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대지가 출간되었을 때,존속살해,형제살해,근친상간,성폭력,청소년과 어린 자녀 학대 등 약자를 대상으로 한 온갖 잔혹한 폭력이 난무하는 재앙의 세상과, 감히 글로 표현해선 안 될 금기였던 죽음과 살인,출산의 장면 등은 당대 독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p.655 해설


이 설명대로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설명을 해보자면 북쪽으로는 샤르트르를 두고 있는 이곳은 '쭉 뻗은 지평선이 수묵화의 먹선처럼, 땅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하늘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곳이다.'(p.24) 이 거대한 곡창지대인 보스평야는 그 먹거리의 크기만큼 수많은 목숨들이 탐하고 욕망하는 땅이다. 플친 유부만두님이 이 책을 읽고 '전원일기 다크'버전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정말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하며 읽는동안 무릎을 쳤다. 전원일기만큼 '대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 마치 그들도 자연의 일부인양 서로 정답게 마시고 먹다가도 이기심과 미움으로 다투느라 그야말로 쉴틈이 없다. 


그의 땅 사랑은 목숨을 내놓게 만드는 여인을 향한 사랑과 같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않을 그런 사랑이었다. 아내도 자식도 그 누구도 아닌, 인간이 결코 아닌 그것은 바로 땅이었다! 그런데 이제 늙어서, 그의 아버지가 힘에 부쳐 마지못해 그에게 넘겨주었듯이, 이 연인을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P32


그 중에서도 중심 인물들은 이 두 집안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땅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나이가 들어 농사를 접고 어쩔 수 없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넘기려 하는 아버지 푸앙과 아내 로즈, 한량처럼 놀음이나 하면서 알콜중독으로 살아가는 첫째 아들 제쥐크리스트(예수그리스도라는 별칭), 결혼한 둘째이자 딸인 파니,욕심많고 성질이 더러워 주민들도 잘 건들지 않는 막내아들 뷔토. 이렇게 위태로운 삼남매가 있다. 그리고 삼남매의 사촌 누이이자 뷔토와 결혼하는 리즈와 그녀의 동생 프랑수아즈가 재산과 그로인한 질투,원망으로 끝없이 갈등을 빚다가 막장으로 치닫는다. 


농부의 고난은 사실상 계속되고 있었다. 농부는 모든 것, 즉 사람들,수많은 요인들, 그 자신에서 고통받았다. 봉건제 아래서 귀족들이 먹잇감을 찾을 때마다 농부는 내몰리고, 추격당하고, 전리품으로 끌려갔다. 영주들이 서로 사사로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농부는 살해당하지 않으면 파멸로 끝났다. 초가집은 불타고 밭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우리네 논밭을 유린한 도리깨 중에서도 최악인 대군대가 왔고, 돈에 매수된 용병 패거리들이 때로는 프랑스의 아군으로 때로는 프랑스의 적군으로 쳐들어왔고, 전화에 휩쓸린 자리에는 헐벗은 땅만 남았다.- P100


흙을 사랑하고 땅을 귀하게 여기는 이 순박한 농부들이 왜이렇게들 잔인한지 갸우뚱하며 찬찬히 들여다보면 대를 이어온 땅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외부적인 요인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과 귀족으로부터끝없이 핍박당하고 전쟁으로 짓밟히다가 부르주아에게 또 갈취당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더욱 땅에 목숨을 걸고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짐승으로 변했다. 교육을 받을 여유도 없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변화는 더디게 수용하고 그래서 정치에 쉽게 희생양이 된다. 그렇게 절망은 악의로, 분노로 분출되어 스스로와 가족은 물론 이웃들을 갉아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친 척하는 것인지, 정말로 미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그의 분노는 광기로 비쳤다. 그는 선 채로 마차를 빠르게 몰며,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대꾸도 않고, 달리는 말에 주의하라고 외치지도않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밤에도 어떤 때는 이쪽에서, 또 어떤 때는 저쪽에서 마차를 타고 달려오는 그를 만나기도 했는데,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 수 없지만 악마를 만나고 오는 것이 분명했다. - P496


아버지가 나누어준 땅과 결혼하면서 아내로부터 얻은 땅이 보태져 마을 소작농 중에서 가장 큰 땅을 차지했던 뷔토는 잠시동안 행복을 누렸고 타고난 농부답게 열정을 바쳤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제 프랑수아에 대한 멈출줄 모르는 욕망이 땅을 향한 갈증만큼 강해 스스로도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에 이른다. 거기다 결혼전에는 동생과 가디건 하나를 같이 두르고 다닐만큼 정답던 리지도 재산이 생기고 남편도 얻자 동생과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결국 자매는 소송으로 재산이 나뉘고 뷔토는 이에 마치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나간듯 분노하며 폭발하고 되돌릴 수 없는 불화와 죽음으로 향한다. 


