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나은 사람 - 나를 지키며 더 나은 일과 삶을 향해 나아가는 법
최갑수 지음 / 얼론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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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는 여행이나 사진에세이집을 주로 읽었다. 내가 자주 읽었던 여행에세이의 작가 최갑수가 쓴 여행이 아닌 작가로서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온 그의 노하우들이 담겨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으로 가는 습관을 들이고, 오타와맞춤법을 확인하고 마감을 지키는 일, 우리가 실천하는 이런작고 기본적인 일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게 해줍니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모여 거대한 피라미드가 되고 만리장성이되는 것이죠.
디테일이 모여 스펙터클이 완성됩니다. 우리의 지루하고,
고단하고, 고독한 하루하루가 모여 우아한 일생을 만듭니다.

지금 힘들다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남보다 뒤처지고 있는 것 같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운이 안 좋을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잠시 쉬어갑시다.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자신의 힘으로 수평선 너머 보이는 섬까지 헤엄쳐 가겠다는신념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수있을 것입니다.
먼저 도착한 누군가가 해변에서 손을 흔들며 "어이, 거의다 왔어, 끝까지 힘내" 하고 소리치며 우리를 힘차게 응원해줄 것입니다. 질투할 시간에 실력과 체력을 키우는 게 훨씬 이득 아닐까요. 하나둘, 하나둘 열심히 팔을 젓다 보면 따뜻한해변에 등을 대고 누워 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기분 좋게올려다볼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얼마 전, 모니터용 새 안경을 맞췄습니다. 눈이 많이 나빠져서 모니터가 흐릿하게 보였거든요. 노안이 왔나 보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까운 것들이 흐릿하게 잘 안 보이더군요. 새로 맞춘 안경을 쓰니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제는 가까이 있는 것들, 옆에 있는 것들을 잘 챙겨야 하는나이가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멀리 봐야 하는 나이가 아닌거죠.
지금까지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어쩌면 영원히 가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가진다면 운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들을 손에 더 꽉 쥐고, 더 잘 들여다보고, 더 꼭꼭챙기고 살아야겠습니다. 다시 스케줄러를 봅니다. 마감과 강연, 방송 일정 사이에 챙겨야 할 생일들이 반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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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완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드문 드문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고만 말할 수 있겠다.
평생에 걸쳐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온 학자가 내놓은 지금까지의 결론은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일반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은 없다는 것. 다만 자기에게 중요한 타인에게서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학자의 결론이다. 난 이 결론이 철학적 논증이 이해 되고 아니고를 떠나 마음에 든다.

내 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이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모른다. 등이나 항문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니, 타인이 나를 나로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그 얼굴을, 공교롭게도 당사자인 나는 평생 볼 수가 없다. 거울이나 사진으로 시간차를 두고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타인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의 바로 그 얼굴(나 자체)을 나는 볼 수가 없다. 하물며 나를형성하고 있는 이 신체의 내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병이 난 것 같아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게 정말 ‘내‘ 몸인지 묻고 싶을정도로 몸은 나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다. "나에게 가장 먼존재는 나 자신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인용한 이 독일 격언이 몸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실감 나는 표현인 것 같다.

‘나‘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창가에 기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내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왜냐하면 그가특별히 나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아름답다는 이유로 어떤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천연두가 그녀를 죽이지 않고 그녀의 아름다움만 앗아간다면 그 사람은 그녀를사랑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나를 나의 판단력이나 기억력 때문에 사랑한다면,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아도 이런 장점만 잃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육체 속에도 영혼 속에도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또 이런 성질들은 소멸할 수 있으므로 나의 본질을 형성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성질이 없다면어찌 육체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이의 영혼의 실체를, 그 안에 어떤 성질이 있든 상관없이,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뿐더러 또 옳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결코 인물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성질만을 사랑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무나 직책 때문에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선 안된다. 인간은 어떤 인물이든 바로 그 빌려온 성질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ㅡ블레즈 파스칼, 《팡세》, 단장 323

