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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평점 :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이 자꾸 떠오르는 요즘이다.
책에도 때가 있다. 이 작가를 좋아함에도 이 책은 번번히 잘 읽히지 않아 도서관에 끝내 반납했어야 했다. 아마 그 시기에 나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을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을 좋아하는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지나 지금 다시 책을 폈다. 좋은 구절이 많아 한 번 더 읽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너무나 좋은 책을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후회보다 가을이 오면 가을을 마음껏 좋아하겠다는 작가처럼 지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좋아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걸 독서를 통해 얻은 한 뼘 넓어진 나의 마음 품이라고 생각한다.
에티켓 이론이야. 통조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실 겉에 붙은 라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본성이 아니라 드러난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열어보면 되지." 그가 말했다. "열어볼 수 없다니까. 그게 규칙이야. 과거는 통조림 속에 들어 있고, 우리에게는 따개가 없어. 그러니 누구도 과거를 바꿀수는 없는 거야."
툴루즈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툴루즈 1대학 근처의 라이브클럽에서 장피에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됐어. 그때 그는 영국학생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들어보니 스파게티 인생론이랄까, 아무튼 이런 이야기였어. 우리가 상상하는 인생은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비닐로 포장한 스파게티 면과 같아. 각자의 인생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거지.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장피에르의 주장에 따르면 말이야. 실제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 포장을 뜯어 살은 뒤, 팬 위에서 소스와 버무린 뒤의 면과 같아. 포장 상태에서는,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모두의 인생이 하나의 시간을 따라진행되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소스에 버무릴 때마다 예측
할 수 없는 형태로 뒤엉키는 스파게티 면과 같다는 거야. 소스팬 안에서 한 가락의 스파게티 면은 자신의 형태만을 간신히이해할 수 있을 뿐, 다른 면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거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고 말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 각자의 인생은 소스 팬 안의 스파게티 면이라는 걸 잊지말라고.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 소스 팬을 한번 뒤섞는 것과 같아. 너희 인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인과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어떻게 뒤엉키든 스파게티 면의 차원에서는 한 가락이니까. 너희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일이 소스에 버무린 뒤 만들어진 스파게티 면의 형태를 따라 움직이는것과 같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진정한 시간여행은 그게 아니라 소스 팬을 몇 번이고 뒤섞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일개 스파게티 면의 차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고 해도 너희는 너희의 과거가 누군가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을 거야.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간 너희가 맞닥뜨릴 사람이 이미 늙어버린 연인이라면 어떤 기분이겠어?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도 너희가 바꿀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제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그 세계는 우리가 디디고 선 이 땅의 아래에 있습니다. 지상의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세계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광부들의 세계는 존재합니다. 조지 오웰에게 소설가란 이 두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비유하자면 소설가는 마르고 젖은 존재인 셈이죠. 소설가는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멀리 있는 것은 작아. 가까운 것은 크고. 이게 원근법의 원리지. 이게 뭘 뜻하는지 아는사람?" 그녀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대학교 수업에서 원근법이라니,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지훈이 손을 들었다. "보는 사람의 눈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 우리의 위치가 모든 걸 결정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크거나 절대적으로 작은 것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만 있는 거야. 그러니 어떤 대상의 크기는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어. 그 위치가 우리의 의지를 뜻해. 아무리크다고 해도 우리 위치에 따라 얼마든지 작게 만들어버릴 수있어. 그러다가 아주 멀어지면 어떻게 되지?" "소실점으로 사라집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리적 세계에는 그런 소실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 지금도 수많은 것들이 그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있어. 이게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의 참모습이야. 그럼 그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 지훈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그게 존경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매혹이었을지도.
"나를 사랑하긴 한 거야?" 화영이 물었다. 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헤어질 수가 있어? 난 그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화영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인생은 그런 것이다. 납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서로 얘기했다면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십 년 전의 일을 따져가며 왜 그랬냐고 묻는 건무의미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일들이 납득되리라. 기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감은 코앞이고 원고는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졌는데 잠조차오지 않을 때, 나는 밖으로 나가 걷는다. 그럴 때 걷는 일은큰 도움이 된다. 걷는 동안에는 적어도 걸어가고는 있으니까. 책상 앞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걷는 게 나으니까.
반면, 걷기는 전혀 애쓰지 않아도 된다. 걷지 못할 만큼 몸과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대개는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별노력 없이 수월하게. 그럴 때 걷기는 사랑과 닮아 있다. 애쓰거나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사랑은 지금의 내 마음과 몸으로 하는 일이지, 과거나 미래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지금의 몸과 마음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게으를 수도 있는,지금의 몸과 마음으로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우연을 ‘나‘의 인생으로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우연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다. 미야노가 모임에서 한 번 만났을뿐인 이소노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태도에서비롯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삶을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설사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이는 경이로웠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삶이 거기 있었다. 한번 대답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영원히 지켜보고 돌봐야 하는삶 선물처럼 받았으니 나 역시 주고 주고 또 주기만 해야 할 삶이 거기 있었다. 엄마에게도 나는 그런 삶이었을까?
아침에 깨어서 보니,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나는 그 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침 사이에 ‘그러므로‘라는접속사를 넣어 연결해봤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내 나이 때의 엄마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내 나이 때의 열무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온 눈보라가 얼굴을 덮쳤다. 이내 안경알이 흐려졌다. 흐리마리 하얀빛에 갇혀 헤매다가 나는 나무한 그루와 부딪힐 뻔했다. 눈 쌓인 호수의 하얀 빛을 바라보고선 독일가문비나무였다. 독일가문비나무는 묵묵히 눈을 맞고서 있었다. 독일가문비나무와 눈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무처럼 나도 눈을 맞기로 했다. 이제 나는 슬픔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해지려 할 뿐이다. 언제부터 그 눈이내리기 시작했고 언제까지 그 눈이 내릴지는 나도 독일가문비나무도 알지 못하니까. 왜 그런 눈이 내리는지도. 다만 우리가아는 것은 지금 이 시기는 여름철에는 맞기 힘든 눈을 맞아야 할 때라는 사실뿐. 그러고 나면 여름은 저절로 찾아올 테니까. 소로가 먼저 있어, 오래전, 호숫가의 소로에게 그랬듯이.
그렇게 우리는 여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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