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가수 조영남과 선물에 대한 얘길 한 적이 있다. 내가 그의 얘길 아직도 기억하는 건, 그토록 많은 선물을 받고도 전혀 감동받지 않는다는 그의 기이한 ‘무감동’ 상태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들 특유의 선물 공세에는 그만 기가 질리고, 수없이 많은 꽃다발을 받았지만 고마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단다.
그런 그가 서강대 영문과 교수인 장영희에게 주려고 화투장으로 밤새 꽃다발을 만들었다고 했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그것도 단 한 사람을 위한 예술품을 선물로 준다는 것의 근사함 때문에 나는 그에게 집요하게 물었다. “원래 선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어하신다면서요?”
조영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림을 안 주는 편이란다. 노래 선물도 안 한다. 자신이 가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은행 통장을 안 보여주는 심리와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다 그가 웃었다. 장영희에게 ‘슬픈 카페의 노래’란 책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 책에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작품을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작 책 한 권에 무감동한 그가 그토록 감동받다니!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조차 그 책을 당장 사서 읽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선물 중 하나는 스무 살 겨울에 받은 ‘5000원짜리 도서상품권’ 한 장이다. 달랑 도서상품권? 참 진부하고 성의 없다고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스무 살, 내 친구가 건네준 야들야들한 분홍색 한지 봉투 안에는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이 더 들어있었다.
5000원에 1000원을 더하면 당시 내가 사랑하던 황지우와 이성복이 쓴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 2권(당시 3000원이었다)을 거스름돈이 생기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또 소설가가 꿈이었던 내가 교과서 삼아 읽었던 ‘문학동네’와 ‘창비’의 단편 소설집이나 보르헤스나 마르케스 같은 남미 작가들의 책들도 딱 맞게 살 수 있는 돈이었다. 5000원 상품권에 덧보태진 1000원짜리 지폐 한 장. 그건 책을 사는 내 패턴과 좋아하는 출판사, 작가 취향까지 고려한 선물이었다. 무심함을 가장한 오래된 친구의 세심함이라고 해야 하나.
가령 선물의 여왕 노영심이 말하는 ‘선물의 기술’은 이런 거다. 안경을 유달리 잘 잃어버리는 친구에게 안경걸이를 선물하거나, 대보름날 호두와 땅콩만 선물하지 말고 예쁜 망치와 땅콩을 담아둘 작은 바구니 같은 걸 같이 선물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에겐 자신을 볼 수 있는 날짜를 표시한 예쁜 달력을 선물한다. 기왕이면 같이 가고 싶은 장소를 달력에 써넣을 수도 있겠다. 나 같으면 달력 위에 호암미술관 희원, 삼청동 와플 가게, 신사동 가로수 길에 있는 빈티지숍, 가을 수락산, 뻘이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서산의 단골 조개구이집을 적겠다.
물건에 관한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사진가 윤광준은 언젠가 내게 자신이 선물 받은 파버 캐스텔(faber castell)연필에 관한 얘길 해주었다. 잘 만들어진 연필이란 이런 것이란 생각, 연필을 쥐었을 때의 그 친근한 느낌 때문에 이 연필이 좋단다. 지금은 근사한 프랑스 식당의 주인인 연극배우 강만희는 ‘차’(자동차 말이다!)를 선물 받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달의 바다’로 소설가가 된 정한아는 내게 최근 생일 선물로 받은 작은 노트에 대한 얘길 해주었다. 그 노트엔 친구가 직접 적은 싯구와 어디에선가 가져온 소설 문장들, 그리고 자신에게 보내는 그녀의 소중한 편지가 적혀 있었다고. 스물다섯, 반짝이는 어린 나이에 큰 문학상을 받은 후 찾아온 불안감에 힘들 때, 그 선물은 자신에게 특별한 위로가 됐다고 했다.
겨울이면 수족냉증을 앓는 손녀를 위해 할머니가 직접 짠 털실 양말, 시인 강정이 가난한 후배에게 꽃다발 대신 받았다는 대파로 만든 꽃다발. 특히나 술을 좋아하는 시인이 이 기발한 꽃다발을 그 날 술자리의 찌개에 넣어 부글부글 잘 끓여 먹었노라 참회하듯 고백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선물이 사람을 이렇게 크게 웃게 한다면, 위로할 수 있다면, 시든 대파 다섯 개로 족한 것이다.
누군가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준비하다가 문득, 진짜 선물이란 ‘갈비세트’나 ‘차 세트’ ‘와인 세트’ 같은 이른바 세트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세트로 묶이는 것은 실은 선물이 아니다. 누군가 적당히 묶어놓은 걸 전달하는 전달품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행간을 꼼꼼히 읽어 주는 선물, 도서상품권 한 장에도 마음을 담는 법이 있다면 선물에도 분명 좋은 기술이 있을 것이다. ‘아부의 기술’이란 책도 나올 마당에 ‘선물의 기술’ 같은 책 한 권 나오면 좋지 않을까. 나라면 당장 한 권 사서 읽어 볼 것 같다.
백영옥(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