백설공주하고 힘을 합치는 걸로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왕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기도 하니... 어떤 데서는 왕이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저도 예전에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언젠가 들으니 줄리 앤드류스는 어떤 수술이 잘 안 돼서 노래를 잘 못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때 참 안 좋았을 듯한데 나이 먹고 그걸 재미있게 말하기도 했답니다 긍정스러운 사람인가 봅니다


희선

stella.K 2020-07-28 15:47   좋아요 1 | URL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캐릭터죠.
지금까지 백설공주 이야기가 여러 버전이 있더군요.
흥미롭긴 합니다.

줄리 앤드류스가 병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1935년생이더군요.
최근까지도 영화활동을 했더라구요.
대단하다 싶어요. 존경스럽고.
나이들어 활동 안하는 배우들도 많은데
죽을 병이 아니라면 자기하던 일은 계속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난 2월, 우리 영화 <기생충>이 세계 주요 영화제를 석권하고 마침내 미국의 아카데미까지 넘보고 있을 때, 미국의 한 원로 배우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름 아닌 커크 더글라스다. 향년 나이 103세. 고인에겐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난 그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 활동을 같이했던 영화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타계했기 때문에 그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커크 더글라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글쎄,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외국 영화를 안방에서도 보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대략 1970년대에) 우리에겐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이라 일컫는 세대가 있었다. 바로 그때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던 1 세대 배우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무튼 그의 부고 소식을 들으니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간 배우들이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를테면 앤서니 퀸이나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오드리 헵번 등등의 배우가. 그들은 정말 화면 안에서 빛났다. 


가 빈센트 반 고흐로 분하고 나왔던 1956년작 <열정의 랩소디>란 영화는 정말 볼만하다. 사실 이 영화 이후에도 고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보다 많이 만들어졌다. 드라마도 있는 것으로 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러빙 빈센트>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론 실사에 고흐의 필치를 살렸다는 측면에서 기술의 승리를 보여준 건 맞지만 때문에 오히려 감동은 좀 반감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보단 모든 고흐 전기 영화의 아버지 격인 이 <열정의 랩소디>가 오히려 인물에 충실해 보인다. 특히 커크 더글라스가 연기한 고흐는 정말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게 몰입도가 상당히 좋다. 


우리는 흔히 고흐를 두고 고독의 화가라고 말한다. 왜 그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잘 알다시피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친구와의(화가 세잔) 우정을 지켜나가는 것도 서툴렀고, 사랑은 더더욱 그랬다. 고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 아쉽게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잃어야 했다. 누가 보면 사랑은 밀당인데 그런 테크닉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비웃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이 어디 테크닉만 가지고 되는 것일까. 사랑을 고백했다 거절당한 그를 보면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못해도 한 번 정도는 더 노력해 봐야 하는 건 아니냐고 한다면 그건 어쩌면 그는 물론이고 상대에게도 모독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문득  <봄. 봄>과 <소낙비>의 작가 김유정을 떠올렸다. 그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죽고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집안이 급격히 기울었다. 그는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난봉꾼인 형과 고집불통에 수전노의 아버지가 서로 불화하는 것을 보며 우울한 소년이 되어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만다. 어머니를 여읜 지 2년 만의 일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나이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그는 소년 시절부터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했던 것 같다.


형은 아버지와 불화했지만 유정에게만큼은 잘해 주었다고 한다. 형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을 때도 그만큼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형이 재산을 거덜내고, 고향인 강원도 실레 마을 이혼한 둘째 누이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을 때 사랑이 찾아왔으니 상대는 박녹주였다. 박녹주는 김유정 보다 나이 많은(그래 봐야 두 살 연상이다) 화류계 판소리 명창이다. 하지만 둘은 어울리지 않은 짝이었고,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인회남은 악몽에서 깨어나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유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박녹주에서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담배 연기 가득 찬 방에서 밤낮없이 연애편지에만 매달렸고, 나중엔 자신을 안 만나 준다고 그녀에게 협박과 공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박녹주를 사랑한다'라고 혈서까지 써서 일기장에 간직하기도 했단다. 이쯤 되면 집착을 넘어 광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훗날 그의 집착적 짝사랑은 끝나긴 했지만 몇 년 후, 박봉자라는 여인을 사진만 보고 반하여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는 실패다.


