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다르거나, 튀거나, 어쨌거나
김홍민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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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너무 모범적인 독서를 하는 당신에게


나는 장르소설을 (거의)읽지 않는다.

그래도 내 길지만 가는 독서 역사에서 아주 잠깐 장르소설 그것도 추리소설을 읽은 적이 있긴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앞에 앉은 남자 아이를 조금 좋아했는데 그 아이 눈에 띌려고 읽었다. 그 때 루팡과 셜록이 나오는 얇은 어린이용 추리소설이 있었다. 두 인물 아니면 변변한 추리 소설도 없었던 때였다. 하지만 훗날 생각해 보면 보통 이 두 인물을 접하면서 추리소설에 입문하게 되지 않나.


녀석의 눈에 띌려고 책을 가슴 높이도 아닌 거의 코높이까지 들고 읽었다. 그러자 역시 걸려 들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 정중앙을 살짝 밀더니 "이 책 나 빌려 줄 수 있어?" 한다. 나는 웃으며, "그럼.빌려 줄게."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싸 보이겠는가. 나는 최대한 시크하게, "그래? 알았어. 다 읽고." 이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그 아이는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나중에 좋아하는 아이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가질 수 없다면 버리랬다고 난 당연히 녀석을 버렸다. 하지만 너무 많이 버렸다. 추리소설은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그것까지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게 무슨 죄라고.


그래도 살아오는 동안 추리를 읽어 보려고 한 적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래도 마음 같지가 않아 알만한 유명한 작품들을 안 읽고 방치하다 결국 중고샵에 팔아버린 적도 있다. 추리 소설도 안 읽는데 판타지나 SF를 읽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난 장르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장르물을 척척 잘 읽을 수 있을까. 철학책 좋아하는 사람에겐 열등감이 없는데 말이다.


이 책에 <터무니없는 책들을 좀 더 부지런히 읽어왔더라면>(196p~)이란 글이 나온다. 이 '터무없는 책'의 범위는 고전과 순수 문학을 제외한 SF나 판타지, 특히 만화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또 이것을 저자는 '사회적으로 핍박 받아온 책'이라고 까지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책은 이른바 80년대 빨간 책들 즉 사회과학 도서들인줄 알고 있는데, 또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저자의 말이 맞기도 하다.) 저자는 간혹 듣기 힘든 독창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곤 하는데 그럼 감탄하게 되곤 한다. 물어보면 그들은 바로 그런 '터무니 없는 책'을 어려서부터 탐독해 왔다는 대답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책은 뼈대없는 책, 킬링타임용으로 폄훼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만화나 하이틴 로맨스는 더더욱. 이런 책을 학교에 가져가 담임 선생님 눈에 띄면 압수를 당하거나 그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졌다. 것도 나름 트라우마다. 책 읽으라고 하곤 책을 찢는 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인가. 사회적으로 핍박 받아 온 거 맞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런 추억 하나쯤 있어야 어디 가서 왕년 소리 하면서 가오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이렇게 말하니 이 부분에서 어지간히 힘든 시절을 견뎌 왔나 보다. 왜 장르물의 훌륭함을 몰라주냐고 툴툴거리는 것을 넘어, "우리 이대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도 같다. 가히 장르물 전문 출판사 사장님답다.(저자는 출판사 북스피어의 사장님이시다.) 그러면서 저자는 '라이트 노벨'에 주목해 달라고 한다. 라이트 노벨이란 무엇인가. 몇마디로 설명할 수 있나? 뭔가 알 것 같긴한데 설명하기는 애매하다. 그것은 문고본 판형으로 표지가 만화적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미스테리, 판타지, 로맨스, SF가 혼재되어 있지만 '장르소설'로 분류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라이트 노벨의 범위는 매우 넓어서 때로는 장르나 순수문학까지 커버한다(202p~).


그러니까 어른들이 사춘기 아이들에게 죽어라 고전을 읽으라고 할 때, 죽어라고 안 읽고 다른 책을 읽고 있다면 그게 라이트노벨일 가능성은 거의 백퍼다. 예전에 이런 건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걸 저자는 무려 7페이지 반에 걸쳐서 설명해 놨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 문학사대주의가 엄청났겠구나 싶기도 하다. 저자의 '터무니없는, 사회적으로 핍박 받은 책'이 그냥 볼멘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 글 말미에 이런 말을 한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문학 베스트 10위 안에 절반 이상이 라이트노벨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라이트노벨이 한국의 독자(아마도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이고 장차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조금은 필요한 것이 아닐지.(그래서 그동안 한 번이라도 했나?) 지금부터 꼭 10년 전(이 책은 2015년 생이다) 장르소설도 라이트노벨 같은 흐름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없다가 뒤늦게 '한국의 스티븐 킹을 키워야 한다느니', '한국의 서점 매대가 외국 추리소설로 뒤발해 있다느니' 하는 호들갑과 개탄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언제까지 '한국 소설의 경쟁력' 타령만 할 것인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206p)

좀 뼈때리는 얘기 아닌가. 사람에게 족보와 민증이 중요하듯, 책도 계통과 체계를 만들면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한다. 라이트노벨의 역사가 얼만데 언제까지 족보없고, 체계없다는 소릴 들어야 하는가. 마치 문학의 서자 혹은 이유없이 미움 받는 며느리 같다. 책 가지고 자기검열이 심하면 한국의 스티븐 킹, 한국 소설의 경쟁력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제 스티븐 킹이 프로젝트가 낳은 적자라고 하던가. 좋은 책, 나쁜 책 구분하지 말고 무슨 책이든 맘껏 읽을 수 환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근데,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들은 철학책만 읽을 것 같지? 천만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잘 생긴 평전에서, 제자 맬컴이 보내주는 미국의 대중 잡지에 실린 추리소설을 읽었다 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 백권의 소설 중 좋은 책이라 부를 만한 책이 두 권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버트 데이비스의 추리소설 ('두려운 접촉')이라고 했단다. (이 책은 현재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란 이름으로 나와있다.)


어디 그뿐인가, 헤밍웨이나 카뮈도 추리소설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모든 사람이 추리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추리소설이 무익하거나 해악이라고 여기진 말라고 호소한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맺힌 게 정말 많구나 싶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하면 음지에서 읽을 걸 양지에서 읽자는 말인 것 같다.


