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 출세욕 먼슬리에세이 2
이주윤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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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0쪽 내외. 보통의 다이어리만 한 크기. 이런 책을 읽고 뭐 할 말이 많을까 싶기도 한데 의외로 할 말이 많아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알아주는 작가의 글 쓰기 담론이 아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글쟁이 언니의 솔직 토크' 뭐 그런 느낌이다. 특이하게도 이건 기획물이다.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슬리 에세이'란 시리즈물의 2탄으로 나왔다. 그것도 앞으로 한 달에 한 권씩 펴낼 거란다. 와, 요즘 출판 기획과 작가의 활동이 여기까지 왔구나. 새삼 놀라기도 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인 협회는 있어도 작가 협동조합 같은 건 공식적으론 없는 것 같던데 뜻 맞는 사람끼리 모여 책을 내고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누고, 서로 으샤 으샤 하는 뭐 그런 활동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긴 그 코 묻은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눠봤자 얼마나 돌아가겠냐만. 어쨌든 말이 되거나 말거나 작가들의 활동은 진화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먼슬리가 됐건 뭔 소리가 됐건 작가는 자꾸 떠들고 판을 깔아줘야 한다.


책에서 이슬아 작가에 대해서 말해서 말인데, 알다시피 이슬아는 구독 작가로 유명하다. 저자는 자신은 필력이 없어 그런 활동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이건 누구든 일단 마음만 있다면 한 번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도 해 봤으려고. 누구에 비한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이슬아도 처음부터 구독자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구사하는 문장은 젊은 독자들이 좋아할 만 문장이다. 그들 가운덴 구독을 좋아하기도 하던데 먹힐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싫으면 말고.


지금 생각해도 내가 대담하긴 했지. 작년에 이슬아 삘 받고 나도 어설프게 구독 활동을 했으니. 처음 시작을 했을 땐 과연 구독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 그런 흔치 않은 독자가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독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고, 내 글을 구독해 준 독자들에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대신 난 그때부터 이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후유증이 생겼다.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래도 이슬아는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건 인정! 


2.

독자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무리 기고 뛰고 나는 작가가 글을 써도 꼭 글 못 쓴다고 구박하는 독자는 있게 마련이다. 나도 언젠가 책을 내고 모 사이트에서 이것도 글이냐고 구박하는 독자의 리뷰를 보고 기분 상한 적이 있다. 성격상 또 그런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뭐라고 반박하려다 결국 말아버렸다. 이제 난 독자가 아니라 작가다. 체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면 글은 언제 쓰고 이미지에 스크래치만 간다. 


생각해 보면 독자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저자가 애정 하는 작가 중 한 명이 김애란인가 본데 어떻게 김애란을...?! 할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모 소설을 내 특유의 필봉으로 가차 없이 사시미를 떴다. 그러자 어느 댓글러는 속이 후련하다고 했고, 좋아요도 그때 기준으로 최고점을 찍고, 심지어는 그달의 리뷰에 선정돼 적립금까지 받았다. 그래. 사시미를 뜨려면 이 정돈해 줘야지. 나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독자는 딱 거기까지다. 그 이전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올라오는 리뷰도 칭찬일색이었다. 뻘쭘했다. 잘 썼다는데 내가 더 이상 뭐라고 말하리. 거기까지가 독자의 일인 것이다. 거기에 저자는 악플에 대처하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아주 합리적인 대처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냥 반사라고 하란다. 그 이유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읽으면 되고, 과연 그러면 되겠다 싶다.


3.

저자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다. 계속 쓰는 작가가 되려면 둘 중 하나다. 저자처럼 치열하게 쓰던가 아니면 낮엔 일하고 밤에 쓰거나. 모르는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첫 책을 내고 계속 출판사 사장과 편집자와 케미가 좋아 일을 계속해 오고 있는가 본데 그러기가 쉬운가 싶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기는 개점휴업이라고 첫 책 내면 각자도생의 길을 가지 않을까. 물론 뜻이 맞아 연이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첫 책 내고 출판사 사장한테 엄청 깨졌다고도 했는데 과연 그게 작가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난 워낙에 첫 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출판사 쪽에서 책 내자고 했을 때 2년이나 튕기다 지난 2016년에야 겨우 냈다. 어느 출판 사건 자기네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면 서로 고마운 거지 깨고 깨지고 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출판사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초보 작가일수록 조금이라도 좋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이냐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그래서 내 책이 유명 출판사에선 그냥 하나의 배경 정도밖에 안 되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스펙이라면 스펙 아닐까. 자신의 책을 소개할 때 "거 유명 작가 000가 낸 출판사에서 냈어. 그러니까 끕이 같다고." 구라 치고 싶지 않을까. 이러고저러고 지간에 어느 출판 사건 내 책을 귀하게 여겨 줄 출판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료 따박따박 주고.


