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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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물의 삶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소설.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등장하는 [보편 교양]은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물론 그 말을 들은 학생은 은재를 비롯한 서너 명뿐이었다.
스무 명은 엎드려 자고, 다섯 명은 이어폰을 꽂고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은 아무 제재도 하지 않았으며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충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엎드린 학생들의 뒤통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학생들이 버•리고 간 학습지의 빈칸에 숨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된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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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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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작가에서 내가 사랑에 빠진 작가로
밑줄 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건 그만큼 내 생에 새기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것.
그럼에도 그 흔적들은 닳아버리겠지만, 그때 다시 내게로 새 바람이 불고 있을 거라고 확신이 든다.

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

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계속 지는 한 다음번에 이길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워진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결국 돈을 따게 돼 있었다. 다만 판돈이 부족했을 뿐이다.

"오래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는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고 그 혜안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만은 볼 수가 없죠.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진호씨가 말했다. 그건 무척이나 놀라운 말이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다 채울 수는 없었기에 이번에는 미야자와 겐지가 쓴 짧은이야기인 「목련」을 기억하는 대로 들려주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다음과 같았다.
주인공은 료안. 료안은 산골짜기를 홀로 건너가고 있었다. 봉우리에는 새까맣고 탐욕스러운 바위가 차가운 안개를 뱉어내고도시치미를 떼고 있어 힘들게 올라가도 기댈 데 없이 쓸쓸했다. 험준하게 파인 길을 따라 걷느라 힘이 든 료안이 스르르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너의 세계야, 너에게 딱 어울리는 세계야. 그보다 더 진실은, 이것이 네 안의 풍경이야.‘
료안은 꾸벅꾸벅 졸면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눈을 뜨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정상에 섰을 때, 골짜기의 안개가 모두 걷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료안은 깜짝 놀라

고 말았다. 자신은 분명 험난하고 지독한 곳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하얀 목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료안에게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 또한 료안이라고 말했는데, 료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고원의 평평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곳은 정말로 평평하군요."
"네, 평평합니다. 하지만 이 평평함은 험준함에 대한 평평함입니다. 진정한 평평함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건너왔기 때문에 평평한것입니다."
그 평평함을 안 뒤에 료안은 자신이 지나온 골짜기에 목련이 가득한 것을 다시 보았다. 그 사람은 목련나무를 가리키더니 그게바로 ‘부처의 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료안의 말인지 그 사람의 말인지, 혹은 두 사람 모두의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끝난다.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선입니다. 부처의 선은 절대입니다. 그것은 목련나무에도 나타나며, 험준한 봉우리의 차가운 바위에도 나타납니다. 골짜기의 어두운 밀림과 강이 계속 흘러 범람하는 곳의 혁명이나 기근, 역병도 모두 부처의 선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목련나무가 부처의 선이며 또한 우리들의 선입니다."

그 하루하루는 늘 새 바람이 그녀 쪽으로 불어오는 나날이었다고 해.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지 이해하진 못하셨잖아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지구의 나이 사십육억 년을 일 년으로 치면 한 달은 약사억 년,
하루는 천삼백만 년, 한 시간은 오십오만 년이 된다. 그런 식으로따져보면 공룡은 12월 11일에 나타나 16일에 사라졌고, 인류는12월 31일 저녁 여덟시에 처음 등장해 열한시 삼십분이 되어서야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문명은 자정 이초 전에 시작됐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바얀자그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돌처럼 흩어져 내린, 깊은 시간의 눈으로 보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공룡의 사체였다.

"후지와라, 그 사람이 낡은 버스를 타고 타르사막을 건너가는부분이었어. 사막에서는 바람도 뜨거워 창문을 열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서더니 차장과 운전수가 지붕에올라가 차창 위로 휘장을 늘어뜨렸다. 차 안이 온통 어두워졌겠지. 눈이 안 보이자 냄새가 밀려왔어. 싸구려 기름 냄새. 담배 냄새. 땀냄새. 그다음에는 살인적인 더위가 느껴졌고 운전사는 엔진을 껐어.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지. 어둠에 익숙해진 후지와라가 둘러보니 사람들은 모두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모래 폭풍은 십여 분동안 버스를 둘러싸고 미쳐 날뛰다가 잦아들었는데, 사막에 사는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거지. 모래 폭풍이 지나가리라는 것을. 그러자 운전수가 말했대."
그리고 그녀는 어떤 인도말을 얘기했다. 모두 지나갔어. 다 끝났어.
"그 이야기 때문에 울었다고?"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 

"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에 우리 할아버지는 어릴 때 최양업 신부나 바르바라를 아는 신자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었지. 우린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 우리 정신의 삶이 과거로 팔십 년은 더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네. 나는 1940년대를 기억하고 있어. 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증언했잖아. 지금 만약 내곁에 열 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통해 팔십여 년 전의일들을 역사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다면그 아이의 손자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시각으로 내가겪은 1940년대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비관이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지금 이백 년을 경험한 사람의시각으로 1801년 신유박해를 바라보고 있다네. 이승훈을, 정약용을, 이벽을 오직 연민과 사랑이 있을 뿐, 여기에 비관이 깃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 되는 것이라네.

