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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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이고 명백한 미래소설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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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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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고 발랄한 10편의 SF소설들과 만난 것은 단비같은 즐거움이었다.

공학박사인 저자의 명쾌하고 쉬운 문장과 전문가적 지식들이, 기발한 상상력과 버무려져 뚜렷한 개성이 이야기마다 엿보인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은 가장 처음에 실린 이야기다. 외계인의 입장에서 지구인의 추잡하고 이상한 행동들을 진지하게 시치미 떼고 관찰하는 서술이 웃음을 자아낸다.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구인 묘사에 유머코드가 없는 사람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종류의 생명체를 파괴하거나 분해하기 위한 장비보다도 같은 사람들을 파괴하고 분해하기 위한 장비를 갖추는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외로움을 많이 타고 무척 연약한 생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더 기괴한 습성이다. 사람이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로는 자외선이 특별히 강한 이 행성에 내려 쪼이는 방사선이 이 생물의 지능을 담당하는 장기인 대뇌를 계속해서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가설이 유력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아직 우리의 현대 과학기술이 밝혀내지 못한 우주의 신비로 남아 있다.

 

 

이렇게 능청스럽고 의뭉스러운 문장들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기능을 떠올리게 한다. 비타민같은 폭소를 터뜨려 스트레스를 날리고 활력을 주는 기능. 우리는 가끔 그런 효과 때문에 느긋한 자세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다.

사람이 자발적으로 붉은 액체를 빼내는 행위-헌혈을 우주 최대의 신비로운 일로 여기는 이 서술자는 급기야 인간들이 좋아하는 에 뭔가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 이거야말로 삶을 한 발 물러나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상한 녹정 이야기는 가장 판타지적이며 훙미진진한 작품이다. 신라 시대 최치원의 가르침 때문에 사슴이 도를 깨우쳐 인간의 탈을 쓰고 불멸의 삶을 산다는 설정이 얼마나 기발한지. 게다가 작품의 마지막, 올림픽 개막식 중계에서 그 사슴이 벌인 일은 모든 지구상의 동물들을 각성시키고 깨달음을 준 것 아닌가. 만화같이 유쾌한 판타지다.

 

슈퍼 사이버 펑크 120은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는 단편이었다. 정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를 2시간 내로 제출해야 한다는 전화를 우연히 받은 인터넷 관련 업체 직원. 그에게 주어진 2시간이 마치 이틀 간의 재미있는 스릴러를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프로그램 다운과 설치를 받는 도중에 알 수 없는 오류 메시지가 자꾸 떠서 짜증났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김 박사의 심리에 절절하게 공감할 것이다. 요런 단순한 생활 에피소드로 긴장과 궁금증과 웃음이 가득한 작품을 써내려 간 저자가 컴퓨터에 능통한 공학박사라는 사실에 친밀감이 든다.

 

판단역시 대화로만 이루어진 짧은 소설이지만 초임 신입 생활을 겪은 회사원들이라면 꼰대의 전형을 보여주는 설교에 익숙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블랙코미디같기도 한 길고 장황한 설교 끝에 김 대리가 입사 셋째 날만에 사직서를 던지는 결말도 코믹하다.

효율과는 거리가 먼 업무 지시자의 꼴사나운 행태를 감내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은 차세대 대형 로봇 플랫폼 구축 사업에서도 읽을 수 있다.

 

멋쟁이 곽 상사는 전형적인 관찰자 시점 서술이다. 곽 상사의 미스터리한 과거가 어렴풋이 밝혀지면서 이상하고 답답한 노인이었던 곽 상사에게 보내지던 화자와 독자들의 곱지 않던 시선이 훈훈하게 바뀌는 반전이 재미의 포인트다. 특히 곽 상사의 비협조로 아무것도 하지 않던화자가 그 덕에 조사 기관에 끌려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니 다행이다.

기억 밖으로 도주하기는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으러 분투하며 도주하는, 그런 영화라면 으레 가져와야 할 충격적 결말을 이 작품도 제시하고 있다. 단편에서 탁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영리하게 활용한 이야기다.‘

 

지상 최후의 사람일까요는 독서토론을 하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지상 최후의 사람이 더 이상 지구상에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유전체 자료를 전부 삭제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을 로봇이 말리는 설정. 로봇과 기계 문명으로 거대해진 미래에 대해 막연히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한번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우리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숨은 씨앗과 조우하게 되는 책이다.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의, 상상력에 의한, 많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위한 책이다. 저자의 또 다른 상상력들이 마음껏 펼쳐진 차후 작품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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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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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끝까지 독자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미스터리 대가로서의 저력, 그리고 주인공 소타와 리노가 각각의 인생 문제에 부딪쳤을 때 서로를 만나고, 함께 사건을 풀어가며 고민까지 해결해 가는 해피 엔딩의 종결.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노란 나팔꽃이라는 에도 시대부터의 역사적 소재가 있다.

