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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평점 :
작가 리보칭이 말한 대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오마주라는 이 책의 정체성은 표지에서부터 드러난다. 유럽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호텔 전경이 표지 전체를 가득 채우고, 몇 개 객실 창문에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은 뭔가 수상쩍다. 작품 속에 표현한 대로 캉티호 호수의 절경과 맛닿은, 북유럽 건축가가 설계하고 가구까지 세팅한 고급 휴양지인 이 호텔은, 그야말로 움직이지 않는 제3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 이 소설의 영감이 떠오른 건 몇 년 전 르웨탄에서 휴가를 보낼 때였다.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절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경치를 위해 뭐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p.386)에서-
모든 사건이 이 호텔에서 펼쳐지고, 모든 비밀이 여기서 밝혀진다. 모든 놀람과 반전과 충격은 이 호텔의 또 다른 배경이다.
초반,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선망의 대상인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호텔 산책로에서 피살된 그를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부인이자 총지배인인 란니, 란니를 사랑하는 황아투, 그리고 각종 미스테리한 주변의 인물들이 의혹의 중심에 대두한다. 그리고 살인범으로 유력한 용의자였던 황아투마저 살해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헤어나오기 힘든 미궁 속으로 빠진다.
과연 이 둘을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비밀의 열쇠는 바로 타이완 휴양지의 한 고급 호텔인 이곳에 연관된 사람들이 쥐고 있다.
작가가 법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미국 CIA와 타이완 최고위 검사, 형사가 연루된 이 스케일 큰 살인사건은 정교하고 치밀한 계획하에 잘 조직된 예술작품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배경(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에 이어 등장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이다.
사건이나 대사, 줄거리의 흐름 등은 작고 작은 조연일 뿐. 여기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이야말로 이 소설을 살아있게 만드는 핵심이다. 먼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푸얼타이 교수. 조류학자이면서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최고의 탐정인 그는 세밀한 관찰력과 두뇌로 퍼즐의 뼈대를 맞추어 간다. 게다가 마지막에 다이아몬드를 얻게 되는 통쾌함으로 독자들에게 최고 절정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전직 경찰 뤄밍싱의 캐릭터는 비운의 탐정, 딱 그만큼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애잔한 연민의 감정이 뒤따른다. 매춘부 샤오쉐리를 위해 집을 구해주고, 그녀를 지키려고 할 때부터 그는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부인과 헤어지고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뚱뚱해진 그가, 녹슬지 않은 추리력으로 사건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은 비장미까지 느껴졌다. 이 작품의 가장 비호감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살인사건의 총책임자인 차이궈안의 정체를 밝혀내는 부분에선 숨막히는 긴장감이 독자들을 압도한다. 마치 홈즈나 포와로가 주변 인물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하나하나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장면같이.
변호사 거레이는 뤄밍싱의 첫사랑이자 부인이었다는 점에서, 혹시 그녀가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오해를 풀고 뤄밍싱과 다시 맺어지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열네 살이나 어린 동업자 남자 친구가 있고, 작가가 법학도인 만큼 한번 이혼한 부부가 재결합하기는 힘들다는 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소설 속에 풀어낸다.
그녀와 란니가 ‘운명을 바꾸는’ 놀이 아닌 놀이를 했다는 이야기는 타이완 사회가 역시 일본과 중국 등 동양의 전통문화가 스며들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인텔 선생 왕쥔잉. 이 인물이야말로 뒷통수를 세게 한 대 친, 대반전의 인식 변화를 가져온 캐릭터였다. 솔직히 소설 초반의 찌질하고 비겁한 왕검사가, 사실은 혁명과 변화의 꿈을 안고 대담한 도적질을 한 괴도 인텔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까. 푸얼타이에 이어 가장 독특한 매력을 과시하는 인물이 바로 인텔 선생일 것이다.
… 자넨 똑똑하고 유능해.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세상에 있지도 않은 성니콜라스 십자가를 찾는 것과 같아. 정말로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건 뜨거운 피와 땀이라네.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것 말이야.
구 목사와 왕쥔잉이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잠깐 멈칫했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무게의 여운을 느끼면서.
나름의 시선으로 사건을 풀어가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아니더라도, 주목할 만한 조연들은 더 있다. 먼저 화웨이즈의 신부인 샤위빙. 마지막에 밝혀지는 그녀의 정체 또한 충격이었다. 원주민 가스폭발사고 당시의 희생자, 아버지를 잃고 입양되어 킬러로 자라난 그녀의 배경을 읽고 나선 누구나 놀라움과 허탈감, 애틋함이 소용돌이쳤으리라.
또한 성실하고 반듯하고 신뢰를 주는 경관 뤄위정. 그는 소설 내내 일관성을 유지한 조연으로, 선량하고 정직한 타이완 시민이자 근면한 직업인,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위대한 소시민을 대표하는 것 같아 존재만으로도 소설 속에 빠질 수 없는 균형감을 주었다.
여러 사건과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이 모든 추리쇼를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책을 덮으면 당장 캉티호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또 아는가. 어느 독자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을 오마주한 걸작 하나가 떠오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