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샤넬 - Coco before Chane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앤 폰테인
주연 : 오드리 토투, 알레산드로 니볼라

  

전기 영화가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는 일종의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다. 그건 대체로 맞는 이야기 같다. 그래도 내가 본  몇 편의 전기 영화들은 나름 흥미롭게 본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면, 채플린이라든지 쟌다르크의 전기 영화등은 말이다. 하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영상에서 먹어주고 들어가는 것은 있으니 보고 후회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나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영상은 좋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쉬움 또한 어쩔 수 없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지극히 프랑스적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관객들이 허리우드 화법에 익숙해진 탓이란 말도 될 것도 같다. 허리우드적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해서 다 실망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 나라 사람이 그 나라 정서에 맞게 만들었다면 그것도 나름 좋은 것이라고 인정해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머지는 허리우드적이어야 한다면 그것도 좀 우습지 않은가? 영화는 허리우드표란 공식만 빼면 그 나름 인정해 줄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정적이란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한 시대를 풍미한 인간이 되려면 당시의 금기를 깨고, 파격적인 뭔가의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 샤넬은 파격적인 의상과 소품으로 당시의 평범함을 압도했을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모든 여자들이 치렁치렁한 치마를 고집할 때 그녀는 과감히 바지를 선택했고, 파티에서도 모든 여자들이 밝고 화사한 핑크의 옷을 입었을 때 그녀는 검은 드레스가 갖는 또 다른 의미를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 사람은 개인주의적이어서 일까? 그녀의 그런 파격에 소근소근 뒤에서 말이 많아도 드러내놓고 좋다 싫다를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새로움을 조심스러워 하는  프랑스 여인들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어떻게 변화를 선도해 갔는지가 생략 되었다. 그뿐인가?  그녀가 자신의 일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지,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는지도 그다지 표현되지 않았다. 그저 사랑과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샤넬.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일에만 파묻혀 살다 죽은 여자로만 그렸다. 그것은 확실히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언듯 싶다. 물론 샤넬이 당시로선 앞서간 여성이었을테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일만을 하고 살았다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수동적 여성상을 보여준 것은 아닌가 싶다. 

당시로선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일을 선택한 것은 진보적 선택이었겠지만 오늘 날은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다. 분명 뭐 하나에 독보적이고 입지전적인 인간이 되려면 결혼이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과 일, 둘 다에서 성공을 거두는 인간들이 무수히 많이 생겨났다. 그만큼 살기가 좋아졌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런 발전된 세상에서 과거에 살던 사람을 영화에서 복원한다는 건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영화 제작진들은 존 더 고민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감독이 여성 감독인 것도 같은데 같은 여성으로서 이 정도 밖에 못 만들었다는 게 아쉽다.   


이렇게 쓰고 보니 있는 그대로의 영화라기 보단 비판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샤넬의 연인 카펠이 마음에 든다. 당시 많은 여성의 결혼관이 남자 잘 만나 결혼하는 것이고, 남자들 역시 여자들이 일을 취미로 하라고 했을 때 진정으로 샤넬을 응원했다. 멋진 남자다. 이런 남자는 꼭 영화에서 무슨 사고로 일찍 죽는다. 클리셰이긴 하지만 확실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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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2-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좀 더 스케일 크게 숲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나무만 보여준 느낌이랄까. 좀 안타까웠습니다. 2%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stella.K 2010-02-15 15:44   좋아요 0 | URL
오, 세실님! 그렇죠? 아쉬웠어요.
그나저나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거죠?^^

세실 2010-02-15 15:45   좋아요 0 | URL
넵..
이번 설엔 옆지기랑 저 둘이서 음식을 준비했답니다.
힘들어 죽는줄 ㅋㅋ
그래서 오늘은 하루종일 뒹글거리고 있답니다.

stella.K 2010-02-15 15:49   좋아요 0 | URL
와우, 남편분이랑 같이 음식도 만드셨군요.
힘드셨겠지만 나름 좋은 시간이셨겠어요.^^

프레이야 2010-02-1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설연휴는 잘 쉬셨어요?
저도 이 영화 리뷰를 쓴 적이 있어요.
좀 의존적으로 그렸지않나 해서 아쉬워했었죠.

