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자주 듣던 노래에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그런 기후 탓인지 한국 사람들은 개성도 또렷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반면에 복잡한 문제 앞에서 골똘히 생각하며 쉽게판단내리지 못하면 어딘가 의뭉스럽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의 내성적인 성격이 싫었다. 사춘기시절에는 이 성격을 바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스무 살이 지난 뒤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주는 것보다 받아야할 것이 더 많은 셈이다. 관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타인의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원래의 균형을 찾을 수있다. 다행히 나는 나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만큼 타인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이 지체의 시간이 나는 좋다. 이런 나를 옹호해줄 만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자위다. 그의 책 드러내지 않기를 인용해서 말하자면, 그는 타인 앞에서 판단을 유보하는 나의 태도에 관해 이런 변론을 내놓을 것이다.
다른 철학책과 마찬가지로 피에르 자위의 이 책에도 자아는 "헛바람, 허깨비, 기만에 불과하다고 표현돼 있다. 헛된 망상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진정한 세계의 모습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필요한데, 그때 사용하는 철학적 기술이 바로 겸손이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 겸손이란다른 꿍꿍이를 감춘 음흉한 태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겸손이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술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겸손을 통해 우리는 섬세한 감각을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겸손은 그저 타자가 몹시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그에게 아직도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섬세한 지각일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오늘날 드러내지않기‘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드러내지 않기‘라는 경험의 중추는ㅡ아직은 그 경험이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ㅡ 자기증오나 자기에 대한 염려와는 무관하다. 그 중추는 순전히 타자들에게로, 대타자에게로, 피조물들에게로, 세계로 향해있다.
피에르 자위의 이 책에는 ‘혹은 사라짐의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오래전 라디오헤드의 <How to DisappearCompletely)라는 노래의 제목에 매료됐던 나는 서점에서 이 부제를 보자마자 책을 집어들었다. 책은 다음과 같은 카프카의 일기로시작하고 있었다. 사라짐의 기술과 카프카의 조합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초대받았을 때 그저 별 생각 없이 순진무구하게 문지방을 넘고 계단을 올라왔음이 분명하다. 상념에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그런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한채 그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행동할 뿐이다. 이 일기에서 카프카는 자아의 기획이 없는 순진무구한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이를 번안하면,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 없이 매일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글을 쓰는 행위가 될 것이다. 겸손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자아의•축소 내지는 사라짐이 이렇듯 예술 행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발견한 사람은 블랑쇼다.
피에르 자위의 설명에 따르면, "블랑쇼는 아마 현대 예술의 본질을 사라짐의 기술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기, 글쓰기, 어쩌면 필름으로 기록하는 것까지도 항상 사라짐의 추구일 뿐이다. 이쯤 이르러 나는 누군가의 책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참으로 멋진 경험을 다시 한번 할 수 있게 돼 무척 기뻤다. 예술은 사라짐의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의심리상태, 재능, 예술가로서의 위상 등등이 모두 소진되는 과정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고 나면 작품 자체도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사라짐을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다음 문장에서 나 역시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요즘내가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최상의 독서란 내가 막 쓰려고 했던 그 글을 읽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세잔의 말마따나 결과보다는 ‘실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대상보다는 기본적으로 대상과 입장 밖에서방향이 결정되는 생산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블랑쇼는 카프카와 발레리라는 판이하게 다른 두 작가가서로 만나는 이 명제 ‘나의 모든 작품은 연습일 뿐이다‘를대하며 감탄한다.
이걸 보르헤스의 말로 바꾸면 ‘실수가 없으면 시인도 없다‘가 되리라. 보르헤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문학에 끌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불행에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시인은 이 끌림으로 다시 불행을 뛰어넘는다. 이번 계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보르헤스를 반박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 역시 이삶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침묵』을 쓴 존 그레이에 따르면, 행복은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이란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아는신처럼 독창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노력해서발견되어야만 하며, 그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니까. 하지만 그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아라는 게 허구의 이야기라면? 우리 안에는 애당초 그런 자아가 없다면? ‘헬조선‘이라는게 있다면, 그 지옥은 내 안에 없는 자아를 찾아낼 때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집단적 착각으로 만들어진다. 실재와 허구 사이의, 아무리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이 까마득한 심연의 지옥 속으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인간의 삶을 소모시킬 뿐인 낭만주의적 착각에서 벗어나 임시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자신을 받아들인 뒤에나 이따금 실재는 브루클린의 달처럼 짧은 순간 그 모습을 드러낼 텐데,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그때까지 살아왔던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해지리라. 그러니까 실현되는 것은 이 세계이지, 우리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실현을 이따금 우연히 목격할 뿐이다. 구월이 찾아오자, 새벽 공기는 나날이 식어가고 있다. 나는 책상과 의자만 놓인 아주 작은 방에 사는 랍비와 어떤 사람의 대화를 읽었다. "랍비님 가구가 없네요." "당신 가구도 없네요." "저야 잠시 들렀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랍비처럼 사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임시적 존재로, 마치 여행자처럼 이 삶을 사는 건. 하지만 여든 살의 보르헤스는 한술 더 뜬다. "매일 아침 깨어나 ‘흠, 내가 여기 있군. 다시보르헤스로 돌아가야겠네‘라고 반복하는 걸 멈추고 싶어요." 내게 문학은 여전히 경이롭다. 그러니 문학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임시적 존재로 되돌아갈 수밖에.
