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멀리 간다
김지은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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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향한 애정이 담긴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

「바둑이 방울을 작사·작곡한 김규환의 다른 창작 동요 중에 「그림」이라는 노래가 있다. 오래전 동요 대회에서종종 불리곤 했던 애잔한 음률의 명곡이다. 이 곡은 동생이야단맞는 장면을 목격한 언니가 동생의 상처를 헤아려 보는 내용이다. 동생은 집에서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본 어른에게 물감을 가지고 장난한다고 호되게 혼난다. 어머니의 눈에는 그림에 몰두한 어린이의 마음은 안 보이고 잔뜩 어지럽혀진 집 안의 풍경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또래인 언니에게는 동생의 마음이 보인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며 반짝반짝 빛나던 동생의 두 눈이 자꾸 떠오른다. 가단조의 쓸쓸한 멜로디에는 어린이의서투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어린이의 항변이 담겨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노래의 마지막 소절에 상냥한 어른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튿날 학교에 가 보니 게시판에 동생이 전날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동생의 담임 선생님은 이그림을 듬뿍 칭찬하고, 그런 선생님을 보면서 언니는 마음을 놓는다. 한 사람의 어른이라도 우리 마음을 알아준다는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이 노랫말처럼 어린이는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은 경험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 동화는 수많은 몰이해를 뚫고 만들어 내는, 약자를 마중 나오는 세계에 대한활자화된 증거들의 모음이다.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땠는지 알아? 나를 반겨 주었어. 나를 응원했다니까!"라고 드끼는 경험은 자라는 어린이를 조금 더 마음 놓고 자라나게한다. 자신도 어서 자라 누군가를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어린이들의 용기 있는 말을 지키고 존재의성장을 응원하며 대신 공격받기 위해서 어른인 동화 작가가있다. 하지만 책과 노래 바깥에서 만난 실제 어른들이 다짜고짜 화를 내고 야단만 친다면 책과 노래도 별다른 도리가없다. 문학과 예술의 힘은 딱 거기까지다.
어린이들이 보기에 어른들은 시선을 높은 곳에만 두고사는 사람들이다. 뭘 잘 모르거나 서투른 것이 있어서는 안되며, 시험 점수는 백 점이 기준값이다. 어른들에게 돌발 상황은 이해 불가능하고 짜증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권력자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책‘이란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의 성장은 기억을 덮어 쓰는 과정이라서 아무리 즐거웠더라도 자라고 나면 희미한 잔상만 남는 경우가 많다. 그림책 작가 기타무라 사토시( )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영국 유학 시절 어느 맞벌이 가정의 아이를 돌보는 일로 돈을 벌었다. 아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쓰고그린 습작을 들고 가서 읽어 주었는데, 최초의 독자인 아이는 수십 번 다시 읽어 달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 환호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일본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그에게 아이의 부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의 대학 졸업식에 그를초대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영국까지 달려간기타무라 사토시의 눈앞에는 몰라보게 장성한 청년이 서 있었다. "아직까지 나를 기억해 주다니 고마워요."라고 말하자 그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 저는 선생님이 기억나지 않아요. 좋은 분이었다고 부모님이 늘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때 읽어 준 책들도 다 잊었느냐고 묻자 청년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타무라 사토시는 2010년 서울국제작가축제의 강연에서 이 일화를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게 잊히고 마는 숙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들려준 이야기들이 결국 그 아름다운 사람 자체가 되었기때문에 저는 그 숙명이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당시나는 그 일화를 들으면서 기억에서는 서서히 엷어지지만 마침내 존재 자체가 되는 것, 이것이 어린이책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린이와 책 사이의 연결고리가 약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제목을 까맣게 잊은 뒤에도 두고두고 그리워할 만큼 견고한 것이 책과 어린이의 관계다. 어린이는 그 책을 넘어 성장한다. 책을 흡수하고 추억을 뛰어넘어 나아간다.

 만약 그 청년이 "선생님의책이 준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답했더라면 그건 더 멋진 일이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기억을 하건 못 하건 청년은 오늘로부터 가장 멀리,
우리보다 더 먼 곳으로 갈 사람이다.