작가치고 원고료 날려 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알아봤더니 우리가 알만한 유명 작가도 무명 때 한 번씩은 다 원고료를 떼인 경험이 있더라. 그 말을 듣는데 어찌나 속이 쓰렸던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그런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출판사는 아니다. 어느 단체다.) 작년 말에, 내 책을 내 준 출판사 사람들이랑 오랜만에 만나 게거품 물고 원고료 떼었다고 성토하니까 사장이 듣더니 딱 한 마디 하는데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양아치라고. 그러자 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졌다. 그 말 한마디를 못해 그렇게 게거품을 물었던가 싶었던 것이다. 혹 시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원고료 준다고 해 놓고 안 준 의뢰인 있거든 지금이라도 더 이상 양아치 되지 말고 반드시 지급해 줬으면 한다. 그거 안 준다고 부자로 잘 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 양심은 지키고 살아야지.


4.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그 많은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란 쳅터였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급적 접속사 쓰지 말이라. 부사 쓰지 말아라. 단문으로 써야. 기타 등등의 잔소리 솔직히 좀 지긋지긋했다. 중요한 건 문장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다. 물론 가급적 그런 걸 쓰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면 당연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해서 꼭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강박적이 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신 저자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들어 글이라 생각하지 않고 노래 부르듯 글을 불러 본다고 했는데 그건 정말 참고할만하다. 중요한 건 글의 리듬이라고. 나도 영화 <변산>을 보면서 힙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말인데 노래도 아닌 것이 리듬은 있다. 우리의 글 쓰기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뮤지컬도 그렇지 않은가.


5.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계속 쓰는 삶을 위해 팔리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글은 무조건 써야 한다. 나도 한때는 블로그에 낙서 반, 일기 반 한 글만 쓰는데 무슨 책을 낼까 싶었는지만 결국 책을 냈다. 물론 그것으로 책을 내지는 않았다. 내가 쓴 책은 독서 에세이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난 뭔가를 끄적이긴 했지만 블로그질을 예전만큼 안 하게 되었다. 요는 누가 봐도 되는 글, 누구 보라고 하는 글을 확 줄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어쩌다 신문 연재 기회를 얻게 되었나'를 읽다 정말 찔렸다. 그 알량한 책을 내니 글 쓰기가 더 불편해졌다. 누가 이런 후진 글만 쓰면서 어떻게 책을 냈지? 흉보는 것 같아 스스로 위축되기도 했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것을 깨닫고 좋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1일이다. 했다. 예전에 난 블로그에 100일 동안 뭐라도 쓴다고 하고 그걸 실천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게 또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그런 내공이 모여 책을 내게 된 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저자 말마따나 무조건 써야 한다. 어설픈 글로 투고할 생각하지 말고 남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꾸준히 글을 써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 1일을 아직도 시작도 못하고 난 이렇게 리뷰만 쓰고 있다.ㅠ


6.

이 책은 정말 웃기고, 재밌고, 용기를 주는 책이다. 누구든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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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7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1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7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8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동주의 문장
윤동주 지음, 임채성 엮음 / 홍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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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예술가중엔 고독하고, 아련하고, 애잔함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흐가 있고, 생텍쥐페리와 카뮈가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으론 배호나 김광석 등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더 찾아보면 더 많이 나오겠지. 그중에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윤동주일 것이다. 


모처럼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으면서 습작시를 포함한 동시와 산문까지 아마도 그의 모든 작품을 총망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는 모름지기 다작, 다독, 다상량이라고 했건만 윤동주만큼은 다독과 다상량은 했을지 모르지만 다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애송하는 시로 그의 시를 떠올리길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다작보다 중요한 건 사람 자체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말미에 벗들의 회고가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그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동기인 강처중은 그는 여간해서 누구에게도 시를 보이지 않으며 보여주는 때가 있다면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라고 했다. 그는 겸허하고 온순했지만 자신의 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학교 후배인 정병욱은, 그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히면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냥 써진 시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쉽게 씌여진 시'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딱 잡이 뗀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후략)라고 적고 있다. 