이 책은 라이트노벨뿐만 아니라 장르물에 대해 정말 맛깔스럽게 잘 써 놨다. 읽고 있으면 나 같은 문외한도 한번쯤 읽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저자가 '터무니 없는 책(장르물) 어딨까지 읽어 봤니?' 하며 잘난 척하는 것도 같은데 그게 밉지가 않다.


인터넷 서점에 하루면 몇 편씩 올라오는 리뷰(또는 페이퍼)를 보면 고전 아니면 신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 걸 보면 뭔가의 스토리가 읽혀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춘기 때 읽지 않은 고전을 성인이 되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게 아니더라도 책이 좀 예쁜가. 그런데 오늘 지구에서 고전을 읽었다면 또 다른 행성을 개척한다는 마음으로 장르물도 읽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책 중엔 희대의 걸작도 있는 것으로 안다. (알고 있으면 공유해 주시라.)


이제 서평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이 책은 그런 책 가운데 단연 블루오션이다. 나 같이 장르소설 안 읽는 사람이 읽기 딱 좋다. 그리고 어디가서 꿀리지 않고 아는 체하기 딱 좋다. 장르물에 대해 아는 체 하고 싶으면 이 책을 읽어라. 이 책에 소개된 책을 읽으면 더 좋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표지가 좀 구리다. 신경 좀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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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0-31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추리 소설은 유익하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으며 추리한다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되지요. 청소년들에게 오히려 지루하게 읽힐 고전을 필독서로 선정하여 읽게 하는 교육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책은 무조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부터 읽히는 게 옳은 순서라고 생각해요.
통통 튀는 아이디어는 만화에서 많이 얻을 수 있는데 학부모들은 만화를 보면 질색하는 경향이 있죠.

stella.K 2021-11-01 10:3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런 부모가 아직도 있다는 게 놀라워요.
그들도 어렸을 땐 다 만화 보고 자랐을텐데 말이어요.
사실 추리가 생각의 확장이란 측면에선 좋긴한데
밝은 느낌은 아니잖아요. 살인에서 시작하는 것도 많고.
아마 그래서 부모들은 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건 좀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ㅋ
학습 만화는 권장할 거예요.

새파랑 2021-10-31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고전은 장르소설에 안들어가는 군요 ㅎㅎ 전 예전에는 추리소설을 가끔 읽었는데 어느 순간 잘 안읽게 되더라구요 ㅜㅜ 혹시 좋은 장르소설 있으면 알려주세요 ^^

stella.K 2021-11-01 10:38   좋아요 1 | URL
근데 셜록이나 루팡은 벌써 나온지 200년쯤 되지 않았나요?
그럼 뭐 고전이라고 해야겠죠.
새파랑님도 저랑 비슷하시네요.ㅎ

잠시만 기다리소서. 내 언제고 이 책에서 실한 것으로 사시미를 떠서
진상해 올리리다.ㅋㅋ

책읽는나무 2021-11-01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딩 6학년 짝꿍이 잘못했네...ㅜㅜ
서로 오작교 연결만 되었어도 추리소설로 시작해 장르의 깊은 세계로 빠졌을텐데 말이죠ㅋㅋㅋ
저도 어릴 때 셜록 홈즈 그 시리즈 읽어 대느라 정신 없었었네요.옆집 친구랑 같이 읽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경쟁하 듯 읽었고,맨날 둘이서 저 사람 어쩌고 저쩌고 추리 흉내내고..갑자기 그랬었던 추억이 돋네요^^
그랬었는데도 생각해 보니까 성인이 되면서 갑자기 장르쪽은 그리 많이 안읽어졌던 것 같아요.왜 그랬을까??
몇 년 전부터 스티븐 킹 책을 찾아 읽으면서 어머나~~숨어 있었던 추리극이 좀 살아나는 느낌이 들긴 하더라구요.
저자의 말처럼 폄하시 된 사회 분위기 탓도 작용해온 듯 합니다.잘 만들어 내는 북스피어 같은 출판사가 많아지고...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장르쪽 작가들이 더 많아진다면 기꺼이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부터는 찾아서 읽어볼 노력을 해야겠네요^^

stella.K 2021-11-01 18:01   좋아요 1 | URL
ㅎㅎ 옛날 초딩하고 지금 초딩하고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땐 대놓고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알아서 하는 거죠 뭐.
저는 추리는 영화나 드라마로 본지라 책으로는 별로 읽은 게 없더라구요.
이 책 기회되시면 한 번 읽어보세요.
저자가 정말 재밌게 글을 잘 써요. 저는 기회가 좋아서 중고샵에서
천원에 샀는데 그런 기회 다시 있을까 싶어요.^^

희선 2021-11-02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리소설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루팡이나 홈즈 알았지만 그런 게 책인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책이 있다는 거 알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보고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추리소설이라는 게 있다는 거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본 거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일본 소설이 많네요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그런 건 몰라도 읽다보면 범인은 알기도 했어요 그런 것도 읽다보니 사람이 죽는 거 별로기도 하더군요 그래도 사회파 소설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도 하니...


희선

stella.K 2021-11-02 16:0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ㅎㅎ 부모가 추리소설을 자녀에게 권하지 않는 게
그런 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람 죽이는 거 아무렇지도 않은 뭐 그런 이유.
그건 포르노 잡지나 폭력물을 염려하는 수준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래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진짜 흥미진진하잖아요.^^

 
마음을 건다 - 정홍수 산문집
정홍수 지음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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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형철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정홍수의 <소설의 고독>을 거의 극찬하다시피해서 혹했다. (나는 일단 제목에 '소설'이 들어가면 눈이 간다. 실제로 소설은 많이 못 읽지만. 병이다.) 글 잘 쓰기로 유명한 그가 부러 자신의 책에 소개할 정도면 그냥 못 지나 차지 싶었다. 근데 엉뚱하게도 잔뜩 눈독 들인 책은 사지 못하고 이 책을 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건 중고샵 때문이다. 급한 대로 이 책을 사 보자 했다. 막상 사 놓고 이게 뭔가 얼떨떨하긴 했다. 풋) 그런 걸 보면 난 아무래도 책보단 작가에게 마음이 갔던 것 같다. 아마도 작가의 직책이 문학 평론가라서 그랬던 것 같다. (요즘엔 평론가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해 보니 아주 모르는 작가도 아니었다. 오래전, 고 김소진 작가를 기리는 <소진의 기억>이란 책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 책의 동인 중 한 사람이었다. 만날만한 사람은 만난다더니 이런 식으로 인연을 맺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이 내내 평론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산문집'이다. 하지만 평론집으로 읽어도 그렇게 크게 속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실 산문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색깔을 달리하기도 하는데 평론가가 쓰면 평론적 산문이 된다.