동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저 고양이도 나만큼 아플 거라는 짐작, 내 친구도 나만큼 슬플거라는 안타까움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다른 존재의서러움이나 아픔 앞에서 "괜찮아?"라고 묻는 그 순간의 진심을 겨룬다면 우리는 어린이를 이기지 못한다. 어린이들은여러 놀이를 하면서 이기기도 지기도 하지만 공감의 놀이만큼은 언제나 아픈 상대에게 져 주려고 애쓴다. 그들의 모험은 수많은 져 주기를 통해 그들 모두가 이기는 세계를 향한다. 어른들과 크게 다른 대목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모든것이 놀이이기 때문에 세상보다는 안전하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그 안전한 사고 실험 속에서 공감으로 이어진 공동의승리가 얼마나 빛나는지 배운다. 긴장감 속에 온갖 모험에뛰어들면서도 친구와 저릿저릿하게 마음이 통하던, 놀이터에서 느낀 그 잠깐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남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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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낙원 -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
박서영(무루) 지음 / 오후의소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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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하나 하나를 다시 더듬어 작가가 닿고 싶어한 생각을 응시한다. 내가 존경할만한 어른이 한 명 더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충만해진 하루였다.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이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이라말한다. 겸손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을 복잡하게 이해하고 섬세하게 상호작용을 하는 일이다. 나는 이것을 지적인 노력으로 이해한다. 이 세계가 모두 비슷한 삶의 모양을가진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거기서 다정함은 과잉이 될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모양이 제각기 다른 세계에 산다. 이해보다 오해가 가깝고 조화보다 반목이 쉬운 세상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점 사이에 정성껏 선을 이어보려할 때, 그렇게 이어진 선들로 넓게 그물을 짜보려 할 때, 세상의 다정함들이 힘을 낸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삶을 응원하며 우정을 나눌 수 있도록. 우리의 다름이 세계를 한쪽으로기울지 않게 하리라 믿을 수 있도록.

식물에 ‘정아우세頂芽優勢, apical dominance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식물의 줄기나 가지 맨 끝에 달린 어린싹 ‘정아
‘에 식물의 힘이 가장 집중되는 현상을 뜻한다고, 새잎이나면 괜찮은 거라 말해주었던 친구가 알려주었다. 정아의성장은 식물이 지금 자라는 쪽으로 힘을 쓰고 있다는 증명이다.

그게 무엇이든 살아 있는 것과 관계 맺는 경험은 언제나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서로를 이끈다. 무채색의 세계를 색으로 물들이기도 하고, 평생 모를 것 같았던 일에 푹 빠져들게도 만든다. 이어져 있는 존재들은 언제나 서로를 변화시킨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우연은 종종 우리를 현실의 경계 너머로 데려간다. 낯선사랑을 마주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방식으로 뜻밖의 협주가 일어나는 기쁨이 그곳에 있다. 저마다의 진실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흔들리고 깨어나리라는 기대, 서로의 얼굴에서 별의 흔적을 발견하리라는 기대가 그곳에 있다. 알레마냐의마지막 그림에서 아이들 곁에는 까만 코끼리 한 마리가 서있다. 무수한 선들이 가로지르며 만들어내는 교차점들을고요히 바라보며, 근원을 더듬고 미지를 고대하는 이들을위한 작은 희망의 암시처럼.

이 세계에 너무 많은 선이 그어진 탓에 사는 동안 누구나한 번은 이방인이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실은 ‘크리처‘
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고 낯설고 신비롭다는 것을 아는 방법은 그것뿐일 테니까.

<숲의 요괴》에서 남자가 길을 잃는 여정은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길 잃기를 닮았다. 솔닛은 길 잃기가 "관능적인 투항이고, 자신의 품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고, 세상사를 잊는 것이고, 지금 곁에 있는 것에만 완벽하게 몰입한나머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희미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빌려 길 잃기의 의미가 온전히현재에 존재함으로써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에 머물 줄 알게 되는 것이라고도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한 시대의 인간이얼마나 오만할 수 있는지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위험한가. 신비를 잃어가는 동안 우리는초월의 감각도 함께 상실했다.
누군가는 이야기가 그것을 되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말한다. 저 산 어딘가에 요괴가 있다고 상상하는 방식으로만 되찾을 수 있는 어떤 마음이 있다고. 반듯하게 닦인 길너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계속 만들고 읽는 것으로감각될 수 있는 크기와 깊이가 있다고. 그러니 언제고 기회가 찾아온다면 기꺼이 길을 잃어볼 일이다. 길을 잃고 나면 지도는 다시 그려질 것이다. 세계의 모양과 크기도 달라질 것이다.

