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르지니 데팡트라는 작가를 머리에 깊이 각인시켜준 이 놀랍고 고마운 소설은 근래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

등장인물 세 명의 진솔한 고백들이 편지 형식으로 가득히 쌓여, 프랑스 현대 사회와 문화를 풍성하게 그려준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와 그 이후를 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하니, 동시대의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치를 담고 있는 책이다.

오스카라는 작가가 파리에서 우연히 한시절 최고의 배우였던 레베카를 보고, 살이 올랐으며 옷차림에 피부까지 엉망인 그녀를 비난하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 글을 우연히 읽은 레베카가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고 시작하는 답글을 올리면서 둘 사이의 소통이 시작된다. 레베카는 '당신 아이들이 트럭에 깔렸는데 손도 쓰지 못한 채 무력하게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를, 눈알이 튀어나오는 장면과 고통에 찬 비명이 매일 저녁 당신을 찾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신랄한 저주를 서슴없이 날린다.

다소 충격적인 레베카의 답글을 보며, 오스카는 사실 어린 시절 누나의 친구였던 레베카를 잘 알고 있고 너무나 좋아하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런 글을 올렸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레베카는 차갑게 응수하며 단지 그의 누나, 코린에 대해서만 좋은 추억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오스카는 출판사 편집자인 조에 카타나가 미투 사건으로 고발하여 세간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레베카와 조에가 서로 연결되는 바람에 오스카도 (계속 이어지는 메일을 통해) 자신이 한 행동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 책의 보석같은 부분은, 바로 레베카와 오스카가 서로 사적이고 내밀한 비밀까지 진솔하게 고백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둘은 편지를 통해 티격태격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되며, 어느 새 서로 의지하고, 지지하고, 조언하고, 믿어주는 끈끈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서로의 덕분으로 자신의 생각과과 자신의 인생을 바꾸며 새롭게 태어나는 값진 경험을 한다.

한때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던 레베카. 그녀는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가장 매력적이고 애정이 가는 인물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되는 많은 독자들은 레베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진실하고 치열하게 사랑하고 살아내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녀의 솔직함과 열정적 태도와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는 오스카가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어줄 것이다.

실제로 잘 나가는 남성 작가인 오스카를 미투 사건으로 고발한 조에 카타나가 코로나에 걸리고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먹을 것을 아파트까지 가져다주며 진실된 위로를 한 사람은 레베카였다. 레베카는 이미 마음의 친구가 된 오스카에게 돈을 뜯어내라고 조에를 충동하기까지 한다. 또한 오스카가 내밀한 고백을 이어가며 딸과의 불편한 관계, 레즈비언인 누나에 대한 연민, 자신 역시 한 남자를 사랑했던 회한을 이야기할 때, 진심을 다해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다독이고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사십 대 후반의 작가 오스카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며, 과거 행동의 잘못을 깨닫고 조에에게 사과한다. 이 모든 게 레베카와 주고받은 메일의 힘이었으니, 이토록 날것 냄새 나는, 어떤 가식도 없는 진솔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레베카는 세계 어디서든 예외없이이 적용되는 영화감독의 편견, 나이든 중년 여성의 슬픔을 촬영하고 싶어하는 심술궂은 권력에 시원하게 맞서 대항하며 거절한다.

"내가 이미 보여준 것과 다른 면모를 필름에 담으려는 사람들 말이에요. 적절한 다른 사람을 찾아보거나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세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걸 시키려고 찾아오지 마세요."(164p)

서신의 형식을 통해 레베카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페미니즘 정신은 위대하다. 스크린에 뚱뚱한 여자, 늙은 여자, 똑똑한 여자가 금지되어 있다고 영화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는 그녀는 어떤 교수보다도 날카로운 지혜를 전달한다. 여성의 용도는 욕망 혹은 강압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흑인의 용도는 가사 일을 하거나 춤을 추는 것이며 뚱뚱한 사람의 용도는사람을 웃기고 혁명가의 용도는 처단당하는 것, 가난한 사람의 용도는 배곯아 동정받다가 친절한 부자에게 구원받는 것이라며(235p) 우리 사회 곳곳에 심어진 힘의 관계와 부조리를 폭로하는 그녀. 레베카의 사상과 가치관을 남녀 불문하고 모두가 배웠으면 한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란 바로 이런 비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이 책을 널리 지인 모두에게 홍보하고 싶은 이유다.