저자의 이력이 독특하다. 1996년 <문학 사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의 길을 걷지만 그의 본업은 편집자다. 나는 평론가라면 대학교수들이 하는 줄 알았더니 편집자도 평론을 한다. 새삼 나의 시야가 완전 좁았구나 했다. 편집자라면 문학 생산의 현장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 아닌가. 대학교수들이 쓰는 그것과는 좀 결이 다를 것 같다. 좀 더 생생하고 핍진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책을 읽다가 저자는 문학(야)사에 나올 법한 장면을 펼쳐 보인다. 저자가 80년대 중후반 첫 직장으로 민음사에 들어갔을 즈음 다른 동료 직원들은 퇴근하고 홀로 사무실에 남아 교정을 보고 있을 때 글로만 접했던 문인을 봤다고 한다. 바로 서정인 선생이다. 당시 선생은 <세계의 문학>에 '달궁'을 연재하던 하고 있었는데 사무실로 쭉 밀고 들어오더니 도트프린트에 연재된 <달궁> 원고를 건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때 저자는 사무실 한쪽에서 '아!'했단다. 왜 안 그랬을까.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은 뒤통수만 봐도 "꺅!" 소리 내는데 책 좋아하는 사람이 작가 보고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겨우 '아!'라니. 역시 문학 종사자들은 너무 점잖다. 근데 저자가 오래된 얘기를 하고 있긴 하다. 도트프린트. 이게 뭔가 순간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뿐인가, 김수영문학상 심사가 있는 날엔 김우창, 유종호, 황동규 선생이 사장실에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나 베니어판에 귀를 쫑긋하고 들었단다. 또한, 중앙일보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은 당시 민음사 편집장이었던 이영준 형과 서로 친구라며 그 인맥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때는 또 성석제 형(이란다)은 소설은 엄두도 못 내던 때(!)라 어쩌다 시를 한편 완성하면 이영준 형에게 팩스로 보내 강평을 들었다니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성석제가 맞나 싶다. (대작가분껜 좀 죄송하지만 문득 깎아놓은 밤톨이 생각났다.ㅋ) 무엇보다 사무실 저자의 뒷자리엔 그 무렵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 김소진이 도시락을 싸 들고 출근해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내가 다닌 편집 학교'중에서) 이런 글을 읽는 건 나에겐 큰 기쁨이다. 그림으로 남겨도 좋을 것 같(은데 난 재주가 없)다.


또한 저자는 뒤에 황석영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난 황석영의 소설을 두어 권 읽은 것 같긴 한데 별로 좋은 줄 몰라 더 이상 읽지 않고 있다. 민망한 일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가 본데 사람이 덜 됐는가 보다. 그런데 루카치가 그런 말을 했단다. 소설은 '남성적 성숙의 형식'이라고. 그러면서 저자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황석영을 떠올렸다 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황석영은 남자답게 선이 굵은 작가가 아니던가. 문제는 난 그런 남성적 카리스마가(보통 이걸 허세라고도 하지) 강한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그래서 <대화의 희열 3>에 첫 번째 게스트로 나왔을 때도 조금 부담스럽게 봤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나중에 그의 자전 <수인> 정도는 읽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막상 읽어보니 과연 신형철 작가가 극찬할만한가, 물론 그가 소개한 <소설의 고독>은 어떨지 몰라도 이 책은 적어도 내가 볼 때 문체는 좀 기대만큼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읽다가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다. 난 분명히 책을 완독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면, 주로 소설과 영화에 대한 단상을 썼는데 소박하면서도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면 읽히고, 읽어주고 싶다. 문체가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평론가들은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주례사식 평론을 한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은 그 말에서 얼마나 많이 멀어졌는지 모르겠다. 

얼핏 듣기론 외국은 평론가와 작가가 거의 견원지간이라고 들었다. 외국 평론가들은 작가의 작품을 혹평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양진영에 상향평준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과부 상정 과부가 안다고 서로 밀어주고 땡겨주는 온정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예전엔 일반인이 책을 사는데 평론가들의 입김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블로그나 SNS의 발달로 평론가들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지금은 일반인들도 서평집을 내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서평과 평론은 엄연히 다르다. 서평은 일반인들도 할 수 있지만 평론은 일반인이 할 수 없다. 그건 좀 더 전문적인 영역이고, 많은 식견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물론 분명 오늘날 독자의 책 선택에 평론가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을 분석하고, 의미 있게 하고, 기록하는 일이 그들의 일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환호해 마지않는 작가들이 있지만 그들의 작품은 앞으로 1년 뒤 또는 3년 안에 우리의 관심에서 완전히 살아질 확률은 매우 높다. 물론 부지런해서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하면 아주 잊히지는 않을 수도 있다. 문학도 일종의 산업이라 새로운 신예 작가가 나오면 그쪽으로 눈을 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누군가는 어떤 시기에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으며, 어떤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상기시켜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평론가의 할 일 아니겠는가. 서평가들은 오직 그 책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옛 문학가들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 같지만 사실은 평론가의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요즘의 평론가들은 좀 다르긴 한 것 같다. 그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로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독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평론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들은 더 이상 동굴 안에 있지 않다. 예전에 누가 평론집을 읽었던가. 그건 정말 문학을 지극히 사랑하거나 학자의 길을 가겠다는 사람이 아니면 읽지 않았다. 그들의 그런 자구적 노력이 아직은 다소 미미해 보이긴 하지만 언젠가 일반 독자들도 본격 문학 평론집을 가지고 토론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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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3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평론집의 느낌이 있는 산문집인가 보네요. 서평과 평론의 차이를 하나 알고 갑니다~!!