별들과 태양의 거대한 역학 속에서 우리의 불행은 그 무게가얼마나 될까? 하느님은 우리를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시무시하게 싸워야만 빵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모체이며 우리가 되돌아갈 그곳, 죄를 저지를 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땅,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고 파렴치하게 굴어도 알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생명을 다시 만들어내는 땅, 그 땅만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P652


뷔토가 욕망하던 처제 프랑수와즈의 남편인 장 마카르는 루공 마카르총서의 그 마카르 집안 사람인데,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읽은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중심 인물들 밖에서 겉도는 외부인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군생활을 마친 후 목수로 살다가 이 마을로 흘러들어온 그는 어쩌면 이 막장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일 수도 있다. 장의 위치에서 에밀졸라는 덤덤하게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 밝힌다. 그건 바로 농부들의 피,땀,눈물을 머금은 땅이다. 에밀졸라의 자연주의는 때로 잔인하리만치 냉정하다. 하지만 어찌하랴. 현실이 그런것을! 나는 그래서인지 아직 에밀졸라가 더 읽고 싶다. 










그동안 읽은 루공마카르 총서


  

  

 




이제 남은 루공마카르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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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1-07 19:50   좋아요 3 | URL
5시 30분에 일어나셔야 하옵니다!!!
그 시간은 제가 아들이랑 아침 밥 먹는 시간이에요.
모닝콜 해드릴게요ㅋㅋㅋ
졸라 1 위 하시려면 누구보다도 발빠르게!!!!🏃‍♀️🏃‍♀️🏃‍♀️

미미 2022-01-07 19:52   좋아요 3 | URL
5시반🤦‍♀️ㅋㅋㅋㅋ최대한 해보겠습니다 후... 마니아의 길은 험난하네요ㅋㅋ👍

서니데이 2022-01-07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미미 2022-01-07 22:07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즐겁고 포근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1-07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미미 2022-01-07 22:08   좋아요 2 | URL
네 ^^♡감사해요!! 굿밤되시고 유쾌한 주말보내세요!!

러블리땡 2022-01-08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되세요 ^^

미미 2022-01-08 07:35   좋아요 1 | URL
러블리땡님 감사해요^^♡ 행복한 주말되세요!!

페넬로페 2022-01-08 00: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 소설을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 주시는 미미님!!
저도 올해는 루공마르크 총서로 고고할 예정이예요**

미미 2022-01-08 07:41   좋아요 4 | URL
반가운 소식입니다♡.♡
페넬로페님도 졸라세계의 감동과 환희를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이 작품도 좋고 제르미날과 인간짐승도 훌륭해요!!
감사해요ㅎㅎ행복한 주말되세요^^♡

thkang1001 2022-01-08 0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감사합니다!

2022-01-0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8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8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8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22-01-08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저도 루공마카르 총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미미 2022-01-08 18:42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북홀릭님^^* 이 작품은 다른점보다 재산을 물려준 후 푸앙의 비극이 인상적이었고요.앞쪽 절반은 약간 지루하실수도 있어요(푸앙은 노년의 비극이라서 따로 간략히 페이퍼 쓰고싶을정도) 총서 중에서 개인적으로<제르미날>과 <인간짐승>을 강력추천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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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대의 키가 크고 건장하고 단단한 몸매에 곱슬머리, V자형으로덥수룩한 수염을 길게 기른, 파멸에 빠진 그리스도, 술독에 빠진 그리스도, 겁탈자, 노상강도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클루아에서 아침부터 마신 터라 이미 얼근히 취했고, 진흙투성이 바지에 얼룩진 더러운작업복을 입고 챙 달린 모자는 뒤로 돌려 쓰고 있었다. 눅눅한 검은색싸구려 시가를 피우는 그에게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촉촉하고 아름다운 두 눈 깊은 곳에서는 빈정거려도 그리 악랄해 보이지 않는 솔직하고 사람 좋은 건달의 모습이 보였다.
- P28

그는 계속되는 언쟁에 말이 끊기는 와중에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설명했다. 그러나 북받치는 마음에 목이 메어 한없는 슬픔, 설명할 수없는 울분은 말하지 못했다.  - P32

그의 땅 사랑은 목숨을 내놓게 만드는 여인을향한 사랑과 같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않을 그런 사랑이었다. 아내도 자식도 그 누구도 아닌, 인간이 결코 아닌 그것은 바로땅이었다! 그런데 이제 늙어서, 그의 아버지가 힘에 부쳐 마지못해 그에게 넘겨주었듯이, 이 연인을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 P32

아버지는 매번 삭감될 때마다숫자들을 고집하며 완강히 버텼지만, 번번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자신의 분신으로 자신의 살을먹고 자신의 피를 빨아먹으며 지금껏 살아온 이 욕심 많은 아들이 화를 내자, 그는 속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는 자신도 그렇게 제아버지를 먹어치웠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양손을 부들부들 떨기시작하더니 마침내 폭발했다.
- P40

장은 계속 읽었다. 이제 왕, 주교, 영주라는 삼중의 재판권에 대해, 의무적으로 경작해야 하는 밭에서 땀흘리는 가련한 사람들을 사방에서난폭하게 잡아당기는 재판권에 대해 읽을 참이었다. 관습법이 있고, 성문법이 있고, 그 위에 절대왕정, 가장 강한 자의 논리가 있었다. 보장받을 데도 호소할 데도 없이, 칼의 전능함만이 있었다. 그다음 시대에도공정성이 요구될 때면 불리한 증거들은 매수되었고, 정의는 돈에 팔렸다. 군대에서 신병을 뽑을 때 목숨에 붙는 세금은 더 악질적이었다.  - P98

