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차붐@월드컵 <7> 나에게 축구는 `전투`였는데 아들 두리는 `행복한 생활`인듯

차붐@월드컵 <7> 나에게 축구는 `전투`였는데 아들 두리는 `행복한 생활`인듯

한국에서 우리 부자의 얘기가 화제라고 한다.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갈 뿐이다.

젊은 세대, 그들의 생각과 감각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가 그들과 함께 몸을 섞고 일을 하고 있는 게 맞는 일인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요즘 TV에 나와 정신없이 떠드는 녀석이 하나 있다. 노홍철이라고. 몇 년 전,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이 친구가 왔다. 큰딸(하나) 대학 동기의 남자친구라고 하면서. 쓸데없는 얘기지만, 딸의 대학 동기는 유로 상공회의소를 거쳐 G그룹의 경영전략실에 근무하는 멀쩡한 재원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남자친구를 보자 기가 막혔다. 그런데 아이들은 재미있어 좋다고 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세대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이 노홍철이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곤혹스럽고 불편하다.

나는 10년간의 독일 분데스리가 생활 중 선발로 못 나온 게 딱 두 번 있었고, 중간에 교체돼 나온 게 한 번 있었다. 그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심하게 낙담을 했으면 감독이 그 다음 경기 전에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다음부터 너를 빼려면 미리 말해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뛰어라!"

그 당시 나에게 축구는 생활이 아니라 '밀리면 끝나는 전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 두리는 확실히 다르다. 축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생활'인 것 같다.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은.

그러니 TV 해설을 하면서 이놈은 "전 그때 후보라서 잘 몰라요"라고 멀쩡하게 얘기하는데 옆에 있는 내가 진땀이 났다.

내가 두리에게 배우는 게 하나 있다. 언젠가 자전적인 글에도 썼던 적이 있지만 '남의 행복이 커진다고 내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녀석은 항상 여유가 있다. 늘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남을 인정하는 여유가 없는 나에 비해 두리는 동료를 인정하는 여유가 있다. 그래서 두리의 삶이 나보다 더 즐거운 모양이다.

'행복이'.

두리의 e-메일 닉네임이다. 굳이 그런 이름을 쓰는 걸 보면 천성이라기보다는 행복하고 싶어 스스로 하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연예인들을 얘기하듯, 외국 축구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줄줄 꿰는 두리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스페인의 황태자비가 화면에 잡히자 '예쁘죠?'하는 말이 하고 싶어서 혼났다며, 중계를 마치자마자 황태자비의 전력에서부터 사생활까지 쫙 얘기해 준다.

두리와 함께 해설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한때 '기자'를 꿈꿀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두리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전처럼 유럽축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축구의 흐름을 읽는 거야 자신이 있지만, 선수들의 현재 상황을 팬들에게 현실감 있게 설명해 줄 경험과 정보가 부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리는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또 나와 다른 요즘 아이들의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친구들의 얘기를 하는 것이니 내가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본인도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축구선수이면서 베컴의 자서전을 머리맡에 놓고 잠들거나 지단에게 가서 공에 사인을 받고는 즐거워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선수였어도 나에게는 한번 붙어 보고 싶은 경쟁자일 뿐이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성공'에 모든 것을 두었다. 그러나 두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행복과 즐거움'이 그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부럽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그들에게 물려준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다.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 중앙일보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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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저 같으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황해문화 여름호 편집 막바지입니다.

믿었던 필자가 연이어 두 사람이나 믿음에 배반하여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마감 중입니다. 당신이 남긴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읽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가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 중 상당수는 올해 상반기 나를 계속해서 번민케하고 있는 고민이란 겁니다. 불행히도 그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 저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유행 담론들의 출처가 실은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담론(좌파 담론부터 포스트모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들도 이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혹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인 대처(어찌 이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러운 지경에 처한)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란 사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이 오염 상황은 자기계발이란 표제어를 갖지만 실은 Onanie이고, 安心立命(spiritual peace and enlightment)을 꿈꾸지만 주화입마하고 만 상황 같아 보입니다.