stella.K 2021-09-14 11:25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 대충 그렇겠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1-09-18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작가 하면 삼포 가는 길, 이란 단편이 유명하죠. 국어교과서에도 나왔을 것 같아요.
제가 읽은 건 두 권으로 된 <무기의 그늘>이었는데 그야말로 남성적으로 느껴지는 소설 같아요. ^^

stella.K 2021-09-18 18:45   좋아요 0 | URL
지나치게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작품은 전 별로 더라구요. ㅎㅎ
근데 황석영은 정말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더군요. 부럽기도 하고.ㅋ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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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기는 을지로 어디쯤에서 태어났지만(정확히는 집과 가까운 어느 산부인과 병원이었을 것이다) 워낙 어렸을 때라 태어난 집은 기억에 없고,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이사한 광희동 집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이다. 그 집에서 거의 9년을 살고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적잖이 기쁘고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집에서 너무 오래 살까 봐 내심 걱정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새롭게 이사 간 집에서 산 세월을 생각하면 그 집은 그렇게 긴 세월도 아닐 테지만 확실히 9년이란 세월은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내가 그 집에서 오래 살까 봐 걱정이었던 것은 집으로 보나 동네로 보나 별로 좋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리도 회색빛 그 자체인 것인지. 풀 한 포기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동네는 또 얼마나 후미지고 지저분한지. 한 때 집 앞 공터는 쓰레기 집하장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영아의 시제가 발견되기도 했다. 게다가 누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고 했던가. 어느 집에서 싸움이 시작됐다 하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구경하기 바빴다. 글쎄 그게 보기에 따라선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두고두고 생각하면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책에도 보면 어느 교양 있는 점잖은 중년 부부가 이사와 그대로 점잖게 살고 싶어 했지만 동네가 워낙 그렇지 않아 결국 악다구니를 쓸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구나 싶다.   


그래도 우리 집이 나쁘지 않았던 건 옥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엄마가 그 집을 원했던 것도 바로 이 옥상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4 남매는 한창 자랄 나이라 마구 뛰어놀 공간이 필요했다. 그 집은 마당이 작은 대신 옥상이 있었으니 뛰어노는데 이만한 장소도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빨래를 말리고, 간장을 달이기도 좋고. 


어느 날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동네 아이들이 눈을 크게 굴리며 "야, 이 집은 옥상이 있어." "어, 정말? 좋겠다. 옥상도 있고." 그게 내 귀엔 나름 크게 들렸다. 뭐야, 그럼 쟤네들 집엔 옥상이 없단 말이야? 아이들은 우리 집에 옥상이 있는 것을 부러워했겠지만 난 그 아이들의 집에 옥상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난 그때 우리 집에 대해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집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기와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당시론 현대식 이층 양옥집 두 채가 지어지는 걸 보면서 다녔다. 그게 어찌나 신기하고 부럽던지 도대체 누가 이런 집을 짓고 사는 걸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했다. 학교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때는 70년 대 중반 지금의 강남의 옛 지명인 영동지구였다.(난 오래도록 이 의미를 몰랐는데 국회가 있는 영등포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서 실소했다.) 난 지금도 궁금하긴 하다. 왜 하필 부모님은 하고 많은 곳 중 그곳을 선택했을까. 그곳이 지금의 '강남 불패'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란 걸 아셨을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전에 아버지와 엄마는 천호동을 알아보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무튼 우리가 이사한 곳은 정확히 논현동이었다. 이사할 집은 앞서 말했던 학교 가는 길에 보았던 이층 양옥과 비슷했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흡사했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동네는 '친애할만한 곳'은 못 됐다. 논현동의 논이 논 논자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도로가 포장이 되지 않아 비가 오면 질척해 발이 빠졌고,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말도 못 했다. 나는 서울에 아직도 붉은 흙과 개천과 달구지를 맨 소가 똥을 싸고 지나다닌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떠나 온 광희동 옛집을 그리워했다. 적어도 그 동네는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은 그 후 2, 3년 내에 말끔히 사라졌지만.  


저자는 아랫동네와 윗동네로 어린 나이에 느꼈던 계층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 경험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나의 경우는 공부에서다. 즉 학습격차. 먼저 다니던 학교에서 공부를 썪 잘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은 했다. 하지만 전학한 학교는 여간해서 중간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학교는 생긴지는 얼마 안 되었고 이런 시골 같은 곳에서 처음부터 이렇게 경쟁적이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반에서 2, 3등을 했던 언니가 고등학교는 중간으로 떨어지더니 3년 내내 반등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 사실 언니는 이사는 해도 전학은 하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다녔다. 그러니까 언니가 다녔던 중학교는 소위 말하는 8 학군 지역이 아닌 것이다. 고등학교 때야 비로소 8 학군 내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난 처음 그런 언니가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공부하는 차원이 달라서 그런가 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특정 학군이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면 공부가 평등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원래 학교란 나의 존재가 인정되고, 학습의 만족도를 극대화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학교는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커트라인을 만들어 놓고 미달자, 패배자를 만들어 놓고 시작한다. 중학교 때 언니는 당당했고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런 언니가 중간을 했으니 그 박탈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언니만이 알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딸의 성적이 그렇게 떨어졌는데도 아버지나 엄마는 그것을 학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언니가 실력이 없고 공부 머리 없는 집안 내력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건 차라리 우리를 살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엄마와 아버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간만 해라 주의였으니까. 안 그랬으면 우리 중 성적 비관 자살자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원인을 학교에서 찾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 본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학교란 공부를 하는 곳이고, 내 자식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보내는 곳이 아닌가. 내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공부를 못하는 것이 어떻게 본인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왜 학교의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그랬다면 부모는 내 자식 공부 못하는 것에 대해 학교에 더 많이 문제제기를 하고,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러기보다 오히려 촌지를 바치고 과외라는 편법을 선행학습으로 둔갑시켜 정당화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더구나 언니가 학교를 다녔던 때는 학력고사 시대였고, 대학도 전기와 후기로 나누던 때였다. 당연히 전기의 대학은 좋은 대학이고 후기는 실력 없는 대학이었다. 이건 또 얼마나 아이러닌가. 학교가 학생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학교를 맞춰야 한다.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년 학교에서 실시하는 가정환경조사는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그거야 말로 "어디 살아?"란 질문을 노골적으로 제도화했던 비열하고 비인격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강남의 8 학군이니 뱀의 머리가 되느니 용의 꼬리가 되라고 할 텐가. 


어쨌든 그 집을 25년을 살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오래 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원래 미국은 잘 사는 집일수록 언덕 꼭대기에 저택을 짓고 산다던데 우리나라는 어디 그런가. 언덕 꼭대기면 달과 가까워 달동 네고 산동네지. 그곳을 우리 4남매야 평지를 오르내리고, 아버지는 자가용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출퇴근하신다지만 그 집에서 제일 고생한 건 역시 엄마다. 집에서 시장까지 일주일이면 거의 두세 번은 무거운 시장 가방을 들고 오르내려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더구나 그땐 우리가 한창 자라느라 먹성이 좋았고 도시락도 싸 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또 본의 아니게 있는 집 자식들이라 아무 반찬이나 싸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귀한 집 자식일수록 마구 굴리며 키워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네 부모들이 다 그렇듯 못 살고 못 먹던 시절을 경험한지라 '내 자식 마는 좋은 것으로'란 생각이 엄마,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뼈골 빠지는 건 당신들이고 그걸 알리 없는 우리는 천하의 후레자식 되는 거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고난을 밥반찬 삼아 얘기하곤 한다. 