이런 김유정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그가 일찍 어머니를 여읜 데서 온 외로움 때문일 거라며, 실제로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뿔뿔이 출가해버린 누이들에게서는 예전과 같은 애정을 기대할 수 없기도 했으니 한편 이해할 것도 같다. 그렇다면 사진으로만 본 박봉자란 여인에게 사랑을 퍼부었던 것도 그녀가 그의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정도라면 고흐는 김유정에 댈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김유정의 집착이나, 고흐가 훗날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기까지 둘의 공통점은 우리가 미쳐 다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갔다는 점일 것이다. 고독이 예술에 절대적인지 그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둘은 우리가 인정해 줄 만한 예술가임엔 틀림없다. 하나는 미술에서, 하나는 문학에서. 그리고 이들의 생애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만 접할 수 있는 우리는 그저 쓸쓸함으로 그들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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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드디어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걸까? 우리나라 영화상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겠지만 세계가, 그것도 저 콧대 놓은 미국의 아카데미를 굴복시켰다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긴 어느 예술가가 남자의 소변기 하나 전시장에 갔다 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우기면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세상인데 세계적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극찬해서 뽑은 상이니 거기에 굳이 뭐라 할 필요는 없다. 주는 떡인데 왜 안 받겠는가.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좋다고 따라서 나도 좋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가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영화로 봉준호 영화의 실체를 본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은 봉준호 영화를 좋아했다. 재밌지 않은가. 유머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진지한 박찬욱 영화보다 훨 났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균열을 느꼈던 건 저 유명한 <설국 열차>에서였다. 유머를 아스라이 다 걷어내고 대책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것을 보고 한 없이 떨떠름했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 후로 봉 감독의 영화를 굳이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영화 마니아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운이 좋아 얻어걸리면 그때 보지 뭐 했던 게 오늘날에 이르렀다.   


영화는 좀 충격적이긴 하다.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의문이 남기도 한다. 물론 기존의 영화가 하층민을 어떻게 보여 주었나를 생각할 때 어찌 보면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하층민의 삶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주로 착하고, 어리숙하며, 자주 위험에 빠지는 설정으로 그려 왔다. 그럴 때 자본주의자들은 악역을 맡고, 가난한 자를 착취 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노동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가난한 하층민들에게서 기생충 같은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기생충이 하층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인간은 계층과 상관없이 도처에 깔렸다. 그것을 왜 하필 감독은 계층 간의 문제로 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생충은 선량한 사람에게 빨대 꽂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 빨대를 꽂았다는 초반 설정은 흥미롭기는 했다. 적어도 박소담이 탐스러운 복숭아를 들고 부잣집 동네 골목을 싱그럽게 걸을 때까지만 해도. 게다가 기택의 가족들은 없이 살면서 영악하고, 연교네 사람들은 자기네들 세계 안에 갇혀 다소 어리숙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못 믿어하며,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한다. 그게 21세기 신흥 부자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누구는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 현대 사회를 비판하려는 하나의 우화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기생하는 인간에 대해 잘못 설정하거나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생하는 인간은 그렇게 하층민 대 상층민이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라, 어떤 계층이던지 간에 상대를 끊임없이 갉아먹고 이용하는 인물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택네 가족의 그런 설정이 꼭 나쁜 것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마음 먹기에 따라선 결말을 그렇게 가져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매번 봉 감독의 영화는 어떠한 결말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난다. 그게 봉 감독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 같기도 하다. 하층민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어떻게든 괴물에게서 빠져나와 살아 보려고 허우적대지만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괴물>에서 <마더>까지) 이젠 물에 가라앉기까지 한다. 하층민에게 일체의 희망 같은 건 없다는 식이다.    


누구는 그가 소위, 있는 집 자식이라 영화를 그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확한 건 알 수는 없고,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니었을까. 그게 틀리지 않다면 가난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뭔가 모를 트라우마로 계속 계층 간의 문제를 파고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해 그토록이나 통렬한 것일까. 