물론 이 시는 그가 천재적 영감을 갖고 있어 뚝딱해서 쓴 시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의 해설대로, '어둡고 암울한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뜻으로 쓴 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다시 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촌 송몽규를 비롯한 몇 명이 독립운동으로 뭔가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나설 때 윤동주도 함께 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송몽규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결국 홀로 방에 남아 저 시를 나레이션처럼 읊는다. 감수성과 자의식이 강했을 그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시를 지었을지 알 것도 같다. 송몸규를 비롯한 같은 또래의 학도병은 나라를 구해 보겠다고 할 때 자신은 육첩방에 홀로 남아 신세한탄처럼 이렇게 시나 읊어대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쓰렸을까.


흔히 윤동주의 시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미학'이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워낙에 수줍음을 잘 타고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니 그랬겠지만, 그의 부끄러움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의 <이런 날>이란 시를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 헷말간 권태로 깃들고 /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 부르고 싶다


이 시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런 날'은 곧 일본의 국경일을 말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일본의 국경일에 만주국 국기인 오색기를 함께 게양했는데 우리나라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아이들 역시 나라 잃은 설움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크게 웃고 신나게 뛰어놀 뿐인데 이를 보고 시인은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게 부끄러웠을까. 아니, 그건 안타까울지는 몰라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은 그래야 한다. 생업 외에는, 뛰어노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나라에 사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았을까. 우리나라는 조선조부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그 말기엔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의 나라다. 배우고, 똑똑하고,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국민이 왜 나라 잃은 현실을 아파하고 서러워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든, 왜놈이든 먹고사는데 걱정 없게만 해 준다면 나라를 팔아먹은들 무엇이 대수랴. 그런 자포자기 한 사람이 다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시인은 평생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을 만난다. 거기서 정지용은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지만 시를 쓰지 말라고 한다. 내 나라 말로 시를 쓸 수가 없는데 시는 써서 뭐하겠냐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며 깊은 한숨을 쉰다.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정지용의 부끄러움은 같은 것이었을까. 조국을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오직 시로만 고백했던 윤동주와 한낱 지식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책으로만 일관했던 정지용을 보면서 나라면 어찌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역사는 자꾸 독립투사를 내세워 또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독립투사들처럼 순국을 각오하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불행한 역사를 살아간다면 과연 나는 순국을 각오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이름을 고쳐서라도 내 한 목숨 부지하고 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그럴 것만 같다. 또한 끌려가는 투사들을 지켜보며 함께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초라한 참회록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참회록>

 ......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는 시로 참회록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문재(文才)였지만 친일을 했던 이광수는 끝내 문학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참회록을 썼기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보라. 이광수는 한때 문재였음을 기억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지금도 기억되고 애송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지는가. 그게 단순히 시대를 아파했던 회의주의자의 타령으로만 보이는가.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 한 권 갖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이 시인이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치자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주를 위해 사용하여 '시인 윤동주 지묘'라고 씀으로 이때 처음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그를 더욱 애잔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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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23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잔해서 예술가답지요.

순국... 참 어렵죠. 저라도 죽음 앞에선 제 자신의 생명이 제일 소중할 것 같아요. 그래서 순국자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stella.K 2020-06-23 18:44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제가 있는 건데
저는 아무래도 나라 보다 제 목숨이 더 귀한가 봅니다.ㅠ

윤동주 시인만 생각하면 왜 그리 짠한지...
영화 다시 봤는데 강하늘이 연기도 잘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도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편집도 그렇고, 시나리오 자체가 시 같아요.
누가 자기는 이상과 백석, 윤동주 평전 다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던데 옛 문인을 사랑한다면 이 세 사람은 정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더군요.
저는 이상만 가지고 있어요. 그것도 고운 걸로.ㅋ

transient-guest 2020-06-24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니 민족이니, 종교도, 무엇도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닌가 싶어요. 특히 하루살기에 급급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다만 남의 지배는 확률상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할 때보다 우리를 이롭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가치의 척도가 아닌가 싶어요. 아이들이 식민통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울 수는 있어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물론 독립운동과 선각자들의 희생으로 절대로 한국을 이롭게 할 수 없는 자들을 몰아낸 그 노력과 투쟁은 별도의 이야기입니다만. 윤동주시인은 일찍 죽어서 어쩌면 더 짠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그 만큼 더.