그러던 중 동네가 리모델링 바람이 불었다. 집을 아예 부수고 새로 짓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 바람을 타고 집을 새로 지었다. 지하 일층, 지상 이층으로 지어 1층은 우리가 살고 나머지는 세를 주는 방식으로 살게끔 지었다. 처음엔 새집이었으니 그 기분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마당을 3분의 1로 줄여 실내는 널찍했지만 역시 마당이 줄은 건 아쉬웠다. 그 집의 하이라이트는 마당에 있었는데 말이다. 25년 중 10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세상 공부하려면 집에 세를 들여 보아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엔 있는 사람이 입바른 소리 하면 갑질로 비치고 이 책의 기조와도 맞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언제까지나 그 언덕 꼭대기의 집에서 살게 될 줄로만 알았던 우리가 이사를 했다. 이사 경험은 그리 많지 않지만 우린 이사할 때마다 좋아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의 이사는 집안이 기울어 줄여가는 이사다. 오빠가 사업에 실패해 집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우린 마지막 2년을 전세로 돌려 살았다. 그때 처음 세입자가 되었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을 산 새 주인은 대체로 좋은 사람 같아 별 마찰 없이 살았다. 하지만 우리 집이 이사를 했을 땐 가차 없었다. 그 주인은 2년 후에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집을 부수고 새로 지을 거라고 했다. 이미 남의 집에 뭐라고 할 건 없지만 10년 정도밖에 안 된 집을 부순다니 뭔가 낭비 같기도 하고 되게 아쉬웠다. 그 집에서 우리 4남매는 학교를 마쳤고, 언니가 시집을 갔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사 한 달 앞두고는 반려견인 (몰티즈 암컷) 제니가 죽어 마당에 묻혔다. 그땐 반려견의 장례업이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라 어떻게 할 바를 몰라 그렇게 했다. 그런 저런 사정을 알리 없었던 주인은 제니의 뼈가 다 삭기도 전에 우리가 이사를 하자마자 당장 그다음 날 포클레인이 밀고 들어와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자 좀 서늘했다. 만일 우리 집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정했던 날 보다 하루나 이틀만 늦어도 그렇게 했을까 알 수가 없었다.


우린 그렇게 그곳을 25년 만에 떠났다. 저자는 집에 관해 쓰는 건 한 시대를 쓰는 거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청년 시절의 반을 보냈다. 처음 이사 오고 살 수 있을까 싶지만 우린 어쨌든 살았다. 살다 보면 살아온 곳은 다 친애하는 곳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그런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집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풀어내고 있다. 유년 시절은 물론이고 도시와 공간, 사회 계층 간의 문제 나아가서 페미니즘의 문제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누구든 인생에 한 번은 자기 이야기를 써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름만 남겨서야 되겠는가.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와서 무엇을 경험하고 살았는지 자기 인생 보고서 정도는 남겨야지. 어찌 보면 집에 관한 이야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구든 그 시작은 집이란 공간에서부터 시작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난 많은 부분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장르가 좀 불명확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순수하게 자전 에세이로 써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참고 도서와 인용구 등을 밝혀놓은 것이 무슨 논문이 되기를 바랐나 좀 애매모호한 모양새가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분 저자 개인의 생각을 일반화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려면 더 많은 논증이 필요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에세이라면 그건 개인의 생각이란 걸 전제하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별무리가 없었을텐데 말이다. 그냥 그렇다고.) 열심히 썼다는 건 인정하지만 에세이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저자의 의욕이 너무 앞선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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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kang1001 2021-07-13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stella.K 2021-07-13 19:56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지요.^^

scott 2021-07-13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케이님의 추억이 지나간 자리, 서울 곳곳 아파트 숲이 들어서기 전 마당을 소유 했던 삶이 그려지네요.

스텔라 케이님 반려견 이번 무더위 무사히 잘 견디길 바랍니다. ^ㅅ^

stella.K 2021-07-14 18:5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다롱이는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즈음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엔 잠을 잘 안 자서 신경안정제를 먹이고 있는데
그것도 아주 효과가 좋은 건 아니더군요.

hnine 2021-07-14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집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고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stella.K 2021-07-14 19: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자꾸 옛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나이가 들긴 들었습니다. 그죠?^^

페크pek0501 2021-07-14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고 도서와 인용구를 밝혀 놓은 걸 보면 저자가 공을 많이 들인 책 같네요.
책 하나로 이렇게 길게 글을 쓸 수 있는 스텔라 님의 능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진심!!!
덕분에 재밌게 읽었어요. ^^

stella.K 2021-07-14 19:10   좋아요 1 | URL
좋은 책이긴한데 의욕이 넘 앞서지 않았나 싶어요.
조금은 힘을 빼도 될 것 같은데...

사실 이 리뷰 쓰는데 보름쯤 걸린 것 같아요.
요즘 제가 사는 게 말이 아니고 생각은 넘쳐나는데
다 쓸 수는 없고, 시간도 없고.
쓰는데 좀 애를 먹었습니다.
언니 같이 깔끔하고 명확하게 써야하는데 그래서 제 글은 별로
인기가 없나 봐요.ㅠ ㅋ

희선 2021-07-14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K 님은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잘 기억하고 있었군요 오랜 시간을 보낸 집을 떠나야 했을 때는 아쉬웠겠습니다 stella.K 님이 이사하고 바로 집을 부수다니... 집 무척 새로 짓고 싶었나 봅니다 새로 지은 그 집은 지금 있을지...


희선

stella.K 2021-07-15 18:58   좋아요 1 | URL
이런 말하면 꼰대라고 그러시겠지만 나이들면
자꾸 어렸을 때 생각이나요.
집 얘기는 그냥 어렸을 때 얘기를 하기 위한 일종의 당의정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ㅎㅎ
저자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새 주인이 능력 있어서 새로 짓겠다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부수고 새로 짓는 건 하나의 트렌드인 것 같습니다.ㅋ

니르바나 2021-07-19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서재 이 달의 마이페이퍼로 강력 추천합니다.^^

stella.K 2021-07-19 20:12   좋아요 0 | URL
니르바나님의 예감이 틀린 적이 없으니 기대해 볼까요?ㅎㅎ
고맙습니다.^^

scott 2021-08-06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케이님 이달의 당선 작으로 드디어!!