stella.K 2010-02-16 10:56   좋아요 0 | URL
알아요. 이 영화 가지고 많은 사람이 리뷰를 썼더군요.
그중 프레이야님이 추천을 가장 많이 받으셨잖아요.
저는 추천 그다지 기대 안했는데 의외로 받았네요. 히히.
사실 열심히 쓰기는 '블랙'을 열심히 썼는데 그건 좀...
확실히 내가 열심히 쓰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좀 다른가 봐요. 흐흑~
전 설연휴 그동안 못 본 영화와 함께 잘 보냈어요.
프레이야님도 잘 보내셨죠?^^
 
블랙 - Blac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산자이 릴라 반살리
주연 : 아미타브 바흐찬, 라니 무커지

누구든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은 적이 한번씩은 다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나면 그 사람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양, 다음에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은연 중 갖게 되어 사람에게 마음 문을 못 열게 된다. 열더라도 반쯤은 문을 닫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인간에게 과연 희망은 있을까? 무한한 신뢰와 교감은 가능한 것일까?  

여기 한 소녀가 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래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중 삼중고의 아이다. 그 아이는 또한 야생마이기도 하다.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미셸이 이 아이의 이름이다. 그 아이가 왜 그토록 뻗대기만 하는지 나는 영화 초반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있으니 이해할 것도 같다. 아이는 한마디로 자신의 감각을 이용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처음부터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을 못 보면 청각이라도 뛰어나야 할 텐데, 귀로도 들을 수 없으니 무엇하나 사물을 느끼고 만진다는 게 불가능하다 못해 두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한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미셸이 만난 선생님의 이름은 사하이. 남자고 괴짜다. 이 낮선 선생님을 진정한 스승으로 맞아 들일 때까지 미셸이나 미셸의 부모는 그를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미셸을 그렇게 다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집 세고. 제 3자가 봐도 너무 강압적이지 않은가? 미셸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부모가 그를 신뢰할 수 없다. 그쯤에서 사하이로서도 백기들고 나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사하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고 그 집을 나온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끝까지 미셸을 책임진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도 그를 집에 두고 싶어하지 않았던 미셸의 아버지는 당장 나가줄 것을 권고한다. 자신이 고용한 사람이니 해고할 권리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하이는 선생은 고용되고 말고의 존재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선생은 선생일뿐이라고.(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런 그의 우직함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사하이는 결국 모든 것을 그만두고 나올 찰라 미셸의 버릇없는 행동을 보고, "그래 좋아. 이왕 그만 두는데 저것 하나는 내가 고쳐주고 떠나겠어" 하며 미셸에게 달려든다.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해고한 미셸의 아버지가 20일간 출장은 간다는 것이다. 오, 예! 이런 황금 같은 기간을 그냥 놓칠 수 없는 그는 엄마를 설득해 20일 동안에 미셸이 변화가 없으면 그땐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한다. 그 20일 동안의 사하이의 고군분투는 정말 눈물겹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소득없이 미셸의 집을 떠나야 했다. 그것도 미셸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지만 마지막 1분1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 결국 미셸의 아버지와 마주친다. 얼마나 재수없는 순간인가? 


하지만 미셸의 깨달음의 순간은 또한 이때 일어난다. 미셸은 바로 이때야 비로소 사물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고 소통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건 시쳇말로 '도를 트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때 느끼는 또 한 번 세상을 넓은 시야로 보게 되고, 가슴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건 미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도 어느 한 분야에서 고군분투 하다가 "유레카!"하며 탄성을 지르는 순간이 있지 아니한가? 이런 순간은 솔직히 인생에 있어서 몇 번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런 순간을 맞지 못하고 죽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이 있다는 것. 나는 과연 지금까지 몇 번의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미셸과 그 부모는 얼마나 기뻤을까? 이것은 사하이 조차도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셸은 이제 더 이상 야생마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의 순간이 있고나니 미셸은 나날이 숙녀다워졌고, 꿈을 꿀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의 꿈은 대학을 진학하는 것. 다행히도 미셸은 무사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만한 그 지점에서 미셸은 갈등과 좌절도 겪게 된다. 수없이 되풀이 되는 낙제. 동생의 결혼을 보면서 자신이 과연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 온전한 여성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정체성의 혼란.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사하이 선생님이 어느 날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났다. 그렇게도 가르치는 것에 철저하셨고 자상하셨던 분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이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일어나기 위해 서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위협이 된다. 무엇보다 공부는 아무리 해도 낙제를 면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싶을 때 그녀를 강하게 잡았던 것은 사하이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진 선생님 때문에 그녀는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리고 결국 와신상담 끝에 학점을 이수하고 당당하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간지 20년만의 일이고 선생님과 이별하게 된지 12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졸업식 날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됐고 수소문 끝에 사하이 선생님을 찾았을 때 자신의 학사복 입은 모습으로 선생님을 뵐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선생님의 병은 깊어질 때로 깊어져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셸은 그 옛날 자신을 가르쳤던 그 방식 그대로 선생님을 가르쳤고, 그 순간 만큼은 기억을 되찾은 사하이는 기쁠 때면 미셸과 함께 추었던 어색한 춤을 춘다.   