stella.K 2020-06-24 15:29   좋아요 1 | URL
중요한 척도죠. 리뷰에 다 쓰지 못했지만, 누가 그런 말을하더군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도 왕조를 회복하지 못한 건
왕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렇겠구나 싶더군요.
유럽도 그렇고, 하다못해 일본도 왕조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게
그냥 그런 게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비록 반쪽이지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도 울나라는 아직도 독재와
싸워야 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고 사는 걸 보면 새삼 희안한 국가란 생각도
듭니다.
짧게 살아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는 것도 크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ㅎ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1 - 1900-1934
장석주 지음 / 시공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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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사춘기 때 문학 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 시기에 우리나라 문학을 좋아하기란 게 쉬운 일일까? 잘 알려진 세계 고전 문학이나 읽어낼 수만 있다면 자타 공인 문학 소년, 문학 소녀는 아닐까. 솔직히 나는 그랬다. 그 시절 우리나라 문학이 싫었다. 우리 문학을 읽는다는 게 왠지 뒤쳐지는 것만 같았고, 뭐 별거 있나 우습게 봤다. 쏟아지던 베스트셀러도 그랬지만 근대 문학은 더더욱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한동안 문고본이 유행이었다. 특히 삼중당 문고는 주머니 가벼운 문학 소녀와 소년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었을까 싶다. 책가방에 그 책 한 권쯤 안 넣고 다니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문고본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너무 채신머리 없을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었다. 실용성은 좋을지 모르지만 장서용으로는 영 아니었다. 나의 오빠나 언니 세대엔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그런 책은 갖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문고본엔 우리 고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김동인의 <감자>나 <배따라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같은 것 말이다. 책이 좀 근사했다면 적어도 한 번은 서점에서 무슨 책인가 뽑아 봤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도 그냥 권장 도서 정도로만 취급할뿐이지 그 모든 책들은 교과 과정엔 없다. 이렇게 학창 시절 국어 교육은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문학 교육은 전무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소감 일부다. 그것도 겨우 1권을 읽고.


이 책이 유달리 감동스럽다거나 우리 근대문학을 요약해 보여주는 건 아니다. 무려 권당 500페이지 내외로 5권까지 근현대 우리 문학을 연대기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도 아는 바도 없지만 유독 일제 강점기 또는 개화기에는 관심이 많다. 그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관심을 갖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상과 백석 등 당대 문학인과 문학 단체와 문학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기-승-전-문학(史)인 것일까.


물론 문학사를 쓴 사람이 장석주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동일이나 문학 평론가 김윤식 교수 또 그밖의 학자나 교수들도 쓰긴 했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 개론서겸 대중서로 이 책은 적절해 보인다. 문사철이 그토록 중요하다면서 우리 문학의 역사를 단편적으로도 알지 못한다면 뭔가를 놓치고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뻗어나갈지 알 수 없다. 정사로 알 수도 있지만 나처럼 어느 특정 분야에 꽂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이 책은 특별히 우리나라 근대 초입은 1900년부터 1934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읽으니 우리나라 근대 사회의 한 단면이 보이는 것 같고, 문학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도 새삼 알겠다. 몇년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가 어떻게 하다 작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굉장한 문학적 내공을 감추고 있거나, 문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그 옛날 문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문을 깨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문학이었다. 언문은 소위 있는 집 자제나 할 수 있었다. 문학엔 사상과 정서가 담긴다. 글로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을 있는 표현하고, 세상을 깨우치고 싶어 했다. 하나 안타까운 건 당대의 문사들 예를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광수를 비롯해 알만한 문사들 거의 대부분이 친일을 했다는 점이다. 험악하거나 간신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친일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처럼 고고하고 선비 정신으로만 무장해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애국심은 고사하고 깨어 있는 양심으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문인으로서 할 일을 다하지 않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작가로서 할 일을 했다. 그렇다면 애국심이나 지식인의 양심과 작가는 별개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야 이광수가 작가로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또 이건 나의 사견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있는 집 자제였다. 친일에 저항하면 따라 올 육체적 고통을 쉽게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의 안위를 도모하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같다. 결국 문학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을 당대 문학인들은 스스로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문학의 대의가 구국의 대의를 대변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문인들에 관해서는 늘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 책을 (늦게나마)읽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기 어렸다고, 자국의 문학이 자국민들에게 사랑 받기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좀 덜할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정말 욕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한숨을 푹푹쉬며 그것도 작품이냐며 험담 아닌 험담을 했더랬다. 원래 작가와 독자는 그런 존재다. 어떤 식으로든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가 좋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작가는 잊히는 법이다. 잊히는 건 또 얼마나 서러운 일이랴. 근대의 작가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들이 언문을 깨우쳤다고 해서 마냥 사람들로부터 환영만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문을 깨우치고도 이것 밖에 못 쓰냐고 희롱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잊힐지 몰라도 그들의 작품은 100년을 살아남아서 후대에도 읽히고야 만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작가와 그 작품들도 그러지 않을까. 문학의 힘은 그런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멀쩡한 책이 오늘은 파쇄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차곡차곡 모아놓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세월을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 100년 뒤엔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또한 역사다. 작가만이 가장 작가답게 현세를 그릴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다.