8월 무더위 다롱이와 행복하게 ~*

stella.K 2021-08-06 19:24   좋아요 1 | URL
꺄오~ 제가 이달의 거시기를 했단 말입니까!
이거 제가 거시기된 거 보다 스콧님 축하 받는 게 더 기분 좋은데요?ㅋㅋ
고맙습니다. 늘 다롱이 걱정해 주시고.ㅠ
스콧님도 축하드립니다.^^

초딩 2021-08-06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stella.K 2021-08-06 19:25   좋아요 0 | URL
어멋, 초딩님 고맙습니다.
일케 친히 댓글도 남겨주시고. 기분 좋네요.
초딩님도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1-08-06 1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stella.K 2021-08-06 19:28   좋아요 2 | URL
아, 서니님! 이거 얼마만입니까?
그동안 좀 소원했죠? 미안함다.
제가 더 챙겼어야 했는데...ㅠ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좋은 주말 보내요.^^

강나루 2021-08-06 2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 축하 축하드려요.

stella.K 2021-08-06 20:23   좋아요 2 | URL
어멋, 고맙습니다.
언제부턴가 이달의 당선작이 되면
서로 축하하는 분위기가 되었어요.
안 되신 분들(저도 잘 안 되는 편이긴 합니다만 ㅋ)에겐
좀 미안하지만 일케 서로 축하해 주니까 분위기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강나루님도 축하드려요.^^

니르바나 2021-08-16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니르바나 돗자리 펼까요 ㅎㅎ
파란 딱지 받으셨네요. 축하합니다.^^

stella.K 2021-08-16 14:3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앞으로 파란 딱지가 필요하면 니르바나님을
사알짝 찾아 뵐까봐요.ㅋㅋㅋ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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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역시 장서가는 돼도 애서가는 못 된다. 이 책도 (아마도)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샀던 것 같다. 하지만 애서하지 못하고 결국 장서하고 말았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책 겉표지는 비교적 깨끗한 편인데 책장을 펼칠 때마다 테두리가 누렇게 바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저자가 2006년에서 2009년 사이에 쓴 것으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 사고를 가지고 칼럼도 썼는데 잊고 있었단 사실에 새삼 놀라웠고 무슨 역사 칼럼을 읽는 것 같았다. 책이 꼭 유행을 타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이 책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었구나 왠지 찔끔거렸다.

 

장서가와 바람둥이의 공통점이 있다. 바람둥이가 상대를 알겠다 싶으면 곧 다른 사람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장서가 역시 갖고 싶은 책을 손에 넣으면 바로 다른 책에 눈을 돌린다. 책의 입장에선 꽤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 좋다고 한 때는 언제고 독수공방 홀대를 하다니. 내가 이러려고 당신 손에 팔려 온 줄 아냐고 매일 밤 환청을 듣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책도 그런 책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저자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독자인 나는 너무 책을 읽을 줄 모르거나 게으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몰락의 에티카>로 유명한 그 저자가 아닌가.

 

책을 계획에 따라 읽는 것과 마음 내키는 대로 읽는 것 어떤 것이 좋은 독서법인지 모르겠다. 올해 또는 이달에 무슨 책을 읽을 것인지를 계획했다면 이 책은 좀 더 빨리 읽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읽을 생각을 안 하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나마 내키는 대로 붙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이제야 읽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아주 만족스럽게 끝까지 읽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 온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 갈수록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그게 책 읽는 사람의 게으름이나 타성일 수도 있고 그 책이 지니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책에서 저자는 레이먼드 커버의 <대성당>을 읽고 쓴 글에서 일본은 이 책을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했지만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고 위로 겸 주위를 일깨운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엔 소설가 김연수가 있다고 하면서. 김연수가 누구인가. 일이 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가 번역했다고 강조한다. 문득 이 부분을 읽는데 이거 저자 자신을 빗대어도 되는 말 아닌가 싶어 약간 실소했다. 물론 저자에게 책을 냈다고 상이 주어지거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론 저자가 책 내기만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번역에서 김연수와 하루키를 비교한다는 건 어딘지 난센스란 생각이 들긴 한다.) 왜 그런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이 책은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저자가 문학평론가인만큼 우리나라 문학 전반을 다루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난 작년 무렵부터 그런 문학사나 문학 전반을 다룬 책이 좋아지고 있으니. 또 그건 문학평론가들의 일 아닌가. 하지만 문학평론가들은 꽤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에서 먼 존재들이었다. 기껏해야 이미 고인이 된 김현이나 김윤식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고 그나마 그것도 전공자나 문학에 지극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아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 문학평론가들에 대한 평가는 싸늘하다 못해 가혹할 정도가 되었다. 도대체 문학평론가가 뭐길래 이런 비난에 가까운 소리를 감내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에 책을 읽지 않는다는데 소설이나 시를 읽기도 버거운 판에 평론까지 읽어야 하나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들은 굴을 파고 스스로 안주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 문학평론가들은 다르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대중과의 소통에 적극적이 됐다.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러고 나니 평론가들에 대한 시각이 잠차 바뀌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이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아직도 잘 모른다. 왜 평론을 읽어야 하는지. 게다가 평론과 서평이 어떻게 다른지 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독자는 잘 알려진 유명인의 독서에세이나 서평집이 좋지 문학평론가의 평론은 왠지 어색하다. 예를 들어 이 책을 보면 내내 흥미롭게 읽다가 마지막 쳅터는 이것이 평론이다고 보여주듯 전통(?) 평론 몇 꼭지가 들어있다. 글쎄,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안 읽고 책을 덮으려고 했다. 물론 다 읽긴 했지만. 요는 나 같은 생각을 할 사람도 있을 거란 거다. 그럴 때 평론은 어떻게 독자에게 다가갈 것인가. 

 

저자가 언제 어떤 개기로 독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미문에 가까운 저자의 문체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존재할 것이다. 특히 어느샌가 모르게 글 하나가 끝날 때마다 마지막 문단에 꽂히게 만든다. 어떤 저자의 어떤 글이더라도 마지막 문장 또는 마지막 문단이 좋기란 쉽지가 않다. 하다못해 어떤 시인의 시도. 몇 개의 예를 들어 보자.