마지막으로 사냥권, 비둘기장과 토끼장에 대한 권리가 나왔다. 이권리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농부들의 가슴에 증오의 불씨를 남겨놓았다. 사냥은 대대로 농부들의 화병거리였는데, 영주가 어디서나 사냥할수 있도록 허락한 봉건제의 옛 특권으로, 감히 영주의 구역에서 사냥을한 자유농민은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짐승, 자유로운 새가단 한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드넓은 하늘 우리에 갇힌 셈이었다. 사냥감이 큰 피해를 주어도 관할구역에 속하는 밭이라면 자작농은 참새 한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 P99

농부의 고난은 사실상 계속되고 있었다. 농부는 모든 것, 즉 사람들,
수많은 요인들, 그 자신에게서 고통받았다. 봉건제 아래서 귀족들이 먹잇감을 찾을 때마다 농부는 내몰리고, 추격당하고, 전리품으로 끌려갔다. 영주들이 서로 사사로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농부는 살해당하지 않으면 파멸로 끝났다. 초가집은 불타고 밭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우리네 논밭을 유린한 도리깨 중에서도 최악인 대군대가 왔고, 돈에 매수된 용병 패거리들이 때로는 프랑스의 아군으로 때로는 프랑스의 적군으로 쳐들어왔고, 전화에 휩쓸린 자리에는 헐벗은 땅만 남았다.
- P100

허기의 고통, 모든 물가의 갑작스러운 폭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사람들은 짐승처럼도랑에 난 풀들을 뜯어먹곤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거나 빈곤이 조금가시고 나면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칼과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죽였다. 죽음의 신, 페스트는 무지와 불결로 인해 끝없이 되살아나는 혼란이었다. 지난날에는 죽음의 신이 슬프고 창백한 농촌 사람들에게 낫을 휘두르면서 지배했다.
- P101

바스티유를 탈환한다음 농부들이 성들을 불태우는 동안, 8월 4일 밤은 인간의 자유와 시민평등권을 인정하면서 수백 년에 걸쳐 쟁취해낸 것을 합법화했다. "농부들은 하룻밤 만에, 귀족 칭호만으로 그들의 땀을 마시고 그들이 밤새워 지킨 열매를 삼켜왔던 영주들과 동등해졌다. 농노의 신분, 귀족의모든 특권, 성당과 영주의 재판권은 폐지되었고, 예전 권리에 대한 값치르기, 공평한 세금, 모든 시민에게 민과 군의 모든 일자리 내주기, 그렇게 계속 열거되었다. 그들의 삶을 괴롭혀왔던 해악이 하나씩 사라지는 듯했다. 농부들이 새로이 맞이한 황금시대에 대한 환희의 노래였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농부들이야말로 세상의 왕이요 양육자라고 치켜세웠다. 농부만이 중요했으며 성스러운 쟁기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어야했다. 그뒤 93년의 공포정치는 신랄하게 비난받았고, 책자는 혁명의 아들인 나폴레옹이 "방종이라는 선례에 빠지지 않고 농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며 과도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 P103

그는 분할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다른 일들로도 혼란스러웠다. 그의 둔한 머릿속에서는 다른 것들이, 즉분노, 자존심, 약속을 들어버리고 싶은 몽니, 속을 것 같은 두려움에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수컷의 극단적인 욕망이 혼란스레 뒤엉켜 싸웠다.
갑자기 그는 결정을 내렸다.
"난 자러 갈래요, 아듀!"
- P109

힘든 작업이 아직 시작되지 않아 하루 식사는 네 번뿐이었다. 아침 일곱시에는 우유에적신 빵, 정오에는 토스트, 네시에는 빵과 치즈, 여덟시에는 수프와 돼지비계였다. 모두 널따란 부엌에서 양쪽에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긴 식탁에 앉아 먹었다.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커다란 아궁이 한쪽을차지한 주물 화덕뿐이었다. 안쪽으로 가마의 시커먼 입이 보였다.  - P130

아무 땅에나 파종을 하고 우연히 싹이 나오면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내 배움을 통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경작을 할 날이, 소출이 배로 늘어날 날이 언젠가 오겠지만, 그때까지 무식하고 고집 세고한 푼도 투자하지 않는 농부는 땅을 죽이고 말 것이다. 예전에 프랑스의 곡창지대였던 보스 지역, 이제 밀밖에 없는 메마른 보스평야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건만 어리석은 이들에게 지쳐서 서서히 진이 빠져 죽어갔다.
- P187

생쥐스트의 농장주 집안인 코카르네 맏딸 결혼식에서처럼결혼식 케이크, 크림 두 가지, 당과류와 프티푸르네 접시를 내놓을예정이었다. 집에서는 고기 수프, 순대, 튀긴 닭 네 마리, 백포도주로 조리한 토끼 네 마리, 구운 소고기와 송아지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는십오 인분 정도의 음식인데, 정확한 손님 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P234

"글쎄요! 각자 자신이 모시는 신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지요!…… 내가 당신들에게 빵을 비싸게 팔지 않는다면, 바로 프랑스의 농촌이 파산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빵을 비싸게 판다면, 야반도주하게 되는것은 공장들일 테고요. 당신들의 임금이 올라가면, 생산된 물건값이 올라가겠지요. 내 도구들, 내 옷, 내가 필요로 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말입니다… 아! 그렇게 돈을 쓰면, 우리가 파산하겠군요!"
- P464