문득 책을 읽다 작가 홍명희에게 한참 머물렀다. 그는 바로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다. 이야기의 구조만을 생각한다면 허균의 <홍길동전>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다른 건 <홍길동전>은 허구의 고대 영웅을그리지만, <임꺽정>은 실록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정밀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시대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임꺽정>은 1928년에서 1940년까지 몇 번이나 중단과 연재를 반복했지만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조선 초유의 대작", "조선 현대 문학의 거탑"이란 찬사를 들으며 소설사에 남을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하지만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건 따로 있다. 그건 그의 독서법이다. 그는 1907년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 3학년에 편입해 1910년까지 다닌다. 이 무렵 일본과 서양의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3학년 2학기 때부터 독서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한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되도록 속히 읽는다."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유지하며 도스토예프스키와 바이런과 자연주의 계열의 일본 작가뿐 아니라 금서로 분류된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과 풍기 문란 딱지가 붙은 책까지 섭렵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특히 요즘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없지 않은데, 작가 홍명희가 살아 있다면 이 사실을 알면 썩소를 날릴 것도 같다. 사실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만 해도 이것은 보편적 독서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속독이 유행이기도 했다. 한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한 책을 슬쩍 끼워 보기 시작하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반성해 본다. 물론 비판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독서의 성실함일 것이다. 작가 홍명희는 이 독서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곧추세우며 책을 읽었을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것저것 조금씩 건드려 놓은 책중 하나인 이 책이라도 마치기 위해 허겁지겁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펴낸 장석주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 날개 부분에 그가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가 나와있는데 얼마나 지난했을지 감히 짐작이 간다. 그 덕분에 나 같은 독자는 편안히 앉아 읽어보지 않는가. 참고로 홍명희는 원고자 1만 3천장의 분량을 12년에 걸쳐 쓰고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장장 8년에 걸쳐 원고지 2만 장에 걸쳐 이 책을 썼다. 가히 문학계의 수도사답다. 그도 그럴 것이 1992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후 두 달만에 풀려나 무작정 제주도 서귀포에 방을 얻어 썼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이 책 마지막 5권까지 다 읽고나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상상해 본다. 생각보다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안 읽었을 때 보단 달라져 있겠지. 그 한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아, 그리고 하나. 근대 작가들도 청소년 시절엔 하나 같이 외국 문학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도 사춘기 때 외국 문학만 읽고 우리 한국 문학은 안 읽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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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5-2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맞춤법 검사에서 하나도 걸리지 않고 한 번에 무사 통과된 글이다.
믿을 수가 없어 몇번씩 확인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야호!
이러다 어떤 사람 매의 눈으로 잡아내면 어쩌지..ㅋ

페크pek0501 2020-05-27 22:58   좋아요 0 | URL
맞춤법 검사라는 게 있습니까?
저는 자신 없는 낱말은 아예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고 쓰는 편이라서요...

그보다 저는 요즘 한글 파일의 맨 위 보면 찾기, 라고 있잖아요. 그걸로 반복되는 낱말을 걸러 내는 작업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반복적으로 쓰는 게 많은지 깜놀입니다. 예를 들면 것, 이라는 낱말을 치는 거예요. 그러면 열 몇 개가 나와요. 그러면 다른 말로 대체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있다, 라는 낱말도 반복해 쓰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또 것이다, 라는 말을 제가 잘 쓰더라고요.
참고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답니다. 미리보기로 보셔도 됩니다. 앞부분에 나와 있는 걸 보고 구입했거든요.