과학 전문이라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역사물에 한쪽 발을 담그고, 특유의 미스터리 추적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들을 끝까지 달리게 하는 이 작품은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독자들은 소타와 리노의 입장에서, 또 하야세 형사의 입장에서 아키야마 슈지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슈지의 정원에서 노롼 꽃을 훔쳐간 이는 누구인지, 나오토의 자살의 비밀은 무엇인지 추리를 하게 된다.

추리물의 미덕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주변의 인물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게다가 그 결과가 독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는 데 있다면, 이 작품은 정통 추리물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결말의 놀라움과 전개의 자연스러움이 훌륭했다.

이 작품에서 미스터리한 인물들로는 소타의 형 가모 요스케, 소타의 첫사랑 상대인 이바 다카미, 슈지의 전 직장동료 히노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신비로운 노란 꽃을 중심으로 얽혀 있다.

가모 요스케는 경찰청의 높은 신분이면서 왜 노란 꽃의 정보를 따라 비밀리에 움직일까. 의사 집안인 이바 다카미는 왜 중2 시절 소타와의 연락을 끊었으며, 밴드 멤버로 우연히 합류했다가 다시 자취를 감추었을까. 무슨 사연으로 이름을 숨기고 밴드 일원에게 접근한 걸까. 히노는 슈지가 연구하는 꽃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수수께끼의 분위기를 흘린다. 식물 연구원인 그는 정말 슈지의 죽음과 무관한 걸까.

촉망받는 뮤지션 나오토의 자살은 노란 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와 밴드들은 어떤 의미로 맺어져 있었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나오토와 마사야에겐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왕년의 유명 가수이자 나오토 밴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구도 씨의 별장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소설 초반의 충격적인 살인 사건 용의자의 고향이 바로 구도의 별장과 같은 지역, 가쓰우라 시골 마을인 것은 또 무슨 인연일까. 모든 것이 미궁에 빠진 채 독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정신착란과 환각 증세를 가져와서 소위 사람을 미치게만드는 노란 꽃의 씨앗이 있다는 설정. 그 설정이 에도 시대부터의 긴 역사를 걸쳐 소타의 할아버지, 다카미의 할아버지에까지 이어진다. 또한 그 후손들인 젊은이들은 진지한 사명감에, 혹은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 찾기에 하루를 보내며 쫓고 쫓기는 스토리를 만들어 나간다.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단편적인 사건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지만 결국엔 하나의 중심으로 귀결되는 이 작품은 잘 설계되어 건축되다가 마지막에야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견고한 성()이다. 그 모든 떡밥들을 하나의 큰 퍼즐로 완성해가는 솜씨는 오로지 노장의 실력이다.

게다가 올림픽 수영 선수로서 지금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리노, 그리고 원자력 전공자로서 미래의 쓸모없는 학문을 선택했다는 자조감에 빠져 길을 잃은 소타, 두 남녀는 마지막에 다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걷기로 다짐을 한다. 사건의 해결 뿐 아니라, 두 주인공 청춘남녀의 진로 찾기마저 행복한 결말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형사 하야세가 아들의 은인에게 보은하기 위한 목적을 결국 달성한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어쩌면 인생에서 잠시 방황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믿고 신념대로 인생을 살아가라는 교훈을 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위의 대사는 이바 다카미와 소타가 한 번씩 내뱉는 것으로, 인생의 좌표를 찾았을 때 어떤 각오로 삶을 살아갈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빚 갚기의 볼모로 저당 잡힌다는 것은 요즘 젊은 세대 중에서는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위의 대사와 연관지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과연 가업을 잇는다라는 전통이 이토록 뿌리 깊은가라는 깨달음. 또 하나는 원자력을 포기하려 하던 소타가 2030년의 원자력 폐로 문제를 걱정하며 방사능 폐지를 위한 신기술을 계속 공부하려는 결심에서- 다음엔 작가가 본격 환경 소설을 써준다면 좋겠다는 기대.

 

 

몽환화. 스스로를 망치는 자멸의 꽃. 환상의 꽃.

단순한 소재인 꽃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추리의 향연을 감상하며, 미래 세대에 대한 걱정과 희망의 목소리까지 제시한 작가의 깊은 생각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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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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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에 대한 걱정과 희망, 환경에 대한 깊은 생각까지 담긴 추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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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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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리보칭이 말한 대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오마주라는 이 책의 정체성은 표지에서부터 드러난다. 유럽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호텔 전경이 표지 전체를 가득 채우고, 몇 개 객실 창문에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은 뭔가 수상쩍다. 작품 속에 표현한 대로 캉티호 호수의 절경과 맛닿은, 북유럽 건축가가 설계하고 가구까지 세팅한 고급 휴양지인 이 호텔은, 그야말로 움직이지 않는 제3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영감이 떠오른 건 몇 년 전 르웨탄에서 휴가를 보낼 때였다.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절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경치를 위해 뭐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p.386)에서-

 

 

모든 사건이 이 호텔에서 펼쳐지고, 모든 비밀이 여기서 밝혀진다. 모든 놀람과 반전과 충격은 이 호텔의 또 다른 배경이다.