영화에서 계층을 통렬하게 가르는 대사는 의외로 연교네 꼬마 도령의 입에서 나온다. 신분을 세탁하고 부자 집에 입성하게 된 기택네 가족. 각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역할을 하는데 꼬마 도령의 후각은 그것을 속이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똑같은 냄새가 난다고 흘리듯 얘기를 한다. 그 대사가 제법 예리하다. 후각은 예민하지만 동시에 우매하기도 하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는 그것을 기막히게 가려내지만 같은 사람끼리는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사회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김치와 마늘 냄새에 둔하고, 서양 사람이 버터 냄새에 둔한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후각은 인종까지도 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그 부잣집 도령의 대사는 구별 짓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을 본능에 가깝게 포착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 구별 짓기는 향수를 쳐 바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결말은 상당히 비극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구나 싶기도 하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결코 만만히 보거나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던가,  오히려 계층 간의 문제를 더 조장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화가 이제까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 역사에 대해 그렸다면,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부자를 어떻게  이용하고 역습하는가를 기생충이란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하층민끼리의 대결을 부잣집이란 그라운드에서 보여준다는 설정도 재미있긴 하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통쾌한 결말 그런 건 없다. 영화가 굳이 교훈적이거나 통쾌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봉 감독의 영화가 매번 이런 식이라면 식상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봉 감독의 영화적 디테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봉테일이란 수식어를 달아주기도 하지만 앞으로 디테일은 좋은데 스토리가 약하다는 말을 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는 또 그렇다고 쳐도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왜 미국이 아카데미의 영광을 이 영화에 허락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이것도 오리엔탈리즘일까? 미국의 백인주의가 결코 유색인종에게 호의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엔 뭔가의 숨겨진 의도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기네들이 주저하는 뭔가의 주제를 대신해 줬다면? 즉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있는 자를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비해 가난한 자들은 지극히 소극적으로 다뤘다. 그건 당연하다. 윤리적인 문제를 피하고 싶고, 무엇보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꽃이라지 않는가. 가난한 자들의 냄새나는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까발려 주다니. 손 안 대고 코를 푼 기분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게으르고, 능력도 없으며, 얍삽하고, 우매하다는 것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보여줬다. 심지어 그들은 연대할 줄 모르고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영화는 가난한 자가 부자를 넘보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와 가난한 자를 만만히 대해줬다 오히려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걸 자본주의자들을 위한 교훈으로 이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닌지.   


그걸 인종의 문제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동안 아카데미가 자국에게만 돌아간다는 비판이 있어왔으니 생색내기에도 좋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추측일 뿐이다. 상은 좋은 것이다. 상은 더 넓고 웅장한 영화 제작의 세계로 가는데 확실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난 그저 봉 감독이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길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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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27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딩 부분에서 지적해 주신 대로
아카데미의 전술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비난을 피하고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
고나 할까요.

그나저나...
트황상 말대로 아카데미가 세계 영화
상이 아닌 자국을 위한 영화상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죠.

stella.K 2020-04-27 18:08   좋아요 1 | URL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한쪽에선 아카데미의 그런 결정에
비난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미국이란 다 그렇지 뭐 그랬는데
그게 이해가 가겠더라구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대종상이나 청룡영화상도
우리나라 영화 일색이잖아요.
그런 영화상을 만일 일본이나 중국 또는 제3국이 가져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화나죠.
암튼 이번에 아카데미가 통 크게 쓰긴 했어요.
작품상이나 감독상 둘 중 하나는 자국 영화로 해도
뭐라고 안 그랬을 텐데.
그 두 개 다 주고 땅을 치고 후회하진 않았는지 감히 상상이...ㅋㅋ

수이 2020-04-3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아직도 안 본 1인...... 봐야겠다 봐야겠다 하면서도 저는 아직까지 못 봤어요. 안 본건가;; 스텔라님 리뷰 읽으니까 얼른 봐야겠다 싶어요.

stella.K 2020-04-30 19:31   좋아요 0 | URL
ㅎㅎ 수연님도 안 보셨군요.
크게 기대는 마시구요. 뒤가 약간 충격적이어요.
그것만 감안하시면 보는데 크게 무리는 없을 거예요.
이거 그래도 소위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작품인데
꼭 남 얘기하는 것 같죠?ㅋㅋ

페크pek0501 2020-05-0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상영할 때 극장에서 봤어요. 역시 봉감독이구나 싶었죠.
하지만 큰 상을 수상할 영화로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깜놀, 이었어요.