아, 이 마지막 부분은 정말 감동이었다. 나는 어느 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하이를 불쌍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위대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대로 병에 걸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미셸을 지켜봐 주며 늙는 것도 박수를 받을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는 아우라일 것이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병.  

제자가 잘되는 것은 선생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 이탈리아의 거성 발타사르 그라시안이 말했던 것처럼, 그런 선생님은 존경은 받을 수 있지 모르지만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라시안은 존경을 받으면 사랑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하이라면 다르다. 그는 존경도 받지만 사랑도 받는다. 뭐 때문에? 자신이 한때 미셸을 가르쳤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본래 누가 조금만 잘되도 배가 아픈 존재지만 그것이 또 자신 때문이라면 얼마나 뻐기기 좋아하는 존재던가? 또한, 감추고 숨어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 내가 이 사람 때문에 이렇게 잘 되었노라고 말하기 좋아하기도 한다. 거기엔 어떠한 심리가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레이건 대통령을 나름 좋아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미합중국의 사랑 받는대통령이었지만 그의 말년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우리의 인생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젊었을 때 뭐했다고 자신의 업적 기리기 하는 거 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초두에 상처 받은 인간에 대해서 말했다. 그건 무엇보다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찔리기도 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난 한때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아볼 때 '난 정말 선생도 아니었구나.' 할 때가 있다. 특히 내가 교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폐기가 있는 한 아이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땐 내가 상담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떨결에 맡게 됐는데 난 그 아이의 이상 야릇한 행동에 아,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동안 녀석의 이상한 복수에 시달리곤 했다. 지금도 녀석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사람들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내가 사하이 같은 선생님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난 그때 왜 그렇게 선생으로써 책임감이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또 한 번 자책했다.  

상처 받을 것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핑계다. 100% 다 줘 보지도 못했으면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까? 뭐든지 나를 아낌없이 던질 수만 있다면 상처란 없다. 상처 받고, 안 받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인데 거기에 어떻게 상처가 있을 수 있을까? 특히 선생이 제자에게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건 이미 선생이 아니다. 그런데 허울만 좋은 선생이라면 제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선생님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열려고 했는데 결국 더 마음의 빗장을 잠그게 됐다면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사하이는 20일이라는 주어진 기간에 마지막 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과가 없다면 그건 그의 책임은 아니겠지. 그러므로 진정한 선생은 제자에게 실망이란 없다. 희망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미장센이 좋은 영화다. 발리우드 영화라 허리우드 문법에 철저하면서도 어떤 면에선 허리우드 영화를 능가하는 강점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그러면서도 허리우드에 너무 경도된 것은 아닌가? 난 인도 영화를 볼 때마다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진정한 인도 영화가 있지 않을까?) 

 두 주인공의 연기도 볼만 하지만 어린 미셸을 연기했던 아예샤 카푸르란 아역 배우의 연기가 실감난다. 하지만 인도에 과연 눈이 내리나 영화를 보면서 약간 갸우뚱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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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 April Snow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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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허진호
주연 : 배용준, 손예진

오랫만에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본 처음 본 건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그땐 영화를 잘 몰랐던 때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영화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하고 감동도 있어야 한다는 그냥 평범한 관객으로서, 내가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너무 잔잔하고 밋밋하기까지 했던 그런 영화로 기억 된다. 그때 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다들 감동했으며, 허진호 감독이야말로 영화를 아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런 반응이 나는 띄아 했었다. 뭐 그렇게 까지야... 단지 나쁘지 않다면 한석규와 심은하가 나와줬다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새겨볼만한 좋은 영화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도 나름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별 재미를 못봤던 영화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의 욘사마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일본에서는 인기가 많았다지?   

