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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평점 :
주술을 이기는 겸허의 힘
한겨울의 오싹한 경험이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겸허함이 주술을 이긴다’는 깨달음으로 귀결되었다.
젓가락에 관련한 미스터리 이야기 모음집이라니 처음부터 강력하게 마음을 끌어당겼다. 게다가 일본, 홍콩, 대만의 유명 작가들이 협업하여 각자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결말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한국의 작가도 참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젓가락이라 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창의력 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낼 수 있었을 텐데.
첫 작품 <젓가락님>을 읽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과연 무슨 신비하고 기묘한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공포스러운 일을 몰래 엿보는 경험이란 언제 어디서든 ‘그래서 결말은?’이라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학교 배경의 미스터리물은 각자 어린 시절의 닫아둔 추억들을 소환한다. <젓가락님>은 액자소설의 구성으로 모든 이야기를 민속학 교수가 시작하고 수렴한다는 점에서 떠들썩했던 마음 속 공포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U자 복도 구조물에서 끝없이 도망가는 장면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멈출 듯한 순간이 어디 영화뿐이랴. 마지막엔 모든 내용을 학자의 시점, 관찰자 입장에서 객관화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노련한 이야기꾼으로부터 독자들이 인기 정점의 스토리 결말을 듣는 듯한 착각. 어쨌든 그 기묘한 이야기가 교수의 구술 채집 형태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은 보너스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장치였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문득 생각난 듯이 던진 교수의 질문에 오빠의 죽음을 전하는 대답 장면이 가장 소름끼쳤다. 한겨울의 판타지 체감도가 압권일 뿐더러 누구나 갖고 있는 어릴 적 무서운 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두 번째 작품인 <산호 뼈>는 전형적인 추리물에 청소년 소설같은 성장 이야기까지 곁들여졌다. 하이린쯔라는 도사에게 어느 날 ‘나’라는 화자가 찾아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미스터리 속으로 독자들을 몰고 간다. 궁극엔 ‘신(神)’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에까지 이끌어 간다.
이 작품은 두 다른 세계에 있는 소년과 소녀가 빚어내는 아슬아슬한 경계라는 설정이 핵심을 이룬다.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에 집착하는 소년을 도와주며 소녀는 상식의 세계, 이성의 세계로 그를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소년은 ‘평생 음과 양, 두 세계의 경계선에서 눈을 감을 수 없는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슬픔과 아슬아슬함이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이 줄타기에 재료로 넣어진 젓가락의 비밀, 왕선군의 비밀. 소년의 엄마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 하지만 작품 전체에 배경음처럼 퍼져 있는 박하사탕의 향기는 낭만과 감동의 한 조각을 독자 가슴에 크게 던진다.
마지막 장면, 하이린쯔의 정체와 함께 산호젓가락의 비밀이 밝혀지는 소름돋는 반전은 독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신은 인간의 바람이다. 모든 종교와 신앙은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작품 속 한 대목에서 미스터리의 정체를 종교와 철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세 번째 작품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다. SNS에 퍼진 귀신 이야기가 한 시대의 유행을 만들고, 나중에 그것이 기획된 것임을 밝히는 가운데 생방송 도중 살인이 일어나는 구성은 매우 흥미롭다. 무분별한 경쟁률과 욕심으로 시청자들의 조회수를 늘리려는 유튜버들이 오늘날 넘쳐나기 때문이다.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네 청년들의 이야기와, 시청률 및 구독자수를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행태가 현 시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대 감각이 돋보인다. 작품 속 ‘귀신 신부’ 소녀의 마지막 병원 장면은 서늘한 소름을 안겨주지만, 이 소녀가 책의 다섯 번째 이야기에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걸 알았을 때 서늘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 작품은 ‘인간의 악의보다 더 무서운 건 없다’는 교훈을 남긴다. ‘저주를 기획할 때, 자신들이 인간의 ‘악의’라는 벌집을 쑤신다는 걸 알아야 했다‘는 소설 속 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죄책감과 악의, 미움이라는 감정은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위험한 감정이기에, 이 작품은 생생한 화살이 되어 누군가를 쉽게 탓하고 오해하는 현대인의 가슴에 박힌다.
네 번째 작품 <악어 꿈>은 압도적으로 공포를 던져 준 이야기였다. 작가의 고백과 매춘부 여성의 고백이 서로 구성과 시점을 교차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어느 날 작가 싸인회에 아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중년의 기자가 찾아오고, 작가와 기자, 그리고 기자의 아들은 댐 건설로 수몰된 B초등학교의 비밀을 풀기 위해 해당 장소를 찾아간다. B초등학교는 젓가락 저주 내지 소원 빌기의 꿈에 나오는 중요한 배경으로, 여덟 명의 초등 학생이 실종된 장소이다. 하지만 이곳은 끔찍한 살인 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곳으로, 절정으로 치달을 때 밝혀지는 작가의 비밀 때문에 온몸에 돋는 소름과 경악은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미스터리적 구성에만 초점을 맞추어선 안된다.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에 대한 질문을 읽을 수 없다면 이야기를 제대로 감상한 게 아니다. 거기에 젓가락 저주의 문화적 의미까지 더하며 ‘저주는 개인적인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것이다’라는 명제가 무거운 파문을 던진다. 타이완에서 민며느리라는 억압적 제도, 여성과 임산부 대상으로 입혀진 금기들, 타이완 전통사회 자체가 여성을 겨냥한 저주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우리 모두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친가지일 터. 역사의 흐름을 통틀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여성 인권이 말살되고 억압된 채 신음으로 이어져 온 사실을 다시 한번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 성찰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공포를 던져주었지만 가장 독자들을 각성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 이야기 <해시노어>는 가장 큰 즐거움을 준 작품이었다. 앞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고리로 맺어 연결시키며 거대 신화의 SF로 종결시켜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작품에서 다룬 주제는 중국의 역사, 신화, 과학, 철학, 종교와 우주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젓가락님이라는 무서운 존재의 실체를 ‘이계의 물체’라는 SF적 상상력으로 완성시켰다는, 거기에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인간의 정을 가진 캐릭터를 입혔다는 점이다. 처음에 탐정 아원에 대해, 이 책에 나온 모든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그가 불멸의 신명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넘어 당혹감을 느꼈다. 여기엔 처음으로 주인공에게 닥친 위기와 악과의 대결이 만화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주인공 핀천과 그가 사랑하는 소녀를 구해준 아원이, 모험과 역경을 통해 젓가락님을 원래 그들의 세계로 보내는 장엄한 해피엔딩은 영화의 한 장면같다. 특히 곳곳에 설을 풀어가는 중국 신화와 역사의 한마당이 고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한 가득 지적 유희와 재미를 선사한다. 이계의 물체가 두 손가락을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 형태로 길게 뻗어 사람의 가슴에 찔러 넣는 장면 묘사는 외계 물체와의 접촉을 영상화했던 수많은 책과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핀천과 샤오쿠이의 약간은 낭만적 이야기도 양념처럼 신선함과 별미를 느끼게 했다.
책을 덮었을 때 가장 크게 와닿은 건 ‘인간의 악의가 삶의 카르마에 적용, 인과의 법칙을 어긋나게 만든다’는 진리였다. 그 진리는 결국 누구나 미움과 적대감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양심과 죄책감, 선의로 희석시켜 주어진 삶과 시간을 겸허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양심 있는 삶, 겸허함을 아는 삶이 주술과 적의를 이긴다는 것 – 명확한 교훈은 이 두꺼운 미스터리 시리즈물을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