그 말의 파급효과는 대단해서 델롬, 푸앙, 클루, 베퀴 모두 입이 떡벌어지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르쾨는 신문을 떨어뜨렸다. 우르드캥은 나가다가 다시 들어왔다. 뷔토는 프랑수아즈를 잊어버리고 탁자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 P469

(집달리)아무런 대답이 없어 그는 더 세게 두드려야 했고, 감히 이름을 부른 다음 소유권 포기를 위한 최고장때문에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곳간 창문이 열리더니, 똑같은 한마디가 큰 소리로 터져나왔다.
"염병하네!"
그리고 가득찬 요강을 쏟아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비피는최고장을 도로 가져가야 했다. 로뉴 사람들은 한번 더 배꼽을 잡았다.
- P495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친 척하는 것인지, 정말로 미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그의 분노는 광기로 비쳤다. 그는 선 채로 마차를 빠르게 몰며,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대꾸도 않고, 달리는 말에 주의하라고 외치지도않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밤에도 어떤 때는 이쪽에서, 또 어떤 때는 저쪽에서 마차를 타고 달려오는 그를 만나기도 했는데,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 수 없지만 악마를 만나고 오는 것이 분명했다.  - P496

푸앙은 수프에서 불안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홀로 수십 리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마치 자기는 먹으러온 거라고, 거기엔 그의 위장만 있지 심장은 없다고 말하려는 듯했다.
- P535

그때까지만 해도 푸앙은 걸을 수 있었다. 여전히 땅에 관심이 있어걷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옛 연인들을 잊지 못하고 집요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는 늘 예전의 자기 밭들을 보러 올라갔다. 그는 길을 따라, 상처 입은 노인네의 발걸음으로 천천히 배회했다. 아무 밭이나 그 주변에 멈춰 서서 지팡이에 기댄 채 몇 시간씩 가만히 서 있다.
가 다른 밭으로 몸을 이끌고 가서는 다시 그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늘어 말라버린 나무처럼 자신을 잊은 채 서 있곤 했다. 그의 공허한 두 눈에는 밀도 귀리도 호밀도 분명히 구분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뿌옇게보였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올라오는 혼란스러운 기억들이었다.  - P541

정오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그는 몸을 움직이는 순간부터 얼어붙고 벌벌 떨었다. 의지와 권위가 죽은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노쇠가 오고, 버려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늙은 짐승이 되고, 그게 바로 인간으로 살았던 것에 대한 비참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할일 다 한 후 쓸모없이 귀리만 축내는 말이 도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무 쓸모 없는 노인네는 돈만 축내니까. 그 자신도 아버지의 종말을 원했었다. 이번에는그의 자식들이 그의 종말을 원한다 해도, 그는 놀라지도 슬프지도 않을것이다. 본래 그런 법이다.
- P543

별들과 태양의 거대한 역학 속에서 우리의 불행은 그 무게가얼마나 될까? 하느님은 우리를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시무시하게 싸워야만 빵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모체이며 우리가 되돌아갈 그곳, 죄를 저지를 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땅,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고 파렴치하게 굴어도 알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생명을 다시 만들어내는 땅, 그 땅만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 P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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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2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곧 리뷰가 올라오겠군요~!! 페이지가 엄청나네요 😅

미미 2021-12-02 00:14   좋아요 1 | URL
늦게 들어와서 리뷰는 못썼어요 새파랑님과 함께 읽으려고 했는데 다른 책 읽고 계셔서 타이밍 놓침요😅 굿밤되세요!

새파랑 2021-12-02 00:18   좋아요 1 | URL
밑줄 읽어보니 제르미날의 농촌버전(?) 느낌이 들어요 ^^
ㅋ 기대가 됩니다. 푹 주무세요~!!

페크pek0501 2021-12-02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펄벅의 대지, 인 줄 알았어요. 에밀 졸라군요. 어쩐지 6백 쪽이 넘어서 이상했어요.
뿌듯한 독서로 느껴지실 듯합니다. 두꺼운 책이니...
완독하셨다면 리뷰만 쓰시면 되는 건가요?

미미 2021-12-02 13:55   좋아요 0 | URL
네ㅋㅋㅋ펄벅의 대지도 읽어야되는데 말입니다. 어제 못써서 지금 쓰고 있어요😊
 

이번달에 읽은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은 여러모로 어려운 책이었다. 특히 거울,고체,액체...같은 은유가 등장해 당황스러웠는데 함께 읽은 다른 분들도 아마 비슷한 구간에서 힘들었을것 같다. 이 책 ‘뤼스 이리가레‘는 현대 사상가들에 대한 ‘안내서‘로 나온만큼 해당 인물의 저서, 그 중 핵심키워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있다. 이리가레가 말한 거울에 관해서 설명이 나와있어 함께 읽은 분들과도 공유하고 혹시 관심있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해당 내용을 올려본다.

