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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서늘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걸작
숨막히는 호기심으로 책을 끝까지 달리고 나서 밀려온 건 안도감과 찬탄이었다. 재미와 호기심과 공포와 감동을 한꺼번에 눈폭탄처럼 선사하는 이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표지 그림부터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내 동생의 무덤’이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제목 아래 있는 그림은 소용돌이치며 불어닥치는 눈폭풍. 황량한 마을에 불어닥친 거대한 잿빛 토네이도같은 눈회오리는 불길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도대체 이 표지의 그림이 뜻하는 게 무얼까 고민했다. 읽기 시작하면서도 혹시 사건이 영영 미스터리로 끝나버리며 고구마를 먹이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게 아닐까, 모든 인물들이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며 허무와 씁쓸함을 토해내는 그런 이야기일까 불안했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 에드먼드가 석방되는 심리 승인 판결의 날부터 이 눈폭풍은 소설의 중요한, 제4의 캐릭터처럼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 표지는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장면 - 자유의 몸이 된 에드먼드가 복수의 행동을 개시하며 진실의 실체를 독자들이 깨닫는 부분, 앞을 못 볼 정도로 눈폭풍이 몰아치는 광산 위로 무대가 옮겨지는 부분, 누워 있던 몸이 절로 벌떡 일어나지고 등이 굳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호흡이 거칠어지는 그 부분, 악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그 부분을 설명하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표지 그림은 너무나 적절한 선택이었고, 이 작품 후반부의 긴장과 재미를 영원히 독자의 가슴 속에 박제하듯 남길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에드먼드가 풀려난 첫날 우리 모두는 눈에 갇혔어.”
댄이 법정을 떠나기 전 남긴 이 의미심장한 대사가 결국 어떤 상징이었는지를, 표지를 감상하며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완벽한 미스터리 설계
로버트 두고니라는 작가의 존재감을 깊이 인식하고 주위에 널리 홍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번 작품을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세 가지의 장점을 손꼽고 싶다.
우선 미스터리 추리물로서 완벽에 가까운 설계라는 것.
과연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끝까지 독자를 괴롭히는 중, 에드먼드를 종신형에 처하게 한 증거물이 위증이며 조작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시더 그로브 마을의 인물 가운데 어떤 다른 인물이 범인일까 하는 트릭으로 독자들을 몰고 가는 설계. 하지만 나중에 비밀이 밝혀지면서 독자들은 스스로가 함정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야말로 이 책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처럼, ‘무고한 죄인 한 명을 만들기보다는 범법자 열 명을 놓치는 편이 낫다’, ‘통념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 이 두 문장이 독자에게 꾸준히 전달한 암시 때문에 누구나 진짜 범인과 진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잘 짜여진 소설은 처음부터 잘 설계된 건축물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슴을 쥐어짜듯 오싹오싹하게 만드는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면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을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여겼는데, 그 작품에 못지않은 재미와 공포를 주었다. 특히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작품이기에 사계절 서늘함이 필요한 미스터리 매니아들에게 추천한다. 다만 그런 점에서 에드먼드의 어린 시절 성장 배경과 그가 어떻게 숙부의 집에 맡겨지게 되었는지, 그의 내적 인성이 형성된 동기 등도 잠깐이나마 설명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유정의 <28>이나 <종의 기원> 등에서 사이코패스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길고 긴 당위성이 작품 서두에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다. 하지만 뭐 어떠랴. 우리 주변 어딘가에 도사릴 수도 있는 악인, 평범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악인에 대해 동정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면 그것 또한 이 작품과 안 어울렸을 터. 계속 그 아쉬움이 든다면 나중에 트레이시 시리즈 어딘가에서 에드먼드의 에피소드가 프리퀄처럼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디테일한 법정 장면 묘사
다음으로 법정 드라마의 재미와 디테일한 세부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13년간 변호사로 활약한 경력이 이토록 작품의 세세한 묘사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분야에 전문가로 일했다는 건 최고의 작품을 위한 훌륭한 밑거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2부에서 댄이 변호사로서 에드먼드 1심 재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히는 부분은 마치 독자들이 시더 그로브 법정의 방청석에 앉아있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차분하게 펼쳐가는 댄의 질문들. 클라크 검사의 반박과 마이어스 판사의 객관적이고 힘 있는 지적, 교도관이 죄인을 호송하며 법정 내부에 자리잡는 장면, 피고의 표정 변화, 증인 헤이건의 실수와 미심쩍음을 발견해내는 과정, 캘러웨이의 고함과 사람들의 술렁임, 사설범죄과학연구소 스콧 박사의 DNA에 대한 증언, 이 모든 디테일들이 실제 법조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알 수 없는 거대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의 유명한 법정 변호 장면이 떠오르면서, 이 작품의 전문성이 빚어낸 재미와 진실 추적의 스릴감이 너무나도 훌륭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가장 강력한 이유다.
