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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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인물들이 펼치는 환상의 추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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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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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뉴욕에 정착한 안드레 애치먼의 자전적 소설이다.

하버드라는 곳에 대한 애정과 증오, 친밀감과 거리감을 섬세한 심리 묘사 속에 버무려 읽는 즐거움은 남달랐다. 이토록 사람과의 관계를 섬세하고 잔잔하게, 애틋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묘사한 작가들이 또 있었던가.

와 칼라지의 관계가 주는 미묘한 긴장과 떨림에서 칼라지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킨다. 자유분방한 활력을 가진 괴짜,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거칠 것 없는 독설. 누구나 칼라지를 처음엔 독특한 이방인으로 바라보다가, 그의 내면에 감춰진 고독과 불안, 연약함을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특대형 미국에 대한 냉소와 비난이 결국 한 조각 파인애플을 얹은 슬라이스햄 때문에 찬양과 경외로 변하다가, 마지막엔 매정하게 내쳐지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짙은 연민이 솟아나온다.

는 칼라지와 스스로가 닮았음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를 멀리하고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추방당하기 직전의 고독한 아웃사이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상류층을 비웃는 웨이터, 늘 여자와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언제나 버림받는 거리의 부랑자와 닮은 칼라지. 보스턴의 늦은 밤 거리를 운전하며 재즈를 듣는 고독한 야수의 모습 속에서 는 동질감과 함께 그와 멀어져야 한다는 이중적 고뇌를 느낀다.

미국 사회 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유대인과 아랍인 이방인으로서의 연대감은 를 숨쉬게 하고 를 살아있게 하고 고독에서 건져주지만, 동시에 그런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기만 한다. 자신은 절대 칼라지처럼 되어선 안된다고, 칼라지와 어울리다가 영원히 미국으로부터, 케임브리지로부터 버림받아선 안된다고 불안해한다.

그리하여 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칼라지를 사랑하면서도 그와 자신이 결코 같은 부류가 아님을(적어도 는 하버드에서 강의하는 지식인, 대학원생이 아닌가.) 증명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 간사한 마음을 경멸한다. ‘는 아이비리그 학생이고 그는 택시운전사일 뿐이라는 선긋기, 칸막이 세우기를 무의식적으로 자꾸 시도하는 자신을 비참히도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어디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극단적인 무능력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살며 평범한 일을 하고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불가촉천민이었다.

 


수치심. 칼라지와의 만남 이후 가 가장 진지하게 느낀 정서는 바로 수치심일 것이다. 칼라지를 부끄러워하면서,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유대인으로서의 간교함이라 여기는 내면의 꿍꿍이를 부끄러워하면서, 칼라지가 떠난 세상의 홀가분함을 상상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마지막 순간 비겁하게, 영혼의 친구와의 작별조차 피해버린 자신의 저열함을 끝없는 후회 속에 부끄러워한다. 또 와히다에게, 예카테라나에게, 린다에게, 자신에게 마음을 준 모든 여자들에게 진심이 아니었음을 부끄러워한다. 앨리슨마저도, 앨리슨이야말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싶은 유일한 여자였음에도 그녀의 상류층 부모와 칵테일 파티 후 느낀 것은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덩어리였다. 또는 자격지심, 또는 빈털터리에 외국인으로서 그들에게 내쳐질까봐 두려워 먼저 문을 닫아버리는 과도한 자의식.

