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
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계속 지는 한 다음번에 이길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워진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결국 돈을 따게 돼 있었다. 다만 판돈이 부족했을 뿐이다.
"오래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는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고 그 혜안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만은 볼 수가 없죠.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진호씨가 말했다. 그건 무척이나 놀라운 말이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다 채울 수는 없었기에 이번에는 미야자와 겐지가 쓴 짧은이야기인 「목련」을 기억하는 대로 들려주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다음과 같았다. 주인공은 료안. 료안은 산골짜기를 홀로 건너가고 있었다. 봉우리에는 새까맣고 탐욕스러운 바위가 차가운 안개를 뱉어내고도시치미를 떼고 있어 힘들게 올라가도 기댈 데 없이 쓸쓸했다. 험준하게 파인 길을 따라 걷느라 힘이 든 료안이 스르르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너의 세계야, 너에게 딱 어울리는 세계야. 그보다 더 진실은, 이것이 네 안의 풍경이야.‘ 료안은 꾸벅꾸벅 졸면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눈을 뜨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정상에 섰을 때, 골짜기의 안개가 모두 걷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료안은 깜짝 놀라
고 말았다. 자신은 분명 험난하고 지독한 곳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하얀 목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료안에게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 또한 료안이라고 말했는데, 료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고원의 평평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곳은 정말로 평평하군요." "네, 평평합니다. 하지만 이 평평함은 험준함에 대한 평평함입니다. 진정한 평평함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건너왔기 때문에 평평한것입니다." 그 평평함을 안 뒤에 료안은 자신이 지나온 골짜기에 목련이 가득한 것을 다시 보았다. 그 사람은 목련나무를 가리키더니 그게바로 ‘부처의 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료안의 말인지 그 사람의 말인지, 혹은 두 사람 모두의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끝난다.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선입니다. 부처의 선은 절대입니다. 그것은 목련나무에도 나타나며, 험준한 봉우리의 차가운 바위에도 나타납니다. 골짜기의 어두운 밀림과 강이 계속 흘러 범람하는 곳의 혁명이나 기근, 역병도 모두 부처의 선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목련나무가 부처의 선이며 또한 우리들의 선입니다."
그 하루하루는 늘 새 바람이 그녀 쪽으로 불어오는 나날이었다고 해.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지 이해하진 못하셨잖아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지구의 나이 사십육억 년을 일 년으로 치면 한 달은 약사억 년, 하루는 천삼백만 년, 한 시간은 오십오만 년이 된다. 그런 식으로따져보면 공룡은 12월 11일에 나타나 16일에 사라졌고, 인류는12월 31일 저녁 여덟시에 처음 등장해 열한시 삼십분이 되어서야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문명은 자정 이초 전에 시작됐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바얀자그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돌처럼 흩어져 내린, 깊은 시간의 눈으로 보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공룡의 사체였다.
"후지와라, 그 사람이 낡은 버스를 타고 타르사막을 건너가는부분이었어. 사막에서는 바람도 뜨거워 창문을 열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서더니 차장과 운전수가 지붕에올라가 차창 위로 휘장을 늘어뜨렸다. 차 안이 온통 어두워졌겠지. 눈이 안 보이자 냄새가 밀려왔어. 싸구려 기름 냄새. 담배 냄새. 땀냄새. 그다음에는 살인적인 더위가 느껴졌고 운전사는 엔진을 껐어.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지. 어둠에 익숙해진 후지와라가 둘러보니 사람들은 모두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모래 폭풍은 십여 분동안 버스를 둘러싸고 미쳐 날뛰다가 잦아들었는데, 사막에 사는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거지. 모래 폭풍이 지나가리라는 것을. 그러자 운전수가 말했대." 그리고 그녀는 어떤 인도말을 얘기했다. 모두 지나갔어. 다 끝났어. "그 이야기 때문에 울었다고?"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
"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에 우리 할아버지는 어릴 때 최양업 신부나 바르바라를 아는 신자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었지. 우린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 우리 정신의 삶이 과거로 팔십 년은 더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네. 나는 1940년대를 기억하고 있어. 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증언했잖아. 지금 만약 내곁에 열 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통해 팔십여 년 전의일들을 역사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다면그 아이의 손자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시각으로 내가겪은 1940년대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비관이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지금 이백 년을 경험한 사람의시각으로 1801년 신유박해를 바라보고 있다네. 이승훈을, 정약용을, 이벽을 오직 연민과 사랑이 있을 뿐, 여기에 비관이 깃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 되는 것이라네.
할아버지의 말대로 과거의 우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할아버지의 최종적인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십여 년에 걸친 공부를 통해 이성으로 신의 존재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네. 그래서 나는 신을 직접 체험한 신비주의자들, 예컨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에 관한책을 읽었지.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됐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바로그 무렵, 나는 이십팔 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네.
하지만 내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글을 읽으며 그는 자기 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한가운데로 여기 있지만 저기에도 있는 사람. 그날은 내가 소설가에 대한 정의를 얻은 날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 "내가 진정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랑은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사랑의 단상2014」, 190~191쪽)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장을 떠올린 지훈처럼 나도 김연수를 생각하면 이 문장부터 떠오른다. 나에게 김연수는 ‘빠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고, 김연수가 쓰는 소설도 언제나 ‘빠진 상태‘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이야기였으니까.
말년의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주체성에 골몰했다. 1981~1982년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강의를 엮은 책에서 내가 읽은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단한 주체성의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끈질긴 사색과 집념이다. 푸코는 강의 내내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의 주체화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체화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spiritualité‘ 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이때의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핵심을 의미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다가 "아, 좋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흘러나왔다. 「죽음이 찾아오면」이라는 시의 "삶이 끝날 때 나는말하고 싶어, 평생/나는 경이와 결혼한 신부였노라고"라는 구절을 읽을 때였다. 눈은 점점 침침해져 ‘삶이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어‘ 다음이 쉼표인지 마침표인지도 분간되지 않지만, 이런 시를 읽으면 용기가생긴다. 잘 보이지 않는다면 안경을 벗고 눈을 좀더 책 가까이 가져가면 된다. 예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불편한 행동이지만, 몸은불편해도 더이상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올해 내게 생긴 새로운 변화다. 아직 경이와 결혼한 신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제 나는 확실하게 안다. 세상에는 경이로움이 있다는사실을. 그리고 그 경이는 의외로 단순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메리 올리버의 언어는 정확하다. 이어서 "세상을 품에 안은 신랑"이라고 쓸 때, 실제로 그는 세상을 품에 안는 일에 대해 말하고있다. ‘세상은 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것과 ‘세상은 품에 안을 때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건 다르다. 세상은 품에 안을 때 경이롭다는 말은 경이로움이 내게 달린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을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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