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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평점 :
갑자기 말들이 내 안에서 죽어버렸다. 익숙한 생각이 스스로 완성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내가 실은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하고 있던 이야기는 언제나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결코 로더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고, 그의 전체를 바라본 적도 없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그를 이용해왔다.
로더는 내 우울이었다. 내 내면의 분열, 나를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 힘, 내가 가장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 로더의 분노를 확실히 규정하면서 몇 년을 보내는 일은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마치 로더 안에서 분노를 찾아냄으로써 내 안의 분노를 줄이려는 것 같았다. 로더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정말로 그의 불능 상태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신의 일부에 계속 몰두할 수 있었다. P.166
나는 눈길에 잘 미끄러지는 편이다. 작년 겨울에도 두번 크게 넘어졌고 올해도 이미 두 건이나 해치웠다. 그런 나이기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제법 신경쓰고 눈길에는 튼튼한 등산화를 선택한다. 그리고 미끄럽지 않은 쪽으로 온 신경을 곤두세워 ㅡ그러나 남들이 볼때 너무 거기에 골몰해 보이지 않도록 애써 침착한척하며 ㅡ되도록 천천히 걷는다. 본래는 걷는 속도가 빠른 축에 속하는데 겨울에는 생존을 위해 나무늘보가 된다. 조심한다고해서 잘 되는게 있고 별 소용없는 게 있다. 인생이 그렇듯 말이다. 나에게 눈이 온 길에 대한 조심성은 삶의 태도와도 닮았다. 일단 한번 넘어지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넘어질땐 꼭 주변에 사람들이 제법 있고 나는 마치 소동극의 주연처럼 내 역할을 잘 해낸다. 올해 한 장면에선 누군가에게 청혼이라도 할 것처럼 한 쪽 무릎을 꿇었고(아쉽게도 곁에 누구도 없었으며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또 한 장면에선 ‘여기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라고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려는듯 뒤로 자빠졌다. 올해는 소동극을 그만 멈추고 싶은데 산책길에 눈이 제법 남아있다. 며칠 걷기를 삼가하고 되도록 버스로 이동했다.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건 없다. 얼른 해가 바뀌어 토끼처럼 뛰고싶다.
파리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할 넥타이,스카프를 사다가 남편과 크게 다퉜다. 고급 매장도 아니고 노점에서 쌓아두고 팔던 거였는데 색감이 다양하고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메이드 인 프랑스! 게다가2 하나에 만원!! 철저하게 계획대로 움직이고 낭비를 싫어하는 ISTJ인 남편은 그런걸 왜 여러개 사느냐고 나를 타박했고 나는 선물하고 싶은 명단을 읊었지만 벽에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많은 돈 들이지 않고 센스있는 선물을 할 수 있겠다는 기쁨으로 들뜨고 설레였던 나는 몇 차례 답답한 입씨름을 치르고 나자 무너졌다. 세상 고통을 다 짊어진듯 서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가장 비참한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행객 신세라 더욱 고립감을 느꼈다. 파리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놀란 눈으로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프랑스어로 상황을 말하면 당장 내 편을 들어줄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길에 서러워져 눈물은 더 쏟아졌지만 얼마간 용기를 얻었던것 같다. 결국 나는 고집을 부려 원하는 만큼 그것들을 구입했다. 한국에 돌아왔을때 남편은 넥타이를 3개나 자기것으로 찜해 가져갔고 형제들, 아버님께도 회사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칭찬도 받았다. 심지어 여분이 더 없냐고 물어서 파리에서의 신파극을 마치 없던 일인듯 굴었다. 나의 첫 해외공연은 그렇게 화려하게 주목받은 뒤 씁쓸하게 막을 내렸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문장의 형태에 반응할 때면 내 문장들도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생각은 풍부한 표현으로 넘치고, 감정들은 명확해지고, 다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진다. 내게 곧바로 반응해주는 누군가의 지성이 있는 곳에서 내 지성이 작동하는 소리만큼 나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정에도 짜릿함 만큼이나 평안함이 필요하다. 그 두가지가 모두 갖춰지지 않으면 마음의 접붙이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결은 신뢰할 수 없는 순간의 문제로 남는다. 꾸준히 연결되지 않으면 우정에는 미래가 없다. 뉴욕에서 미래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미칠 듯한 마음의 동요 속으로 곧바로 다시 내던져진다. P.169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는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모음이다. 꽤 공감가는 문장들이 여럿 있었다. 막상 읽다보면 소설적인 에세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살면서 펼쳐왔던 나의 공연들을 떠올렸다. 다시 볼일 없을듯한 사람들 앞에서의 공연은 그럭저럭 기억에서 희미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의 공연은 나의 이미지로 어느정도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공연을 보며 상대에게 '이끌리고, 한동안 특별해진 기분을 느꼈다가 친밀한 관계 바깥으로 급속하게 떨어져 나오기도 한다.'(P.152) 타인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를 반복하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나'를 수용하고 끊임없이 만들어간다. 때로 함께 때로는 혼자 대본없는 극을 펼치며 그렇게 이 세상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나간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다시 공연하지 못할 그 날까지 나름의 실수와 성공을 무던히 반복하면서, 다음 무대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고 어쩌면 불안해 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공연을 한다.
늦은 밤, 나는 혼자 앉아 궁금함에 사로잡힌다. 나는 자극이 되라는 의미로 꺼냈는데 상대방이 공격으로 받아들인 문장이 어떤 것이었을까? 대니얼의 마음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미움을 사고 만 뉘앙스는 무엇이었고, 샬럿의 통찰력을 흐트러뜨리고 마이라의 기분을 맥빠지게 만든 내 대답은 또 무엇이었을까? 왜 이런 일이 이토록 쉽게, 그리고 자주 일어나는 걸까?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