사실 이 영화는 좀 위험하긴 하다. 어떤 사람은 스와핑이라고 얘기하더만, 그건 너무 단순하게 얘기하는 것이고(그건 네 사람의 합의하에 하는 거 아닌가?) 문제는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면 섹스에 시들해지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는 법이라고, 연애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레어서 좋은 것이고(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불륜이라는 것도 도덕적으로 금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더 애틋하고 짠한 뭔가가 있어 사람을 자극한다. 이 영화도 영화 자체로나 내용으로 보다 그런 것들을 부추기고 자극해서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뭐 이 영화뿐이겠는가? 여타의 멜로 영화들이 인간의 내밀한 것을 보여줄 때 합법적인 부부관계에서는 보여주지 않고 꼭 연애나 불륜의 관계에서 보여준다.  

합법적인 부부관계에선 보여줄 것이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영화 문법이라면 이걸 좀 깨주는 영화도 나와줘도 되지 않을까? 합법적이고도 건전한 부부관계에서도 인간의 내밀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이것 또한 영화가 아니겠는가? 영화가 하지 못하는 게 어디 있으며 도전하지 못하는 금기의 영역이 어디있겠는가? 영화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한 반발짝 내지는 한발짝 앞선 뭔가를 보여주기도 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위험하지만 또한 범작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허진호 감독을 뭐라 할 생각이 없다. 적어도 이 영화까지는. 난 이 영화를 나름 좋아라 하면서 봤다. 그것은 대사를 그다지 많이 쓰지 않으면서(이건 작가의 몫이겠지만 내가 알기론 감독이 각본도 감당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줬다는 것이다(난 어느 새 이런 영화가 좋아졌다.) 

이를테면, 주인공 인수(배용준 분)와 서영(손예진 분)이 배우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다.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다. 더구나 서로의 배우자와 불륜관계라는 걸 알았다. 배신감에 치를 떤다. 둘은 그런 점에서 서로의 입장이 닮아있고 동병상련일게다. 물론 처음엔 서로를 바라보는 것 조차 민망하고 화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위로한다. 그들의 절제된 감정 흐름과 대사들이 관객을 절저하게 분리시켜 놓는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이들을 느껴보라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영화속 주인공들은 그런 불행 속에서도 아주 잠깐 잠깐씩 상대 때문에 웃는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웃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조금만 행복하면 불행을 생각하고, 불행하다 싶으면 어떻게든지 행복을 모색하는 존재. 모순되지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보여진다. 주인공이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 즉 죽음을 생각할 때 삶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럴 때 그의 죽음이 또는 그의 부재가 꼭 불행하게만 보여지지는 않았다. 감독은 이러한 면들을 잘 포착한다. 

암튼 이렇게 서로에게서 자신의 위로를 모색하다 보면(아마도 이 표현이 맞을 것이라고 본다. 서로는 서로에게 위로를 주려고 처음부터 애쓰지 않았으니), 남녀상열지사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상대는 배용준과 손예진이다. 어떻게 이들이 영화에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다. 이것은 조금 다르긴 <어 웨이 프롬 허>란 영화와도 약간은 닮아 있다. 

이들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거두고 마음을 조금씩 열 때 나눴던 대사들이 좋다. 이를테면, 서로의 하는 일을 묻는 장면. 인수가 상대의 물음에 대답하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할 때, 서영은 그냥 살림을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인수는 "그거 어려운 건데..."한다. 별것 아니지만 뭔가의 울림이 있다. 이런 별것 아닌 대사 한마디의 울림을 위해 절제하고 또 절제하는 것. 이것이 허진호 영화의 특징일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 고안해 낸 영화 문법은 아닐테지만. 

인수와 서영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들 각자의 배우자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도 뭐라 원망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묻게 되는 말. 사랑 앞에 윤리가 먼저일까? 이해가 먼저일까? 이건 확실히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란 복수의 논리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자신도 불륜을 해 봤더니 배우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됐더라는 식의 윤리를 배반함으로 이해를 구하고자 함도 아닌 것 같다. 결국 도덕이나 윤리 보다 앞서는 건 이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면 인수와 서영의 사랑이 인정 받는 꼴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또 얼마나 깨어지기 쉽고 불완전한가?  