이리가레의 ‘반사경‘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거울의 은유와 여성

외출하기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옷매무새는 괜찮은지 살펴볼 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물 대하듯이 객관적 시선으로 관찰한다. 나 자신의 객관화라는 점에서, 거울은 서구 담론에서 중요한 은유로 사용되어 왔다. 지성적 사고를 이르는반성(réflexion)이나 사변(spéculation)이라는 말에는 이미비추어 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근대에 들어 서양철학에서 거울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두 개로 나누어 객관화된 ‘나‘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 반성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 P2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이론에서 거울은이보다 훨씬 더 핵심적 의미를 띤다. 라캉이 인간의 주체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틀에서, 거울 단계는 아이가 마침내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고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극복하여 상징계로 진입하는 드라마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하지 못하는 유아의
‘조각난 몸의 환상은 거울 단계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극복된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아이는 자기 신체의통일성을 이해하게 되고, 그전까지는 완전한 합일의 상태라고 믿었던 어머니와 자신을 구별하게 된다. 아이가 거울단계의 막바지에 찾아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무사히극복한다면, 이제 아이는 법과 질서와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로 들어가 말하는 주체, 욕망의 주체가 된다. - P3

여기서 거울의 역할은 자아의 신체 이미지를 제공해 주는 데 있다. 주체의 통일된 신체 이미지는 상상계를 구성하는 바탕이 되며, 상상계는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 통일성,
조화, 자기동일성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자아이의 이야기, 남성 주체의 오디세이다. 어째서인가?
이때 신체의 통일된 형태를 반사해 주는 거울이 평면거울이기 때문이다. 평면거울이 반영하는 이미지는 남성 신체의 이미지다. 왜냐하면 "편평한 거울은 하나의 구멍‘을제외하고 여성들의 성 기관 대부분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rigaray, 1974:109, note 122). 여성과 남성의 나신을 표현한 조각상이나 회화를 떠올려 보라. 남성의 것과 달리 여성의 성기는 머리카락이나 나뭇잎 따위로 가려져 있거나, 드러나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재현에 실패한다.
여성의 성 기관은 하나가 아니며 바깥쪽에도 있고 몸 안쪽에도 있기 때문이다. 평면거울이 비출 수 있는 것은 바깥에위치한 성기뿐이며, 그나마도 거울 앞에 선 채로는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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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30 2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ↀωↀ<)
응원 ฅ🐾

미미 2021-11-30 23:37   좋아요 3 | URL
스콧님 이모티콘 냐옹이 소리가 들립니당(ᴗ̤ .̮ ᴗ̤ )₎₎ᵗᑋᵃᐢᵏ ᵞᵒᵘෆ

그레이스 2021-11-30 2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런 의미에서 쿠르베의 그림 <세상의 기원>은 라깡의 관심을 끌만했죠
실제로 라깡이 그림을 샀다고 해요

미미 2021-11-30 23:44   좋아요 4 | URL
엄훠 😳 검색하니 바로 나오네요!!! 적나라하군요! 라깡이라고 써주시니 너무 귀엽습니다~♡ 라깡 책 빨리 주문해야겠어요!

새파랑 2021-11-30 23: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밑줄만 읽어도 전 어려워요 😅 이런책을 읽으시는 미미님 대단~!!

미미 2021-11-30 23:58   좋아요 4 | URL
‘하나이지 않은 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집니다ㅋㅋㅋ😆

mini74 2021-12-01 0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슨 드라마였는지 영화였는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다 다친 에피가 생각나요. 그러고보면 한 번도 제대로 대면해본 적이 앖는 것 같아요. 거울이 이렇게 해석이 되는군요. 전 그저 여성상징기호가 거울, 허영 나르시즘 뭐 이런식? 이었는데 객관화된 나를 본다는 것 등 다양한 것들이 담겨있둔요. 넘 잘 읽었어요 미미님 안녕히 주무세요 *^^*

미미 2021-12-01 00:22   좋아요 3 | URL
뒷부분에 남성들의 나르시즘의 의미도 있는데 너무 복잡해서 안넣었어요
거울에 관해서는 속설도 괴담도 많은게 이런 이유들 때문인가봐요ㅎㅎ미니님도 굿밤되세요~🙆‍♀️

책읽는나무 2021-12-01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울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던데...평면형 거울은 남성의 시선과 성기 남성의 관점을 비춰주고,입체형 거울 또는 반사되는 거울은 반대로 여성의 시선,몸,관점을 비춰주는 것...제대로 해석한 게 맞는 건지? 책을 읽었어도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네요?ㅋㅋㅋ
이해하기 쉽게 나왔다고 하셔도 읽어 보니 이것 또한 쉽지 않네요..ㅜㅜ
문해력이 참.....ㅋㅋㅋ

미미 2021-12-01 08:18   좋아요 3 | URL
어려운 책이었지만 거울의 그런저런 기능을 이번기회에 알게되어 큰 수확이었지않나 싶어요ㅋㅋㅋㅋ나무님 12월도 즐거운 독서생활 함께해요^^♡