비가 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죠. 상류층에선 어린 아들이 마당에 텐트를 치며 노는 반면,
하류층에선 변기에서 물이 넘치고 길거리에 물이 넘쳐 개고생을 하잖아요. 극명한 대비가
인상적이었어요. 한쪽에선 비가 낭만적 분위기를 풍기는데, 다른 한쪽에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죠.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스텔라 님이 쓰신 글 유익했습니다.

stella.K 2020-05-07 15:19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 말이어요. 큰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전 트럼프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그가 오스카를 이 작품에 준 것에
투덜거렸잖아요. 일견 이해는 가더라구요.
트럼프로선 절대 이해 못하죠.
암튼 주는 상 일부러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의외이긴 해요.ㅋ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그의 영화를 좋아해 볼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보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웬걸 그의 영화가 아니었다. 아마도 감독의 이름과 영화 제목이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해 착각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그렇게 멋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가 완전 빠져들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토니 타키타니.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그람은 잘 그리지만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성인이 되어 어느 여인의 가슴을 그리는데 정교하지만 느낌이 없다. 그냥 인형의 가슴을 그리는 것만 같다. 그런 것을 보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악단의 연주자로 그의 곁에 있지 않았던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독은 그의 친구다. 늘 조용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다. 결국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우연찮게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고독이 그의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그의 생애 없을 줄 알았다. 그는 너무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이젠 아내가 없으면 불안하다.


아내는 너무 사랑스럽다. 하지만 사랑스럽다는 건 사랑하기에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건 옷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쇼퍼홀릭이라는 것. 화구 외에는 살 것이 없는 토니와 옷이 자신의 빈 영혼을 채워준다고 믿는 아내 에이코와의 결혼은 처음엔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옷과 신발은 집에 그득하다 못해 포화상태다. 결국 그는 가볍게 아내에게 옷 사는 것을 자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아내는 노력해 보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에 허물어지고 극단적 선택인지 아니면 우발적 사고인지도 모를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홀로 남게 된 토니는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흔적을 지워야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방법 그대로 자신의 일을 도와줄 비서를 구하는데, 아내와 똑같은 사이즈와 발 크기를 가진 여자를 구한다. 그는 새로 온 비서에게 유니폼 삼아 아내의 옷을 입고 일해 주길 바란다. 그것을 통해 아내를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빠져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장센이 갑이다.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어떤 공간을 보여주기보단 큰 창을 자주 보여준다. 어린 토니의 집 주방 창문, 성인이 돼서 그가 일하는 사무실 창문, 결혼한 후 신혼집 주방, 침실도 온통 큰 창문이 보인다. 시점은 (거의 대부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구도다. 관객의 관음증을 최대한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인 걸까. 그게 또 호퍼의 도회적이면서도 쓸쓸한 이면을 보여주는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입체적인 공간감을 일부러 배제하고 회화적 느낌을 극대화 시켰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멀리서 슬로모션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와 등장한다. 그리고 간간히 보여주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숲. 일단 그런 것만 유심히 봐도 감독이 뛰어난 미술적 감각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영화엔 가급적 내레이션을 안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굳이 그걸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레이션은 보통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할 때 또는 낯설게 보기를 유도할 때 사용되겠지만, 이 영화는 연극에서의 방백처럼 등장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쇼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내가 토니의 말 한마디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또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토니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린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 사람의 옷이라고 하는 빈껍데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죽어야 비로소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공허를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비극성. 무엇보다 토니는 아내와 같은 사이즈의 여인을 구해 옷을 입게 하므로 위로를 넘어 광적으로 변해 가려고 하는 자신을 자각한다. 그런데 비해 졸지에 고급스러운 옷과 신발을 입게 된 토니의 새로운 비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왜 울었을까? 뭔가 압도된 듯하다. 이 화려하고 멋진 옷을 두고 간 나오코는 어떤 여자였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것처럼 감독은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를 꼬집으려 했던 건 아닌지. 또 그것은 영화 초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토니의 여자의 가슴을 그린 것과 뭔가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 마니아라면 영화 제목에서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하루키를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개인적으로 하루키 원작의 영화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언젠가 <상실의 시대>을 본 적이 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봐서 그런지 꽤 괜찮았다. 그땐 꽤 괜찮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 작품은 가히 좀 놀랍다 싶다. 보통은 원작을 영화화하면 잘해야 본전이란 선입견이 있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하루키의 원작을 200% 끌어올린 작품은 아닐까 한다.


누구는 하루키는 장편에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 그것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단편에서 감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단편은 정말 도시에서의 가난을 위트 있게 그린 작품으로 그 이미지가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에 나오는 이 작품은 어디서 영감을 얻었을까? 소소하게도 한 장의 티셔츠라고 한다. 마우리 섬에서 '토니'라는 서양식 이름에 '타키타니'라는 성이 붙은 기묘한 이름이 쓰인 1달러짜리 티셔츠를 구입한 하루키는 그 셔츠를 입을 때마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에 착안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감독은 또 그 작품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하나하나의 영상적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게다가 전편에 흐르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뭔가 고독하면서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잘도 표현해 주었다. 이쯤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예술인들의 뮤즈는 아닐까? 이제 마니아뿐만 아니라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필히 하루키를 알아야 하는 하나의 문예 사조를 이룬 것만 같다. 하긴, 그는 언젠가 오리지널리티를 얘기했었다.    