혹자는 그나마 우리의 양심에 결계 노릇을 해주던 이념의 시대가 가버린 뒤 남은 것은 몰염치한 욕망의 무한질주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와 같은 면모의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결론은 이상하게 원론이라 불리우는 삶에 대한 태도(입장)만 남기는 앙상함을 드러내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변혁이란 것도 결국 "삶을 바꾸라."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입장 혹은 "세상을 바꾸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책만 남는 것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적인 언술들도 생사입멸(生死入滅)의 과정을 거치는지 한 때 포지티브했던 말들도, 세상의 변모와 더불어 더이상 그 이전의 저항적 언술로서의 생명력을 다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한동안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말들, 혁명, 인권, 민족, 민중, 시민, 자유, 평등, 평화, 연대, 노동 등의 단어들이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한 동안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아 주변부 청년들이 외쳐대던 'Cool'의 정신이 이제는 가장 유능한 소비자본주의의 슬로건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했던 말들도 이제는 그 힘을 잃었거나 훼손된 의미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제가 했던 말, 자본주의는 젤리 같아서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어떤 반동도 튕겨내거나 흡수해버린다고 했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 듯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파스빈더가 말했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이 시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시대를 주유하는 가장 큰 정서는 아마도 이 불안일 겁니다. 민주주의(체제)란 말을 능력주의와 동일한 말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신보수주의 & 신자유주의자 담론의 가장 뛰어난 전도사들은 바로 마케팅 이론가들)들에게 사회적 위계는 곧 그 사람의 자질입니다. 그네들이 포장하고 있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력은 서태지가 보여준 것처럼 중졸 출신도 열정만 가지면, 스스로를 어떻게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노력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전도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부단한 자기계발이란 노력 끝에 계속 직장을 옮겨다니는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글로벌화된 세상,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로 대통합을 이룬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 가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수치이기도 합니다.

모든 저항을 즐겨 소비하며 무럭무럭 성장한 자본주의 체제는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대에 자본주의도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묘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런 때 믿을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습니다. 성과급, 연봉제는 블루컬러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의 분리에 더해져 이젠 노동자들 자신을 토막토막 내버립니다. 마치 드 보통의 말대로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되어 우리들 자신을 짓누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친구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얼마나 멋지게 일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마 쿨한지 만을 설명합니다. 노동의 연대는 이제 학력고사 당일까지 우리를 주눅들게 했던 연봉경쟁의식 앞에서 우리를 뿔뿔이 조각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연대하란 말인가! 모두가 나의 경쟁상대인데,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저항이 곧 자본주의를 살찌우는데, 그러다보니 결론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더없이 치열한 경쟁으로 나서거나 아니면 한 발 물러나 마치 보헤미안인 양, 철학과 예술을 음미하거나 종교적인 순수함으로 이를 초월하려 합니다. 실은 도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자본주의의 상류계급 부르주아로 승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복종으로부터 스스로를 온존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려 듭니다. 성공한 자는 성공한 자대로 성공의 꼭대기로부터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발버둥치고, 실패한 자는 실패한 대로 더이상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애시당초 달랐던 출발점을 한탄합니다. 이 시대 평전이 유행하는 까닭 중 하나는 더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는 반증 혹은 사회 이론이나 구조, 정치로부터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비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악순환의 연속이니 이를 초월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을 하류사회로 직행하게  만드는 직선코스인 셈인 것이지요.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다. 아니, 도리어 그들을 즐겁게 강화시키는 것이니 초월해버리자는 것...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나로부터 시작된 "생을 즐겨라!"는 절대 명령입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자유는 비아그라를 삼키고, 아무리 사정해도, 사정해도 흐물거리지 않는 약발 죽이는, 꼿꼿한 욕구의 대가리를 쳐들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명령합니다. 규율사회에서 지시는 외부로부터 왔으나 이제 모든 명령과 지시는 내부로부터 옵니다. "일해라!", "공부해라."란 명령은 "일을 즐겨라!", "열정으로 살아라.", "스스로를 계발해라."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공포와 불안을 담아 엄습합니다. 멈추면 도태되므로 이제 아침형 인간은 한밤중이 되어서까지 스스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불안이 세상을 좀 먹고, 나를 좀 먹지만 어디에도 함께 할 인간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가족이, 회사에선 동료가, 간만에 만난 친구는 주식형 해외펀드에 투자해서 종잣돈을 모으고, 10년만에 10억 벌기 프로젝트가 도처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웰빙과 함께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동거하는 지식 기반 정보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시대의 노동은 사라졌는가?
아니,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노동을 재현하는 권력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한 명의 인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담론은 모든 노동하는 주체를 자본가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경영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전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영화는 단순히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불어닥쳤던 구조조정은 단순히 기업만의 구조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를 민영화하고, 우리들 개개인을 구조조정시켰습니다. 내 안에 기업구조조정본부를 설치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인데, 나를 이토록 학대하며 지배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이제 당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조건, 일에서의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입니다. 서동진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 역시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는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 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존재할 뿐이므로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끊임없는 무한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조울증에 사로잡힌 (노동하는)주체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징기스칸에게서 열정을 빼면 그는 한낮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을 터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요. 그 정답을 저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번 특집 원고들을 읽고, 교정하면서 몇몇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출구를 찾고 있는 듯 합니다. 이번 특집에는 좌담 원고가 하나있습니다. 일본의 현재를 고민하고 있는 "전야"라는 계간지의 편집위원 두 사람(다카하시 데츠야, 나카니시 신타로)과 "황해문화" 쪽 두 사람(김명인, 정근식)이 모여앉아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들입니다. 일본의 일억총중류 환상으로부터 '후리터', 600만엔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그네들의 속사정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도리어 후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눈 내용입니다. 결국 문제는 일정하게 상상력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우리가 해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해방의 주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발견할 수 있는가? 혹은 발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그리고 이번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동국대 철학과의 홍윤기 교수가 천규석 선생의 책에 대해 이정우 대표가 날린 서평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든든한 연대의 표시라고 여겨주기 바랍니다.