수이 2021-12-01 0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사경은 지금 번역중이래요 12월에 안 나오면 내년에 나올듯요, 미미님의 부지런하고 꼼꼼한 독해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미미 2021-12-01 08:25   좋아요 1 | URL
오~타이밍이 좋네요! 미스터리를 캐네는 느낌이예요ㅋㅋㅋ비타님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1-12-01 0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러 군데 어려웠지만 거울이 단연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어려워서 포기할뻔..ㅋㅋ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미미 2021-12-01 10:12   좋아요 1 | URL
여성을 표현한 액체도 좀 더 알고싶었는데 이 책에는 없는듯 해요ㅋㅋㅋ거리의 화가님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21-12-01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울 이미지는 여러가지로 변주되어 활용되지요. 예는 많겠지만 영화 블랙스완에서도 오페라의유령에서도 저는 거울 이미지에 매료되더군요. 전자는 여자, 후자는 남자의 거울인데 압도적인 이미지였어요 제겐.
미미 님의 정리 최고입니다*^^*

미미 2021-12-01 10:38   좋아요 2 | URL
아 블랙스완 좋아서 두 번 봤어요. 오페라의 유령에도 거울이 등장했군요! 이제 거울 나오면 더 눈여겨 볼 듯 해요.ㅎㅎ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오거서 2021-12-01 1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울을 보는 의미를 사유하고 해석해본 적이 없는데 미미님이 공유해주시니 거울, 이미지, 객관화, 욕망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독서에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미미 2021-12-01 12:55   좋아요 2 | URL
이 부분 읽고 좋아서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오거서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쁩니다^^♡

공쟝쟝 2021-12-02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동영상인가 뭐시기 만든다고... 완전 하얗게 잊고 있었다.. 이리가레 페이퍼.... 써야하는데 (한숨...)

미미 2021-12-02 13:20   좋아요 0 | URL
쟝쟝님의 페이퍼 저도 기둘리고 있음요👍^^♡

페크pek0501 2021-12-02 1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시리즈도 좋군요. ^^

미미 2021-12-02 13:56   좋아요 1 | URL
지난번에 주디스 버틀러편 읽어봤는데 알기 쉽게 쓰여져 입문용으로 딱이예요.전부 사고 싶어요^^♡
 

이리가레가 철학자가 되기 이전 저서들은 정신분석학과언어에 관한 것이다. 그중 『치매환자의 언어(Le Langagedes déments)』(1973)는 치매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언어적기능의 주된 장애가 대화 상대자에게 적절히 반응하여 타자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반응을 낳는 주체적 발화 능력의상실임을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이리가레는 남성 중심적인 상징 질서 내에서 여성의 위치가 바로 이와 유사하며,
훗날 자신의 주요 개념이 될 ‘성차‘가 언어 안에 존재함을예기치 못하게 발견하게 된다.
- P2

페미니스트 철학자로서 그녀의 학문적 삶이 크게 변화한 것은 1974년 철학박사 학위 논문으로 반사경, 여성으로서의 타자에 대하여(Speculum. De lautre femme)』(이하 『반사경)를 제출하면서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곤란을겪은 뒤 출간한 『반사경』은 기존 프랑스 학계에는 꽤나 당황스러운 텍스트였음이 분명하다. 이 저작은 서양의 사상적 아버지들인 수많은 남성 철학자들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의 대상이 된 남성 이론가들의 목록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캉도 포함되어 있었다(라캉을 위한 장을 별도로 마련하거나 직접 언급하지는않았지만, 라캉의 방식으로 해석된 프로이트를 독해하고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리가레는 정신분석학이 성차에무지하고 무관심한 남근중심주의 담론이라고 날카롭게비판한다.
- P3

이 일련의 사건은 이리가레가 특히 초기 저서에서 보여주듯이 상징 질서에서, 무엇보다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담론을 자처하는 철학에서 여성의 관점과 목소리가 어떻게 배제되고 삭제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 P3

『반사경』과 『하나가 아닌 이 성(Ce sexe qui n‘en est pasun)』(1977)으로 대표되는 첫 단계는 비판의 시기다. 여기서는 서구의 자기중심적이고 단성적인 남성 주체가 세계를 구축하고 이해하며 해석해 온 방식을 분석하고 타자인여성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한다. 특히 『반사경』은 철학의주체 개념이 다른 모든 타자들을 남성적 주체와의 관계로환원해 버린다는 것을 폭로한다.
- P4

그에 비해 이리가레의 글은 난해하다. 정신분석학, 철학,언어학의 개념들과 사상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기때문만은 아니다. 이리가레에게는 글쓰기 양식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철학적 전략이자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촘촘한 논리적 건축물을 세우는 대신 끝없는 의문문과비약이 있고, 주어와 술어가 문장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대신 시적 표현이 난무한다.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분쇄하여 ‘그의 말과 그녀의 말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어디까지가 남성 주체의 언어이고 어디부터가남성의 타자로서 여성의 메아리인지, 혹은 이리가레 자신의 주장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 전략을 엘리트주의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이리가레의 글쓰기 스타일은 중성적인 인간주체를 자처하는 남성 주체성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단일한 주체의 말에 적극적인반대 주장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질문들을 쏟아 냄으로써,
이리가레는 남성 주체의 단단한 동일성에 금이 가게 하여대화가 가능한 간극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 P9

장르는 글의 맥락에 따라 어떤 때는 젠더로 번역될 수 있지만 대체로 문법적 성의 의미를 품고 있으며, 환원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성적 차이를 가진 두 성을 지시할때 사용된다. 즉 사회문화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의 젠더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새롭고 낯선 용어와 언어유희는 이리가레의 글을 면밀히 살핀다면오히려 그녀의 문제의식과 주장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역할을 할 수 있다.
- P11