우리 모두 그와 같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77년 여름, 케임브리지에서의 처럼, 삶의 위기와 우울감에 시달릴 때마다 영혼의 닮은꼴인 친구를 찾으러 카페 알제로 뛰어가던 기억, 거기서 칼라지를 만나 경멸하는 이들에 대한 험담을 실컷 하고 난 후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기억, 하지만 정작 그와의 친분을 숨기고 싶어하던 기억. 누구에게나 그런 똑같은 기억, 부끄러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유려한 심리 묘사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인 아름다운 장면은 월든 호수에서 보낸 하루였다. 꿈같은 여름 휴가, 그날의 기억은 와 칼라지의 마음 속 깊이 각인되어 평생의 강력한 아스피린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굵은 글씨로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프랑스어들 - ‘와 칼라지가 상상 속 프랑스로의 여행을 떠나며 유쾌하게 나누는 이 나오는 장면마다 미소가 지어진다. 칼라지의 명함과도 같은 본 수아레라는 인사는 이 책을 덮은 독자들이 자기 마음 속 그리움의 대상에게 한 번쯤 던져보게 되지 않을까.

월든 호수와 프랑스. 이 두 존재는 평생 의 마음 속에 그리움의 대명사로 남게 된다. 또한 그리움의 힘 때문에, ‘, ‘의 공모자인 우리 모두는, 버거운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고 겨우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이면 우리는 누구나 칼라지와 같은 이가 내게 다가와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유쾌하게 욕을 퍼부으며,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눈으로 속 시원히 자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향해 주먹질과 발길질로 복수해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싸구려 와인을 나누며, 내가 괜찮을 때 사라져주고, 그러다 어느 새벽 복통으로 쓰러져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면 체커 택시를 타고 달려와 기꺼이 응급실로 데려다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 우린 누구에게나, 이렇게 칼라지같은 친구가, 너무나 사랑하지만 한편으론 숨기고픈 비밀스러운, 자신을 닮은 이방인 친구가 필요하다. 왜냐고? 도시 속의 우린 모두 마음에 날카로운 이빨 하나를 숨기고 사는 이기주의자이며 사람들의 섬 사이에 혼자 고립된 가여운 타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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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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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걸작

 

 

숨막히는 호기심으로 책을 끝까지 달리고 나서 밀려온 건 안도감과 찬탄이었다. 재미와 호기심과 공포와 감동을 한꺼번에 눈폭탄처럼 선사하는 이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표지 그림부터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내 동생의 무덤이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제목 아래 있는 그림은 소용돌이치며 불어닥치는 눈폭풍. 황량한 마을에 불어닥친 거대한 잿빛 토네이도같은 눈회오리는 불길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도대체 이 표지의 그림이 뜻하는 게 무얼까 고민했다. 읽기 시작하면서도 혹시 사건이 영영 미스터리로 끝나버리며 고구마를 먹이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게 아닐까, 모든 인물들이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며 허무와 씁쓸함을 토해내는 그런 이야기일까 불안했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 에드먼드가 석방되는 심리 승인 판결의 날부터 이 눈폭풍은 소설의 중요한, 4의 캐릭터처럼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 표지는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장면 - 자유의 몸이 된 에드먼드가 복수의 행동을 개시하며 진실의 실체를 독자들이 깨닫는 부분, 앞을 못 볼 정도로 눈폭풍이 몰아치는 광산 위로 무대가 옮겨지는 부분, 누워 있던 몸이 절로 벌떡 일어나지고 등이 굳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호흡이 거칠어지는 그 부분, 악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그 부분을 설명하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표지 그림은 너무나 적절한 선택이었고, 이 작품 후반부의 긴장과 재미를 영원히 독자의 가슴 속에 박제하듯 남길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에드먼드가 풀려난 첫날 우리 모두는 눈에 갇혔어.”

 

댄이 법정을 떠나기 전 남긴 이 의미심장한 대사가 결국 어떤 상징이었는지를, 표지를 감상하며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완벽한 미스터리 설계

로버트 두고니라는 작가의 존재감을 깊이 인식하고 주위에 널리 홍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번 작품을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세 가지의 장점을 손꼽고 싶다.

우선 미스터리 추리물로서 완벽에 가까운 설계라는 것.