할아버지의 말대로 과거의 우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할아버지의 최종적인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십여 년에 걸친 공부를 통해 이성으로 신의 존재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네. 그래서 나는 신을 직접 체험한 신비주의자들, 예컨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에 관한책을 읽었지.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됐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바로그 무렵, 나는 이십팔 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네.

하지만 내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글을 읽으며 그는 자기 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한가운데로 여기 있지만 저기에도 있는 사람. 그날은 내가 소설가에 대한 정의를 얻은 날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 "내가 진정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랑은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사랑의 단상2014」, 190~191쪽)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장을 떠올린 지훈처럼 나도 김연수를 생각하면 이 문장부터 떠오른다. 나에게 김연수는 ‘빠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고, 김연수가 쓰는 소설도 언제나 ‘빠진 상태‘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이야기였으니까.

말년의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주체성에 골몰했다. 1981~1982년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강의를 엮은 책에서 내가 읽은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단한 주체성의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끈질긴 사색과 집념이다. 푸코는 강의 내내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의 주체화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체화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spiritualité‘
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이때의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핵심을 의미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다가 "아, 좋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흘러나왔다. 「죽음이 찾아오면」이라는 시의 "삶이 끝날 때 나는말하고 싶어, 평생/나는 경이와 결혼한 신부였노라고"라는 구절을 읽을 때였다.
눈은 점점 침침해져 ‘삶이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어‘ 다음이 쉼표인지 마침표인지도 분간되지 않지만, 이런 시를 읽으면 용기가생긴다. 잘 보이지 않는다면 안경을 벗고 눈을 좀더 책 가까이 가져가면 된다. 예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불편한 행동이지만, 몸은불편해도 더이상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올해 내게 생긴 새로운 변화다. 아직 경이와 결혼한 신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제 나는 확실하게 안다. 세상에는 경이로움이 있다는사실을. 그리고 그 경이는 의외로 단순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메리 올리버의 언어는 정확하다. 이어서 "세상을 품에 안은 신랑"이라고 쓸 때, 실제로 그는 세상을 품에 안는 일에 대해 말하고있다. ‘세상은 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것과 ‘세상은 품에 안을 때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건 다르다. 세상은 품에 안을 때 경이롭다는 말은 경이로움이 내게 달린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을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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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

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넣는 일은 계속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숲속 빈터가 열리게 되면 뜨거운 육체의 아름답고 털 없는 동물들이 뛰놀게 된다고 서양의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누워서 바라보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 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다락 같던 ‘나‘에게서 벗어나 엉거주춤 관계 속에 집어넣었던온갖 잡동사니들을 챙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히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슬픔이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얘기인 것처럼 늘 맑게 웃었구나, 참 떼도 많이 쓰고 참을성도 없었구나 등등의 회한이 들면서 그런 자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여러 여자들과 연애하면서 진우는 사랑이란 프리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쨌든 사랑을 통과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은 여러 가지 빛깔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어떤 빛깔이 두드러지는가는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달랐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 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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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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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쓴 글이라고?!?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꺼졌다 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그것이가끔은 어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오래전 우리들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믿지 않는 일들이 가까운 입술 위에서 일어나던, 그랬던 나날들처럼 말이다.

스카이 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순간 창밖 가로등이 잠시 깜빡하고 꺼졌다 켜졌다.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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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엄청난 햇살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현실은 언제나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는 법이지

그 진흙탕에 가곤 했다. 진흙의 일렁임. 그 향기를 들이마실 때 새로운 단어들이 떠오를 거라는 것, 이것이 내가한 생각이었다. 내 앞에 도달해야 할 무언가가 아직 있고,
나는 마음 깊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여전히 아침에 눈을뜨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나는 열렬히 기뻐하며 그사실을 감지한다. 그것은 나를 저편으로, 좀 더 먼 곳으로,
가까운 끄트머리로 끌어당긴다. 그렇다, 그것. 다른 것은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나의 몸과 함께. 내 몸에 남은 것과 함께. 숲에 남은 것과 함께. 내 몸과숲. 닳아 버리고 구멍 난 우리의 몸들. 누더기가 된 것들. 찢기고 없어진 것들 사이에 작은 우주가 남아 있다.

그렇게 평범항 날들이 하루, 또 하루 더해졌다

그리그는 새벽 3시쯤 우리가 있는 침대로 왔다. 그의 방문이 조용히, 최대한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에 나는 문소리는 매번 겁먹은 말 울음소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긴 하다. 이윽고 그리그가 나무 계단을 한 단씩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한동안 들썩거리다가 암흑 속을 더듬거리며 내게로 와서 지쳐 쓰러졌다. 나는 그 순간을 가장 사랑했다. 그런 순간이면 우리 셋이 같은 배낭 안에 담긴 기분을 느꼈다. 배낭 또는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마찬가지다. 둘 다 지구상에서 우리를 기다리눈 건 모든 혼합된 종이라는 점에서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과분한 것.
그 섬광은 최악의 순간일지라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어, 진흙탕 같은 전투 중에도 불현듯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현재 나는 책 읽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쉬지 않고 외부세계를 살고 있다. 바깥세상을 책처럼 읽어 나간다. 끊임없이 바깥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인식하는방식도 변화했다. 다시 말해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라고 덜 느낀다. 내게 연필 한 자루만남을 임종 직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되었다. 인간이 우리 종(種) 안에 격리된 존재, 즉 다른 종들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그들과 다르긴 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인간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극히 제한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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