애국심이란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증오하는 졸렬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그 어떤 타자도 내 나라 동포를 대하듯 포용하는 박애 정신과 더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일은 끝내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그 사랑은 가련한 사랑이다. -<그냥 놔두게, 그도 한국이야>

 

잘 알려진 대로 톨스토이의 문학과 그의 삶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문호 톨스토이는 인류의 교사를 자임했지만 인간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의 가장 열등한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괴리를 좁히기 위해 고뇌했고, 그것이 톨스토이를 위대한 인물이 되게 했다. 고뇌는 공동체의 배수진이다. 그 진지가 무너지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고뇌의 힘>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는 1930년대 말에 뒤늦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년)을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이다." <봄빛>에 대해서라면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한 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이다.- <한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정지아의 '봄빛'>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생각했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만약 생존자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이라면,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거기에서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나겠구나 하고 더 짧은 결론, 눈먼 노인을 만난 남자가 자기 아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아이가 신이라고 하면 어쩔 겁니까?(196p) 그래,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

 

7월 31일에 선생이 영면 하셨다. 소설이란 그저 재미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아졌다. 요즘에는 일부 작가들도 더러 뜻을 같이한다. 그러나 이청준의 책을 전부 태우지 않는 한, 소설은 이야기 이상이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삼국지> 세트를 구입할 생각이 없지만, 완간되면 삼십여 권에 이룰 고인의 전집은 구비하려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피 끓는 영웅들의 활극이 아니라 피맺힌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고 이청준 선생님을 추모하며- 이청준의 [그곳을 다시 맞아야 했다]>

문득 내 글들의 마지막 문장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다시 볼 마음이 전혀 나지 않는다. 특히 그 알량한 서평인지 독후감 인지도 모를 글들을 볼 자신이 없다. 많은 경우 어떻게 마무리를 져야 할지 몰라 일독을 권한다란 말을 적잖게 썼던 것 같다. 나는 왜 이런 마무리를 못하는 걸까 괜히 자책을 하게 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도 어떻게 써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아무튼 독자는 이런 문장에 감탄해 저자의 책을 자꾸 사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독자를 사로잡는 서사와 문장이 없다면 우리가 왜 책을 사 보겠는가. 결국 작가의 이런 노력이 독자를 가깝게 만들 것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은 에세이지만 일정 수준 평론도 갖추고 있다. 또한 에세이라고 해도 평론가의 눈으로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난 작가가 평론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좋아 보였다. 우리가 왜 평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독자인 나로선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저 어렴풋이 느끼는 건 여러 관점에서 문학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고 문학적인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린 평론을 일상 가까이서 접해보지 못했다. 독자가 평론을 가까이서 접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건 평론가의 숙제가 아닐까. 평론가도 소설가나 시인 못지않게 독자와 가까이 있어 줬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 좀 바빠지겠구나 했다. 저자의 나머지 책도 읽어야 할 것 같고 저자가 책 속에서 소개한 몇 권의 책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아, 내 글의 마지막 문장은 결국 이렇게 마치는구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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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2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책은 또다른 책을 읽게 만드네요

stella.K 2021-06-24 11:0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런 책 넘 많지 않나요?
독서에세이나 서평집 백퍼죠.
사실 오래 전에 저자를 본 적이 있었죠.
나름 미남이긴한데 내 스타일은 아니라
뭐 글 잘 쓰는 사람이 한 둘인가요?
그래서도 오랫동안 읽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번에 읽어 보니까 정말 글을 잘 쓰더군요.
읽을 책이 늘어난다는 건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일 같습니다. 언제 다 읽냐고요.
안 그래도 읽을 책도 많은데.ㅠㅠ

페크pek0501 2021-06-25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1부 시인, 2부 시집, 3부 세상, 4부 소설, 5부 영화 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읽는 재미가 있어요. 그렇게 목차에 나눠 있어서 좋더라고요. 저는 완독은 못했어요. 지금 책을 찾아보니 반 이상은 읽었네요.
하루에 몇 꼭지씩 읽고 나서 목차에 나온 각각의 제목 옆에 읽었다는 표시를 해 놓았어요. 여러 책을 병행해서 읽는 습관 때문에요. 오늘 꺼낸 김에 몇 꼭지 읽어야겠어요.
글을 잘 쓰는데다가 목소리는 성우 같이 좋아요. 이 저자가 하는 팟캐스트를 예전에 반복해 듣곤 했어요. 팬이었죠. 멘트가 좋았거든요.
파란색 글 - 글을 뽑아 옮기신 것, 좋습니다. ^^

stella.K 2021-06-25 19:44   좋아요 0 | URL
ㅎㅎ 언니도 병행해서 읽으시는군요.
언제부턴가 저도 그렇게 읽고 있는데 이제부터라도
웬만하면 완독해 보려구요. 이 책은 저한텐 완독하기
좋은 책이었어요.
저도 한 번 팟캐스트 들어봐야겠어요.^^
 
드라마를 쓰다
매거진 t 편집부 엮음 / 씨네21북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언젠가 읽으려고 찜을 했었나 보다. 물론 찜을 했다고 꼭 읽게 되진 않는다. 그래도 인연이 아주 없지 않은지 절판되고 중고샵에 아주 싼 값으로 나와 있으니 읽어 볼 마음이 동했다. (어떤 물건은 지나치게 싸면 싸구려란 느낌 때문에 오히려 안 사게 되는데 책은 그렇지가 않다. 싸면 쌀수록 환호하게 된다.) 책은 세 명의 드라마 작가와 한 명의 드라마 PD의 작품론과 인터뷰를 실었다. 나는 늘 작가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방송 드라마 작가다. 내가 관심 있어하는 쪽은 소설가들인데 말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나의 선택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방송은 그 구조상 금방 잊히지 않는가.  