과연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끝까지 독자를 괴롭히는 중, 에드먼드를 종신형에 처하게 한 증거물이 위증이며 조작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시더 그로브 마을의 인물 가운데 어떤 다른 인물이 범인일까 하는 트릭으로 독자들을 몰고 가는 설계. 하지만 나중에 비밀이 밝혀지면서 독자들은 스스로가 함정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야말로 이 책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처럼, ‘무고한 죄인 한 명을 만들기보다는 범법자 열 명을 놓치는 편이 낫다’, ‘통념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 이 두 문장이 독자에게 꾸준히 전달한 암시 때문에 누구나 진짜 범인과 진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잘 짜여진 소설은 처음부터 잘 설계된 건축물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슴을 쥐어짜듯 오싹오싹하게 만드는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면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을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여겼는데, 그 작품에 못지않은 재미와 공포를 주었다. 특히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작품이기에 사계절 서늘함이 필요한 미스터리 매니아들에게 추천한다. 다만 그런 점에서 에드먼드의 어린 시절 성장 배경과 그가 어떻게 숙부의 집에 맡겨지게 되었는지, 그의 내적 인성이 형성된 동기 등도 잠깐이나마 설명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유정의 <28>이나 <종의 기원> 등에서 사이코패스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길고 긴 당위성이 작품 서두에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다. 하지만 뭐 어떠랴. 우리 주변 어딘가에 도사릴 수도 있는 악인, 평범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악인에 대해 동정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면 그것 또한 이 작품과 안 어울렸을 터. 계속 그 아쉬움이 든다면 나중에 트레이시 시리즈 어딘가에서 에드먼드의 에피소드가 프리퀄처럼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디테일한 법정 장면 묘사

다음으로 법정 드라마의 재미와 디테일한 세부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13년간 변호사로 활약한 경력이 이토록 작품의 세세한 묘사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분야에 전문가로 일했다는 건 최고의 작품을 위한 훌륭한 밑거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2부에서 댄이 변호사로서 에드먼드 1심 재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히는 부분은 마치 독자들이 시더 그로브 법정의 방청석에 앉아있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차분하게 펼쳐가는 댄의 질문들. 클라크 검사의 반박과 마이어스 판사의 객관적이고 힘 있는 지적, 교도관이 죄인을 호송하며 법정 내부에 자리잡는 장면, 피고의 표정 변화, 증인 헤이건의 실수와 미심쩍음을 발견해내는 과정, 캘러웨이의 고함과 사람들의 술렁임, 사설범죄과학연구소 스콧 박사의 DNA에 대한 증언, 이 모든 디테일들이 실제 법조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알 수 없는 거대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의 유명한 법정 변호 장면이 떠오르면서, 이 작품의 전문성이 빚어낸 재미와 진실 추적의 스릴감이 너무나도 훌륭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가장 강력한 이유다.

 

 

 

따뜻한 마을 사람들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점은 트레이시와 세라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애정과 따뜻함이다.

시더 그로브의 거의 전체가 세라를 잃으면서 동시에 변했다는 인물들의 말, 그 말은 세라가 어린 시절 얼마나 사랑스러운 개구쟁이면서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특히 아픈 피터와 자전거로 문제가 생긴 댄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묘사한 부분들과 오버랩된다. 이 소녀 하나를 잃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가슴 한 구석에 어떤 돌덩이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들 나름의 정의를 위해 어떤 공모를 하게 되었는지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20년 만에 세라의 유해가 발견되고 나서 저마다 세월의 더께를 어깨에 쌓은 채 장례식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 그들이 세라를 추억하고 세라의 아버지에게 입은 은혜와 혼자 남은 트레이시를 위로하는 장면은 잔잔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캘러웨이와 클라크, 디안젤로와 파커 씨마저 그들의 공모가 결국 세라와 트레이시를 위함이었음이 밝혀지는 후반부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감정 따뜻한 위로와 공감, 애정의 힘이 감동으로 수렴된다. 이런 이웃들이 내 주변에도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과 함께.

