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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벅찬 감동과 경이로움,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인간과 모든 자연과의 경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철학적 사유.
한 프랑스 인류학자가 캄차카 반도의 화산에서 곰을 만나 사투를 벌이며, 서로의 몸에 표식을 남긴다.
곰에게 얼굴을 물려 머리뼈와 턱조각, 이 두 개를 빼앗기고 다리를 찢긴 그녀는 등산용 도끼를 휘둘러 곰을 쫓아내지만,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
삶의 극한에 이르는 고통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고통을 1부터 10까지 단계로 나눈다면(프랑스 병원에서 그렇게 구분하다고-) 9.9에 이르는 고통에까지 그녀는 여러 번 도달한다.
그것은 그 숲 인근 군사기지에서 최초 응급조치를, 러시아 병원에서 인공 플레이트 삽입 수술을 받은 뒤 프랑스 파리 병원에서 다시 재수술, 이후 세균 감염으로 다시 턱을 열어야 했던 1년 동안 육체적으로 일어났던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 동정의 눈길, 입원과 치료에 대한 압박, 의료진의 강요와 무심함, 심리치료사의 정제되지 않은 질문... 곰과의 싸움 이후 그녀의 내면이 겪어야 하는모든 폭력이 주는 고통이다.
나스탸샤 마르탱. 이 철학적인 에세이 한 권을 통해,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일깨워준 그녀에게 나는 존경과 경의를 느낀다.
누구도 저런 상황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고통의 끝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누구도 저런 모욕과 수치와 동정과 시선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불안과 우울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이 책은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함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가르쳐준다.
오로지 자연과 세상에 대한 겸손,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고 자연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현명함만이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지침까지.
인류학자로서 지적으로 고찰한 숱한 신화와 믿음이 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아르테미스가 사랑한 곰, 페르세포네가 겪은 인간 세계와 지하 세계의 경계. 기술에만 집착하는는 현대인에게, 신화와 철학과 고대 믿음의 세계에 다가가게 하고 진실을 발견하게 하려는 그녀. 자신의 몸을 서구의 의사가 시베리아 곰과 대화하는 영역, 더 정확히 말하면 대화를 시도하는영역이라고 해석하는 그녀.
나스타샤가 왜 알래스카로, 캄차카 반도로 떠났는지, 내면의 열망을 들여다 보며, 우리는 그녀의 열정, 끊임없이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 원시적 자연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그 무엇을 발견하려는 고독한 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삶의 동력을 끊임없이 가동시킬 수 있는 원천 에너지로는 내면의 열정 못지 않게 '엄마'의 존재가 크다. 나스타샤의 엄마는 그녀가 힘들고 지칠 때, 극한의 고통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지키려 하고, 믿고 감싸주며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거야.'하며. 파리의 인턴이 결핵에 감염되었다며 그녀를 다시 절망으로 부를 때, 그녀의 엄마는 단호하게 그녀를 집으로 이끈다. 그리고 딸을 살려낸다. '엄마'의 힘은, 그녀가 친구 다리아를 기술하는 부분에서 몇 번이고 목격할 수 있다.
곰과의 싸움 이후, 그녀에게 닥친 모든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강한' 인간, 삶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 나에게 일어난 일의 아름다움은, 내가 더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다. 나는 땅 위를 다시 딛고 오르는 새들의 다리를 느끼게 될 것인가? 멀리 있는 그것들의 날갯짓을, 호흡의 감촉을?
무엇인가 일어난다
무엇인가 다가온다
무엇인가 나에게 닥쳐든다
나는 두렵지 않다 (p107)
이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우리가 삶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헛되고 헛된 삶의 껍데기를 보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신의 영역이라 믿지 않으며, 남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며, 물질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녹기 직전의 얼음조각같은 가벼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p145)
그렇다.
한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깨달음 중의 하나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의 존재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의식하며, 그것이 내 운명에 닥칠 커다란 변화에 대비하며, 언제나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가족과 같은 이반이 숲에서 수많은 순록을 학살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체험은 그녀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자연을, 지구를 지키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현대인을 대신해 속죄하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삶을.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강함에 대해 생각한다.
한계란 없다는 것. 삶이 주는 한 가지 약속은 오직 '불확실성'이라는 것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한계의 끄트머리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주는 그녀의 삶을, 자신의 내면을 알고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은 모든 독자들에게 추천한다.