우리는 보통 성장한다는 것은 다양한 속성을 익혀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다양한 가능성을 잃어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러 가지를 잃고 있다. 잃으면서 살아간다. 지금 내게 가능한 것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삶이라면, 산다는 것은 그 밖의 몇몇 가능성은 버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잃은 것.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자신,
하지만 이제 그렇게는 될 수 없는 자신 철학자 구키 슈조는 이를 가리켜 "멀고 먼 곳, 내가 태어난 곳보다 훨씬 더먼 곳, 그곳은 아직 가능이 가능인 채로 존재했던 곳" 《때마침》)이라 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의 존재 방식 중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있는 존재‘라기보다 ‘이야기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아이덴티티 identity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나인 근거‘라든가 ‘자기동일성‘, 또는 ‘독자성‘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다. 앞에서도 등장한 정신과 의사 랭은 아이덴티티를 다음과 같이정의하고 있다.
‘아이덴티티‘란, 이로 인해 지금 이곳에서도 과거에서도 미래에서도 자신이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는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이것으로 인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성질의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동일한 지속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런 ‘아이덴티티‘가 공상일수록 한층 더 애지중지한다.
(로널드 랭, <자기와 타자 Self and Others》)

랭에 의하면
나의 아이덴티티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유치원생이 되고, 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 이런 역할이나 속성 자체를 제거하면 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들중에 어느 것 하나 그 사람 고유의 것은 없다. 이들은 내가 타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타자가 나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의 재료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총계가 ‘나‘인 것은 아니다.
내가 ‘내‘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역할이나 속성의 단편을 이어 붙여, 나라는 것의 이미지를 조립하는 과정에서다. 랭은 이를 "일관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나의 아이덴티티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라고

하지만 스토리를 자아내려면 자신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와 타가 서로 의미를 무효화하는 부조화 속에서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가 몇 번이고 파탄을 겪는 과정이고, 또그것을 끊임없이 다른 방법으로 고쳐 말하기 위해 시도하는과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 자신도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인생이라 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선을 떠올리는데 이런 습관을 고쳐야 한다. 인생의 어느 시기지는 순진무구하고, 어느 시기부터는 때가 타기 시작한다는것은 거짓이다. 어느 시기까지는 행복하고 어느 시기부터는불행해진다는 것도 거짓이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하고, 마냥 불행하다면 분명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 것이다.

까? 하나의 시나리오 안에 있어야만 하는 걸까? 동일한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종종 극심한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불안. 그것은 늘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과 떼어놓기 어려운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에대해 생각할 때, 불안해하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업신여기는느낌이 있다. 자기보다 겨우 몇 살 많은 사람을 늙은이 취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는 증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공격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의 어두운 현재를 보여준다. 이래서야 뭔가가되고 싶다는 이미지가 결여된 채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싶고, 다른 내가 되기를 희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풍족한 노년을 보내고 있으면 현재가 밝다는 뜻일까? 앞에서 봤듯, 만족스러운 노년이란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지하고 있다. 그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다....... ‘행복한 노년‘이란 지금까지의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는 상태인 것이다. 즉, 과거의기억과 거기서 형성된 재산에 기대어 산다. 그런데 이는 다른형태의 삶을 애초에 차단한 삶이다. 이미 확정된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현재가 성립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만족스러운 노년은 점점 한계가 있는 좁은 세계로 들어간다. 자신이 변화하거나 존재가 잊히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삶의 태도이다.

나다움 같은 것을 찾아 자기 내부를 샅샅이 뒤지지만, 사실우리 내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만약 그런 게 잠재되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질문에 얽매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오히려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나는 누구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더 낫다.
‘나‘라는 것은 타자의 타자로서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타자는 타인과는 다르다. 엄마도나는 아닌, 타자다. 그런 타자에게 나는 의미 있는 타자인지의 여부가 우리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산 사람은 불행해진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파탄 나거나 완료됐을 때 남는 것은 공백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인생을 일에 걸고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이야기)를모두 일에 바쳐버렸기 때문에 그 안에 있을 때는 좋지만, 정년을 맞아 그 이야기가 무효가 되었을 때 다른 이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배우자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란 내가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은우리를 구원해주기도 한다. 같은 인생이라도 이야기 방법에 따라. 해석 방법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바꿈으로써 한계점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없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자신의 내부로던지고, 거기서 뭔가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소유한 자신의 속성가운데서가 아니라 누군가 어떤 타자에 대한 타자 중 한 명일수 있다는, 그런 양식 속에서, 사람은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항상 구체적인 누군가로서의 타자,