* 참,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 자본주의도 가장 잘 나갔다고 했던 제 말의 참뜻은 자본주의가 잘 나갈 때 혁명이 잘 나가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제 인식을 역으로 표현해본 겁니다. 이 점 오해없으시길... 그리고 이 글들은 이미 읽은 것들도 있겠지만 함께 읽어도 좋을 책들입니다. 물론 시간이 되고, 돈이 된다면 톰 피터스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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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 경쟁이 남성 수명 단축시켜


짝짓기 경쟁이 남성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과학전문매체 라이브 사이언스(livescience.com)는 11일(현지시간)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오래 사는데 이는 남성들이 짝짓기를 위해 무모한 경쟁을 하는데 기력을 쏟아 수명이 단축되기 때문이라는 미국 미시간대 대니얼 크루거 박사 연구팀의 주장을 인용, 보도했다.

크루거 박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의 수명이 남성보다 길고 이러한 남녀의 수명 차이는 18세기 중반부터 인식돼 온 것"이며 "이것은 최근의 경향이 아니라 오래된 진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크루거 박사 연구팀은 네이처지 잡지 봄호에 게재된 연구 보고서에서 침팬지들의 경우 13살 정도에 사망률이 가장 높은데 이때가 번식능력이 왕성해지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수많은 종의 수컷들이 짝짓기를 위해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숫양은 머리를 들이받으며 싸우고 수컷 새들은 화려한 깃털을 뽐내며 짝짓기를 시도한다. 동물들의 이런 행동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수컷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연구팀은 자연적인 짝짓기 방식은 진화 과정에서 최상의 유전자가 살아남도록 할 수 있지만 종종 개체 손상을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크루거 박사 연구팀은 또 요즘 남성들은 호감이 가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과거처럼 육체적 힘을 과시할 필요는 없지만 물질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느라 기력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압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단지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식만 변화됐을 뿐.

크루거 박사는 "남성은 (이제) 재산과 사회적 지위로 경쟁을 한다"며 "이것이 남성이 배우자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척도"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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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18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재산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는 나는 아예 경쟁하지 말아야겠다.

stella.K 2006-05-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만 그런가요? 여자인 저도 그래요. 하지만 사랑 하나면 밥그릇 두개 수저 두벌로도 시작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문제는 이 사회에 낭만이 사라지고 물질 만능만 존재한다는 겁니다.ㅜ.ㅜ

비자림 2006-05-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할 수 있어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 사랑의 마법에 걸린답니다.

비로그인 2006-05-18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어도 좋아.

stella.K 2006-05-1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엇, 그럼 지금 사랑을...?!^^
담뽀뽀님/ㅎㅎㅎ. 그 맘 알것 같아요.^^

비자림 2006-05-2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한 9년째 마법에 걸렸다고 하면 실망하겠죠? 호호

stella.K 2006-05-2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짝사랑을 9년째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깨어나실 때가 된거고 사랑하시는 거라면 이젠 열매를 맺으셔야 할 때라고 봅니다.^^

비자림 2006-05-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는 2000년 2001년에 맺어져서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구요, 1997년에 결혼했어요. 서로 안 지는 19년 되었지만 헤어지기 싫어서 대문 창살 사이로 손을 잡게 된 건 결혼하던 해였어요. 호호 스텔라님의 유도심문에 내가 넘어갔나?
 

 

갑자기 문닫는 연예인 홈피, 그 이유는?

[정승혜의 유행유감]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세요!! 잠수모드ㅠ.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나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일상 나누기가 미니홈피의 기능이라면 모르는 사람들과 글로 소통하는 즐거움이 블로그의 역할이다. 비록 허공에 지은 집이지만 취미의 선을 넘지 않는 시간 할애나 타이밍 조절만 잘하면 일상의 즐거움을 유지시켜주니 인터넷이 준 또 하나의 선물이라고 느낀다.

