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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하우스
피터 메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평점 :
이것은 가슴 졸이게 하는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다.
초반엔 스릴러와 추리물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한 형사의 어두운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봉인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드라마다.
소설 초반부의 살인 사건과 대단히 사실적인 검시 장면은, 앞으로 잔혹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이야기의 수위를 예고하며 잔뜩 심장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표지에 있던 ‘스코틀랜드 호러 스릴러의 정점’라는 문구가 시작부터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입 부분 핀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회색빛 머리카락의 괴물같은 거한이 고개를 옆으로 하고 핀을 내려다보는 장면, 핀은 소스라치듯 놀라 가위에 눌리듯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고, 이건 누가 뭐라 해도 미스터리 호러물다운 시작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책은, 겉으로는 호러 스릴러의 무늬를 가지고 있지만, 속은 깊고 진한 인간의 삶과 운명을 다룬 정통 ‘드라마’라는 것이다. 멜로와 휴먼과 서스펜스를 종합선물세트처럼 지니고 있는. 책을 읽는 도중 때때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나 <체실 비치에서>와 같은 비극적 운명과 회한, 놀라움과 감동의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그만큼 재미있고, ‘극적 드라마’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었다.
그것도 스코틀랜드 바닷가 마을의 황량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분에 넘치도록 만끽할 수 있는 드라마. 보너스같은 배경이 주는 풍성한 자연의 묘사 속에 고전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운명의 아이러니, 다양한 감정들은 생생하게 넘실거린다.
사랑과 우정, 질투와 분노, 용기와 후회, 복수와 회한이, 그리고 이 슬픈 운명의 서사 속에 몰입한 독자들은 황홀한 북부 바다의 내음을 느끼며 비밀의 출구를 향해 발을 내딛게 된다. 과연 에인절 맥리치의 살인범은 누구인가. 주인공의 과거와는 어떤 인연으로 얽혀 있는가. 출구의 문턱에서야 작품의 처음과 끝이 긴밀하게 이어지고, 안 스커 섬에서 봉인된 비밀이 놀라운 반전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이다. 독자들의 머릿속을 입체적 상상력으로 가득히 채워넣는 디테일한 묘사들은(비록 번역본일지라도) 눈으로 활자를 ‘씹어가며 맛을 보는’ 즐거움마저 던져준다.
어린 시절 마샬리를 농장으로 바래다주던 들판, 트랙터 타이어를 훔치던 밤의 풍경, 바르바스 황야와 해리스 산맥, 크롬웰 거리를 휘젓는 스산한 비바람, 안 스커 섬에서 가넷새를 잡고, 도살하고, 훈제하고 소금에 절이는 디테일한 작업들, 18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핀이 그동안 한번도 찾지 않았던 부모님의 묘지에서 오열하는 장면 등 - 생생하게 살아있는 묘사의 힘 덕분에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깝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안개가 옅어지면서 구름 틈새로 햇살 파편이 쏟아졌고, 번들거리는 섬은 완전히 대조되는 명암을 뿜어냈다. 꼭대기에서 눈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흩날렸는데, 조금 후 그 눈송이가 새 떼임을 깨달았다. 날개 끝이 검푸르고 노란 머리가 멋들어진 흰 새로, 날개 길이가 거의 2미터에 달했다. 가넷새였다. 수천 마리나 되는 가넷새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하늘색을 바꾸면서 요동치는 대기의 흐름을 탔다.…
또 하나의 매력은 비극적 운명의 서사가 주는 감동이다.
캘럼이 절름발이가 되어야 했던 밤의 모험들, 이후에 에인절 맥리치가 외로운 캘럼에게 단 하나의 친구가 되어준 아이러니, 마샬리와 핀, 아슈타르의 끊어질 듯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사랑의 줄다리기, 도널드에 대한 질투, 구가 사냥을 그토록 피하고 싶어 긱스를 찾아가는 핀의 불안과 혼돈, 피온라크를 구하기 위해 폭풍우를 뚫고 퍼플아일호에 몸을 실어 기어이 섬에 도착하는 미친 듯한 집념. 그리고 안 스커 섬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꽁꽁 숨겨둔 불행한 기억과의 대면. 아슈타르와의 마지막 조우. 이렇게 넘쳐나는 운명과 인연의 실들이 독자들의 가슴을 꽁꽁 묶어 우리의 주인공 핀 매클라우드에게 따스한 애정과 응원, 매서운 질책과 비난을 쏟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한 편의 대작을 읽고 나면 늘 그러하듯, 주인공(그가 도덕적으로 어떤 잘못과 실수를 저질렀든)에게 연민을 느끼며 이제 그가 깊고 평온한 밤을 보내길 기원하게 된다.
“너만 괜찮다면, 글래스고에서 벌어지는 다음번 스코틀랜드팀 경기 입장권을 구할까 해서 말이야. 아버지랑 아들이랑 보통 그런 걸 같이 하잖아. 축구장 가는 거 말이야.”
해피 엔딩을 암시하는 위 마지막 대사를 보면 그 기원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 예측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아슈타르의 장례식이나 마샬리와 풀어야 할 문제들, 도나 머리의 아이, 또 에든버러의 모나를 동시에 걱정하게 되는 ‘사소함에 목매는’ 독자들에겐 말이다.
이런 장편을 읽고 나면 으레 '어떤 인물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 따위의 수다를 떨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 욕망은 (우리 자신의 결함은 망각한 채) 작품 속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 선택에 대해 날카로운 잣대로 평을 내리는 독자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다.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긱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크로보스트 남자들의 정신적 지주, 구가 사냥꾼의 리더이자 안 스커 섬에서의 심판자, 흔들리는 핀을 잡아주고 그를 걱정해주고 누구보다 전통과 정의를 실천하는 인물. 물론 그가 신봉하는 전통이 오늘날 동물권에 비추어 본다면 극도의 야만스러운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작품 속에서만은 누구라도 신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멘토. 긱스는 일찍 부모님을 잃은 핀에게 단 한 명의 믿을 만한 어른이자 멘토였다.
"왜요? 아저씨는 이걸 왜 하는 거죠?"
"전통이니까." 도니가 대신 나섰다. "누가 전통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겠니."
하지만 긱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전통이 아니다. 물론 전통의 일부일 수는 있겠지. 내가 이걸 하는 진정한 이유를 말해 주마. 얘야. 그건 온 세계를 통틀어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만 한다는 뜻이지."
위의 대사에 드러나는 긱스의 카리스마에 누가 반하지 않으랴. 특히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선 남자든 여자든 그 누구든 이런 카리스마 있는 정신적 멘토가 필요한 법이다.
이 작품을 읽고 누구나 느끼게 되는 두 가지 보편적 진실.
첫째, 낯선 루이스 섬의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북쪽의 안 스커 섬을 떠올리고 싶다는 것. 그것이 게일어로 가득찬 소음 속, 네스 항의 펍에서 맥주 한 잔을 기울이는 행운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만.
둘째, 누구나 가슴 속에 깊이 자리한 블랙하우스 하나쯤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이든 최근에 지어진 것이든, 봉인된 비밀 하나를 간직한 어두운, 굴뚝 없는 블랙하우스를 내면에 하나씩 품고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책을 덮은 누구에게나 묻고 싶다.
당신 내면의 블랙하우스는 지금 토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