존재론적인 차이로서 성차 개념은 섹스, 젠더 이분법에대한 반성을 고무했다. 비판적 무기에서 어느새 불가침한강령처럼 되어 버린 페미니스트들의 반(反) 본질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성들 사이의 차이는 섹스와 젠더라는 이원화된 지대를 넘어 생물학, 자연, 욕망,
무의식, 언어와 상징 질서가 복잡하게 또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생성 중인 것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정치학과 인식론에 집중되어 있던 페미니스트 이론은다양한 층위와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신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할 가능성과 그 실제 사례를 갖게 되었다.
- P12

여성 철학자로서, 또한 페미니스트로서는 드물게 별도의 학회(이리가레서클(The Irigaray Circle)]가 만들어졌다.
는 데서 우리는 이리가레의 영향을 더욱더 실감할 수 있다.
흔히 철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 들뢰즈주의자처럼 한철학자의 사상을 따르는 학파가 형성되고 새로운 쟁점과개념들을 발굴하여 현대의 문제들과 연결 짓기 위해 고전을 반복하여 연구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고 태생적으로 권위주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인지 그러한 작업이 드물다. 반면 이리가레의 철학에 관한논문과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학회가 설립됐다는 것은이리가레 철학의 특수한 위상을 짐작케 한다.
국내의 경우 이리가레에 대한 대중적 수용은 과거에 비해 감소했지만, 전문 연구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여성철학 혹은 페미니스트 철학이라는 분야가 철학연구자에게도 그 이름조차 낯선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극소수이긴 하나 전공자도 조금씩 불고 있고, 더불어 여러분야에서 이리가레에 대한 연구도 늘고 있다.
- P13

반사경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의 동일성을보장하기 위한 거울 역할을 한다. 남성은 여성을결핍된 존재로 설명함으로써 남성 자신의동일성과 우월함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남성 중심적 담론에서 여성이어떻게 타자가 되고 배제되는지 폭로한다.
반사경은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 담론을 비춰보여 주는 거울이자 여성의 입장에서 세계를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며, 나아가 여성의 거울역할을 동요시키고 여성 자신을 재현하기 위한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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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나타난 계급의 첫번째 대립은 일부일처제 안에 있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대립의 발전과 일치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엥겔스'가족 사유 재산제,그리고 국가의 기원' p.105


인종차별은 오래된 문제다. 하지만 보다 오래된 차별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이 사실은 더 명확해진다. 전쟁시(위기상황) 연합군에 타인종이 섞일 수는 있지만 여성은 결코 쉽지 않다. 지금도 분쟁국가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즉 안보를 위협하는 적이 나타났을 때 다른 인종과는 연대할 수 있어도 여성과는 연대하기 힘들 뿐더러 오히려 여성의 성은 더욱 위협받는상황이 된다.(위안부는 그 중의 한 가지 사례이지. 전부가 아니다)  뤼스 이리가레는 이 세계의 역사와 규칙은 오직 남성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성(性)에 있어서도 오직 한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어머니 · 처녀 창녀, 이것들이 여자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들이다. (이른바) 여성 성욕의 특징들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즉 번식활동과 영양 공급에 대한 가치 부여, 정절, 정숙함, 무지, 게다가 쾌락에 대한 무관심, 남성들의 활동‘ 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소비자들의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유혹, 그러나 자신은 누리지 않으면서 이 욕망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으로 자신을 바친다. 어머니도 처녀도 창녀도 아닌 여성에게는 자기 쾌락에 대한 권리가 없다. - P242


이 세계에 중심된 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철학과 언어,역사에 그런 남근중심적 규칙과 사고방식이 담겨있고 계승되어지고 있다. 남근중심주의는 여성의 쾌락에 대해서도 남성적 사고방식의 분석과 담론을 이어왔다. 정신분석학에서 대표적으로 이리가레는 프로이트를 예로 든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은 어린시절 남성과 동일했지만 발육을 거치며 자신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실감을 느낀다. 여성의 쾌락에 대한 설명이나 여성끼리의 동성애에 관한 시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남근중심적이다. 그리고 그의 정신분석은 남성세계의 규칙과 일치한다. 


프로이트는 사실 어떤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여성의 성욕도, 게다가 남성의 성욕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도로서 이해할 뿐이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다루는 산물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에게 드러나는 여성의 성욕을 규범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병적 상태가 사회적·문화적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묻지 않은 채, 개인사에 따라 여자들의 질병과 증상 · 불만족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요구 사항을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아버지의 지배적인 담화에, 아버지의 법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P91


이리가레에 따르면 주체인 남성들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의 쾌락을 위한 쾌락으로만 측정된다. 그래서 여성은 그들과 함께하고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고 그들 사이에 교환되는 상품으로 존재한다. 착취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성 착취가 아직까지 많은 국가에서(전시상황이 아닌경우도 마찬가지로) 성산업으로 만연한 것도 그 단적인 증거다. ㅡ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성범죄도 여성이 그 대상이다. ㅡ성매매를 합법화하자는 일부의 주장도 그런 배경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성범죄자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있는데도 성판매 여성들을 위해 성매매를 합법화하자고 말한다. 마치 이 여성들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남성들의 성욕해소를 필수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유독 이 매매의 수요와 공급에서 공급자는 늘 여성이란 점이다. 