초반,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선망의 대상인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호텔 산책로에서 피살된 그를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부인이자 총지배인인 란니, 란니를 사랑하는 황아투, 그리고 각종 미스테리한 주변의 인물들이 의혹의 중심에 대두한다. 그리고 살인범으로 유력한 용의자였던 황아투마저 살해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헤어나오기 힘든 미궁 속으로 빠진다.

과연 이 둘을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비밀의 열쇠는 바로 타이완 휴양지의 한 고급 호텔인 이곳에 연관된 사람들이 쥐고 있다.

작가가 법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미국 CIA와 타이완 최고위 검사, 형사가 연루된 이 스케일 큰 살인사건은 정교하고 치밀한 계획하에 잘 조직된 예술작품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배경(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에 이어 등장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이다.

사건이나 대사, 줄거리의 흐름 등은 작고 작은 조연일 뿐. 여기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이야말로 이 소설을 살아있게 만드는 핵심이다. 먼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푸얼타이 교수. 조류학자이면서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최고의 탐정인 그는 세밀한 관찰력과 두뇌로 퍼즐의 뼈대를 맞추어 간다. 게다가 마지막에 다이아몬드를 얻게 되는 통쾌함으로 독자들에게 최고 절정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전직 경찰 뤄밍싱의 캐릭터는 비운의 탐정, 딱 그만큼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애잔한 연민의 감정이 뒤따른다. 매춘부 샤오쉐리를 위해 집을 구해주고, 그녀를 지키려고 할 때부터 그는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부인과 헤어지고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뚱뚱해진 그가, 녹슬지 않은 추리력으로 사건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은 비장미까지 느껴졌다. 이 작품의 가장 비호감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살인사건의 총책임자인 차이궈안의 정체를 밝혀내는 부분에선 숨막히는 긴장감이 독자들을 압도한다. 마치 홈즈나 포와로가 주변 인물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하나하나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장면같이.

변호사 거레이는 뤄밍싱의 첫사랑이자 부인이었다는 점에서, 혹시 그녀가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오해를 풀고 뤄밍싱과 다시 맺어지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열네 살이나 어린 동업자 남자 친구가 있고, 작가가 법학도인 만큼 한번 이혼한 부부가 재결합하기는 힘들다는 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소설 속에 풀어낸다.

그녀와 란니가 운명을 바꾸는놀이 아닌 놀이를 했다는 이야기는 타이완 사회가 역시 일본과 중국 등 동양의 전통문화가 스며들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인텔 선생 왕쥔잉. 이 인물이야말로 뒷통수를 세게 한 대 친, 대반전의 인식 변화를 가져온 캐릭터였다. 솔직히 소설 초반의 찌질하고 비겁한 왕검사가, 사실은 혁명과 변화의 꿈을 안고 대담한 도적질을 한 괴도 인텔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까. 푸얼타이에 이어 가장 독특한 매력을 과시하는 인물이 바로 인텔 선생일 것이다.

 

 

자넨 똑똑하고 유능해.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세상에 있지도 않은 성니콜라스 십자가를 찾는 것과 같아. 정말로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건 뜨거운 피와 땀이라네.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것 말이야.

 

 

구 목사와 왕쥔잉이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잠깐 멈칫했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무게의 여운을 느끼면서.

나름의 시선으로 사건을 풀어가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아니더라도, 주목할 만한 조연들은 더 있다. 먼저 화웨이즈의 신부인 샤위빙. 마지막에 밝혀지는 그녀의 정체 또한 충격이었다. 원주민 가스폭발사고 당시의 희생자, 아버지를 잃고 입양되어 킬러로 자라난 그녀의 배경을 읽고 나선 누구나 놀라움과 허탈감, 애틋함이 소용돌이쳤으리라.

또한 성실하고 반듯하고 신뢰를 주는 경관 뤄위정. 그는 소설 내내 일관성을 유지한 조연으로, 선량하고 정직한 타이완 시민이자 근면한 직업인,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위대한 소시민을 대표하는 것 같아 존재만으로도 소설 속에 빠질 수 없는 균형감을 주었다.

 

여러 사건과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이 모든 추리쇼를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책을 덮으면 당장 캉티호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또 아는가. 어느 독자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을 오마주한 걸작 하나가 떠오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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