처음에 세라가 실종되면서 느꼈던 시더 그로브 마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은 이런 햇살같은, 텃밭의 새싹같은, 오래된 마을 사람들의 애정으로 인해 응원하고 싶은 곳, 댄과 트레이시가 결국 나중에는 여기에서 함께 정착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추측으로까지 전환된다.

그는 처음으로 늙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나직해졌다. “모두가 너처럼 달아날 수는 없었다. 트레이시, 여기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었어. 각자 생업이 있었고, 여전히 고향이라고 부르던 마을도 신경 써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기 좋은 곳이었지. 사람들은 아픔을 넘어 계속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병원 현관에서 뭔가 고백하려는 듯한 캘러웨이의 이 대사가 처음엔 그저 한낱 보수적이고 완고한 노인의 단순한 회상이라고 생각했다가, 책을 덮고 나서야 마을 전체를 대표하는 그가 가진 따뜻함이 표현된 대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픔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상처는 저마다의 마음 밑바닥에 거름으로 가라앉아 타인을 위해 공감과 위로의 손을 내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시더 그로브의 사람들에게서 알게 되었다. 시더 그로브는 불안과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었다. 캘러웨이라는 상징이 태양같이 빛을 내리쬐는 희망의 마을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작품에서 로이 캘러웨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게 된 인물이었다. 트레이시를 구하러 살을 에는 눈폭풍을 헤치며 광산으로 올라가는 장면, 자신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죽은 친구에 대한, 세라에 대한, 트레이시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책감과 책임과 사명을 위해 한 발 한 발 눈을 헤치며 올라가는 그의 마지막은 어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절정이었다. 작품의 중반까지는 그저 트레이시를 방해하려는,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꼰대인 줄 알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야 누구보다도 존경스럽고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고는 그에게 품었던 오해가 부끄러워졌다.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트레이시나 댄보다도 과연 로이 캘러웨이의 역할을 누가 맡을지가 아주 커다랗고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다.

서늘한 미스터리물과 디테일하고 논리적인 묘사, 인간에 대한 따뜻한 감동이 궁금하고 배고픈 독자라면 주저없이 첫 장을 펼쳐야 할 소설이 바로 <내 동생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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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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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사람에게 느끼는 공포와 환멸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를 덮고 나서 공포환멸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랐다. 평소 작가의 명성이 주는 거대함에 발맞추지 못하고 작품을 적게 읽은 터라 이 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남달랐다.

 

지방 K시의 명문 집안 아오사와가 사람들이 3대의 생일파티에서 독이 든 주스와 술을 마시고 몰살당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 가정부와 앞을 못 보는 그 집안의 손녀딸 뿐.

벌써 이 기가 막힌 설정이 독자들에게 한없는 미스터리의 세계에 뛰어들 준비운동을 하게 한다. 범인은 누구이며 동기는 무엇일까. 비밀을 발견하는 숨막히는 놀라움에 대비하도록 근육을 키우게 된다.

보통의 범죄 소설에서처럼 범인의 자백, 명백한 동기, 체포, 죄의 응징, 사건의 해결 등과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이 책을 모호함을 싫어하는 독자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기억의 불완전함이 삶과 만나 세상 속에 그림을 그려가는 풍경을 지켜보기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은 손꼽힐 만한 명작으로 가슴에 남을 것이다. 여러 인물이 교차되며 인터뷰되는 방식, 때때로 등장하는 3인칭 시점의 이야기, 신문기사나 파일에서 발췌한 보고서 양식의 정보들. 이 책의 다양한 서술방식은 범인과 동기에 대한 초점을 모으는 끊임없는 잘 짜인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앞 못보는 소녀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각자의 다양한 심정과 시선으로 작품을 보고 있는사람들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공포를 맛보게 한다. 그 공포는 독자의 가슴에 전염되어 보고 있는사람의 보이는사람에 대한 의심과 환멸을 키운다.

이 책에서 보고 있는사람은 <잊혀진 축제>를 쓴 마키와 그의 오빠들, 유능한 경찰과 가정부의 딸, 그밖에 K시의 사람들과 인터뷰어, 그리고 독자들이다.