'성노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신매매는 나쁘지만 '자발적인 성매매'는 괜찮다고 한다. 성착취 현장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은 나쁘지만 '성매매' 자체는 괜찮다고 한다.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성매매'는 나쁘지만 성인의'성매매'는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착취를 용인할 수 있는 성매매와 그렇지 않은 성매매로 나누는 것은 상업화된 성착취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위함이다. -성노동,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 박혜정. p.113


여성의 성폭력 피해나 남성의 '꽃뱀 피해'모두, 성의 주체는 남성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즉,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여성의 것이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에서 폭력 ,매매,협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남성의 성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ㅡ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p.175


사실상 성노동을 인정하자는 주장은 이렇듯 물화된 여성의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그것을 유지하자는 의미다. 이리가레는 쾌락을 중심으로 여성을 상품화하고 억압하는 지배적 담화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 남성편향적인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역사, 담론, 거울, 심지어 쾌락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남성들이 고체라면 여성들은 액체로서 형태도 없이 흐른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 이리가레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비판한 뒤 학회와 대학에서 축출당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가 책의 후반부에 조금 담겨 있다.) 이런 지식인의 의견조차 묵살당하고 배척당하는 이 상황이 더욱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읽는 동안 해체적 접근법이 어렵고 난해해 힘들었지만 주디스 버틀러를 읽었던 경험 덕분인지 그래도 비교적 짧은 시일내에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소 강한 어조가 담겼지만 여러가지 생각들을 끌어내주었던 글이어서 좋았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라캉과 데리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도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어떠한 쾌락인가? 누구의 쾌락인가? 누구와 누구 사이의 쾌락인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쾌락은 결코 관계 속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스스로 유일하다고 믿기 때문에 주인은 자기 중심적 쾌락을 절대자의 쾌락과 혼동한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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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8 23: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성은 오랫동안 그저 소비의 주채이면서 어리석고 순종적 존재, 아내는 정숙하며 자신들의 성적판타지는 직업여성에게란 남성위주의 2분법으로 억압당한 역사가 너무 긴 것 같아요. 미미님덕에 어려운 내용들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미미님은 꼭 학교 다닐때 필기 잘하고 요점 요약에 설명 잘 해주는 그런 친구 같아요. ㅎㅎ

미미 2021-11-28 23:32   좋아요 4 | URL
아유 감사합니다 미니님 ^^♡ 근데 그건 저도 똑같이 미니님한테 느끼는거ㅎㅎㅎ 읽으면서 감동을 제대로 글로 옮기고 싶었는데 좀 한가지에 치우친것 같아요. 읽어봐 주셔서 감사해요ㅎㅎ

다락방 2021-11-28 2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미미님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근사하게 정리까지.
여성주의 책 읽을수록 제 안의 생각이 더 뚜렷해지고 방향도 잡히는 것 같아요. 미미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12월에도 만나요! 🙋‍♀️

미미 2021-11-28 23:36   좋아요 2 | URL
네! 다락방님 이런 훌륭한 책을 골라 주셔서 이번달도 넘 감사해요👍 다 이해는 못했지만 여러 대목들 앞에서 감동받았고 말씀대로 조금씩 길이 열리는 듯 해서 설렙니다. 다음달도 아자아자! ^^♡

그레이스 2021-11-28 23: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에 관한 내용은 제2의 성에서도 말한 것이네요.
내용을 보니 쉽진 않았을텐데 거기서 감동까지!
미미님 👍

미미 2021-11-28 23:47   좋아요 3 | URL
네!그레이스님! 특히 초반에 보부아르가 아른거리는 대목들이 나오더라구요. 나중에 재독시 좀 더 이해하게 되면 더 감동적일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1-11-28 23: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담론을 적어 주셨네요~~
지금에도 별로 변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위치에 대해 좌절할때가 많아요. 법의 테두리조차 너무 불공평해요~~
읽기 힘든 책, 읽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미미 2021-11-28 23:49   좋아요 4 | URL
네 그런 면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핵심을 찔러주는 면이 있어서 읽으면서 조금 슬프기도 하더라구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훌륭했습니다 감사해요 페넬로페님^^♡

난티나무 2021-11-29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짱!!!!!!!! 👏 👏 👏

미미 2021-11-29 07:54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1-11-29 0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미님의 플래그와 밑줄 보니까 학자처럼 느껴집니다~! 이대로 박사논문까지 내셔도 될거 같아요 ^^ 이제 어려운 책도 금방 뚝딱 하시른 미미님 👍

미미 2021-11-29 08:0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감사해요 새파랑님^^♡ 좋았다는 걸 어필하려고 사진을ㅋㅋ 이해 못한 구간도 많았지만 인상적인 책이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11-29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려워요~~~ 미미님 대단하세요. 입 쩍 벌린 채 히야~~ 이걸 다 소화해내고 반추까지 하다니. 별 다섯!!!^^

미미 2021-11-29 17:30   좋아요 1 | URL
솔직히 60프로 정도 소화한것 같아요ㅋㅋㅋ너무 어려운 부분은 그냥 눈으로 읽기만 했어요. 거울,액체,고체가 나오는데 영..ㅋㅋ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 위주로 써봤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