영화에선 인수의 배우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만, 서영의 배우자는 끝내 죽었다. 영화에서는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인수의 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인수는 끝내 자신의 아내와 헤어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모르긴 해도 인수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했을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합의하게 헤어진 것일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에게로부터 보호받고 의지하길 원하지만 그 어디에도 보호받지도 의지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교차된 운명과 고독을 이 영화는 잘 표현해 줬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난 배용준이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잘 생겼다는 것 외에 무엇이 좋은 지를 모르겠다. 무엇보다 난 배우가 배우로서 열심히 스크린이나 카메라에 서야하는데 얼마만 한 번씩 서는 배우는  진정한 배우는 못된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오랜만에 봐서일까? 이 영화에선 꽤 괜찮게 나온다 싶다.  

손예진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불호가 엇갈리는 것 같긴 하지만 난 열심히 배우로써 활동하는 그녀가 나쁘지 않다. 인수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을 때 삼척 어느 횟집에서 울먹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서영으로서의 그녀가 참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김형경의 동명소설이 있다는데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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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2-08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용준하고 손예진을 기용하고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당시 평들이 안좋았지요.겨울연가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일본에 내다판다고 많은 비판이 있었던 영화더군요.

stella.K 2010-02-09 10:36   좋아요 0 | URL
아니 이런 영화가 뭐 어때서요?
물론 배용준이 일본에 너무 경도되고 있다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가 가진 부가가치를 생각하면 뭐 팔 수 있을 때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의 인기가 평생 갈 것도 아니잖습니까?
일본에 내다팔거라고 해서 영화를 너무 얕게 보는 것도 좀 우습네요.
그런 거라면 더 잘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보통 보면 보지도 않은 것들이 입소문만 가지고 뭐라고 그런 다니까요.
아니면 일본에 대해 괜히 악감정이 있거나...ㅉㅉ

프레이야 2010-02-1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리뷰 당선 축하해요~~
전 이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어요. 물론 영화의 느낌이 좋아서였고
뭔가 아쉬움 또한 남아서였어요. 책의 문장들이 지금은 잊혔지만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배우로서의 배용준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여기서의 느낌은 그런대로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스텔라님 말씀대로 서로 마음을 열어가던
과정과 특히 결미가 마음에 들더군요. 희망적으로요.
좋지않나요? 왜 그러면 안 되기라도 하냐구요? ㅎㅎ

stella.K 2010-02-10 20:5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댓글 보고 알았어요.
저 리뷰 왤케 잘 쓰는 걸까요? 아무래도 알라딘 영화팀이
저를 좋아하는가 봅니다. 켈켈켈.

왜 사람들은 이 영화의 진가를 모르나 보고 안타깝더라구요.
프레이야님 계셔서 너무 반가운 거 있죠?
배용준에 대한 생각까지도 저하고 일치하시네요. 반가워요.^^
 
내 사랑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이한
주연 : 감우성, 최강희 외

사실 이 영화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정일우가 아닐까 싶다. 이건 결코 칭찬은 아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정일우는 참 스크린 안에서 끊임없이 왕자 포즈만을 고집한다. 도무지 연기할 생각을 안하고 난 멋진 왕자야! 스스로 도취된 듯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표정만을 지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캐릭터 정말 왕짜증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나리오가 그렇다는 것이다. 배역들 하나 같이 싯적인 언어만을 구사하려고 한다. 좀 더 일상적이고 그래서 정말 아, 그래! 하는 그런 언어를 웬만해서 구사하지 않는다. 그냥 대사를 들으면 나쁘진 않은데 과연 저런 언어 스크린 밖에서도 쓰나? 싶다. 물론 안 쓸 것이다. 뭐 그래서 영화 아니겠어?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 예쁘게 잘 만들어진 영화!   

예를들면, 이 영화는 지하철 기관사로 나오는 감우성이 직접 지하철을 운전했다고 해서 관심을 모았는데 죽은 옛 애인을 잊지 못해 지하철 2호선만을 줄곧 운전하다가 인사 이동 때 3호선으로 옮기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는다. 그때 그는 4차원의 표정으로 읊조리는 대사, "거기 가면 성수역이 있을까요?" 하면서 이후에 나오는 대사 보면 정말 신파란 생각이 든다. 홀로 최루성을 남발하는 정일우의 대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구성이나 영상은 나름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나는 이런 영화가 좋다. 주인공 두 명 정도가 설정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것 보다 8명쯤 구성 되어서 어느 장면에선 이 커플의 이야기를, 저 장면에선 저 커플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교차시키고 퍼즐 맞추듯이 맞추듯 한다. 그것은 작년에 재밌게 보았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던가?)을 연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완성도로 치자면 그 영화가 훨 낫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단연 압권은 우리의 4차원 소녀 최강희의 연기다. 어쩌면 그녀는 4차원에 살면서 감우성과 그런 예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애인의 생일을 위해 객차를 투명 색연필로 꾸며놓고 행려병자의 실수로 객차에 불이나고 그안 갇혀 죽어 가는 최강희의 연기는 찡하다. 그리고 그것을 3년 전을 회상하며 감우성의 현재와 과거를 잘 직조해 냈다.   