stella.K 2020-05-28 19:13   좋아요 0 | URL
엇, 그거 있는데. 사이트마다 있지 않나요?
한글에도 있는데 전 옛날 버전이라 그런지 많이 걸러내지 못하더군요.
작년에 브런치 개설했는데 그건 좀 많이 걸러주는 것 같아서
일단 거기에 쓰고 맞춤법 검사한 후 이쪽에 옮기죠.
그 검사시키면 빨간 줄이 쫙 뜨는데 없어서 신기했어요.ㅎㅎ

<안정효의...>는 오래 전에 사 놓고 완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읽으면 좋긴한데 참고서 같이 써 놔 가지고 꼭 어느 정도 읽으면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
저는 글 쓰기 책은 이윤기나 김연수 작가처럼 쓰는 걸 좋아하는데 말이죠.ㅋ

2020-05-27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8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0-05-28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겠지만, 뒤에서 두번째 단락 세번째 줄 원고지를 원고자라 쓰셨군요 찾으려고 한 건 아니고 글을 보다 보니 보였습니다 원고자라는 말이 있어서 괜찮았던 거겠습니다

홍명희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한 책을 보면 다른 책은 안 봤군요 제가 그러는데... 요즘은 책 여러 권을 보라는 말을 많은 사람이 하기도 하더군요 그건 소설이 아닌 책일 때가 아닐까 싶어요 소설은 흐름이 있으니 그걸 놓치면 안 좋잖아요 그저 제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저는 어떤 책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군요 시작했다 그만둔 책도 조금 있지만...

저는 중, 고등학생 때는 책을 모르고 읽지도 않았네요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싶어요 그때 한국 소설을 잘 안 보는 건 국어나 문학 시간에 하는 공부여서 그랬던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 그걸 알고 시나 소설 찾아본 사람도 있겠습니다 공부로 할 때는 재미없어도 그냥 볼 때는 재미있는 게 문학이 아닌가 싶어요


희선

stella.K 2020-05-28 19:04   좋아요 0 | URL
기계도 완벽한 건 아니라니깐요.ㅎㅎㅎ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단지 맞춤법 검사하면 빨간 줄이
쫙쫙 치는데 신통하게도 그게 없는 거예요.
여태까지 그런 일 한 번도 없었거든요.ㅋㅋ

저는 요즘 우리나라 근대 문학을 읽어 볼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론 많이 못 읽겠지만 왜 진작 못 읽었을까 후회가 되더군요.
희선님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 권씩 읽어보시죠.
암튼 오타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 모든 언어가 멈췄을 때- 음악 한 줄기가 남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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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은 잘 만들어지긴 했다. 무엇보다 책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또 디자인이 좋은 만큼 내용도 나름 튼실하다. 저자가 공들여 썼다는 느낌이 든다. 클래식 입문자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기존에 클래식 입문서들이 많이 나온지라 과연 이 책이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래식 입문서들이야말로 그 주기가 그렇게 길지는 않고 자꾸 새로운 책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미 클래식 입문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하기엔 조금은 망설여진다.


클래식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을 이 책에서도 빠짐없이 다루었다. 그래서 조금은 식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젠 전문적인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이 미덕이 없는 건 아니다. 학창 시절 외엔 음악 이론을 공부한 적이 없고, 또 배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머릿속에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음악 용어들이 낯설게 느껴질 정돈데 그것을 우리말로 친절하게 풀어준 점은 고마울 정도다. 


나 같은 경우 카라얀의 시대 때 클래식을 접한 세대라 이후 어떤 지휘자가 있는지 거의 깜깜하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게오르크 숄티는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지휘자들인데 그들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으니 새삼 클래식에 대한 나의 게으름과 무지함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그것을 이 책에서 단편적으로 남아 알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윤이상을 다뤄준 것이 고마웠다. 물론 저자는 방송국 PD로서 한창때 윤이상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거의 잊힌 거나 다름없이 되었는데 이렇게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돼서 반가웠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아쉽게 느낀 건, 저자가 큰 장이 끝날 때마다 '소년, 클래식을 만나다'란 코너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음악과 관련한 자전적 이야기를 써 놓고 있는데, 이럴 것 같으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 그런 클래식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 제목과도 얼추 맞는 거 아닌가? 아니면 클래식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던가. 뭔가 엇박자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 코너에 소년 때 어떻게 클래식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키워 왔으며 그것과 관련된 직업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단편적으로 다뤘다. 음악을 처음 알게 해 줬던 누나와 중학생 시절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볼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 방송국 음악 PD가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흥미롭게 써 놓았다. 