따뜻한 마을 사람들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점은 트레이시와 세라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애정과 따뜻함이다.
시더 그로브의 거의 전체가 세라를 잃으면서 동시에 변했다는 인물들의 말, 그 말은 세라가 어린 시절 얼마나 사랑스러운 개구쟁이면서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특히 아픈 피터와 자전거로 문제가 생긴 댄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묘사한 부분들과 오버랩된다. 이 소녀 하나를 잃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가슴 한 구석에 어떤 돌덩이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들 나름의 정의를 위해 어떤 공모를 하게 되었는지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20년 만에 세라의 유해가 발견되고 나서 저마다 세월의 더께를 어깨에 쌓은 채 장례식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 그들이 세라를 추억하고 세라의 아버지에게 입은 은혜와 혼자 남은 트레이시를 위로하는 장면은 잔잔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캘러웨이와 클라크, 디안젤로와 파커 씨마저 그들의 공모가 결국 세라와 트레이시를 위함이었음이 밝혀지는 후반부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감정 – 따뜻한 위로와 공감, 애정의 힘이 감동으로 수렴된다. 이런 이웃들이 내 주변에도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과 함께.
처음에 세라가 실종되면서 느꼈던 시더 그로브 마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은 이런 햇살같은, 텃밭의 새싹같은, 오래된 마을 사람들의 애정으로 인해 응원하고 싶은 곳, 댄과 트레이시가 결국 나중에는 여기에서 함께 정착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추측으로까지 전환된다.
그는 처음으로 늙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나직해졌다. “모두가 너처럼 달아날 수는 없었다. 트레이시, 여기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었어. 각자 생업이 있었고, 여전히 고향이라고 부르던 마을도 신경 써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기 좋은 곳이었지. 사람들은 아픔을 넘어 계속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병원 현관에서 뭔가 고백하려는 듯한 캘러웨이의 이 대사가 처음엔 그저 한낱 보수적이고 완고한 노인의 단순한 회상이라고 생각했다가, 책을 덮고 나서야 마을 전체를 대표하는 그가 가진 따뜻함이 표현된 대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픔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상처는 저마다의 마음 밑바닥에 거름으로 가라앉아 타인을 위해 공감과 위로의 손을 내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시더 그로브의 사람들에게서 알게 되었다. 시더 그로브는 불안과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었다. 캘러웨이라는 상징이 태양같이 빛을 내리쬐는 희망의 마을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작품에서 로이 캘러웨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게 된 인물이었다. 트레이시를 구하러 살을 에는 눈폭풍을 헤치며 광산으로 올라가는 장면, 자신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죽은 친구에 대한, 세라에 대한, 트레이시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책감과 책임과 사명을 위해 한 발 한 발 눈을 헤치며 올라가는 그의 마지막은 어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절정이었다. 작품의 중반까지는 그저 트레이시를 방해하려는,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꼰대인 줄 알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야 누구보다도 존경스럽고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고는 그에게 품었던 오해가 부끄러워졌다.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트레이시나 댄보다도 과연 로이 캘러웨이의 역할을 누가 맡을지가 아주 커다랗고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다.
서늘한 미스터리물과 디테일하고 논리적인 묘사, 인간에 대한 따뜻한 감동이 궁금하고 배고픈 독자라면 주저없이 첫 장을 펼쳐야 할 소설이 바로 <내 동생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