오스카와 레베카는 NA모임이라는 약 중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치유하는 지혜로운 현대인이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줌 모임으로 열리기도 하는 그 모임에, 오스카와 레베카는 둘 다 잘 알려진 작가이자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실하게 참여하며 연대감을 키우고 자신을 극복하는 힘을 키운다.

이 책은 오스카와 레베카의 입을 통해, 외로운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가며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사랑에는 차별이 없으며, 인간에게 권력이란 모래알보다도 헛된 것임을 알려준다. 페미니즘은 어느 것도 구분하지 않고 나누지 않는 보편적 인권임을 가르친다

"나는 페미니즘의 집 모퉁이를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그곳에서는 타인의 말이 뒤집히고 균열이 생기고 악습과 충돌이 일어날 때까지 듣는 법을 배우기를 갈망합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니다.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든 말이죠. 나의 경력을 위해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 그렇게 만난 이웃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줄 생각이에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도 다정히 입 맞출 생각입니다. 그게 바로 나의 페미니즘이 될 테니까요."(396P)

이 책의 마지막, 비행기 안에서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앗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오스카에게 건네는 레베카의 편지는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다. 자신의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탄생하는 충만한 경험. 적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에게 한없이 애정과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기적. 어떠한 가식도 없이 진짜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기록.

이 기적과도 같은 벅찬 감동을 모든 이에게 전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래는 스스로 개척하는 것"

당연한 진리지만,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시간 여행을 두고 소동을 피우는 배경 속에서 이 진리는 딱 맞는 그림처럼 더 크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는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의 속편이다.

주인공은 역시 교토에서 대학 캠퍼스 생활 삼 년째를 맞는 '나'이고, 요괴처럼 생긴 외모에 남의 불행을 반찬으로 밥을 세 공기나 말아먹는 오즈, 아카시군, 히구치, 조가사키 등이 그대로 등장한다.

<신화대계>는 만일 신입생 때 다른 동아리를 택했더라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를 상상한 복합적 이야기지만, <타임머신 블루스>는 같은 인물들이 타임머신이라는 소재 하나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동하며 한바탕 작은 소동을 펼치는 심플한 이야기다.

<신화대계>에서 주인공 '나'와 아카시의 연애 이야기가 궁금했던 독자들이라면, 속편에서는 둘의 감정이 조금 더 발전되어 미래에 어떤 결과까지 이르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다.

타임슬립을 통해 꼬인 문제들을 풀어가며 인물들이 좌충우돌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생각은 성숙해진다.

이 책에서 가장 의미있는 부분은, '나'가 과거로 돌아가, 좋아하는 후배인 아카시의 뒤를 쫓는 과거의 '나'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나'는 과거의 자신이 쉽게 아카시를 단념하는 모습을 보고 거센 노여움에 휩싸이며, 과거의 나에게 달려가 '잔말 말고 계속 뒤쫓으라'고 말해주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또 과거의 '나'가 여유를 부리며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자 그런 '내일은 오지 않는다'며 강력히 조언해주고 싶다는 열망을 갖는다.

누구나 미래에서 과거를 보면 어리숙하고 잘 몰랐던 자신에게 '그렇게 하지 마. 나중에 후회하게 돼!'라고 말해주고 싶을 것이다. 주인공이 깨닫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시도해보지도 않고 두려워 미리 물러서지 않기!

타임슬립이란 구조는 언제 어디서든 주인공을 각성하게 하고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안정적인 구조다. 여러 명의 청춘들이 겪는 시간을 둘러싼 소동, 발랄하고 경쾌한 청춘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은 오랜만에 맞이한 봄처럼 가볍고 산뜻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랄하고 재기넘치는 청춘 캠퍼스 소설이다. 유쾌하고 능청스러운 서술자 '나'의 독백을 따라가다보면, 스물을 갓 넘긴 대학 3학년 청년 '나'의 풋풋한 좌충우돌 일상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대학 신입생인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꼭 대학 생활이 아니더라도, 스무 살 그때 각자의 선택에 대해,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는 후회와 아쉬움이다.