영화는 다분히 최루적이다. 너무 예뻐서일까? 등장하는 남자들 넷. 감우성을 비롯해 정일우, 엄태웅, 류승룡까지(아, 우리의 최강 카리스마 류승룡이 이렇게 착하게 나온 건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닐까 한다) 하나 같이 남성적 근육질은 없고 뭔가 말랑말랑 하면서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인물로 나온다.  

외국에서 개기일식 날 옛 애인을 만나기 위해 귀국한 엄태웅은 '프리 허그'를 무언으로 외치며 자꾸 안아 주겠다고 징징대질 않나, 감우성은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해 찔찔대고, 난 좀 눈치 없는 착한 왕자야라고 말하는 정일우는 말할 것도 없고, 최강 카리스마 류승룡도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이성에게 마음을 못여는 그리고 누가 자기의 철옹성을 비집고 들어올라치면 화부터 내는 버럭남이었다. 이런 남자들 여자들이 볼 때 어떤가? 그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옛 애인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자꾸 이런 남자 괜찮지 않아요? 라고 들이대는 것 같다. 그러나 여자의 입장에 이 여자 저 여자 찝적대는 남자도 싫지만 못지 않게 이런 남자도 싫다. 더구나 요즘 초콜릿 복근 때문에 남자의 야성미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고 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런 야성남이 옛 애인을 잊지 않는 순진 정의파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추노'의 대길이처럼. 또는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는 송태하처럼 말이다. 이런 남자라면 여자는 깜빡 넘어간다! 신 초콜릿 복근남 만세!   

그래도 이 영화 결말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이렇게 옛 사랑을 있지 못해하는 사람들이 새 사랑도 진실되고 멋지게 하는 법이라구. 하면서 말이다. 거기엔 반드시 멋진 여자가 있기에 가능한 거야. 뭐 이렇게 셈셈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꼭 권하는 것은 아닌데 봐도 손해 봤다는 느낌 안드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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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말순씨 - Bravo, My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박흥식
주연 : 이재응, 문소리

이 영화는 마치 나와 대화하면서 보는 영화 같다. 말하자면, 나의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난 날을 돌아 본다는 건 그리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아쉽고, 그렇다고 꼭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옛 시절은 아릿하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광호는 중학교 1학년이다. 그리고 영화는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를 광호가 접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하지만 광호는 정작 '유고'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물어 보지만 어머니 말순 씨(문소리 분) 역시 그것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한다. 광호는 자신도 모르면서 오히려 어머니가 그것도 모른다고 면박을 준다. 돌이키면 웃기는 상황이지만 확실히 그 상황에선 물어보는 사람이 오히려 당당할 수 있다. 그땐 그럴 수 있다.  