보라. 이 책은 2006년에 초판이 나왔고 여기 다룬 사람들은 당시엔 나름 활발한 활동을 펼쳤겠지만 지금은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나의 최애 작가인 노희경 작가는 지난 2018년 이후 지금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과연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초록은 동색이라고 이런 책도 흥미롭긴 하다. 재밌는 건 황인뢰 PD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다. TV 드라마 작가는 여자 작가들이 많은데 처음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작가가 담배를 피우면 글을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술을 잘하는지 물어봐서 잘한다고 하면 속으로 '좋아!' 한단다. 그리고 이야기하다 이혼 경력도 있다고 하면 '좋아, 좋아!' 속으로 탄성을 지른단다. 얼핏 들으면 아니 이 사람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다음 얘기가 좀 다르다. 감독들은 다양한 삶을 많이 경험한 작가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란다. 방송이란 게 시간 싸움인데 작가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바탕이 되는 저력 같은 게 있지 않으면 버티질 못하기 때문이라고. 권투 할 때 맷집 좋은 선수가 이길 확률이 높은 것처럼 작가도 그런 맷집 같은 저력이 있는 작가를 감독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꼭 드라마 작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작가가 되기도 전에 술 담배를 하고 이혼부터 하란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에 대한 묘한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지적이긴 한데, 머리는 산발을 하고 까칠하고 신경질적이며 직설화법을 쓰는 뭐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는가. 이건 또 드라마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가끔 드라마에 등장인물로 작가가 나오면 그런 캐릭터로 쓴다. 그건 어쩌면 근성 있는 작가처럼 보이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너무 사람들에게 휘둘리거나 그 반대로 너무 자신을 꽁꽁 싸매는 작가는 현장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게 어디 드라마 작가에만 요구되는 말일까. 자신이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근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만히 보이지 않으며 무엇을 하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것을 요즘에야 깨닫는다. 나이 들어.ㅠ 


근데 역시 난 드라마 작가는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도 못할 것 같다. 시간 싸움을 잘할 것 같지도 않고, 술 담배는 물론이고 결혼을 안 하면 모를까 했다면 이혼 같은 건 가급적 안 할 생각이니까. 물론 드라마 작가가 엄청 부럽긴 하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까 어떤 드라마 보면 대단하다 싶다. 하지만 나를 깎아 먹으면서까지 드라마 작가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오히려 본받고 싶은 작가는 하루키 같은 작가다. 그는 황인뢰 감독이 원하는 작가와는 정반대다. 얼마나 바르고 흐트러짐이 없는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것만 같다. 누가 보면 숨 막힌다고 하겠지. 그래서 그는 시나리오 작가는 못할 것 같다고 공언했었다. (시나리오 작가나 드라마 작가나) 무엇보다 현장의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요는 같은 작가여도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는 거고 그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근성 있게. 항상 바르고 흐트러짐이 없다고 근성도 없는 건 아닐 테니.


그런데 작가는 만만한 직업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게으르면 한 없이 게으를 수도 있는 직업이다. 노희경 작가가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작가 작가 하면서 단 5분도 쓰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고. 사실 작가 되는 거 어렵지 않다. 대신 잘 쓰는 작가가 되려면 매일 쓰는 작가가 되라고 한다. 매일 단 한 줄의 글이라도 쓰라고. 거 보라. 하루키 같은 작가는 문학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방송 드라마계에도 있고 시나리오계에도 있다. 작가라면 어쨌든 쓰는 거. 어쨌든 근성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노희경 작가는 한마디를 더 한다. 대사를 쓰기 위해 대본을 쓰지 말라고. 대사를 잘 쓰면 좋은 극작가가 되는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이미 얘기한 적도 있지만) 어떤 작가는 대사 과잉이고, 어떤 작가는 시적인 대사를 뽑아내려고 병적으로 매달리는 게 보인다. 그것을 띄워주는 티저도 있고. 드라마는 삶이다.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삶이 보이지 않고 대사 하나 잘 쓰면 드라마 작가가 되는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러려면 차라리 시를 쓰는 편이 낫다. 


솔직히 난 처음에 이 책의 구성이나 디자인이 별로였다. 글자는 별로 없고 듬성듬성하다. 사진도 많고. 근데 읽다 보면 나름 곱씹어 볼만한 내용이 있다. 다소 잡지 같은 느낌이다. 시대를 타는 느낌이고. 예를 들면 황인뢰 PD가 요즘 핫한 배우 주지훈이 그의 데뷔작 <궁>에 나온 얘기를 하는데 역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다. 다른 뜻은 없고 주지훈은 내가 요즘 눈여겨보는 배우라서. 또한 <안녕, 프란체스카>란 시트콤은 나도 몇 편 본 기억이 있고 작가 역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작가는 요즘 뭐하고 살까 했더니 2011년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인터뷰했을 때만 해도 아직 젊었고 내내 뭔가 모를 불만과 외로움이 베어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것처럼 이 책은 마치 오래된 누군가의 앨범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방송계의 관음증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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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11 16: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 넘 좋습니다.
스텔라 케이님의 리뷰 아니면 이런 책이 있는 줄 도 몰랐을 것이고
설사 손에 닿을 기회가 있더라도 몇장 넘기다 덮었을지도 ㅎㅎㅎ

학부 다닐때 친구들 그룹중에 유명 작가 멘토와 연출가 기타 방송 영화계출신 들이 계셨어요.(스텔라 케이님이 좋아 하셨던 노희경 작가님 대본은 당시 제친구 /작가 연출 지망생들의 교본이였음)
스텔라 케이님의 말씀과 거의 흡사
따라서 이책의 신빙성은 99.9999 퍼센드 ㅎㅎ

매주 출근 도장 찍으삼 333
두번 ✌️ ̆̈

stella.K 2021-05-11 18:54   좋아요 2 | URL
아, 저는 스콧님의 이런 댓글이 참 좋습니다.
언제나 알뜰살뜰하게 챙기시고 힘을 주시니 말입니다. 흐흑~!
매일은 못해도 매주 쓸수있도록 해보겠삼.
고맙습니다.^^

희선 2021-05-12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프란체스카> 작가는 몰랐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군요 방송 작가, 드라마 작가는 이름 아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네요 방송 같은 거 생각하면 그런 일 무척 힘들 듯합니다 시간에 많이 쫓기지 않을지... 그래도 그런 걸 좋아하고 잘 해 내는 사람도 있군요 이 책 예전에 보려다 못 보고 이제라도 만나셔서 잘됐네요


희선

stella.K 2021-05-12 16:15   좋아요 0 | URL
ㅎㅎ희선님은 드라마 덕후가 아니신가 보군요.
요즘 드라마 덕후들은 작가 이름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시작하죠.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가도 보구요.
저는 뭐 드라마 덕후는 아니지만 작가를 좀 보긴해요.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고 해도 초반 1, 2회 때
재미없으면 안 보게 되더라구요.
얼마 전 송중기 나왔던 드라마가 그래요.
나름 애정하는 배우긴 한데 드라마는 그닥 재미가 없어서
접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