하지만 보이는사람, 즉 액자 속 주연은 히사코와 노란 우비의 청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히사코를 보는 다양한 시선과 기억들은 한결같이 공포에 차 있으며, 어린 시절엔 동경이었을지라도 나중에 이르러선 환멸의 느낌으로 변환된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낸 인터뷰어가 앞을 보게 된 히사코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칠 때 그녀에 대한 혐오와 환멸은 일종의 허무함마저 끌어올린다.

 

내가 가졌던 그런 이미지들은 틀렸나. 모두가 황홀하게 이야기하는 그녀가 정말 눈앞에 있는 여자와 동일 인물인가.

눈앞에 있는 이 빈약한 중년 여자와.

나는 흘깃 그녀를 보았다.

환멸, 환멸을 느낀 사람은 나다.(367P)

 

 

 

모호함과 막연함의 분위기가 이 작품 서사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지만 이 작품의 범인과 범행 동기는 사실 작품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소녀가 오랜 세월 꿈꾸고 갈망하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아오사와가 대저택의 분주한 분위기. 아침에 일어나면 귀에 들어오는 잔소리와 불평, 아첨과 추종, 노골적인 현실 이야기, 책략, 음모, 기도 소리, 저속한 음악, 교성’. 소녀는 이 모든 것에 부르르 치를 떨며 오직 혼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조용한 시간 속에 충만한, 세계의 진정한 음악을 듣는 것.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몇 번씩 되풀이해온 말을 마음에 새긴다.

나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똑똑해져야 한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사악해져야 한다. 이 세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강함이 필요하다.(387P)

 

 

이 대목과 더불어 제목 유지니아의 뜻이 밝혀지는 13장의 바닷가 장면을 읽을 때 어느 누가 소용돌이치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소녀가 청년을 끌어들여 아무도 모르는 꿈나라, 세계가 사라지고 영원의 정적으로 가득 찬, 둘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 신념이 수많은 이들에게 죽음의 절망과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근원이었던 것이다.

단지 희생자라 할 수 있는 청년의 불안한 정신 세계와, 그가 구하려 한 질문과 대답만은 독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녹아내리지 않은 잔여물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두려움의 전조들

여러 가지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비밀처럼 잔상을 남기는 이 작품이, 사실 독자들에게 강렬한 공포의 체험을 던져주는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읽는 이의 마음에 두려움의 전조(前兆)를 불러오는 기가 막힌 묘사들이다.

가정부의 딸이 회상하는 황혼녘 그네에서 히사코의 미소, 사건의 날 경찰이 내려놓은 찻잔에 비쳐 보이는 문자 여고(女苦)’, 마키의 큰오빠가 생일잔치에 가기 전 책가방의 열쇠에 생긴 이상한 징조, 하늘이 무너질 듯 쏟아지는 캄캄한 비와 바람, 사람의 숨을 눌어붙게 만드는 습기, 여관의 천장에 드리운 검은 아메바 모양의 얼룩, 어두운 옛 가옥에서 마키가 보았던 하얀 누에고치의 이미지, 히사코의 엄마가 죄를 고백하는 파란 방에서 어린 히사코에게 어떻게 했을지.

이러한 기가 막힌 묘사와 장치들은 과연 온다 리쿠가 스릴러의 여왕임을 확인하게 한다.