즉 나의 타자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길에서특정한 타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라는 것이 타인에게 나를 바치는 것, 즉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타인안에서 자신의 장소를 확인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바치는그 타인을 이미지로서 자기 안에 갖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이미지화한 타인, 즉 자기 안의 타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면 그건결국 자기애에 지나지 않는다. 랭도 말했듯 타자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타인 안에 자신이 의미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느냐아니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를 타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타자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먼저 나와 관계를 맺어주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타자를 이처럼 대해야 할 것이다. 타자에게 그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타자에게 나를 바치는 것과 타자에게 그 존재(존재의 계기)를 선사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타자의 타자라는 것은 타자에게기대고, 타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랭이 예로든 엄마와 아들의 만남 유형 중 세 번째 경우처럼) 서로 타자에게 상

처를 입을 때까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때로는 (같은 예의 두 번째경우처럼) ‘~해주기 바란다‘는 부정적인 수동이 아니라 ‘긍정적인수동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헌신이라는 이름의 밀착과는 거리가 먼 행위다. 우리는 서로 존재를 부여함으로써 살아갈 수도 있는 것 같다. 여담인데 독일어에서는 ‘있다‘
를 ‘그것이 준다es gibr‘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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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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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삶의 가치는 ... 일상성 속에서 사랑과 긍정적 태도를 실천하는 평범한 삶에 있다는 것이 그의 문학이 전하는 메세지다.
...
차페크의 삶에 대한 인식은 인간 개체들이 서로의 차이점이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를 확장하여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을 지향한다.
ㅡ송순섭 역자 해설 중

두번째 읽기 시도에서 성공한 책.
다시 읽어도 좋을 책.
소설인데도.. 이렇게 밑줄을 많이 그은 책이 있었던가. 어쩌면 철학책으로 읽혀도 이상하지 않을 책!!

그는 매우 검소했다. 몇 번인가 일요일에 아버지가 서랍에서 저금통장을 꺼내어 들여다보던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세워져 있는 재질 좋은 판자 더미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얘야, 이통장에는 일과 땀이 모여 있는 거란다. 돈을 낭비하는 건 완성된 일을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건 죄악이지>라고하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그러면 그 돈은 어디에 쓰기위한 거죠?>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노후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해보는 소리지. 돈이란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보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다. 이 통장에는 삶의 내용이들어 있고, 그건 평생의 결실이야. 여기에 내가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이지.> 아버지에게 노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공동묘지의 대리석 비석 아래 잠들어 있었고(비석을 만드는 데 정말많은 돈이 들었다고 아버지는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했다), 나는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무겁고 부어오른 다리를 이끌며 예전보다 일감이 줄어든 소목 공장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저축한 액수를 계산했으며, 일요일마다 집에서 홀로 통장을 꺼내어 자신의 정직한 삶의 합계를 들여다보았다.

결국 인생의 항로는 크게 보아 두 개의 힘으로 진행되며, 습관과 우연이 그것이다.

사람이 인생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인생을 내던져야 한다.

 목재 더미 위 높은 곳에 아이가 앉아-아니, 그곳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예전의 아이는 단추를 꼭 채운 공무원 셔츠에 역무원 모자를 쓰고 흥미롭게 창백한 얼굴에 흥미로운 콧수염을 기른 어른이 되어 있었다.
<저자를 왜 이리로 보냈을까?> 세상 끝에 있는 역의 역장은생각했다. 그렇습니다. 역장님. 바로 이럴 목적으로 이리로보낸 겁니다. 고향 집에서처럼 목재 더미 위에 앉아 있으라고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길을 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어리석은 일을 겪어야 하며, 나무와 송진 냄새가 나는 목재 옆에 있는 자신으로 돌아가려면삶의 한 조각을 각혈해 뱉어 내야 한다. 사람들은 이곳이 폐에 좋다고 했다. 이미 어둠이 깔렸고 하늘에는 별들이 나타났다. 고향에도 별은 있었는데, 도시에는 없었다. 여기에서보이는 별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별을 쳐다보면서 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아는 것이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실로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이었다. 선로는 풀과 냉이 속으로 뻗어 있었고, 그 뒤에는바로 적치장 뒤에는 벌써 우주가 나타났다. 강과 숲이 소리를 냈고, 그 뒤에는 우주가 소리를 냈다. 별들은 오리나무 잎새처럼 깜박이며 소리를 냈고, 산바람이 세상 사이를 가르며불었다. 아, 그곳은 폐를 채우기에 좋은 곳이었다!