일반인들에겐 알음알음 인연의 끈으로 맺어진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크지만 연예인들은 조금 다른 의미로 운영된다. 연예인 홈피가 한때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이즈의 방 주인이라는 평등함과 더불어 신비한 이미지를 엿보는 재미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 전까지 밤이면 밤마다 미니홈피를 관리하던 아는 여자 배우가 있었다. 그녀는 본인이 스스로 중독이라고 할 만큼 미니홈피에 집착했다. 촬영으로 아무리 피곤해도 밤만 되면 자연스럽게 관리를 하고, 또 그것이 일상의 재미라고 했다. 촬영 중인 드라마나 영화의 현장 소식은 물론 동료 연기자들과 함께 찍은 생생한 셀프 카메라 사진을 자주 올리던 그녀의 홈피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 댓글과 응원 구호로 넘쳐났고 그녀에겐 힘을 내게 하는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처음 얼마간의 일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는 사람이 아프다, 돈을 빌려달라, 한 번만 만나달라” 등등 현실과 사이버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쪽지로 괴롭혀서 한동안 시달리다가 결국엔 폐쇄를 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누구나 처음엔 호기심으로, 중간에는 중독성으로, 나중엔 지쳐서 그만두게 되는 것 또한 미니홈피에 재미를 붙였던 사람들의 한결 같은 대사이며 탈퇴 수순이다. 그저 소소한 즐거움은 잠시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연예인이니만큼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그들이 받은 인기에 대한 대가일 테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부랴부랴 집을 부수는 이유 역시, 얻는 것의 기쁨 이상으로 잃는 것의 무게와 상처가 커지면서부터일 것이다. “스타같지 않고 평범해서 좋아요”로 들락거리던 사람들이 “공인이 그러면 되느냐”로 말을 바꾸는 것은 순식간이다.

일반인들도 ‘남친’과 헤어지기라도 하면 미니홈피에 올려진 사이 좋던 사진들을 비공개로 전환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데, 한때 세상이 다 아는 잉꼬부부였던 연예인들이 이혼과 더불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숙제가 미니홈피 폐쇄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나이에 비해 성숙한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며 마음 씀씀이가 사려 깊었던 정려원의 홈피나 다정다감한 김선아의 미니홈피는 ‘삼순이 신드롬’을 사이버로 이어가는 역할과 함께 인기가 높았다. 솔직하고 담백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던 정려원과 김선아의 유쾌한 방은 얼마 전에 들어가보니 탈퇴한 방이 되어 있었다.

독특한 사진들을 이용한 자신만의 글쓰기가 돋보였던 정려원의 글들은 신선하고 재미있었는데 참으로 아까웠다. 전폭적인 사랑과 극단적인 비판이 인터넷의 모든 공간에서 이뤄지지만, 적어도 개인 홈피에서만은 폭력적인 언어가 오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욕심이다.

무분별한 장난 전화 대신 060으로 시작되는 황당 전화가, 기분 나쁜 행운의 편지 대신 광고성 문구가 개인 홈피를 테러하는 세상이 되니 차라리 ‘과감한 삭제와 적당한 흘려 듣기’가 바로 지혜이며 정답이다. 세 치 혀가 아닌 열 개의 손가락을 더 조심스레 다루어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영화사 아침 대표 blog.chosun.com/amsaj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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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늘바람 > [퍼온글] 좋은 사람에게는 여덟가지 마음이 있다

* 향기로운 마음
향기로운 마음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나비에게.. 벌에게.. 바람에게..
자기의 달콤함을 내주는 꽃처럼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입니다...


* 여유로운 마음
여유로운 마음은 풍요로움이 선사하는 평화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평화롭게 머물도록
끝없이 드넓어 넉넉한 하늘처럼
비어 있어 가득 채울 수 있는 자유입니다...


*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존재에 대한 나와의 약속입니다.
끊어지지않는 믿음의 날실에
이해라는 구슬을 꿰어놓은 염주처럼
바라봐주고 마음을 쏟아야하는 관심입니다...


* 정성된 마음
정성된 마음은 자기를 아끼지 않는 헌신입니다.
뜨거움을 참아내며 맑은 녹빛으로
은은한 향과 맛을 건내주는 차처럼
진심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실천입니다...


* 참는 마음
참는 마음은 나를 바라보는 선입니다.
절제의 바다를 그어서 오톳이 자라며
부드럽게 마음을 비우는 대나무처럼
나와 세상이치를 바로깨닫게 하는 수행입니다...


* 노력하는 마음
노력하는 마음은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투지입니다.
깨우침을 위해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머리칼을 자르며 공부하는 스님처럼
꾸준하게 한 길을 걷는 집념입니다...


* 강직한 마음
강직한 마음은 자기를 지키는 용기입니다.
깊게 뿌리내려 흔들림없이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입니다...


* 선정된 마음
선정된 마음은 나를 바라보게하는 고요함입니다.
싹을 튀우게하고 꽃을 피우게하며
보람의 열매를 맺게하는 햇살처럼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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