무엇보다 가장 최고의 두려움의 전조는, 적어도 내게는 마키라는 인물이 가진 묘한 성향이었다. <잊혀진 축제>를 쓴 마키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이 돼보고 싶다는 욕망, 모방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남에게 독을 먹이는 기분이 어떤 건지 느껴보고 싶었다며 스튜를 먹은 가족들에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마키가 일생 되어보고 싶었던 존재는 바로 히사코. 어린 히사코의 곁에서 나란히 파란 방을 들여다 보는 장면, 성대모사에 재능을 가진 마키가 그 누구의 인격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은 이 책에서 다양한 해석을 끄집어내려는 독자들의 심장에 두려움의 바늘을 꽂는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끝에서, 인간의 악의와 비뚤어진 신념이 비극으로 파생되는 장면들을 목격한 독자들은 거꾸로 선의와 올바른 믿음이 얼마나 건강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주는 엄숙한 사명과 소중한 책임들이 어떤 형태를 띠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 한 권의 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족같은 감상을 덧붙이자면, 이 작품이 주는 강렬한 색채 대비는 작품의 문학성을 한도 초과의 상태까지 끌어올린 주역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파란 방과 하얀 백일홍, 파란 바다와 하얀 허무의 세계, 노란 우비와 검은 야구 모자, 이런 색채의 묘사가 주는 마법은 온다 리쿠가 부리는 언어의 즐거움을 유효기간 없이 소비할 수 있다는 소소한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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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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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량한 농장 헛간에 기대 서 있는 야스를 생각한다. 세 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상실, 공허, 죽음. 하지만 독자들은 이 책을 덮은 직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야스가 원했던 것은 따스함과 사랑, 욕망이었다고.

 네덜란드 시골의 젓소 농가에서 삶의 공허함을 일찍 알아버린 열두 살 소녀는 사랑하는 맛히스 오빠가 죽은 이후 코트를 벗지 않는다. 모두가 놀리고 비웃지만 야스는 꿋꿋하게 코트를 여민다. 부모님도, 오버 오빠와 여동생 하나도, 친구 벨러도 그 누구도 야스를 어쩌지 못한다.

 야스는 코트 주머니에 두꺼비 두 마리, 저금통 조각, 치즈 주걱, 토끼수염과 캔뚜껑 등을 넣고 다닌다. 온몸이 공허함으로 조각나지 않도록, 모래보다 더 가벼운 자신의 몸이 무거워지도록 코트 주머니 속엔 야스가 기억하고 싶은 것, 붙잡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이 가득 찬다.

 

 

-존중이란 각설탕 네 덩이와 연유 한 잔의 합계인 것이다. 나는 내 모든 기억이 들어 있는 호주머니에 재빨리 치즈 주걱을 쑤셔 넣는다.-

 

 

 빼앗길까봐 두려운, 불안의 코트에 감싸인 채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텅 빈 가슴으로 남은 하루들을 견뎌 가는 이 소녀의 삶을 독자들은 위태롭게, 때로는 신기하게 바라보게 된다. 무엇이 이 책에서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걸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도 저마다 가슴 속에 공허함을 품었던 한 조각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야스처럼 어린 시절일 때도 있고, 이십 대의 열정과 충만함 속, 또는 그보다 더 늦게일 수도 있다. 공허는 느닷없는 총격전처럼 사람들 가슴 속에 구멍을 뚫고 자신이 쌓아온 따뜻함의 무게로 얼마나 빨리 그 구멍을 메우는지 지켜본다. 어떤 이는 평생 그 구멍을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고, 어떤 이는 차근차근 상처를 메우고 기워서 불완전한 회복으로 절뚝이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복권에서 당첨되어 얻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베아트릭스 여왕비스킷 깡통처럼 텅 비어 있다. 아무도 우리를 채울 수 없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본 이들에겐 야스의 공허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공허는 삶에 새겨진 흉터처럼 끝까지 그와 함께 간다. 독자들은 야스가 공허를 채우기 위해, 또는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삶의 궤적을 뒤따르며 각자의 인생에서 결코 벗을 수 없는 코트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두 번째 이유는 야스의 상상력이다. 이 책을 읽어가며 즐길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야스는 어느 날 오빠를 잃고, 부모님의 관심을 잃고, 불안의 코트로 무장한 채 상상력의 레이더를 길게 뻗어 모든 사물을 관찰한다. 지하실에 유대인이 살고 있으리라는 상상, 엄마가 저장고 탱크나 방안의 밧줄을 통해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상상, 두꺼비들이 짝짓기를 할 때 엄마와 아빠의 사랑도 다시 피어날 거라는 상상. 이 작품 곳곳에 묘사되고 나열된 야스의 상상력은 역설적이게도, 어둠과 심연에 갇힌 소녀에게서 발견하는 경쾌하고 유쾌한 즐거움이다.