별을 쳐다보면서 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 창백한 청년이었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공놀이하는 모습과 나무 핀이 쓰러지는 것을 평화롭고 조용히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강의 물결처럼 늘 똑같고 늘 새로운 생활. 선로가는 냉이와 억새풀로 뒤덮이고 있었다. 목재 더미가 운반되고, 또다시 새로운 더미가 쌓였다. 늘 똑같고 늘 새로운 반복. 그리고나는 송어 다섯 마리를 잡았다. 어디에서? 바로 역 뒤에서.
이만한 놈들이었지. 가끔 나는 놀랐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 하루에 기차 두 대가 오가고,
끊긴 선로에는 풀이 덮이고, 그 바로 뒤에는 병풍 같은 우주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게 보이는 젊은이였던 나는 목재 더미 위에 앉아 느긋한 표정으로 몸을 숙여 돌멩이를 집어서 신호수가 기르는암탉을 향해 던졌다. 자, 날뛰어 봐라. 이 바보야. 난 이미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다!

지금 나는 그 모든 소음과 요동이 단지 궤도 변경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내면이 뒤흔들릴 때 나는 산산이 부서지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사이 나는 이미 인생의 올바르고 긴 궤도에 들어서고있었다. 인생이 궁극적인 본궤도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보호 장치가 작동한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이런또는 저런 존재가 되거나, 여기로 또는 저리로 가야 하나 하는 모호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의지보다 더 높은 정당성에 의해 자신이 결정된다. 그 때문에 내면의 자아는 이흔들림이 바로 운명이라는 기차의 바퀴가 올바른 궤도로 진입하면서 내는 덜커덕 소리임을 모르는 채 좌충우돌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금 경험하는 순간이 뭔가 나의 삶에서 오래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과 연관이 있다고, 이미 예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이 그 순간 완성되고 있다고 분명하게 느껴질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역 사무실의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때 말이다. 그래! 그때가 펜을 물어뜯으며 숙제를 끝내야 한다는 걱정에 쫓겨 미친 듯 공부를파던 때나 전 생애에 걸쳐 떨쳐 버리지 못했던 나 자신이 모든 숙제를 해낸 성실한 학생이라는 느낌을 가졌을 때와 똑같지 않은가! 이 뭔가 오래전에 일어난 일과 아득하면서도 놀랍게도 분명한 연관성을 의식하는 순간들은 어떤 신비하고위대한 것의 현시顯示)처럼 묘하게 나를 흥분시켰다. 그 순간들에서 인생이 이해될 때는 아주 드물지만, 인생은 보이지않는 연관성들로 점철된 심오하고 필연적인 단일체로 나타났다.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에서 아버지의 소목 공장 마당을 연상시키는 목재 더미 위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경이로움과 무상함을 느꼈고, 인생의 아름답고 단순한 질서를 좇으며 살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 다르게 진행되었거나, 내가 다른 존재였거나, 다른 상황이 주어졌더라면 내게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살았더라면 내게서는 호전적이고 흥분하기 쉬운 인간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는 경솔한 인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건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도 배제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표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표상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선별하거나, 심지어는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처음에 나는 평범한 인생에 대한 변명 같은 글을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유명하고 비범한 사람들이 회상록에다 자신의 비범하고 특출한 운명에 대한 변명을 적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 역시 어떻게든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꾸며 내어 그 이야기가 단일하고 사실에 가까운 그림이 되게 만든다. 그 이야기에 어떤 단일한연결선이 생기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이제 나는 가능성이란게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개개인은 우리를 이루며, 개개인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집합인 것이다. 단지 자신을 보라. 네가 거의인류 전체를 망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끔찍한 일이다.
네가 죄를 지으면 그들 모두에게 벌이 내리고, 그 거대한 집합이 너의 모든 고통과 저속함을 감당한다. 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저속하고 헛된 길로 인도해선 안 된다. 너는 나이고,
네가 인도자이며,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모든 인물들을 너는 어디론가 이끌고 가야 했다.
그래, 하지만 운명들이 그렇게 많으면, 그처럼 많은 가능성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떻게 모두의 손을 잡고 이끌 수 있는가? 영원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 삶의 방향을 바꿔 가야 하는가? <뭔가 또 남아있지 않을까. 왠지 모르지만 다른 인물들 뒤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인물을 간과하지는 않았을까, 이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 배아를 내게서 밖으로 드러내야 할까> 하면서? 그러나 인식하고 이름을 붙일