사람person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이 ‘가면‘이라는 게역사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언제 어디서나 다소 의식적으로 역할을 연기한다는 인식을 가리킨다. (....) 우리는 역할을 통해 서로를 안다.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도 역할을 통해서다.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분투하면서 우리가 구축해온 스스로에 대한 관념을 가면이라 한다면, 가면은 우리의 참자아.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자이다. 결국 역할이라는 것은 우리의 제2의 천성, 인성을 구성하고 통합하는성분이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 이 세상에 들어와, 성격을획득하고, 그러면서 사람이 된다. 에는 드러난제2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제3의 천성도 가능하다. 그리고 제3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저 양을 잊을 정도로어떤 소설에 푹 빠졌을 뿐인데, 어느 틈엔가 내가 그 소설 속의 주인공과 비슷해지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누군가 말한다고 해도 비웃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더구나 양을 잊을 정도로 어떤 책에 푹 빠져본 적이 없다면. 또 하나, 다행한 것은, 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나의 배역을 정하는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가능하면 멋진 배역을 맡기를. 물론 그러자면 먼저 양을 잊을 정도로 뭔가에 빠져야 하겠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은 바로 거기, 고개만 들면 보이는 그날그날의 하늘에 있었던 것이다.
경제활동의 주체들이 이윤을 포기하면 공산주의 사회가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의미를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자아의 구름이 걷히며실재와 대면하게 되리라. 이때 실재란 진리라는 말로 바꿀 수있다. 존 케이지의 비결정성 Indeterminacy은 이를 잘 설명하는 개념이다. 음에서 의미를 제거하면, 즉 화음을 제거하면 ‘심리적‘ 환영이 사라지면서 소리의 현존이 드러난다. 이로써 우리는환영이 아닌 실재의 음을 만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개별적 사건들을 인과의 사슬로 묶어 의미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눈앞의 인생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인생담에서 의미를 걷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자아를 사랑한다. 그 자아를 굳건하게 지켜주는 것이 바로 인생 이야기에서 찾아낸 의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무의식중에 의미를 찾아낸다.
불타는 집, 즉 화택에서는 그저 뛰쳐나와야 한다고 붓다는 말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암시했다시피 체제에는 외부가 없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탈출할 수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벽암록」 제37칙, ‘삼계무법 하처구심‘의 세계를 바로 보는 것. 그러니까 불도 없고, 불타는 집도없고, 사랑하는 여인도 없고, 나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 지금 불타는 집에 앉아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불에 맞서지도 말고, 그 불에 동조하지도 마라. 그 불을 바로 바라보라. 그러면 불은 결가부좌를 한 백남준의 TV가 들여다보는자신의 화면처럼 무의미한 삼원색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공만 남을 뿐이다. 자아의 목소리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진 불을 다시 되살리려 하리라. 그러나 그 목소리를 그대로 흘려보내면 불은 다시 사라진다. 마치 백남준의TV로 수많은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그렇게 해서 백남준의 TV는 이 세계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TV. 즉젠 마스터Zen Master, 禪師 TV가 됐다. 젠 마스터 TV에게는 자아가 없다. 젠 마스터 TV는 거울과 같다.
인간은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인다고에른스트 블로흐는 말했습니다. 인간도 시계처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한, 인과율의 세계는 작동하며, 소망은 이뤄집니다. 어린 시절 저를 매혹시킨 에스컬레이터와 쇠구슬 장식품, 이상이 빠져든 옥상정원과 시계, 박지원 등을 사로잡은 자명종, 20세기 한국인들이 열광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모두 이ㄹ런 인과율이 분명한 운동의 차원에서 바라봐야만 합니다. 모든 움직임은 어떤 결과를 낳습니다. 이보다 매력적이고 두려운 문장이 없습니다. 저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킨다면, 거기에서는 희망이 생깁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문장은 이렇게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한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실현을 저는 목격할 수 없다면 어떨까요? 저는그저 가장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죽어가야 할 운명이라면? 희망이 유예된 그 삶을 저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지체되는시간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할 때, 인간은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그런 의문이 저를 소설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거시적으로 제대로 작동되는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한없이 지체되는 시간에 관심이 갑니다. 인과율이 지체되는 동안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우연과 신화와 운명에 끌립니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소년에게도 삶이란 희망이 유예되는 시간을 뜻했을 것입니다. 그가자신의 뜻대로 조선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천주교가좀 더 일찍 조선에 전해지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금보다 빨리 돌아갔을까요?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를 조선에 소개하려 했던 소현세자의 꿈이 좌절되는 과정을 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않았을 것 같습니다. 조선에 들어갔어도 그가 원하는 세상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주교는 조선에 전해집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마치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이백 년 뒤에 일어날 이 결과에 맞춰 그의 입국 시도를 원인으로 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랬다면 어둠 속에 묻힌 그의 삶도 의미를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을 텐데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국에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화형으로 죽고, 이백 년 뒤 서울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납니다. 이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인생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요?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을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간신히 살아낼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저절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사이에 인과의 다리를 놓을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 그 소년의 그토록 짧은 약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소년에게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쉽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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