광호가 그것을 정작 알게된 건 학교에 가서다. 그렇다. 나도 그날 까만 동복 교복을 입고 학교엘 갔더랬다. 난 그때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았고, 그 전날에도 아무런 일 없이 어제 같은 날이 오늘도 시작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그날 아침 난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그랬더니 몇몇 아이들은 훌쩍 거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죽었다는데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로써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 아직 울지 않았었다. 그러자 어느 키 큰 여자아이가 "너도 울지 않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같이 아직 울지 않는 아이들이 또 있단 말인가? 그때 난 꼭 그 아이에게 그렇게 반응할 생각은 없었는데 "울긴 왜 안 울어!"하고 톡 쏘아 붙였다. 무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다른 아이들과 훌쩍거리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땐 미처 몰랐다. 그것이 기나긴 민주화 항쟁의 첫날이란 걸. 영화는 이렇게 처음부터 나의 아릿한 기억들을 하나 하나씩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광호네 반 아이 몇 명이 대통령 서거 날 축구(?)를 했다고 담임한테 단체로 작살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난 그 시절 카톨릭에 막 귀의를 해서 친구 따라 학생회에도 다니곤 했었다. 어느 날, 나를 인도한 친구가 갑자기 성당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날이 토요일쯤 됐던 것 같다. 다음 날, 주일 미사를 위해 약간은 샤프하게 생긴 고등학교 오빠의 지휘로 졸지에 성가 연습을 하게된 것이다. 그 오빠는 나름 진지하게 우리를 이끌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초로의 성당 주임 신부가 갑자기 들이 닦쳐서는 산통을 깨놓은 것이 아닌가? "국장이야. 국장!" 소리를 치면서. 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 신부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국장 때 성가 연습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이 큰가? 하나님이 큰가? 국장은 국장이고, 크신 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국장이라고 미사를 안 드리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도 세금을 두고 가이사는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신부님은 아마도 성가 연습을 핑계삼아 아이들이 성당에 모여 희희덕대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진정 믿음의 행위였는지 아니면 정말 그 신부님 생각대로 성가연습을 핑계삼은 연애작당이었는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그날 국장이라고 남녀간의 운우지정도 금했을까?         

광호와 친구들이 극장에서 성에 관한 행위로 쑥덕거리고 있을 때, 나 역시도 그 시절 어느 날 같은 또래 친구들과 성에 관한 이야기를 읊조렸던 기억이 난다. 뭔가 맞지 않는 그 알량한 성지식으로 말이다. 그때 내 몸은 얼마나 후끈거리고 오금이 저렸던지.  

광호와 친구들이 봤던 영화는 왕년의 청춘스타 정윤희, 신성일이 나오는 낮 뜨거운 영화다. 그 시절 금지된 영화를 보는 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그들은 나름 뜨거운 가슴으로 봤겠지만, 난 정윤희란 배우가 인기 절정에 있었을 때 그런 벗는 영화에 나온다는 게 마땅치 않았다. 신성일도 잘 생겼다기 보단 느끼한 늑대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그들이 봤던 첫 영화였을까? 그것은 알 길이 없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챔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같았으면 결코 극장에서는 보지 않았을 영화다. 스포츠(권투) 영화고, 영화는 다분히 최루성이다. 자기 아빠가 권투 하다가 죽었다고 저 꼬마 어찌나 우는 연기가 사실적이던지 나도 울컥했다. 보고나서 이래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구나 했다.  

지금은 게을러진 건지, 영화가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해져서 그런지 웬만해선 극장에 잘 가지 않는다.  

영화는 또, 광호네 아랫방에 세 들어 살던 은숙이(윤진서) 마당에서 머리 감을 때 광호가 수건을 가져다 주면서 은숙이 가슴을 넘겨다 보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남자아이들만 여체를 탐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 아이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남자의 육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땐가? 나는 학원에 다닐 생각이 없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친구와 친구 엄마랑 학원을 쫓아 간 적이 있었다. 학원에 뭔가 문의할게 있다고 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슨 짖궃은 발동이 났는지 그때 원장인지? 상담실장인지 하는 남자의 양복 입은 사타구니를 빤히 쳐다 볼 생각을 했다. 딴뜻은 없었고, 내가 그렇게 빤히 쳐다봐도 그는 모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면 그가 아는 것이니 마치 난 유령놀이라도 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보아 내가 그의 사타구니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마음껏 봐주고 나왔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영화는 나의 잃어버린 옛 시간을 찾도록 해 주었고 놀라우리만치 70년대를 정교하게 복원해 내고 있었다. 빨강과 녹색으로 대비되는 거리에 우뚝 서있는 우체통. 당시의 만만한 간식거리로 누룽지를 기름에 튀겨 설탕을 솔솔 뿌린 누룽지 과자를 쟁반에 바쳐들고 은숙의 방에서 함께 만화책을 보던 광호. 당시 금성사에서 처음 나온 탈수기가 따로 달린 세탁기. '아모레'와 '쥬단학'으로 대별되는 방문판매 하던 묵직한 직사각형 가방. 난 그 가방을 볼 때마다 하도 무겁게 생겨서 저걸 어떻게 여자들이 들고 다닐까 어린 마음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문판매는 그렇게 화장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난, 그 시절 우리집을 방문했던 보따리 장수들로부터 사과도 사고, 미역이나 다시마 심지어 내가 입을 노랑 나팔바지를 샀던 엄마를 기억한다.  