난 저자만큼의 음악에 열정은 없지만 확실히 음악은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뭔가의 힘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도 있는데 오직 나만을 위해 피아노를 사 주셨다. 내 몸의 족히 3배는 넘었을 피아노가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난 기쁘고 좋기보단 오히려 그것에 압도 당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나는 거의 3년 간을 피아노의 압제 속에 살아야 했고, 마침내 음악에 소질도 관심도 없다는 걸 안 부모님은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주셨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내가 속한 반이 합주반으로 지정되었다는 걸 알았다. 우린 꼼짝없이 방과 후 두 시간 여를 합주 연습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됐다. 지금 생각하면 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전혀 학생의 사정을 고려치 않은 것으로, 원래는 학생을 모집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어떻게 어느 한 반을 지정해서 반강제적으로 연습을 시키고 대회에 나가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우리의 출전곡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었다. 인생이란 게 다 그렇듯 현재는 고생이고 지나면 추억이다. 놀라운 건 그다음부터였다. 피아노를 배울 때에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던 클래식을 그때 이후로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 종일 듣고 있었다. 귀가 트인다는 게 이런 걸까. 음악은 그냥 귀에 들려오면 듣고 안 들리면 마는 물 같고, 공기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집착할 수 있는 거구나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런데 난 확실히 주위력이 떨어지긴 하는가 보다. 그 옛날 <라데츠키 행진곡>을 수도 없이 연습하고, 지금도 가끔씩 라디오에서 듣기도 하는데, 그 음악을 들으면 금방 어린 시절도 빠져들 줄만 알았지 정말 왜 요한 슈트라우스가 왜 이 곡에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에 관해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 책을 보니 새롭게 알았다. <라데츠키 행진곡>의 '라데츠키'는 오스트리아의 존경받는 노장군이었단다. 1848년 쿠스토자 전투에서 이탈리아 무장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개선한. 그래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것이라고. 글쎄, 알았는데 잊어 먹은 건 아닐까. 내가 그렇게 기본 상식도 모르고 그 음악은 연주하고 듣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책은 나름 의욕적으로 쓰긴 했던 것 같은데 약간은 산만하고,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다소 아쉬운 느낌이 있다. 저자의 다른 책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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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1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가 트인다는 건 좋은 거죠. 그것도 학창시절에요.
저는 요즘 음식 만들 때 베에토벤 곡을 듣곤 합니다. 폰으로 유튜브에서 퍼온 거죠.
힘차서 좋더라고요.

stella.K 2020-04-22 14:13   좋아요 1 | URL
그 시절 연습하기 싫어서 죽을 것 같더라구요.
무엇보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게
그렇게 억울하더라구요.
하지만 그게 나중엔 정말 좋은 약이 되었지요.
클래식은 처음엔 듣기가 지루하지만 자꾸 들으면 좋아지잖아요.
그래도 아직 전인미답의 음악가가 있어요. 말러.
작심하고 들으면 모를까 참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베토벤을 들으신다니 말러도 들으시겠어요.
아시죠? 말러가 제2의 베토벤인 거.^^
 
이낙연의 언어 - 형용사는 명사의 적이다
유종민 지음 / 타래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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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막말 싸움이 하도 꼴불견이라 도무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인종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정치인들도 반성을 해야겠지만 방송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원래 방송이란 게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니 정계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원래 저 동네는 그런가 보다 하게 만든다. 정계에 어디 꼭 그런 사람만 있겠는가. 묵묵히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왜 그리도 묻혀만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언제부턴가 이낙연 전 총리의 말이 회자가 되었다. 막말이나 독설 하지 않고 점잖게 상대를 제압하다니. 그가 과연 어떤 언어를 구사하기에 그럴까 싶어 이 책을 읽었다.  