좋은 일들은 어느 방향에서 올까.
행성의 운행을 예측하듯 행운의 방향도 가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상은 당장 한 치 앞의 사소한 불운도 피하기어려운 것이 인생이다. 운은 그저 운일 뿐. 그런데 가끔 내가 나도 모르는 새 행운을 향해 몸의 각도를 조금 틀었나싶을 때가 있다. 뻗은 줄 몰랐던 손끝에 어떤 좋은 일들이닿았을 때다. 내게는 독자로 좋아했던 그림책의 번역자가되는 일들이 그랬다.
좋아하는 마음을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떤 반가운 일을 마중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림책 번역을 하며 알았다.
2022년 동료 G와 함께 번역한 로이크 프루아르의 그림책 《나의 오두막》과의 인연도 그렇게 찾아왔다. 진행하던팟캐스트에서, 신문 지면 인터뷰에서, SNS에서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을 때 이미 G와 나는 그림책 번역을하고 있었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남자는 산장을 떠날 때까지도 곰을 발견하지 못한다. 곰에게도 남자의 방문은 노란색 모자 하나만큼의 흔적만을남겼을 뿐이다. 이 산뜻한 결말은 우리가 끝내 다 알지 못하는 진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담담히 증명한다. 그러니눈을 크게 뜨라고,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이야기는 말한다. 오독과 재독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반복해 읽어나가듯 안다고 믿는 것들을 의심하라고, 두 눈을크게 뜨고 새롭게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이것이 이 그림책이 가지고 있는 진짜 이야기다.

숀 탠은 ‘이야기란 우리가 복잡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방식‘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답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그림책은 때때로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것을 보여준다. 글과 그림, 낱장과 시퀀스, 넘기고 멈추고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한 사람의진실이 이야기로 완성된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은 이야기가 언제나 하나의 초대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모두를 환대하는 이야기의세계에서 자기만의 오솔길을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저마다의 진실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들이다.

내가 닮고 싶은 모습으로 나를 앞서 걸어주는 이가 있다면 거기에는 길이 있다는 뜻이다. 길은 단지 경로가 아니다.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비록 멀고 고될지라도 무언가에 도달할 가능성 또한 있다.
사표를 내던 동생에게는 이것이 없었다.

린 창문의 이미지를 가졌다. 단어의 본래 뜻이 그렇듯 환기는 내게도 창문을 연다는 의미가 가장 큰데 그 안에는 오래된 목소리가 하나 있다. "20분은 열어둬야지"라고 매일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말. 엄마는 매일 20분은 집 안의 모든창문을 열어두었다. 겨울이면 그 시간이 유난히 괴로워 투덜거리곤 했는데 엄마는 늘 예외가 없었다. 말이 긴 세월반복해 쌓이면 언령이 된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 독립했을 때, 나 역시 매일 20분은 환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실내의 묵은 공기를 새롭게 한다는 본래의 의미만으로도 환기는 내게 중요한 습관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삶의외형을 이루는 일상의 행위보다 근본적인 것, 그러니까 살아가는 태도와 마음가짐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이를테면매일 창문을 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작고 좁은가 실감하는일 같은 것이다. 창문을 열면 내가 갇혀 있음을 새삼 선명히 알게 된다. 창문 하나만 열어도 많은 것이 흘러 들어온다.