광호는 은숙이나 친구 엄마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는데 왜 엄마에게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느냐고 짜증을 부린다. 나도 한때 그걸 아쉬워 했던 적이 있었다. 왜 우리 엄마한테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걸까? 세월이 흘러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쯤이 돼서야 알았다. 냄새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마도 남들은 엄마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러나 늘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에게선 그것을 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광호는 애꿎게도 엄마에게서나는 화장품 냄새를 싫어 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어린 시절 집앞 시장을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나가는 엄마를 보면서 야릇한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언제부턴가 몇 십년 전부터 시장에 나가실 때 화장을 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은밀한 의문 같은 건 갖지 않는 건데 그랬다. 이렇게 우리 엄마는 무식하고 평범해 미칠 것 같고, 남의 엄마는 왜 그토록 근사해 보이는 걸까? 영화는 그 허를 잘도 찔러 준다.  

이 영화에서 발견한 건 문소리의 재발견이다. 영화에선 어쩌면 그리도 부지런하면서도 평범한 아줌마 역활을 잘 해 내던지! 동네 아줌마를 집에 불러다 놓고 집에서 한판 춤판이 벌어졌을 때 건강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맞아, 저게 바로 아줌마 기운이라는 거야! 내남 가리지 않고 스스럼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아줌마. 남들은 그걸 오지랖이라고 하지만 그건 바로 건강한 아줌마 기운이라는 것을 감독은 잘 살려냈다.  

하지만 그런 엄마도 시간이 흐르면 곧 영원속에 박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해 보이는 어머니 말순 씨가 폐결핵으로 저 세상으로 간다. 그뿐인가? 당시 유행했던 '행운의 편지'는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기라도 하듯 광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씩 떠나가게 만든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나와 관계 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또 다르게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틸컷의 저 조그만 여자아이 아직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옷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엄마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엄마에게서 좋은 냄새가 안 난다고 짜증을 부렸던 광호의 대칭일 터. 정말 가슴 찡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언제가 때가 되면 엄마를 보내 드려야 할 텐데 그 시간이 아득하다. 

물론 가끔 영화가 오버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말순 씨가 폐결핵으로 죽는다. 영화의 설정은 70년대 말이다. 그때쯤이면 폐결핵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법도 하다. 또한 요즘엔 다운증후군이라고 해서 보건소에서 사람을 잡아 가지는 않는데, 과연 그 시절 과연 그런 사람을 잡아가고 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이 영화, 나의 잊고 있었던 옛 시절을 생각나게 만드는 가슴 따뜻한 영화다. 스토리가 정말 그 시절에 사춘기를 보냈을 누군가의 추억담을 듣는 것 같다. 누구의 이야길까? 작가? 감독? 아니면 제3의 누구? 아무튼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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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2-03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추천 3개 드리고 싶어요.
축하합니당~
이 영화 저도 오래 전 봤는데 광호 역할의 저 배우 참 독특한 느낌이란
생각을 했더랬어요. '국가대표'에서도 약간 어리버리 딱 그 스타일로 ㅎㅎ
문소리는 참 연기 잘 한다 싶은 진짜 배우^^ 저 아모레화장품 유니폼..
근데 님의 추억담이 더 재미나요.^^

stella.K 2010-02-03 20:18   좋아요 0 | URL
오, 프레이야님! 고마워요.
이 리뷰 정말 열심히 썼는데 댓글 하나 못 받고 얼마나 외롭던지...
솔직히 당선도 당선이지만, 전 이렇게 지인의 댓글이 더 받고 싶은데
그걸 이루어 주는 지인이 없더라구요.ㅜ
프레이야님은 그런 점에서 저의 은인이십니당.
전 님의 댓글 받는게 더 좋아요!ㅎ~

stella.K 2010-02-03 20:30   좋아요 0 | URL
아, 그리고 말씀하신 광호는 정말 연기를 잘하는 것 같아요.
유승호에 가려 빛을 못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전 잘 생긴 배우 보단 연기 잘하는 배우가 더 좋습디다. 문소리도 그렇고.^^

hnine 2010-02-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페이퍼 읽었었는데 두 영화 모두 제가 못본 영화라서 뭐라고 댓글을 못달겠더라고요 흑흑...

stella.K 2010-02-03 20: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괜찮아요, 에치나인님.
보세요. 보시고 우리 얘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