세상에 가장 볼만한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하는데 그건 적어도 반은 맞고 반을 틀린 소리다.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이 구경들이 매번 볼만하단 말인가. 전자는 안타깝고, 후자는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진다. 이걸 좋아한다면 그건 사디즘이다. 사실 싸움 구경이 볼만해지려면 받아치는 사람이 뭔가 달라야 흥미가 있는 법이다. 당한 만큼 갚아 준다는 태도면 결국 똑같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다. 정계엔 나을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있네. 그것이 내가 이낙연 전 총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사실 막말 싸움도 할 수 없으니까 하는 것이고, 누구는 그것도 전략의 하나라고 할지 모르겠다. 뭐 세력을 결집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여론이 나누어졌을 때 상대를 향하여 대신 짖어 주는 개라고 합리화할지 모르겠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어떻게 정치인이 대신 짖어주는 개란 말인가. 국민은 개싸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정치인은 사람이다. 그 정치인의 정책을 보고 싶은 거다. 솔직히 싸움은 국민이 하는 것 아닌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고 하나의 정책으로 입안시켜 법과 제도로 만들어 주는 게 정치인의 할 일 아닌가. 그것을 얼마나 잘해 나갈 것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이 검증되는 것이다. 


정당한 말로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독설과 악다구니부터 쓴다면 그건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설혹 독설과 악다구니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또 실제로 그렇게 해서 이겨왔다면 그건 이긴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국민은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언제나 국민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말이 되는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가 통하는 정치.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분명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다. 말은 그 사람의 사고 수준을 측정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분명 이낙연의 언어가 군계일학이 될 만큼 훌륭할지 모르나 어찌 보면 이런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국회에 더 많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정치인들이 얼마나 언어 구사력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그가 주목을 받는 걸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낙연의 언어를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저자는 이순신과 한비자, 볼테르를 빗대어 이낙연 총리가 언어를 어떻게 구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의욕은 높이 사 줄만 하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선거의 계절이라 그런가 왠지 읽을수록 낚였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이낙연 총리가 이순신과 한비자, 볼테르에 비할만한 건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지 좀 의문스럽다. 그나마 저자는 이순신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김훈 작가가 소설 <칼의 노래>를 썼을 때의 생각들을 기록하기도 한 <연필로 쓰기>란 에세이를 인용했다는 점에서 도대체 정말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인용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김훈 작가의 생각을 인용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참고로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의 삶을 일부 차용한 것은 맞지만 역사 소설도 전기 소설도 아니라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실존 소설이다.)  


게다가 저자가 정말로 이낙연의 언어를 좋아한다면 현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별로 그런 느낌도 없다. 그냥 어디선가 주워 모은 것을 짜깁기한 느낌이고, 그 빈 곳을 그렇게 이순신과 한비자와 볼테르로 채운 건 아닌지.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3분의 2(어떤 책은 2분의 1) 정도 되는 지점을 지나면 나머지 뒷부분은 동어반복적이고 좀 엉성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책도 그것을 비껴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난 이 책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인들이 아니더라고 워낙에 우리 일상 언어가 비속어에 오염 정도가 심각해 오히려 이런 책은 좀 더 다양하게 많이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 길 가다 우연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중 유독 한 아이가 한마디 건너 욕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 그 아이를 떠올려 보면 말이다. 물론 그 나이는 반항심에 일부러 더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감안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쯤 선거 가능한 연령이 되어 있을 것이다. 또 더불어 생각나는 건 국회에서 싸우면 벌금 좀 먹였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법은 정치인들에겐 왜 그리도 관대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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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1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리티션 : 나는 누구보다 나에게 관대하다.

stella.K 2020-04-01 13:4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북프리쿠키 2020-04-01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세개에 텔라님의 느낌이 다가옵니다. 정치는 역시 3류인가 봅니다. 최악과 차악중에 선택할 뿐인데 최선과 최악으로 서로가 선전하고 헐뜯죠.
좋은 점이 있다고 나쁜 것을 덮을 순 없듯이 좋은 점이 있다고 막연히 모든 것이 선이려니 찬양하는 것도 배격합니다. 암튼 텔라님의 균형있는 생각이 참 흐뭇하네요♡

stella.K 2020-04-01 18:14   좋아요 1 | URL
ㅎㅎ 이런 코로나 블루의 나날에 쿠키님의 칭찬을 받으니
유쾌해지네요. 고맙습니다.^^

수이 2020-04-0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법은 정치인들에게도 관대하고 범죄자들에게는 특히 더 관대한 거 같아요. 저 어제 차 타고 지나갈 때 이낙연 봤는데 ㅎㅎ

stella.K 2020-04-04 19: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반가웠겠습니다.ㅋㅋㅋㅋ

후애(厚愛) 2020-04-10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면 정치인의 막말 싸움에 질려 버려서 채널을 돌리고 맙니다.ㅋㅋ
거기다 모두 말말말... 말뿐이에요.
일교차에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20-04-10 20:2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후애님도 좋은 주말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