이 책은 대학 3학년인 주인공이 바로 위와 같은 가정을 기반으로, 평행우주 속에 네 번의 선택을 모두 다 살아본다는 판타지를 담고 있다. 여기에 '다다미 넉 장 반'이라는 주인공의 숙소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첫번째는 영화 동아리 '계'에 들어가서 벌어지는 이야기, 두번째는 '제자 구함'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단을 보고 히구치 스승을 만나게 된 이야기, 세번째는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를 선택했던 삶, 그리고 네번째는 비밀 기관 '복묘반점'을 선택한 이야기다.

똑같은 삶의 기로에서 만약 다른 삶을 선택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으로 펼쳐지는 유쾌한 이야기는 만화적 설정 속에 재미있고 기상천외하다. 마치 입체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듯 인물들과 대사, 행동의 코믹한 묘사는 해맑고 가벼운 웃음을 선사한다.(실제로 이 책은 2010년에 TV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네 번의 다른 삶에서 운명처럼 동일한 인물들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한다.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운명의 검은 실로 엮여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 오즈, 기괴한 괴짜며 미워할 수 없는 스승인 히구치, 영화 동아리 선배인 조가사키, 나방을 싫어해서 반복적인 상황에 부딪쳐 주인공과 연을 맺는 아카시군. 치위생사인 하누키... 모든 인물들이 독자적인 개성과 악의없는 해학으로 주인공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토록 장밋빛 캠퍼스의 낭만과 의미있는 대학생활을 갈구하면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자칭 무의미하고 고독한 자취 생활을 이어가는 '나'. 독자들은 주인공이 과연 운명을 떨쳐내고 후회없이 멋진 삶을 살아낼까 기대하면서도, 아카시군과 이어질 러브 스토리를 '성취된 사랑만큼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라며 퉁치고 넘어가는 너스레에 까무러칠 듯 즐겁다.

게다가 독자들에게, 흠잡을 데 없이 지적인 얼굴에 모든 점에 품위가 있는 젊고 잘생긴 최고의 미남으로 '나'를 뇌리에 새기라고 명령하기까지 하는 주인공의 도발적 용감함.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포인트는 바로 이 '나'의 유머와 도발적 용기, 솔직함과 나약함, '그러한가, 어떤가.' 등으로 말하는 독특한 말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즈와 티격태격 브로맨스를 즐기는 만화적 유쾌함은 압권이다.(남의 불행을 반찬 삼아 세 번은 밥을 먹을 오즈... 라고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곳곳에서 오즈를 미워하지 않는 '나'의 이중성을 목격하는 즐거움!)

모두 네 번의 삶에서 '나'는 어두운 민가 거리에서 요괴를 닮은 노파를 만나고, 이토록 요기를 흘리는 노파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을 리 없다며 점을 치는데, 노파는 네 번 모두 똑같은 대사를 흘린다. 그런데 노파의 대사는 어느 새 모든 독자들 가슴에 제법 큰 여운을 던진다.

"호기가 찾아오면 놓치지 마세요... 호기가 찾아왔을 때 막연히 똑같은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과감하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잡아보세요. 그러면 불만이 사라지고 당신은 다른 길을 걸으실 수 있겠죠. 거기에 또 다른 불만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혹시 그 호기를 놓치더라도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훌륭하신 분이니 필시 언젠가 호기를 잡으실 수 있을 테죠. 저는 압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기회와 인연은 다가오게 마련이다.

누구라도, 과감하게 그 기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잡고, 다른 길을 걷듯 열심히 살아보라는 응원. 혹시 그 기회를 놓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언젠가 또 다시 다가올 기회를 기다리라는 노파의 조언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책을 덮으면 교토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모가모 신사나 가와리마치 거리, 카모 강 델타, 헌책방과 교토대, 철학의 거리를 걸으며 생생한 젊음과 이처럼 신박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 교토만의 오래된, 신비한 분위기를 맛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벅찬 감동과 경이로움,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인간과 모든 자연과의 경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철학적 사유.