수 있던 배아만도 대여섯 개나 있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며,
그 각자는 전 생애를 이루기에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더 멀리에서 찾는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의 속을 뒤지는 일일 뿐이다.
그렇게 뒤지는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 그건 아무 곳으로도 이끌지 못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너와 같은 집합이라는 걸 모르겠나? 너는 그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보기만 해. 그들의 삶 또한 네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삶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너도 다른 사람처럼 신사나 거지, 허리춤까지 옷을 벗어젖힌날품팔이꾼이 될 수 있었다. 너도 냄비 장수, 빵집 주인, 또는얼굴 전체에 잼을 묻히는 아홉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이다. 네 속에 그런 다양성이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들을 인지할 수 있다. 그 모든게 네 내면에 있다. 그들 중 각자는 네 삶의 어떤 것을 살았다. 경찰이 수갑을 채워 끌고 간 누더기 차림의 인부, 현명하고 말이 없던 신호수 노인, 주정뱅이 대위까지 모두가 네가될 수 있었던 모든 걸 잘 보라.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 각각의속에서 네 자신의 일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놀랍게도 너의 진정한 이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 자아 속에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아, 나는 이젠 더 이상 너희들 사이로 들어갈 수가 없고, 너희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없다. 다만 창밖을 내다볼 뿐이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알아본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미워하더라도 난 네가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리라. 그의 멍에를 느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에게 닥친 부당함에 대해 함께 괴로워하리라. 내가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더 많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이기주의자들을 배척할 것인데, 내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돌볼 것인데, 내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성당문가에 서 있는 거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데, 내가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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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황승택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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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슷한 맥락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쓸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작가라고 하더니 이 분 또한 그런 기질을 타고난 분이다. 혹시나 하고 최근 행보를 살펴봤는데 새로 신간을 내셨다. 절망과 고통의 늪을 글쓰기로 헤쳐나간 기자님의 선택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자꾸만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해진다면 난 어떻게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이 책 주변을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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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병에 걸린 친구와 그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의 글이 얼기설기 교차되는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오래된 관심사를 떠올리게 했다. 죽는 것과 병에 걸린다는 것은 인간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 생각하며 내 삶을 되돌아보는 요즘이다.

천선란 작가의 추천의 글 중 이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답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근사치를 나란히 걷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마치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오만해지고,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무심히 흘려보낸다. 건강한몸과 평온한 일상에 대한 감사함을 망각한 채로. 하지만 이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고 있고, 나 또한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동행>에 자꾸 들어가보게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위로를 받고 싶어서. 이건 별로 건강하지 않은 행위일 수도있다. 하지만 일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찬란하기에 절망을말하기가 새삼스럽다. 상실의 아픔을 쏟아내기가 힘들다.
그런 마음이 들면 마음속 깊은 웅덩이가 고요해지며 한없이고독해진다. 그리고 마음은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누가 날 좀 안아줬으면.

거워 보였다. 효정의 눈에는 푸른 하늘과 바다가 담겨 있었고, 효정은 힘차게 그 빛나는 꿈을 향해 달려갔다. 나도 호정의 옆에서, 효정과 함께 달렸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미지의 세계로, 이 길의 끝에 있을 달콤한 결실을 상상하며거침없이 달렸다. 언제고, 영원히 그렇게 달릴 수 있을 줄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효정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바람을 가르며 힘껏 달리던 효정의 다리를 누군가 뒤에서 끌어당기는 듯했다. 효정은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나도 효정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의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만나게 될까? 누구와 함께 무엇을 바라보며 갈까? 왜 우리는 그토록빨리 가고 싶어할까?
효정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게 후회된다고 했고,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는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했다. 걸으면서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느끼고,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보며 감탄하고, 신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게 무엇인지 되돌아봤다. 효정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그리고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일을 떠올렸다. 효정의 마음속에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결연함이 깃드는 게 보였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 여정을 풍요롭게 하는건 결국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무한한 기쁨도, 아쉬움도, 분노도, 깊은 절망도 아무런 감정을느끼지 못하는 무의 상태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결국 받아들인생이인다.
우리는 인생의 길 위에서 잠시 스쳐지났을 뿐이지만,
나는 영원히 살아 있는 효정을, 함께했던 찬란한 시간을, 그리고 피할 수 없던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 시간들 덕분에나는 한때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찼고, 동시에 깊은 슬픔을느꼈으며, 그 슬픔 속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효정과 함께했던 시간 덕분에, 너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둡고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밑바닥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는 다시 걸어갈 준비를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인연들과 가보지 못한 우주를 기대하며, 죽음으로 인해 부서질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며, 그로 인해 틈틈이 나를 파고들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간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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