 

 

-(아빠의) 혀는 진홍색이고 밑면에 푸른 줄무늬가 있다. 마치 번식기의 황야 개구리 같다. 나는 내 안에서 곰팡이가 자라날까봐 여전히 걱정이 된다. 아빠는 향신료를 가미한 롤빵을 커다란 칼로 썰어서 곰팡이 핀 부분을 잘라내는데, 나는 그 빵 조각처럼 언젠가 내 피부도 푸른색과 흰색으로 변할까봐, 그래서 내가 닭 모이로밖에 쓸 수 없는 존재가 될까봐 걱정스럽다.-

 

 

 세 번째로 죽음과 삶의 경계, 마을과 건너 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야스를 바라보며 독자들은 일종의 서스펜스를 느낀다는 것이다. 불안과 조마조마한 긴박감, 그것은 야스가 배꼽에 꽂은 압정이나 오버 오빠의 성적인 장난들을 지켜볼 때도 증폭된다. 맛히스와 소들을 잃고 서서히 변해가는 가족들의 모습, 그 균열을 안타까워하며 야스는 언제나 지금 이 현재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지금 여기의 삶에서 맛히스 오빠가 있는 죽음의 공간으로. 텅 빈 축사와 배고픔이 있는 마을에서 충만함으로 반짝이는 도시- 건너 편의 공간으로.

 언제나 경계 너머의 것을 갈망하지만 그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는 야스의 생각과 행동을 침묵 속에 바라보는 것은 스릴감 넘치는 일이다.



나는 언젠가 나 자신에게로 갈 거야.

 

 

 이 작품의 곳곳에는 죽음이 비누조각처럼 흩어져 있다. 맛히스 오빠의 죽음과 구제역으로 인한 소들의 죽음. 엄마의 말라가는 육신 속에서 읽히는 죽음. 사랑과 희망의 죽음. 오버 오빠가 잡은 나비들의 죽음. 햄스터의 죽음과 수탉의 죽음.

 하지만 여기에서 새로 태어나고픈 강렬한 삶의 욕망을 읽어내지 못하면 안된다. 죽음과 상실이란 삶과 욕망이 맞붙어 있는 이면이기에. 야스가 냉동고에 누워 문을 지탱한 막대기를 거침없이 차버린 행위도 바로 새로운 삶과 욕망을 위한 사랑하는 맛히스 오빠에게, 자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그렇게 엄마, 아빠의 새로 피어날 욕망과 사랑의 제물이 되어 스스로가 가장 원하는 뜨거운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용기가 아니었을까.

 

 

-모든 상실에는 잃고 싶지 않았지만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던 온갖 시도들이 들어 있다. 우리는 상실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 그대로의 우리 둥지에서 떨어진 채 누군가가 다시 주워 올려주기만을 기다리는, 털 없는 찌르레기 새끼처럼 연약한 존재.-

 

 

 야스의 강렬한 삶의 욕망을 읽을 수 있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상실과 공허의 상흔을 남기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무언가 붙잡으려 했던 반짝이는 과거의 기억들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처에 붙인 반창고들을 떼어내며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지금 소중하지만 차갑게 대하고 있는 무언가는 없는지, 놓치고 있는 욕망의 조각은 없는지 돌아본다.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상실과 결핍의 유년이 남긴 긴 그림자이자 자화상이다. 이 그림은 마른 땅에 박힌 덫의 자국처럼 우리 삶의 모든 밭에 뿌려진 채 잊힌 사랑과 욕망의 조각들을 돌아보게 하기에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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