 유리창 너머에는 온갖 소리와 냄새가 있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다. 환기를 할 때마다 투명한유리창 하나가 얼마나 견고한 벽인지 알게 된다. 창 하나만열어도 마음에 틈이 생긴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도록 몸이 시동을 건다.
혼자인 사람에게 고립은 언제나 피할 수 없는 함정이기에 안과 밖을 잇는 습관을 만드는 일은 절실하다. 환기는내게 문밖의 세상과 연결되려는 일종의 각오인 셈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종종 ‘오해‘가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채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흡사 구두나 시계를 만드는 작은 공방의 수공업자 같은 모습으로 그는 커피 그라인더를 돌린다. 그의 손끝에서 별이 태어난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그 별 말이다. 그렇다. 남자는 별을 만드는 사람이다.
매일 밤 남자의 방에서 클레마티스 꽃을 닮은 희고 노란별들이 춤추듯 자라난다. 남자는 그 일을 아주 오래전부터해왔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의 눈에 그는 그저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므로.
그런 오해를 남자는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의 의연함은 그의 비범함과 맞닿아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고귀한 존재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실상 범인들에게 오해는 괴로운 것이다. 너무 자주 오해해서 괴롭고 오해받아서 괴롭다. 그러니 희망은, 늘 오해가 지닌 일말의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다. 때로 오해는 이해를 더듬어가는 과정임을, 오해란 종종 의외의 영역에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의식의 울타리 밖에서, 선택의 경계 너머에서, 종종 뜻밖의 좋은 것들이 발견되었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책의 표지에는 옷걸이 위로 잿빛의 헤링본 체크 코트 한벌이 걸려 있다. 유행이라고는 타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무난한 코트다. 그러나 슬쩍 드러나 있는 안감만은 예사롭지가 않다. 경쾌한 빛깔의 하늘색 천 위로 흰 구름 그림이 뭉게뭉게 떠 있다. 넥 라벨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적힌 글씨는 Nessuno, 이탈리아어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잘것없는 한 노인의 손끝에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매일 새로 만들어진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그의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은 누구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 낡고흔한 코트의 안자락 속에 숨어 있다. 남자는 자신의 비밀을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대나 무관심에 억울해하거나 서글퍼하지도 않는다. 오직 깊은 밤 홀로 깨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갈 뿐이다.
어쩌면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고유함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한 사람의 내면에서 빛나는 많은 것들이 오직 홀로 깨어있는 시간에 만들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쩐지 위로가된다. 매일 어딘가에서 저마다 자기만의 별을 만드는 이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면 조금 덜 외로우니까. 한 사람의 가장아름다운 모습이 코트 겉감이 아닌 안감에 숨겨져 있다고생각하면 용기가 난다. 쌓이고 무르익을 틈도 없이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조바심을 조금은 물리칠 수 있다.
오래 응시하고 귀 기울여 듣고 고요히 채워나갈 힘이 생긴다. 결국 오해하거나 오해받고야 말 모든 이들을 조금은 애틋하게 여기게 된다. 우리가 끝내 모르고 말 세상의 어떤아름다운 일들도 상상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고독 속에 놓여 있다. 이 초월적인 ‘함께‘에 기대어 매번 외로운 날들을 지난다. 서로에 대한 오해를 피할 길은 없지만, 모두가 오해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이해하면서. 그 이해가 오해보다 더 큰 힘으로 서로 지지해주기를 바라면서.

대개의 경우 우리는실패하고,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 또한 언제나 실패와실패 사이에, 혹은 반복되는 실패를 밟고 도달해야 하는 어딘가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쓴 실패담을 읽으면 반갑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유의미한 실패로 이루어진세계라는 것을 확인받는 듯해서.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떤 각오와 계획이 있다 한들 우리는실패하리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실패담들이 힘이 된다. 실패가 자연스러운 것일 때 우리는 무엇이든 더 쉽게 마음먹을 수 있다. 불확실한 것을 향해 스스로를 던져볼 용기도 낼 수 있다. 요안나 콘세이요는
"실패한 두 선 사이에 내가 그으려는 세 번째 선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 번째 선을 그리지 않는다. 그건 그릴 필요가 없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진짜는 언제나 실패한 두 선 사이의 진동으로만 존재하기때문이다.
끝이나 결말 같은 말들은 어쩌면 착각이나 허상일지도모른다. 삶은 계속 흐르고 모든 것은 쉼 없이 변하니까. 그러니 각각의 실패가 모여 이루는 합이 만들어내는 삶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지지 않으려 애쓰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계속 잘못된 선을 긋는 수밖에 없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오직 손에 연필을 꼭 쥐고, 종이 위에 무수히 잘못 그려진 선과 선 사이를 응시하면서.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뒤에도 내게는 더 살아가야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잘 살아볼 것이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내 모습을 더 자주 꺼내보면서, 마주 보는 이들에게 더 다정한 얼굴이 되어주면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모를 이의 뜻밖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을때 두려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고 그저 앞치마를 훌훌 벗으며 이제는 시간이 되었으니 가보자고 씩씩하게 웃으며말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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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다비드 칼리 지음, 모니카 바렌고 그림, 정림(정한샘).하나 옮김 / 오후의소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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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때 잘하자! (남편과 같이 읽은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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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맞는 돌을 찾으면 피카 그림책 22
메리 린 레이 지음, 펠리치타 살라 그림, 김세실 옮김 / FIKAJUNIOR(피카주니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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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네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세상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산을 이루고 있는 암석들을 떠올려 봐.
그 암석들이 얼마나 큰지 보이지 않아도분명히 거기 있듯이, 너도 그러니까.

네가 의미와 이유를 찾으면 모든 돌은 중요한 돌이 돼.
그중에 가장 중요한 돌은 아마도 너의 손에 꼭 맞는 딱 좋은 돌일 거야.
그 돌은 어딘가에서 네가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지.
딱 좋은 돌을 놓치고 싶지 않으면,
마주치는 모든 돌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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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파올라 퀸타발레 지음, 미겔 탕코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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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작은 행운을 찾다 보면
하루의 끝에서
반갑게 밤을 맞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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