한 프랑스 인류학자가 캄차카 반도의 화산에서 곰을 만나 사투를 벌이며, 서로의 몸에 표식을 남긴다.

곰에게 얼굴을 물려 머리뼈와 턱조각, 이 두 개를 빼앗기고 다리를 찢긴 그녀는 등산용 도끼를 휘둘러 곰을 쫓아내지만,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

삶의 극한에 이르는 고통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고통을 1부터 10까지 단계로 나눈다면(프랑스 병원에서 그렇게 구분하다고-) 9.9에 이르는 고통에까지 그녀는 여러 번 도달한다.

그것은 그 숲 인근 군사기지에서 최초 응급조치를, 러시아 병원에서 인공 플레이트 삽입 수술을 받은 뒤 프랑스 파리 병원에서 다시 재수술, 이후 세균 감염으로 다시 턱을 열어야 했던 1년 동안 육체적으로 일어났던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 동정의 눈길, 입원과 치료에 대한 압박, 의료진의 강요와 무심함, 심리치료사의 정제되지 않은 질문... 곰과의 싸움 이후 그녀의 내면이 겪어야 하는모든 폭력이 주는 고통이다.

나스탸샤 마르탱. 이 철학적인 에세이 한 권을 통해,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일깨워준 그녀에게 나는 존경과 경의를 느낀다.

누구도 저런 상황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고통의 끝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누구도 저런 모욕과 수치와 동정과 시선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불안과 우울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이 책은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함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가르쳐준다.

오로지 자연과 세상에 대한 겸손,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고 자연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현명함만이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지침까지.

인류학자로서 지적으로 고찰한 숱한 신화와 믿음이 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아르테미스가 사랑한 곰, 페르세포네가 겪은 인간 세계와 지하 세계의 경계. 기술에만 집착하는는 현대인에게, 신화와 철학과 고대 믿음의 세계에 다가가게 하고 진실을 발견하게 하려는 그녀. 자신의 몸을 서구의 의사가 시베리아 곰과 대화하는 영역, 더 정확히 말하면 대화를 시도하는영역이라고 해석하는 그녀.

나스타샤가 왜 알래스카로, 캄차카 반도로 떠났는지, 내면의 열망을 들여다 보며, 우리는 그녀의 열정, 끊임없이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 원시적 자연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그 무엇을 발견하려는 고독한 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삶의 동력을 끊임없이 가동시킬 수 있는 원천 에너지로는 내면의 열정 못지 않게 '엄마'의 존재가 크다. 나스타샤의 엄마는 그녀가 힘들고 지칠 때, 극한의 고통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지키려 하고, 믿고 감싸주며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거야.'하며. 파리의 인턴이 결핵에 감염되었다며 그녀를 다시 절망으로 부를 때, 그녀의 엄마는 단호하게 그녀를 집으로 이끈다. 그리고 딸을 살려낸다. '엄마'의 힘은, 그녀가 친구 다리아를 기술하는 부분에서 몇 번이고 목격할 수 있다.

곰과의 싸움 이후, 그녀에게 닥친 모든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강한' 인간, 삶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 나에게 일어난 일의 아름다움은, 내가 더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다. 나는 땅 위를 다시 딛고 오르는 새들의 다리를 느끼게 될 것인가? 멀리 있는 그것들의 날갯짓을, 호흡의 감촉을?

무엇인가 일어난다

무엇인가 다가온다

무엇인가 나에게 닥쳐든다

나는 두렵지 않다 (p107)

이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우리가 삶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헛되고 헛된 삶의 껍데기를 보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신의 영역이라 믿지 않으며, 남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며, 물질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녹기 직전의 얼음조각같은 가벼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p145)

그렇다.

한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깨달음 중의 하나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의 존재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의식하며, 그것이 내 운명에 닥칠 커다란 변화에 대비하며, 언제나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가족과 같은 이반이 숲에서 수많은 순록을 학살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체험은 그녀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자연을, 지구를 지키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현대인을 대신해 속죄하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삶을.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강함에 대해 생각한다.