사람들은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니 고독을 벗 삼으라고 한다. 고독은 스스로 있는 존재임을 확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고독한가? 당신의 고독 끝에 누가 있는지를 직시해 보라. 그렇다면 그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다고 그 영혼은 바스러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해도 꽉 끌어안으면 쉽게 깨지는 크리스털 술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기를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쩌면 하루키를 읽으며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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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8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2-28 18: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도 하죠.
그게 인간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페크pek0501 2020-02-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작품을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네다섯 권 읽었는데 썩 좋다할 것은 없었는데
신간이 나오면 또 사고 싶은 묘한 작가예요. 가끔 반짝이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작가라서
그런지... 작가의 명성도 한몫 하겠지요.

stella.K 2020-02-29 15:1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으시네요. 이 작품 때문에 <렉싱턴의 유령>을 보고 싶기도 한데
영화가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럼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읽고 싶단 말이죠.ㅋ
 

요즘 영화를 드문드문 보고 있어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의외로 몰입도가 좋다.

나 역시 IMF를 거쳐 왔지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것을 영화는 상당히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 극영화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그 시절 매스컴은 IMF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편집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문득 그것을 보도한 당시의 공중파 앵커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영화는 국가 부도의 날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한시현(김혜수 분)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국가의 부도를 막아 보려고 노력하는 부류다. 또 하나는 부도가 날 것을 예상하고 한몫 단단히 챙기는 즉 위기는 기회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윤정학(유아인 분).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다 희망에 배신당하는 갑수(허준호 분). 그런 국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과 그에 편승하는 일파들. 그들은 그 시대가 그랬던 것만큼 한시현을 향해서도 여성 비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갑수를 보면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IMF가 있기 훨씬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중학교 땐가,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오셔서 다음 날 술병이 나서 출근을 못하셨다. 뭔가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난 모양인데 어리다는 핑계로 차마 여쭤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 조그만 사업체지만 대표로서의 무게가 얼마만 한 건지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갑수를 보면서 IMF 그 시절에도 살아계셨다면 똑같이 힘들어하셨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착하고 성실함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또한 서글펐다. 국민의 대다수가 갑수 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갑수 같은 부류가 잘 살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네들이 목표한 것이 그것인 양 산다. 즉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가장으로 가정을 건사 잘하고,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아프지 않고 잘 살아주는 것. 경제에 관해선 그다지 아는 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시현이 보여주는 캐릭터도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번번이 관료적인 재정국 차관과 그 일파들과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똑똑하고 지혜로운 부류는 단연 아무도 믿지 않겠다던 윤정학이다. 경제라는 것, 자본이라는 건 언제나 그냥 있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여러 모양으로 그 모습을 바꾸는 도깨비 같은 것이다. 그것의 흐름을 알고 그것 위에 군림했을 때 엄청난 국가적 재앙에서 살아남았다.


국가 부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IMF 구제 금융은 신청하지 않을 거라고 언론을 하나 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 같이 실천되었다. 언론과 정치를 믿으면 안 된다. 그래 놓고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국민의 저력이라며 한껏 띄워 주기도 한다. 물론 그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겠지만, 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과 백성은 호구가 되어야 하는가. 뭐 그것까지도 좋다고 치자. 정치지도자들 눈에 우리는 개 돼지로 비치기까지 하지 않는가?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좀 화가 났다. 영화는 영화로 보는 게 좋은데 그때를 너무 리얼하게 다루고 있으니 그냥은 봐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관료주의자들에 대하여 분노만 하면 안 된다. 


나아가 어떻게 애국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금이나 털컥 내주는 것만으로 애국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애국은 좀 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네 부류의 사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수가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된다면 관료주의자들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세상엔 갑수 같은 사람이 훨씬 많고, 갑수의 삶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게 뭐가 잘못인가. 하지만 그들 역시도 등 따습고 배 부르면 나태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관료주의자들은 비로 이런 점을 들어 개 돼지라고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 네 부류의 사람은 역사적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항상 있어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관료들도 정신만 차리면 나라에 큰 일을 할 사람들 아닌가? 


분명한 건 국가 운영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분명 지나간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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