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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적극적인 해를 끼친 적도 없고 또 다들 어느 정도는 나 정도의 흠결은 지닌 채로 살아간다는 믿음에서 스스로를 평균적인 인물로 간주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소시민적 양심의 고결함조차 우리 각자의 인생이 버팀목으로 삼기엔 턱없이 부족한, 한낱 덧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얼마나 힘겹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그래서 우리에겐 어마어마한 자기성찰의 압력을 무기로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현실이 필요한가 보다.. 모든 신념, 모든 행동의 가치를 다시금 엄중한 어조로 조목조목 재평가하도록 이끄는 죽음의 섬뜩하고도 절실한 위력.. 하여 죽음의 목전, 죽음에의 자각이란 모든 것을 제 위치로 되돌릴 어쩌면 마지막 기회..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게라심의 졸음이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의심이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에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놓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고 싶었던 마음 혹의 어렴풋한 유혹들, 생각이 나자마자 신속하게 털어버렸던 그런 은밀한 유혹들, 어쩌면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일과 삶의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모든 이해관계도 다 거짓인지 모른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변호하려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허약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무엇 하나 변호할 수가 없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걸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인생에서 사라져버린다면, 그럼 어떻게 하지?’”(pp.111-112)
마침내 이반 일리치가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빛이 비추이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아내도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코와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불쌍했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 참으로 안됐어. 하지만 내가 죽으면 훨씬 나을 거야.’
그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아니야,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 몸으로 보이면 되는 거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눈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바꿀 힘도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었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훌륭한 일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통증은? 통증은 어디로 갔지? 어이, 통증, 너 어디 있는 거야?’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 있었군. 그래, 뭐 어때, 거기 있으라고.’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지?’
그는 오랫동안 곁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의 공포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은 어디에 있지? 죽음이 뭐야? 죽음이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공포도 있을 수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pp.117-118)
“모든 사람이 옳다고 말하는 너그러움으로부터,
어떤 사람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자선으로부터,
진리를 희생하여 얻은 평화로부터
선하신 주님이여, 우리를 구해주소서.”(J.C.라일)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의 시간보다 불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아우구스티누스)
“참된 회개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것들을 지켜보고, 주의 깊은 눈으로 미래를 지켜본다.”(로버트 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