한계란 없다는 것. 삶이 주는 한 가지 약속은 오직 '불확실성'이라는 것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한계의 끄트머리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주는 그녀의 삶을, 자신의 내면을 알고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은 모든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덮고 나면 무작정 산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밤하늘에 손이 닿을 듯한 곳, 360도 대자연의 풍경이 마음을 벅차게 하는 곳에 서 있다면 저절로 겸손한 마음과 삶을 리셋하는 용기를 가지게 될 텐데.

미나토 가나에의 <노을 진 산정에서>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이니 고류다케, 쓰리기다케니, 하나도 모를 일본의 산 이름들은 다소 어렵긴 했다. 하지만 친구간, 모녀간, 헤어진 연인간에 저마다 산을 오르는 사연과 산을 매개로 풀어내는 고민과 화해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총 네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첫 번째와 세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에선 남편과 연관된 비밀로 산에 오르는 쉰다섯 아야코의 사연이 등장한다. 고류다케라는 카페를 차리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 아야코의 마음의 짐은 고류다케에 올라 하늘나라의 남편에게 사과하면서 풀어진다. 마미코와 가이드인 야마네가 대학 산악부 연인으로서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둘의 간질간질한 사연이 소개되며 산을 통해 긴 세월의 오해가 풀리는 내용이 설렌다.

"언젠가라는 말만 하고 있으면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아요." - 마음에 깊이 새길 만한 아야코의 말. 남편의 꿈을 반대했던 자신, 그가 꿈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가버리게 되어 얼마나 회한이 컸을까.

두 번째 이야기 <북알프스 오모테긴자>에선 이 책의 제목이 왜 '노을 진 산정'인지 알게 된다. 음악대학 세 친구의 엇갈린 감정, 섬세한 청춘의 고민들이 풀잎처럼 여린 울림을 준다. 산 정상에서 유이와 사키가 각각 노래와 바이올린으로 멋진 공연을 펼치는 대목은 옆에서 관람한 듯 압권이다. 산의 의미를 '재생'이라고 고백한 그들의 또 한 친구, 유의 이야기에서도 산은 주인공이다. 이야기 끝에 유가 보였다는 등산객들의 이야기는 환상적 장치일까.

세번째 이야기 <다테야마, 쓰루기다케>가 주는 울림도 특별했다. 딸을 위해 몰래 달리기 연습을 해서 초등학교 학부모 릴레이 예선 1등, 최종 2등을 달성한 엄마, 소방관인 남편이 일찍 죽고 최선을 다해 딸을 키우며 늘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엄마, 그 딸이 대학 산악부에 들어가려 하자 반대하지만 결국은 딸의 인생을 응원해주는 이토록 멋진 엄마라니.

딸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자신의 신혼 때처럼 '힐튼' 숙박을 손수 준비하는 장면은 최고였다.

네번째 이야기 <부나가타케, 아다타라산>은 두 친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을 담백하게 고백하고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다. 산이 주요 배경이 되어 그들의 인생이 강물처럼 펼쳐진다. 서로 오해했던 과거, 선택과 갈등, 결혼과 가업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음식을 산에서 먹게 된 경험. 모든 것이 잔잔한 드라마이다.

"지난 괴로운 날들은 괴로웠다고 인정해도 돼. 힘들었다고 입밖에 내어 말해도 돼. 그리고 그걸 지나온 자신을 그냥 위로해줘. 이제부터 다음 목적지를 찾으면 되는 거야." -친구의 편지를 통해 용기내어 산에 오르고,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

이 책의 모든 인물들에게 우주가 되고 힘과 위로를 주는 산과 같은 존재가, 모두에게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등산을 시작하고 싶지만 소심해서,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마음 뿐이라서, 시간이 없어서 망설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지금 당장 신발과 물병과 배낭을 챙길 듯하다. 가까운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가서 흙을 밟고 스치는 나무들의 숨결을 느끼지 않고는 못배길 욕망이 솟는 책.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우연히 만난 그런 책은 너무 소중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